2014년 9월 18일 목요일

여호수아서와 체제전복적인 하나님 나라(공관복음서의 예수운동)_김회권목사

2006년 성서한국대회 성서강해
§김회권 목사의 여호수아 강해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3)_김세윤교수

2. 히브리서의 예

2) 구조
(2) 그리스도인들의 목표(3-4장)②하나님의 아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전과 그의 안식에로의 길을 개척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과 그의 안식에 이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확고히 붙들고, 고난 가운데서도 신실한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4:14, 5:9, 12:1-13).

출애굽 구원의 처음을 체험한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은 약속된 가나안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의 순례길에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약속된 안식에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예는 하늘 안식에로 가는 순례의 도정 중에 있는 우리, 종말의 하나님 백성에의 경고를 위한 전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자는 4:11의 강력한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서, 아무도 (이스라엘 같은) 불순종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3) 예수의 대 제사장직(4:14-10:18)

A. 이 가르침에 대한 준비

하나님의 종말 백성인 독자들이 정진해야 할 목표, 구원의 완성을 이와 같이 제시하고는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개척하고 완성한 그 구원의 길을 완주하도록 효과적으로 돕고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 복음 선포가 4:14에서 시작하여 10:18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핵심적 가르침을 위해서 저자는 이미 앞서 본 바와 같이 1-2장의 서론에서부터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본론의 장들에서 자신의 새롭고 독특한 복음 선포 양식인 대제사장 기독론/구원론을 시작함에 있어, 저자는 탁월한 설교가로서 배교에 대한 경고와 성숙한 이해 촉구를 간간히 끼워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이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유익합니다(대제사장 소개 2:17-3:1, 프로그램적 진술 4:14-5:10, 달램(요약) 6:9-20, 조직적 전개 7:1-10:8 등).

이와 같이 자신의 설교를 조직함으로써 저자는 독자들에게 거듭거듭 배교에 대해 경고하면서, 매번 이어서 달램(위안과 확신)을 주는데, 그 달램의 핵심이 대제사장 기독론/구원론입니다. 이러한 구조로 자자는 ‘배교는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다. 그런데 우리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사역을 하고 계심으로 그에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굳게 붙잡고 그때그때 필요한 은혜를 얻도록 담대히 나아가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4:14-16에 이렇게 프로그램적 진술을 하고는 5:1-10에 대제사장직을 정의합니다.

그리고는 즉각 대제사장 기독론/구원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설교가는 이 교리가 새 가르침이므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함을 촉구하고(5:11-14), 배교의 위험에 대한 경고(6:1-8)와 달램(6:9-20)을 다시 한 번씩 하고, 7:11부터 비로소 대제사장 기독론/구원론을 조직적으로 전개합니다.

B. 대제사장 예수(7-10장)

7장에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영원한 대제사장이며,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기는 아론의 반차에 속한 레위 계열의 대제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대제사장임을 논증합니다.

저자가 이렇게 논증하는 것은 물론 유대교의 성전 제사 의식으로 돌아가려는 독자들에게 그들의 배교를 말리고 기독교의 복음을 충분히 깨달아 신앙의 확신과 기쁨을 다시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저자는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은 인간들로서 스스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이고, 영원성도 없는 자들이므로, 그들의 속죄의식을 통해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의 완성(온전해짐)을 얻을 수 없음에 반하여,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영원한 대제사장이다”(시 110:4)라고 ‘맹세’를 받아 하나님 존전에서 항구적으로 섬기는 대제사장이므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항상 구원할 수 있다고 논증합니다.

저자는 사도적 공통 케리그마가 선포하는 바, 즉 하나님께서 시편 110:1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자신의 우편에 높이셔서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게 했음을 독자들의 특수한 문제에 적용하여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구원해 가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제사장 사역으로, 즉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죄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셔서 하나님께나아갈 수 있게 하는 사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사도적 공통 케리그마를 이렇게 적용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편 110:1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네 우편에 앉으라”고 자신의 우편에 높이신 분(그리스도)에게 110:4에서 “너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영원한 대제사장이다”라고 선언하시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입니다.

8장에서는 모조품인 예루살렘의 성전의 원형인 하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가 예레미야서 31:31-34의 예언대로 새 언약을 중보하셨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9장에서는 대구속의 날에 땅 위의 모조품 성전에서 인간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일 년에 한 번씩 하나님의 백성의 죄들을 다 씻는 속죄제사를 드렸는데(레 16장) 그것으로 죄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원형인 하늘 성전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제사로 드렸다는 것, 그리하여 그 제사는 한 번에 영원히 효과 있도록 드려진 제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새 언약을 발효시킨 제사였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10:1-18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증을 요약하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로 발효된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의 약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렘 31:34)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것들(죄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10:17-18)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의식 때문에 원래 별로 효과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제사로 이미 실효를 완전히 잃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의식에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제사(종말론적인 속죄제사요 새 언약의 제사)에 힘입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어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고,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4) 믿음의 응답(10:19-13:25)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저자는 이제 독자들에게 그 복음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구원의 완성(하늘의 안식에 이름-온전해짐)을 향해 신실하고 도덕적으로 순결한 신앙생활을 권면합니다. 믿음의 여러 영웅들의 모범을 따라, 특히 우리의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12:2)를 본받아서 그 순례의 길을 신실히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2)


2. 히브리서의 예


1) 역사적 배경

이 서신의 독자들은 아마 고마 등에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한편 유대 공동체에서의 소외와 이방세계에서의 핍박은 계속되고, 다른 한편 고대하던 주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첫 신앙의 열정이 식어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을 특히 괴롭힌 것은 죄의식에 따른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 상실이었던 것 같습니다(9:9, 10:2). 그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정결케 되었다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과거의 죄를 해결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세례 후 축적된 죄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는 새롭게 짓는 죄들을 성전의 제사를 통해 해결하곤 하였는데,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유대공동체로부터 추방된 자들로서 성전의 제사의 덕을 입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으므로, 세례 후에도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죄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걱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식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벽을 느끼고 그에게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로 돌아가 유대 공동체에 다시 속하여 소외와 핍박도 면하고, 유대교의 속죄의례의 덕을 받으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2:1-4).

이 서신의 저자는 과거 이 독자들의 목자였는데 지금은 다른 곳에 있으면서, 이들의 신앙의 위기를 듣고 이들에게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교의 종말론적 완성으로서 유대교에 월등히 우월함, 그리스도 복음의 충분성 등을 강해하여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주며 종말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신실히 정진할 것을 고취합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신들의 실제적 어려움에 어떠한 도움을 주는가를 몰라 배교의 기로에 서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한 편의 아주 탁월한 설교입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그의 설교를 만들었습니다.



2) 구조

(1) 사도적 공통 케리그마(1-2장)

저자는 1-2장에서 먼저 독자들이 이미 받은 사도적 공통 케리그마를 요약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는 사도적 복음을 요약하되, 그들의 특별한 상황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펼칠 자신의 새로운 대제사장 기독론/구원론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후자가 전자에 근거함을 보여 줍니다.

그중 1:1-4에서는 프로그램적 천명을 합니다.

과거 구약의 계시는 부분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반해, 창조의 중보자요 지탱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는 종말론적 계시입니다. 그가 또 종말론적인 속죄제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우편에 등극해 천사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오르셨습니다(1:7-2:10).

여기서 천명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1:3)은 장차 8-10장에서 그의 죽음이 대속의 날 제사(레 16장)와 새 언약의 제사(렘 31:31-34)였음에 대한 강해의 프로그램 제시입니다. 이 서신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제되어 있으나(13:20), 그 사건을 시편 110:1에 따라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저자가 독자들의 당면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앞에서 현재 대제사장으로서 사역하심에 자신의 복음선포의 초점을 맞추기 위한 포석입니다(4:14에서 10장까지 전개).

이 서두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뛰어남을 강조합니다(1:7-2:9). 저자는 유대교에서 모세의 율법이 시내산에서 천사를 통해 계시된 것이기에 위대하다는 교리(“천사들이 선포한 말씀”, 2:2, 행 7:38, 갈 3:19)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중보자요 지탱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계시(복음)를 저버리고 유대교(천사들을 통한 계시)로 회귀하려는 독자들에게, 저자는 천사들은 영원하신 성자와는 달리 단지 섬기는 영들(1:14)이며, 그들을 통해 중보된 율법은 성자를 통한 계시(복음)에 대한 예비적인 것에 불과함을 강조하여 그들의 배교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2:1).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보자요 지탱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아들/상속자이시며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되신 분이라고 강조한 저자는 2:10-18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시편 110:1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만유의 주로서 높임받으심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를 천사들보다 훨씬 우월하신 분으로 그리다가 시편 110편과 내용적으로 일부 통하는 시편 8편이 생각나서 그 시를 인용합니다(2:6-8).

저자는 이 시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잠시 천사들보다 낮은 인간으로 성육신하여 우리와 같은 처지에 와서 우리의 대표가 되셨음을 천명하여 자신의 대제사장 기독론을 펼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2:14-18). 이렇게 저자는 사도적 공통 복음을 구약의 본문들에 의거 재해석하여 독자들의 필요에 맞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목표(3-4장)①

이렇게 독자들의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제사장 기독론/구원론의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것을 천명한 저자는 그러한 복음 선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3-4장에서 독자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에 들어가는 것(4:1, 9), 또는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6:19)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에 당도하여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며 그의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을 지칭하여 우리가 “온전케 됨”/ “온전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에 참여함을 뜻합니다.

여기서 전제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힘입어 우리가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얻었다는 것; 그러나 아직 그 구원의 완성을 얻지 못했다는 것; 그러기에 구원의 첫 열매를 얻은 우리는 지금 구원의 완성을 향해 순례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도적 공통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늘 성전 또는 안식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즉 우리를 “온전케 하기”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성육신하도록 하여 우리와 연대하게 하셨고 죽음에까지 고난과 순종의 길을 가도록 하셨으며(2:10-18, 5:5-10), 결국 자신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또는) 하늘 성전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8:1-2, 9:24). 즉 “온전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가 가야 할 구원의 길을 먼저 가게 하심으로써 그 구원의 길을 뚫게(개척하게) 하여 “많은 자녀들”이 이 길을 따라 영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구원의 개척자”이십니다(2:10). 그는 “온전함”에의 길을 우리의 선구자/향도로 앞서 가셨고(6:20), 그리하여 그는 우리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십니다(12:2).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1)

2)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서신 왕래 (2)

(2) 바울은 “클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 파, 베드로 파, 그리고 아마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고전 1:10-17).

(3) 얼마 안 있어 바울은 또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고전 16:17)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들도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전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청하는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전달하였습니다: 결혼(고전 7:1-40), 우상에 제사된 고기 먹는 문제(8:1-11:1), 예배 때 여성 복장 문제(11:2-16), 성만찬 시의 분란(11:17-34), 성령의 은사들(12;1-14:40), 부활(15장),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1:1-4).

(4) 바울은 우리가 “고린도전서”라 부르는 편지를 써서 이 문제들에 대해 응답합니다(고로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쓴 두번째 편지였다). 에베소에서 주후 55년 초에 쓴 이 편지에서 바울은 성령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지상에서 육신과 죄에 노출되어 실존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고, 교회의 교제를 북돋우는 삶의 정신과 절도있는 삶을 권면함으로써 그들의 열광주의를 교정하려 하였습니다.

(5) 바울은 주후 55년의 오순절 뒤 곧 고린도를 방문하려고 계획하면서, 우선 디모데에게 이 고린도전서를 쥐어 보냈습니다(고전 16장).

(6) 그러나 그의 편지는 고린도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디모데는 교회를 잘 타이르고 통합을 이루라는 바울의 지시들을 집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7) 그래서 바울은 그 문제들을 스스로 척결하려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부 고린도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큰 슬픔 가운데 에베소로 귀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방문을 “쓰라린 방문”이라 부릅니다(고후 2:1-5).

(8)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큰 환난 속에서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고후 2:4) 강경한 어조의 편지를 써서 디도의 편에 고린도로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보통 “눈물의 편지” 또는 “혹독한 편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세 번째의 편지였는데, 보통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보나, 어떤 학자들은 고린도후서 10-13장에 이 편지의 일부가 남아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9) 에베소에서 바울은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극단의 외적 위해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고후 1:8).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고린도로부터 뱃길로 돌아오는 디도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싶어 그를 맞으러 드로아로 갔습니다. 그러나 디도가 그곳에 나타나지 않자 그가 육로로 오는 것으로 깨닫고 마케도니아로 가서 그곳에서 디도를 만났습니다(고후 2:12).

(10) 디도는 바울의 혹독한 편지가 효과가 있어 고린도인들의 반란이 끝나고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권위에 반대하도록 한 주모자를 정죄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고후 7:6).




(11) 바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후서를 써서, (주후 55년에 아마 빌립보에서 쓴 편지로서, 실제로는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쓴 네 번째의 편지였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된 데 대한 그의 안도함과 고린도인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그를 적대했던 자를 용서해 주도록 권면하였습니다(고후 2:5-11).

바울은 기쁨으로 들뜬 마음으로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고난과 영광을 생생히 그려 표시하고(고후 3-6장), 전에 부탁했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마쳐달라고 상세히 충고하였습니다(고후 8-9장).

바울은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거둔 헌금을 가지고 마게도냐의 교회들 대표단과 함께 고린도를 거쳐 가면서, 아가야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할 아가야 교회 대표단을 대동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다시 고린도에 보내 그들의 헌금 사업을 완수하도록 하였습니다.

(12) 그러나 고린도에 또 하나의 위기가 벌어졌습니다. 바울의 헌금 사업이 오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사이 외부에서 고린도에 온 방문객들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을 자랑하며,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파송되었음을 내세우며, 환상과 이적 등 자신들의 영적 체험들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위임받지 못한 가짜 사도라고 고린도인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행세, 고린도인들로부터 부양받을 권리 주장, 자신들의 놀라운 영적 체험에 대한 과시 등은 원래 세상적 능력의 표징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던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잘 먹혀 들어갔습니다.


(13) 그래서 바울은 이 “거짓 사도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고린도후서 10-13장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였는데 후에 그의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에 부착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울이 고린도후서 1-9장을 쓰고 난 후 조금 있다가 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후서 1-9장에 덧붙여서 하나의 편지로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를 쓰는 데 여러 날 또는 여러 주가 걸렸는데, 바울이 고린도후서 1-9장을 쓰고 난 후, 고린도에 새로운 위기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받아서, 그는 새롭고 대단히 격렬하며 투쟁적인 어조로 고린도후서 10-13장을 썼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온 방문객들을 “다른 예수”를 선포하며, “다른 영”을 가지고 있고,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합니다(고후 11:4). 자신도 그들이 내세운 사도의 자격 요건들에 비추어 그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사도임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한 사도의 표징들은 가문이나, 인간들에 의한 외적 위임이나, 심지어 성령의 놀랄 만한 체험도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과정 중에 당하는 고난이라고 설명합니다(고후 11:23, 12:11).

그래서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 세상적인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의 신학”에 맞서 자신의 고난으로 가득찬 사도적 삶을 예로 들면서 “십자가의 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린도후서는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개인적이고 감동적인 문서가 되었으며, 모든 교역자들에게 주의 종의 참 모습을 일깨워 주는 귀한 문서가 된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0)

<4>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구조

지금까지 우리는 서신들에 담겨 있는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이 선포하는 구원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복음이 요구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서신들의 가르침을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그 정신(의도)을 헤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서신들을 잘 해석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필요를 소개하면, 그것은 서신들 각각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구조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고린도전서와 후서, 그리고 히브리서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1. 고린도 전후서의 예

1) 고린도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문제들

고린도의 첫 그리스도인들 다수는 하층의 이방인들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고전 1:26-29). 그러나 그들과 더불어 부유층 출신들도 더러 있었던 것 같고(고전 10:27, 11:17-34)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국제도시 고린도의 이방인적 환경과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의 이방인적 과거는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습니다. 문란한 성도덕, 우상숭배, 불신자들과 어울림, 분파주의, 지혜와 지식 자랑, 열광주의 등등.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그들의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로 이해한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구원의 첫 열매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벌써 누리고 있지만 그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 거하는 성령이 이미 받은 구원의 첫 열매를 대표하고 미래의 완성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과 물질(육)을 엄격히 가르는 헬라적 이원론에 젖어 있어서, 바울 복음의 이 ‘시간적 이원론’을 ‘본질적 이원론’으로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신들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하늘의 축복된 삶을 현재 완전히 획득하는 것으로 보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러한 견해를 확인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장차 도래하리라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얻은 것으로 믿고 지금 벌써 그 속에서 왕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고전 4:8).

그들은 또 자신들이 성령을 받아 육신의 제약을 벗어난 영적 존재들이 된 것으로 믿었습니다(고전 3: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몸이 부활하리라는 사상은 헬라적 이원론에 젖은 그들에게는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5장).

그들은 세례 때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고 부활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방언과 같이 현저히 나타나는 은사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신들이 받은 은사들을 서로 자랑하며, 교만과 멸시, 시기와 분쟁의 분위기를 만들고, 예배 때 방언과 예언을 경쟁적으로 해대어 일대 혼돈을 빚곤 하였습니다(고전 12-14장).

게다가 그들은 또 이방의 철학과 수사학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 우상숭배, 그리고 문란한 성도덕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감으로 말하는 성령의 은사들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헬라적 수사학이나 철학의 일종으로 오해하고, 서로 말 자랑과 지식 자랑 경쟁을 벌였습니다(고전 1:18, 4:18).

성령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그들은 우상(곧 이방인들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우상의 신전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참여하고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자유를 만끽했던 것입니다(고전 8:10). 그들은 그들의 영혼이 벌써 하늘의 구원을 얻었으므로 그들의 몸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 시절의 문란한 성생활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문란한 고린도의 이방인들조차 할 수 없는 짓까지도 하게 된 것입니다(고전 5:1-11, 6:12).

이런 ‘열광주의자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거나 목소리 큰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대개 헬라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체험으로부터 그들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도 열광주의자들과 같이 영과 육의 헬라적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였지만, 그들과는 반대로 극단의 금욕주의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육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중요하면 구원받는 것이라고 보고, 영혼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 육신에 얽매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을 삼가고(고전 7장),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고기 먹기를 꺼려했습니다(고전 8-10장).

이 열광주의자들과 금욕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전자는 그들의 지혜와 지식과 자유를 자랑하고 후자를 약한 자들이라고 멸시했으며, 후자는 전자를 육신적인 방탕자들이라고 비판하고 영적 교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분쟁은 아볼로와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함으로써 더욱 복잡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철학과 수사학을 자랑하던 고린도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지식과 언변에 대해 열광하게 된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대단한 성경 해석 능력과 수사적 능력을 가진 아볼로를 위대한 선생으로 환영하게 되었습니다(행 18:24-28).

그러나 “연약한 형제들”(아마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금욕적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더 좋아하며, 베드로를 자신들의 선생으로 삼았습니다. 이 아볼로파와 베드로파에 대항하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원래 사도였던 바울에게 신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게다가 극단의 열광주의자들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위 세 파벌들은 바울, 아볼로, 베드로 등, 인간들의 가르침에 얽매여 있다고 멸시한 ‘그리스도 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고전 1:10-4:21).

고린도 교회는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분열되기도 하였습니다. 성만찬 석상에서 잘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싸온 음식을 먹어대며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재확인하고 시위해야 할 성만찬을 분쟁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고전 11:17-33).


2)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서신 왕래 (1)

바울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편지들도 보내고 동역자들도 보내고 자신이 방문하기도 하며 엄청나게 애를 썼습니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린도전서 5:9에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전에 썼던 편지를 언급합니다. 이 편지를 보통 “이전 편지”라고 부릅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안의 부도덕한 자들이나, 악한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고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우상숭배하고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들(그러니까 교회 밖의 세상의 이웃들)과 일체 교류하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된 듯 합니다(고전 5:9-11). 이 편지는 완전히 상실된 것 같은데, 일부 학자들은 고후 6:14-7:1이 이 편지의 한 조각이라고 봅니다.



김세윤 교수 | jgw153@hanmail.net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9)

4) 정결법의 새로운 정의와 적용


이 세 가지 원칙은 우리가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정결법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가령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서기관들이 예수와 제자들이 정결법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 때, 예수께서 정결법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정의를 합니다. “밖에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다”(막 7:15). 아주 예수다운 새로운 정의입니다.

돼지고기 한 점 먹고 술 한 잔 마시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고 이웃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음식이 우리 뱃속에 들어가서 뒤로 나오면 그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증오심, 탐심, 음란, 불신앙, 복수심,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탐심이 우리로 하여금 맘몬 우상을 숭배하게 하여 하나님 사랑을 못하게 합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증오심과 복수심이 우리로 하여금 이웃 사랑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지, 밖에서 우리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따위가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정결법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막 7:19). 음식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의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을 ‘adiaphora’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차이가 없음’이라는 말입니다. 음식을 가려 먹는 문제 같은 것들은 지키나 마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레위기의 정결 체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엊그제까지 유대 바리새 신학자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읽었을 때, “이 사람의 가르침이 유대 신학과 어떻게 반대되는가? 어떻게 이렇게 놀랍고도 새로운 혁명의, 자유의, 해방의 복음을 선포했나?”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이때 비로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해방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결법을 깡그리 무시한 예수께서 그 대신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막 12:28-34). “음식을 가리고 절기를 지키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판정하는 것입니다. “우상에 바쳐진 고기라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사서 먹으라. 그러나 신전에서 우상숭배의 상황에 참여는 하지 말라(하나님 사랑), 또한 네가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는데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안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을 존중해서 먹지 말라(이웃 사랑)”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제물을 먹느냐의 문제를 다루는 중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9:19-22에서 자신의 사도적 자세를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그걸 22절에 부연합니다. “내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유대인같이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 반면에 (모세의) 율법없는 자들에게는, 즉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는, 나 스스로 율법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곧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이중계명의 법) 아래 있지만 이들과 함께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마신다. ‘약한 자들’(율법주의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내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음식이나 정결의 문제들 같은 adiaphora에 관해서는 그의 선교적 자세를 이렇게 청중에 따라 조정합니다. 유대인과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음식법 결례를 준수합니다(이웃 사랑). 이방인과 강한 자들 가운데서는 음식법 결례를 무시합니다(이것도 이웃 사랑). 그러고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천명합니다. 여기 전체를 천명한 말이 1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것은 원래 헬라어 원문에 보면 마가복음 10:45에 나오는 예수의 유명한 말씀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많은 사람’이란 말은 히브리적 숙어로 모든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선교의 자세를 사랑의 이중계명의 원칙에 따라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삶의 정황 속에서 예수 정신의 적용

바울이 고린도전서 10:31-33에서, 8-10장에서 준 가르침의 전체를 다시 요약합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것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사랑의 관점(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인가?)에서, 둘째 이웃 사랑의 관점(이것이 이웃에게 거침돌이 되는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원칙을 33절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8장-10장에서 바울은 새로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에 누구의 가르침을 적용한 것입니까?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원칙으로 보고, 그 원칙의 정신을 삶의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율법주의적, 문자주의적 경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박탈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일수록 더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가르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이중계명! 그 외에는 자유입니다. 성경에 쓰인 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해 우리의 신학적 선입견이 고쳐져야지, 우리의 신학적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내 신학적 선입견에 맞추도록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을 그대로 따라서 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요약과 요구가 11:1에 있습니다. 여기 장, 절을 잘못 갈라서 마치 11장을 여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10장 말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시오.”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에 당면해서 결국 누구를 본받아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예수님의 음식에 대한 가르침,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본받고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요구를 본받아서 가르쳤고, 또한 자기의 사도적 사역의 자세를 예수님의 섬기는 자세에 맞춰서 하니까, 이것이 최종적인 진술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같이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시오.” 그러니까 율법주의나 문자주의가 아니고 율법의 정신, 그 영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jgw153@hanmail.net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8)

2) 수미쌍관의 구조(2)


어떤 주제를 가르침에 있어, 어떤 말씀으로 열고(여기서는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닫는지의 고리를 만드는 것을 inclusio라고 합니다. 한자 표현으로는 수미쌍관이라고 합니다. 이는 ‘머리와 꼬리를 쌍으로 관련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형태가 많이 나옵니다. 가령 마가복음 1:1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의 클라이막스 15:39에 가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고 백부장이 모든 열방을 대표하여 “저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복음서를 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닫습니다.

이런 것이 전형적인 inclusio 입니다. 이런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은 조금만 눈여겨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말하는 것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역설, 이것이 마가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요체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에 당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으며 우상의 신전에서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길드(guild)에 속하면 그런 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드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됩니다. 고린도에서는 이스미안 게임(고린도 지역에서 벌어진 고대 그리스의 대 경기)이 2년에 한 번씩 열렸는데, 그런 잔치에 참여해야 네트워크도 되고 그러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곳에 참여해서 잔치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하는 문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또 고린도 시장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고기는 신에게 바쳐지는 절차를 통해서 도살됩니다. 그래서 푸줏간에 나와 있는 고기를 사면 십중팔구 우상에게 바쳐진 후 도살된 고기입니다. 한국말로 말하면 “그 고기에 귀신 붙은 것이 아닌가? 부정탄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바울은 이중 계명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사랑의 이중계명이라는 원칙을 정하고 뒤에 다시 한 번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약합니다. 그래서 inclusio를 보면 바울이 이 심각한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결국 예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 통치의 구체적 요구인 사랑의 이중계명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8장에서부터 10장까지 그 문제를 다루고 10장 끝부분에서 바울이 앞에 다룬 것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합니다.


그 요약을 보면 네 가지 명령들이 나오는데, 첫째, “우상숭배를 피하라”입니다(10:14). 이때의 우상숭배를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가 이루어지는 신전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좁게 정의합니다. “그것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25절부터 33절까지를 보십시오. “시장에서 파는 것은 자유롭게 사서 먹으라. 네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푸줏간 주인에게 이 고기가 신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도살됐는지 묻지 말고 사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것의 신학적 근거가 26절입니다.

거기도 “왜냐하면”이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라.” 이것은 시편 24:1을 인용한 것으로서, 창세기 1장에도 하나님의 지으신 것은 다 좋은 것, 깨끗한 것이라고 말씀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레위기의 음식 가르는 정결의 법들을 한꺼번에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셋째, 불신자 중에 누가 너희를 식사에 초대하거든 상에 무슨 음식이 제공되든 네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주인에게 이 고기가 신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도살됐는지 묻지 말고 먹으라.” 그리고 넷째, “다만 누가 너희에게 이것은 제물이라고 알려 주거든 그렇게 말한 자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

바울은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이러면 혹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믿음이 ‘약한 자’라고 합니다. 혹 그런 사람이 식탁에 동석하여 이것은 ‘제물’이니 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네가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연약한 자의 양심에 손상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먹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포기함, 이것이 아웃 사랑이지요.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스도인의 자유

“우상숭배 자체는 피하라.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이웃의 초대를 받았을 때 이교도가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라. 그러나 먹는 행위가 연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을 때는 먹지 말라.” 이 네 가지 명령들이 8장부터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의 요약인데 이것들을 자세히 보세요. 거기에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우상 숭배 피하라), 둘째 이웃사랑(약한 형제의 양심을 손상치 말라), 셋째 그리스도인의 자유(시장이나 이교도 친구의 집에서 제공되는 고기 먹는 것은 위 두 계명에 저촉되지 않으니 자유롭게 하라).

여기서 바울은 우상숭배를 굉장히 좁게 정의합니다. “우상에게 제사가 이루어지는 신전의 잔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강한 자들이 여기서 잘못 나갑니다. 강한 자들은 “우리의 지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뿐이다. 그렇다면 우상은 실체가 없는 나뭇조각, 돌덩어리에 볼과하다. 그러므로 저 이교도들이 살아있는 신이라고 제물을 바치지만 우리는 그냥 참여해서 같이 즐기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지식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상숭배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고, 그 우상을 도리어 귀신들이 이용하여 우상숭배의 분위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악영향을 끼치므로 신전의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의 먹는 자유가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손상할 때에는 이웃 사랑의 원칙에 따라 먹지 말라. 그렇지 않는 한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원칙에 저촉되지 않으면 나머지에 대해서는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7)

2. 문자가 아닌 정신의 강조(2)

그런데 바울의 헬라 세계에서의 선교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특히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가나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는 굉장히 부유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거기에는 유랑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에 휩쓸려 살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고, 진정한 삶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장터나 광장 같은 곳에서 일장 철학 강연을 하고 모자를 돌려서 돈을 걷고, 그 돈으로 먹고 살고, 또 다음 도시로 가서, 똑같이 일장 철학 강연을 하고 또 모자를 돌려서 돈을 거두어 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데살로니가나 고린도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회학적 여건을 상상해 보십시오. “동방의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는데, 우리가 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 바울의 전도단이 고린도나 데살로니가에 가서, 장터나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강연하고 돈을 걷었다고 한다면, 고린도인들이나 데살로니가인들의 눈에 바울의 전도단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유랑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파의 한 부류쯤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복음은 당시 헬라 철학의 일종으로 오해 받았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위해서 복음을 과격히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복음 선포 방식을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의 방법과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값없이, 무료로 선포함으로써 복음의 은혜성을 시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천막 공장에 들어가서 가죽을 다루고 천막을 짓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무료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 선포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불순종한 것입니까? 문자적으로는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의 문자를 거스름으로써 그것의 정신에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문자가 아니라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라는 그 말씀의 정신을 실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어 번 그 말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3:6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가(의지로가) 아니라 오직 영으로 함이니 문자는 죽음을 가져오나 영은 생명을 가져온다”는 말은 곧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율법주의에 사로잡히면 죽음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신이요, 그 정신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가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문자가 아닌 정신을 새로운 상황에서 적용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 말씀을 새로운 조건과 관계없이 문자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죽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정신을 터득하여 새로운 상황에 새롭게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이중 계명

1)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지금까지 바울이 예수 전승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았는데, 모두 문자가 아닌 정신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진짜 중요한 것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까지에 나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질문한 두 번째 문제를 다루는 곳입니다.

질문의 내용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8:1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하여,” 이것이 바울이 답변하고자 하는 질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우상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통하여 도살된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에 대해 질문했는데, 이제부터 내가 그것에 대해서 답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7:1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그들의 구호를 하나 인용함으로써 답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다.” 이것이 고린도인들 중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구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교정해 줍니다. “다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아나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그러면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모르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두 마디가 바울의 원칙들입니다. 즉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과,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어느 관점에서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첫째 ‘이웃 사랑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여 그의 믿음을 세워 올리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교회를 세워 올린다, 서로의 믿음을 세워 올린다, 교회 공동체를 더 거룩하게 세워 올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원칙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 두 원칙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8장에서 10장에 걸쳐 바울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아주 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복음이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가서 그 문화와 충돌을 일으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주 좋은 모범을 제시합니다. 10:31-33에서 바울이 전체 가르침을 결론적으로 요약합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나님 사랑의 원칙).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침돌이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이웃사랑의 원칙).



2) 수미쌍관의 구조(1)

“셩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은 수십 가지일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구조를 잘 볼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두 가지 근본 원칙들은 앞뒤로 서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해서 서로의 갈등을 조장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무시당한 자는 반발한다. 그러나 사랑은 서로의 믿음을 북돋우고 교회 공동체를 세운다”(8:1). 이 말씀은 10:32의 “이웃에게 거침돌이 되지 말라”와 짝을 이루며 이웃 사랑의 원칙을 강조합니다.

한편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8:3).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가?’이다”(10:23)와 짝을 이루며 하나님 사랑의 원칙을 강조합니다. 이런 것을 ‘inclusio’라고 합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6)

6) 이혼의 문제(2)

바울은 “이혼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최대한 존중해서 심지어 혼합결혼에서도 이혼하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지옥이 되거나, 그 가정생활을 유지할 경우 한쪽이 위험하게 되거나 할 경우에는 “이혼을 하라”고 말합니다. 종말의 구원이 완성되기 전까지 우리의 비극은 선과 악 가운데 한 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두 악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보다 작은 악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서나 이혼은 상처를 주고 엄청난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서도 이혼은 악입니다. 그러기에 이혼은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같이 사는 것이 이혼보다 더 큰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보다 작은 악인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남편이 매일 술 마시고 와서 아내와 자식들을 때려 죽이게 생겼는데도 교회에 가서 상담을 하면 “이혼은 절대 안 된다. 참고 기도하면 언젠가는 회개하고 돌아온다. 그러니 끝까지 참아라”하고 충고합니다. 그 안에서 갈등하는 10대 자녀들이 집을 뛰쳐나가서 마약을 하고 깡패들과 어울립니다. 집에 가면 전쟁이고 지옥이니까 집을 나가서 이렇게 망가지는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누구도 참고 살았더니 돌아왔다더라. 참고 살아라”고 합니다. 그러다 실제로 아내가 맞아 죽고 자식들이 망가지는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런 경우에 “갈라져라, 이혼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근본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고 그 정신을 존중한 것입니다. 그 정신은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 문자를 율법으로 만들지 말고,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기치고, 탈세하고, 부동산 투기하고, 약한 자들을 억누르고, 환경 오염시켜 이웃을 병들게 하고, 불량 물품 생산하고 파는 등 온갖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하면서 돈 많이 벌려고 하는 행태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한국의 교회들이 오로지 이혼만은 절대해서는 안 되는 죄악으로 규정하며 이혼하여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나 가혹하게 정죄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한국 교회의 신학적 미숙과 신앙적 왜곡에 대해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습니다.


2. 문자가 아닌 정신의 강조(1)

바울의 예수 전승 사용의 또 하나의 예로, 복음 전파자들의 생계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을 자세히 보면 예수의 말씀이 놀라우리만치 많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그렇게 많이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세 번이나 직접 인용합니다. 고린도전서 9:14에 있는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고 명하셨다”는 말도 누가복음 10:7, 마태복음 10:10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인용은 고린도전서 9:1부터 바울이 반복하는 주장들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듣는 교회의 헌금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도들의 관행을 예로 듭니다. 5절에 “다른 사도들, 베드로, 야고보도 심지어 아내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교회의 지원으로 살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 바나바와 나만 그럴 권리가 없겠느냐?”고 합니다. 7절에서는 로마 병정들의 예를 듭니다. “자비량하고 병정 노릇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양치는 목동들도 양의 젖을 먹지 않는가? 모세 율법에도 심지어 타작마당의 소도 곡식 먹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유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성전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하고 계속해서 나열한 후에 9:14 클라이막스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백히 그렇게 명령까지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5절에 놀랍게도, “그러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무료로 복음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유주의자들은 기세등등하게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보통 예수의 말씀도 인용하지 않는데, 여기 어쩌다 한번 인용하고는 곧 그것을 무시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불트만 학파의 해석방식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함부로 경솔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 말씀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여 율법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예수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따르지 않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교보내면서 왜 “복음 선포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전대를 마련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경의 사회학적 접근 방법, 즉 당시 삶의 정황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해서, 그런 가르침이 어떤 전제하에서 주어졌고, 예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명령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조하는 부자들이 갈릴리와 유대지방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들을 우리가 일부 압니다. 베다니의 나사로,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누가복음 8:1-3에 나오는 예수의 후원자들 등. 이들은 부자들로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이동성이 없습니다. 당시 농노들도 주인에게 매여 있으므로 역시 이동성이 없습니다.

한편 예수와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은 주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목수들 같은 수공업자, 기술자들, 또는 어부들 같은 당시의 사회 중산층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기술자들은 어디를 가든 장도리나 그물 같은 연장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런 제자들을 복음 선포를 위해 어떤 동네로 보내면, 가령 베다니에 보내면 틀림없이 나사로와 자매들이 그 제자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대접할 것인데,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집에서 먹고 자며 그 고을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전대 준비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빨리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명령을 주신 원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 선포에 집중하라,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라’ 이것이 예수의 명령의 의도요 정신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5)

4) 성별에 관한 유대교적 원칙의 혁명적 전환(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어떤 별명을 붙여 욕했습니까? ‘탐식하는 자요, 술취하는 자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마 11:19, 눅 7:34). 그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 예수가 더러워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런 혁명적 가르침에 따라 바울이 자신의 과거 바리새적 신학 원칙을 과감히 버리고 180도 혁명을 일으켜서 이 새 원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원칙을 바로 혼합결혼에 적용한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혼합결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이방인과 악수해서도 안 되고, 같이 밥을 먹어도 안 되고, 이방인의 집에 가서도 안 됩니다. 자유주의적인 유대 랍비들이라도, 어쩔 수 없이 이방인과 교류하고 함께 식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음식과 와인을 가져가서 자기 것만 먹으라고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과감하게 이 원칙을 버립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입니까? 어디서 나오는 기독교적 세계관입니까?

요한일서 4:4의 언어로 말하면 “너희 안에 계신 이(성령, 곧 사탄을 이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가 이 세상의 영보다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이 불신자 파트너 속에서 역사하는 세상의 영보다 더 강하다.”는 자신감에서 온 것입니다. 부활의 자신감, 복음의 자신감에서 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서 게토(ghetto)속에서 움츠러들어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세상을 적극적으로 성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5) 가부장적 제사장 개념의 오류

이쯤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관찰하고 넘어갑시다. 여기서 바울이 “믿지 않는 아내만 믿는 남편에 의해 거룩해진다”고 했습니까? “남편만 아내에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전달하는 제사장 역할을 한다”고 합니까? “믿는 아내에 의해서 믿지 않는 남편도 거룩하게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믿는 아내도 믿지 않는 남편에게 러구성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 사이에 난 자녀도 거룩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적 가정사역한다는 분들이 “아버지가 가정의 제사장”이라고 강조하고 다니는데, 도대체 어디에 그런 말이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의 제사장직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제사장이 있다는 것입니까?

한국에서는 개신교의 목사들이 곧잘 자신들을 제사장이라 주장하며 권위주의적으로 목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옳지 않습니다. 예배를 문자적으로 제사(미사)로 보는 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이나 하는 주장이지요. 굳이 ‘제사장’이란 말을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자라는 문자적인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성의 전달자라는 전의어로 쓰기로 한다면,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쳤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모두에게 ‘제사장’노릇하는 것 아닙니까?(만인사제론) 여기 본문 7:14을 보세요. 남편/아버지만 아내와 자식에게 거룩성을 전달한다고 했습니까? 아내/어머니도 남편과 자식에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전달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내/어머니도 ‘제사장’인 셈이지요?

역대 기독교 역사에서 아내/어머니의 기도로 방탕한 남편과 자식이 회심하고 돌아온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까? 아내/어머니의 기도로 남편과 자식을 회심시켜 구원을 얻게 한 경우가 훨씬 많지요? 그런데 왜 아버지만 ‘제사장’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남녀평등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지, 어찌하여 여자만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슬람이나 유교의 추종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예수께서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한 것이 바로 여자들을 굴종시키는 당시의 남존여비 사상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유교의 질곡에서 이 백성을 해방시켰는데, 다시 교회가 앞장서서 가부장적 가정생활을 강조하고 여성의 굴종을 강요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편/아버지가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해괴한 교리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말입니다. 참 한심스런 상황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본문을 정확하고 깊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6) 이혼의 문제(1)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7:15에도 접속사 “그러나”가 빠졌습니다. 여기에 “그러나”라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파트너가 갈라지기를 주장하면 그때는 이혼하라. 이런 경우는 형제나 자매나 구속받을 것이 없다.” 그것의 신학적 근거가 15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 가운데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도록 부르신 것이지 종교가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서 불신자 배우자가 가정을 지옥으로 만드는 상황 가운데서도 계속 살라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을 주고는 바울은 “그러나 신자 아내나 남편이 그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으며 못 되게 구는 불신자 배우자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면 혹, 그를 회심시켜 구원을 얻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그런 경우도 이혼하지 말고 참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반론을 염두에 두고, 그 반론에 대한 반론을 15절 후반부의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로 하여금 화평을 누리라는 것인데 그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계속 살아서야 되겠느냐? 더구나 네가 참고 기도하며 사랑을 베풀면 네 배우자가 회개하고 믿는 자 되어 구원을 얻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여기 이 15절 후반부와 16절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주장하면 이혼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평 가운데로 부르셨다. 그러니 되도록 참고 가정의 화평을 회복하여 이혼을 하지 말라. 네가 끝까지 참고 기도하며 사랑을 베풀면 네 배우자가 회개하고 믿는 자 되어 구원을 얻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맥락에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은 7:10부터 이혼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가운데, 15-16절은 예외 상황을 맞아 그것과 반대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 전반부에서만 반대되는 가르침을 주고, 15절 하반부와 16절에서 다시 그것을 뒤집는다는 것은 어색한 일입니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15절 전반부에 그렇게 강조하여 반대 가르침을 주지 말고, 이렇게 말했어야 옳지 않겠습니가?: “그러나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강하게 주장하면 이혼해도 된다. 그러나 되도록 오래 참아 가정의 화목을 회복하여 우리를 화평 가운데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라.” 이런 이유로 저는 전자의 해석이 옳다고 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4)

3) 부부생활 (2)


고린도전서 7:10-11에서 “혼인한 자들, 즉 결혼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명한다”하고는 실제로 “이 명령은 나의 명령이 아니고 주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말씀들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아주 드뭅니다. 겨우 서너 번 그렇게 합니다(고전 7:10, 9:14, 11:23-26, 살전 4:14).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권위가 더 있다”고 강조하고 나서,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지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남편과 화합하도록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도 철저하게 상호주의적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혼하지 말라고 해도 이혼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화해를 하든지 정 안되면 혼자 지내라”고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남편만 아내와 이혼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이 주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주의 말씀이 어디 쓰여 있습니까? 마가복음 10:9-12, 마태복음 5:32, 19:6-9, 누가복음 16:18, 이런 곳에 “이혼하지 말라”는 주의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쫓아낼 수 있는데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 율법의 한시적이고 완벽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모세의 율법에서는 너희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런 식의 이혼이 허락되었지만, 원래 한 아내와 한 남편을 짝지은 하나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혼을 금지하신 것은 당시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신 신명기 법에는 결혼 전후에 아내에게서 부정이 드러나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사회에서는 이것을 모두 남성 위주로 아주 너그럽게 적용하여 아내가 조금만 남편의 맘에 안 들어도 내칠 수 있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보다 약 20년 정도 앞선 시대의 가장 위대한 랍비 힐렐은 “남편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것이 있을 경우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슬리는 것의 예를 들었는데, “아내가 나이가 먹어 얼굴에 주름이 많다든지, 빵을 굽다가 태운다든지 할 때도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서 내 보내면 이 여자는 오갈 데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인권이 유린되는 것입니다.

이 유대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이슬람 코란입니다. 코란은 구약과 유대교 전승, 신약과 기독교 전승, 아랍 토속종교가 엉성하게 혼합된 이슬람 경전입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전승을 받아서 그것을 극단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니에게 “내가 너와 이혼한다, 내가 너와 이혼한다, 내가 너와 이혼한다” 세 번 선언하면 이혼이 됩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무자비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혼으로 한 몸 되게 하신 것을 인간이 가르지 못한다”고 하시며, 창조 원리의 ‘한 몸 원칙’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이혼을 금지시켰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해서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고 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7:12-16에서 혼합결혼 상태의 부부들, 즉 부부간에 한쪽만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를 믿고 다른 한쪽은 믿지 않는 경우들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란 오늘날의 세속화된 세계의 무종교자들 같은 자들이 아니고 자신들의 신전에서 행하는 제사 잔치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직업적인 이유로, 또는 시민 생활의 여러가지 이유들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공동체에서만 가르쳤기 때문에 혼합결혼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인용할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내가 예수의 전권대사인 사도로서 나의 명령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즉 그리스도인 남편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여자에게 즉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 남편이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합결혼 상태에서도 예수의 이혼 금지의 정신을 최대한 존중해서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철저하게 남녀평등, 상호주의입니다.

“왜 혼합결혼 상태에서도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의 신학적인 근거가 14절입니다. 사실 14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접속사 “왜냐하면”을 빠뜨려서 뜻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우리 개역성경에 이렇게 접속사를 빠뜨려 논리적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함).

바울은 어느 가르침을 주고 나서는 항상 신학적 근거를 댑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나, 이제 거룩하니라.”


4) 성별에 관한 유대교적 원칙의 혁명적 전환(1)

정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모든 종교들은 한결같이 무슨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더러운 것과 연결되면 내가 더러워진다”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과의 연결을 피해서 자신의 정결을 유지하려고 최대로 노력한 백성이 누구입니까? 유대 백성입니다. 그중에서도 최대로 그렇게 하려 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은 “성별을 추구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 글을 쓴 바울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바로 이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어떤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선교하고 있습니까?

제일 부정한 이방인들 가운데 살면서 선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더러운 것과 연결되면 내가 더러워진다”는 원칙을 뒤집어서 “그렇지 않다. 부정한 자들이 성도들과 연결되면 성도들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거룩해진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인해서 성별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으로 인해서 성별됩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원칙을 180도 뒤집어서, “불신자들이 성도들과 짝지어짐으로 그들이 성도의 거룩성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합결혼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거룩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어 이방인들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바리새적 원칙으로 살았던 바울이 어디서 이런 놀라운 원칙을 배운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만짐으로 예수님이 더러워진 것입니까? 오히려 예수로 인해 문둥병자가 깨끗해진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3)

<3> 바울의 예수 전승 사용과 그 교훈들: 고전 7-10장

고린도전서 7장부터 16장까지는 고린도전서의 제3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편지를 써서 “이러이러한 것들에 대한 답을 주십시오”하고 요청한 것에 대해 바울이 답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7:1에 이런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쓴 것들에 대하여”.

이것이 제목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너희들이 쓴 것”이라는 말 다음에 ‘들’자가 나타나지 않지만, 사실 여기에 ‘들’이라는 글자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해집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편지에 써서 문의한 것들에 대하여 내가 이제부터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1. 복음의 사회윤리학적 적용

1) 남녀평등과 상호주의

첫번째 문제를 보겠습니다. 7:1의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아니함이 좋다” 이 말은 고린도인들의 구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신도들, 특히 여자 신도들이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젖어서 “영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영혼의 정결함을 유지함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몸의 향락을 취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요, 특히 성적 관계는 더러운 것이니, 결혼하면 안 된다. 그리고 성관계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혼 운동을 주장한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의 구호가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아니함이 좋다” 이것입니다.

바울이 그 말을 인용해서, “(그 말도 일리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하면서 고쳐 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음행이 더 조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결혼하라. 그리고 결혼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이혼하지 말고 결혼관계를 유지하라.”

그러고는 3절에 “남편은 아내에 대한 성적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 합니다. 즉 “아내가 성관계를 요구하면 남편이 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입니다.

그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4절에 나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적 이유인즉,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그 남편이 한다.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 이보다 남녀평등을 더 강하게 가르치는 성경구절은 갈라디아서 3:28을 제외하고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28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의 질서에는 옛 창조 질서의 전형적인 불평등관계인 구원사적, 인종적 구분(이스라엘 vs 이방인 - 더 이상 없음), 성적 구분(남자 vs 여자 - 더 이상 없음), 사회 신분적 구분(노예 vs 상전 - 더 이상 없음) 없이 모두 다 하나라.” 이것은 해방의 복음을 사회 윤리학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된 곳에선 항상 노예와 여성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아직도 신의 이름으로 여자를 굴종시키고 무자비한 인권유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도 조선시대에 여자들을 완전히 굴종시키는 상황 속에서 복음이 들어와서 여성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28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및 노예와 상전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부간의 삶에서도 “아내가 주장하면 남편은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5:21에도 “남편과 아내가 피차 순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4에도 “피차 순종하라”는 뜻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만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주인 노릇을 아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2) 공예배시 여성의 역할

그래서 바울 교회에서는 남녀 차별없이 여자들도 공예배 인도를 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무엇이 문제가 됐습니까? 그 당시의 단정한 복장으로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해야 되는데 그것을 벗어던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1:2-16에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여자들 교회에서 설교시키니까 안 되겠다.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계속해서 “공예배에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인도하는데, 다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 즉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14 말씀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창조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가르치려는 의도는 딱 한 마디입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설교하되 머리에 수건을 쓰라.” 그 하나의 권고를 강조하려고 바울이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고 설교해야 할 이유들을 여러 가지로 대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의 신학적 근거를 바울이 어디서 찾습니까? ‘머리’란 말의 기본 의미은 원천(origin)입니다. 바울이 “창세기 2장에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니까 남자가 여자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의 머리다”라는 식으로 논증해 나갑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다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남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렇다면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아무튼 우리가 남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하고 그런 식의 논증을 중단하고 맙니다(7:11-12). 그래서 결국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아름답다는 자연의 이치에 호소함으로 “아무튼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권고를 끝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1장을 대면서 실제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 “여자가 교회의 공예배에서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는 것은 터득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남자는 머리/권위자, 여자는 순종해야 할 자”라고 하는 ‘창조 질서’를 가르치려 한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서신서들을 읽을 때 본문의 의도를 잘 살펴야 합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복장을 단정히 하는 한 남녀가 함께 예배드리는 공예배에서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는 것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데도, 이 본문은 무시하고, 예배시 설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을 금하는 구절인 고린도전서 14:34-35을 들이대며 근본주의자들은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구호를 앞세워 여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은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1:2-16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고린도전서 14:34-35(바울이 쓴 것이 아니고 후대에 쓰여 여기 끼어들어간 구절들)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오로지 율법주의 정신과 문자주의 정신에 빠져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성경의 구절들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그냥 되뇌기만 하면서 자신들이 성경의 권위를 가장 많이 존중하고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목회한다고 주장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 부부생활 (1)

7:5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상대방의 성적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말을 점잖게 번역한 말입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성생활을 자제할 수 있는데, 조건은 “첫째, 둘이 합의를 해야 한다. 둘째 얼마동안만 해야 한다. 셋째,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부부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제하지 못해서 “사탄이 더 시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부부의 동등성과 상호성을 전제로 하고 이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잘 나타납니다. 그러고 나서 “나와 같이 독신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지 못하니 다 결혼하고 정상적으로 성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2)

4. 경고와 달램의 교차 구조


2) 은혜 위에 서 있는 삶지금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서 사는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계속되는 통치에 날마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뿌리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상기시키는 하나님의 통치를 늘 받으려 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로 온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칭의’하면 ‘무죄 선언’ 또는 ‘의인이라 칭함’받았음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칭의’가 그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뜻만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칭의’된 사람, 곧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올바른 관계에 계속 서 있어야 함’, 곧 우리의 현재적 실존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에 완성될 때 구원의 완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칭의론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이 중요한 진리가 무시되어왔던 것입니다.

칭의를 다른 말로 하면 ‘주권의 전이’라고 합니다.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어서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로 이전됨’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잘 표현한 곳이 골로새서 1:13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칭의란 무엇인가?’ 곧 우리가 사탄의 흑암의 통치에서 건져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행하는 의와 생명의 통치에로 넘겨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 신학의 강조점인 은혜에 의한 칭의에는 익숙하지요? 즉 “우리가 선행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었다”는 것에는 익숙하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은혜 위에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구원 사건에 대한 서술과 그것에 근거한 윤리적 명령

1) 복음 선포와 윤리적 요구 


그러므로 바울 서신의 구조가 다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가령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만 우리가 의인된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가장 기본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임’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복음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1-8장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그 구원을 믿음으로 덕 입음에 대한 서술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5장까지를 보십시오.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됐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날마다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로마서 12-15장 전체의 윤리적 명령의 명제입니다.

로마서 1-8장을 ‘교리장’ 또는 복음 선포장이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로 우리를 어떻게 의인되게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의인’으로서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12-15장에 나오는데, 이것을 ‘윤리장’이라고 합니다.

이 윤리적 요구는 “그러므로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서로 사랑하라, 화평을 도모하라”등에서 보듯이, 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윤리적 명령들을 자세히 보면 사랑의 이중계명을 다양한 삶의 상황에 적용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5장도 자세히 보면 사실 사랑의 이중계명의 적용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예수의 산상수훈도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강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서술, 즉 복음 선포에 근거해서, 선포된 복음에 힘입어 의인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사람들, 하나님 통치 아래 놓인 사람들이 이제는 실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 요구입니다.

다른 종교는 윤리적 요구가 먼저이고 그 요구를 다 이룸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적 업적에 구원이 달린 것이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구원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통치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주셨기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윤리적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비극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렇게 포괄적으로 가르쳐지지 않아 많은 신자들이 윤리없는 믿음 생활을 하며, 오늘 제자도의 실천없이도 ‘믿기만 하면’ 장차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이렇게 왜곡된 복음 이해를 극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을 이단자들이라 비난하는 많은 정통 그리스도인들도 실제 삶에서 그런 왜곡된 생각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인구의 ¼이 그리스도인들이라지만, 나의 삶에서, 아니 심지어 교회 안의 삶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샬롬은 잘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근본주의적 문자주의 극복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비극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윤리의 명령어들이 어떻게 복음에 근거하는가?”하는 구조를 모른 채, 성경의 명령어들을 율법주의적,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경향들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음’은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인데, 그때에 우리는 율법주의적 경향, 문자주의적 경향을 피해야 합니다. 이렇게 율법주의, 문자주의에 얽매여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데, 한국교회에서 이런 근본주의적인 신학 색채가 아주 강합니다. 한국의 다수의 기독교적 신앙의 양태가 근본주의적 양태입니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경시하고, 성경의 가르침의 진리됨에 대한 확신이 적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성경을 해석하고, 특히 역사적 진실에 대해 회의적이고, 성경의 가르침을 가볍게 생각하여 성경과 기독교 진리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은 신학적인 해석을 할 줄 몰라서 문자주의, 율법주의에 얽매여서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앙을 왜곡합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를 가지고 있으면 온갖 이단사설이 난무하게 되는 토양을 만듭니다. 한국교회 주변에 온갖 이단사설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수교회들의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의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유주의적 신앙양태에 노출되기보다는 근본주의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예를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스스로가 예수님의 말씀들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적용했는지를 봄으로써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뜻, 특히 사랑의 이중계명이지, 문자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1)

4. 경고와 달램의 교차 구조

1) 경고와 위안(2)

그런데 제가 히브리서를 가르치다 보니 개역 성경 번역이 형편없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전에 빌립보서 강해를 할 때에도 그 아름다운 편지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오역된 곳이 많아 실망했는데 말입니다. 고린도전서의 경우도 어떤 곳은 비교적 잘 되었으나 어떤 곳은 형편없이 오역되었습니다. 한국의 근본주의적 교권주의자들이 마치 하나님이 옛날 개역성경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만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고집하고 새로운 성경 번역을 방해하는데, 여러분은 그러지 마시고 최근에 나온 좋은 번역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보면, 복음을 저버리고 배교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가볍게 경고합니다(2:1-4). 그러다 조금 더 강하게 경고하고(3:12), 조금 더 강하게(4:1), 좀 더 강하게(4:11-13), 그러다 아주 강하게(6:1-8)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10:1에 가면 그것보다 더 강하게 경고하게 됩니다. 이것이 ‘경고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가 “배교하고 신앙에서 뒤걸음질 치면 제2의 회개는 없고 죽는다”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한편으로 달래기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달램 시리즈’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우리가 핍박받고, 고민하고, 죄책감으로 감히 하나님께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지만, 이런 것을 다 알고 동정할 수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기도해 주시니 너희들 신앙이 위축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된다”는 달램의 말을 경고들 사이사이에 넣습니다. 2:17, 3:1, 4:14-16, 5:1-10, 6:9-20이 이 달램의 말씀들입니다. “너희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잘 시작했고, 잘 지키고 있고, 지금도 사랑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가”라고 독자들을 추켜세우며 위안을 주고, 확신을 주고, 달래고 있습니다.


그 다음 7:1-10:18은 히브리서의 본론인데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한번에 영원한 효과가 있는 속죄로 드렸으며, 지금 현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 노릇을 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속죄 제사뿐만 아니고 새 언약의 제사여서, “너희 죄를 내가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렘 31:34)는 약속이 담겨 있으므로, 너희가 신앙생활하다가 좀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발동시켜서 너희를 다시 회복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 하지 말고, 하늘의 완성된 구원(하늘 안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그의 모범을 따라 믿음의 순례의 길을 신실히 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의 구조와 메시지 전체를 알아야 그 맥락 속에서 6:1-8의 경고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알게 되는데, 히브리서 전체의 구조(경고와 달램이 계속되는 교차 구조)도 모른 채 단편적으로 하나만 떼어서 읽게 되면, “세례 후에 나도 좀 죄를 지었는데 두번째 회개가 없다고 하네”하면서 양심이 여린 사람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 전체를 잘 살피고, 전체 구조를 통해서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또 종말론적인 유보의 구조를 포함하여 복음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하는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역설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후의 심판날까지 믿음과 구원에 견고히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바울은 그 신념을 표현합니다(고전 1:7-10).


로마서 8:28-38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렇게 ‘성도의 견인론’(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종말의 구원의 완성때까지 지켜 주심)을 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확신을 주고자 할 때 바울은 보통 ‘예정론’(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믿음과 구원에로 미리 예정하심)을 펼칩니다. 영원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태초부터 우리를 믿음과 구원에로 예정하셨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또는 우리 인간들이 약간의 실수를 했다고 해서 우리를 포기하여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떨어지게 버려두지 않습니다. 전능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영원에서 영원까지 자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사로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 우리에게 두신 구원의 계획 또는 예정의 뜻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성도의 견인론’을 위해 펼치는 교리이고,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믿음의 안위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 사는 우리에게, 구원의 첫 열매을 받고 그 완성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아직도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받아 그 구원의 첫 열매를 누리고 그 구언의 전달자 노릇을 해야 하는 우리에게 우리의 구체적 삶에서 사탄의 뜻을 좇아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굴러 떨어질 수 있음을, 하나님 나라로부터 탈락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고,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신실히 지켜 주실 것임을 역설하여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두 가르침들을 논리적으로 대립시키고 어느 하나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엄연한 성경의 두 가르침들을 그들이 의도하는 바의 평면에서 통합하여 논리적 긴장 가운데 둘 다를 견지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입니다. 전자의 가르침이 의도하는 바는 구체적인 삶에서 사탄의 통치를 뿌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도, 즉 성환의 길을 신실히 가도록 촉구하는 것이고, 후자의 의도하는 바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 즉 신실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기에 안전하다는 것을 일깨워 우리에게 안도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르침들을 상호 논리적 긴장 속에 함께 견지함으로써, 지금 나의 실존에서,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식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는 한 우리는 후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안도하고 신앙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과 자세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안도해야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조마조마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자세를 갖지 않고, 맘몬 우상숭배에 빠져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고, 해치고자 한다든가 음행의 위험에 빠져들 때는 전자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경우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지 행위로 받느냐? 하나님께서 한 번 믿음에 이른 자들을 끝까지 지켜 주신다고 하지 않느냐?”등의 생각으로 자위하면서 실제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빠져 나와 사탄의 나라로 들어가면 제2의 회개는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펴 볼 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구원을 이미 다 따 놓은 당상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통치/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이 경고를 받고 신실한 제자도, 열매있는 성화의 길로 되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통치/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가끔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할까 조마조마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심을 믿으며,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성령이 자신과 함께 계셔서 자신을 일깨우고 힘주심의 증거로 보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안도하며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0)

3.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2)


예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 아빠께 다가오는 하루 양식(‘일용할 양식’)을 비는 자세로 살라”(마 6:19-34). 그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 사랑은 자신의 투자와 노력에 대한 정당한 이익만 취하지 부당하게 과도한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고(즉 이웃의 것들을 빼앗아 자신을 더 살찌게 하려 하지 않고) 자연히 자신의 남은 것들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가 비교적 공정하게 재분배되겠지요. 골고루 잘 살게 되겠지요. 그러면 갈등이 줄어들고 화평이 증대되겠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정의와 평화의 확대로, 자유의 확대로, 인권의 증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는 원수까지도 네 이웃이라고 합니다. “누가 오른 빰을 치면 왼쪽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합니다(마 5:38-48).

너무도 오랫동안 성도들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죽어서 영혼이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조금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분들은 ‘예수의 재림 때에 완성되는 나라’라고만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했고, 그 선포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이 창조하고 모은 하나님의 백성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그들이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지금, 벌써,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나라에서 속량된 사람들, 곧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현재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깨우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힘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인된 우리가,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우리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힘입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으면 우리는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회에 정의와 평화와 자유, 즉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구제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첫 열매로서 이미 출범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우리가 여기서 벌써 누릴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 소금과 빛 노릇을 하는 것이며,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실현된 구원은 종말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구원의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 구원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

우리는 이런 구조 속에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이 유보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을 결정적으로 꺾고 우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벌써 그 구원을 얻고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승리가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가 완전히 제거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말론 구조 속에서 개인적인 삶으로 말하면, 즉 칭의론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했다, 또는 하나님 나라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올바른 관계에(하나님 나라 안에) 서 있음’입니다.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합니까? ‘예수의 재림 때까지’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어떻게 서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됐으니까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으로써’ 서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써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등 돌리는 탕자 노릇을 재현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서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것이 결국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4. 경고와 달램의 교차 구조

1) 경고와 위안(1)

서신들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아 그 관계 안에 서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고 여러 번 경고합니다. 대표적인 경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서신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받아 성령도 받고 성찬예식에 참여도 하고 있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경험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열광주의’에 빠져 우상숭배와 음행, 그리고 형제들과의 갈등 등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바울은 그들의 세례와 성령체험 그리고 성찬 참여와 모형론적으로 같은 체험을 하며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음행 등 죄악 때문에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다 죽었던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의 예’로 들면서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경고가 더 심각한 언어로 주어지는 곳이 히브리서 6:1입니다: “한번 예수 믿고, 세례받고, 구원의 첫 맛을 본 사람들이 신앙을 저버리면 두번째 회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그 본문을 읽고 힘들어합니다. 마침 이 본문이 어느 날의 QT 본문이었는데, 그 본문만 읽었을 경우 성도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히브리서 저자가 탁월한 설교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한 편의 설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첫 기쁨과 열정을 잃어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말리기 위해서 경고하면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신에는 그러한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는 말들이 반복됩니다. 제가 이것을 ‘경고 시리즈’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9)

2. 구원론적 복음 선포(2)


그런데 구원론적 그림언어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칭의’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언어로 선포된 복음의 재발견으로 중세 가톨릭 교회의 공로/상급신학을 타파하고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의인됨’을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를 창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언어는 한편 법정적 개념으로서 무죄선언, 의인이라 칭함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종말의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얻을 죄용서와 의인이라 인정됨을 지금 지레 얻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라는 개념은 그런 법정적인 함축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고, 더 본질적으로 관계론적 함축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인’된다 할 때, 그것은 ‘죄용서’라는 법정적, 부정적인 뜻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긍정적인 뜻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를 믿음’의 축약 형식)으로 칭의를 얻음은 죄용서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 그리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하심을 덧입어 살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바울만 쓰는 언어인데, 바울은 또 독특하게 ‘화해’라는 언어도 씁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를 믿어 죄용서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친구 관계가 된 것으로 나타내고자 해서입니다. ‘새 창조’(고후 5:17)의 언어도 바울만 쓰는 구원론적 언어인데 하나님을 적대하던 관계를 버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아담의 죄와 숙명을 극복하고 ‘종말의 아담’(곧 그리스도)적 존재들이 됨을 뜻합니다.

이것이 “새 창조” 또는 “새 피조물”됨이라 포현하는데, 이 언어와 함께 가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음(롬 8:29, 고후 3:18, 빌 3:20-21 등)을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구원론적 그림언어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부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덧입게 됨, 그래서 신적 충만에 참여하여 신적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됨”인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3.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1)

그런데 구원은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음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출범했고,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상의 신을 그리스도가 결정적으로 이겼습니다. 이러한 승리를 2차 대전 때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여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1944년 6월 승리, 즉 전쟁이 ‘결판난 날’의 승리에 비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기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대가 시작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재림 때에 비로소 그 구원이 완성됩니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과 소련의 군대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하고 히틀러의 후계자 되니쯔 제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1945년 5월 8일에 2차 대전의 승리가 완성되었듯이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사탄의 등뼈를 부러뜨려 결정적 승리를 거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사탄의 모든 잔여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 세상이 지속되면서 사탄의 역사가 계속 막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우리는,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 살면서 동시에 아직도 사탄의 통치가 드러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이라 선언된’ 또는 하나님과 ‘화해된’ 우리는 날마다 사탄의 통치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두 주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탄의 명령을 들을 것인가, 주 예수의 명령을 들을 것인가?’하는 갈림길에 놓입니다. 사탄은 우상숭배로 나를 유혹하면서 자신의 통치를 받도록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그래야 너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웃 것도 빼앗고, 탈세도 하고, 사기도 치고, 환경도 오염시키면서 무조건 돈만 많이 벌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 예수는 뭐라고 합니까? “아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다.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믿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고 그의 통치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온다고 가르쳤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온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의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형태의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한강가에 가서 음식 놓고 비는 것입니까? 아니면 불상이나 장승 앞에서 절하는 것입니까? 그리스 로마시대에 도시마다 신전을 세워놓고 예배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우상숭배입니다. 모든 우상숭배에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우상숭배들은 파괴력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파괴력이 제일 큰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바로 재물을 섬기는 맘몬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형제를 원수가 되게도 하고, 사회 계층들간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나라들끼리 전쟁도 하게 하지 않습니까? 또 그것이 인간성을 황폐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마태복음 6:24에 예수께서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맘몬 우상숭배를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에게 맘몬을 숭배하도록 충동해서 우리를 자기의 죄와 죽음의 통치로 몰아넣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네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착취하고, 거짓말하고, 직장에서 동료를 헐뜯고, 사기도 치고, 탈세도 하고, 그러다보니 갈등과 불의가 조장되고, 인권이 짓밟히고,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경제 양극화가 일어나고 심지어 세계전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탄의 통치를 받는 악인들의 공동체는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8)

1. 기독론적 선포(2)


‘하나님 아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상속/이양 받은 분이란 사실을 나타낼 때 쓰는 칭호입니다. 그것은 비교적 드물게 쓰이는데 가장 중요한 대목에 아껴 쓰는 심오한 칭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요약이나 정의로 쓸 때 사용되기도 하고, ‘보냄의 형식’과 ‘내어줌의 형식’에 쓰입니다.

‘보냄의 형식’은 하나님+그의 아들+보내셨다+목적(우리의 구원)의 형식을 가진 문형입니다(요한 3:17, 롬 8:3-4, 갈 4:4-6, 요일 4:-14). 이 ‘보냄의 형식’은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꾼임을 잘 나타내는 문형입니다.

또 하나는 ‘내어줌의 형식’입니다. 하나님+그의 아들+내어 주셨다+목적(우리의 구원)(요 3:16, 롬 8:32, 갈 2:20).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내어 줌의 형식’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됩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데, 본질을 계시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계시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경 숙어로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에서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본질을 드러낸다는 말, 즉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이 사랑임을 드러내고, 그렇게 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본질(아들의 본질은 아버지의 계시자, 구원의 대행자임을 보여 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십자가가 수난이 아니고 높여짐’입니다. 따라서 3장부터 계속 나오는 요한복음적 숙어 “그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이 문장 형식은 공관복음에서 “그 ‘사람의 아들’이 넘겨진다”는 문형에 상응함). 그것은 요한복음적 이중 의미입니다. ‘땅바닥에서 십자가에 달려 들어 올려짐’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높임받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을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들어 올려짐”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8:28에서도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것을 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ego eimi’(Iam)인데 우리말로 보어가 없이 “내가 ~이다”입니다. Ego eimi란 말은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시는 존재로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들어 올릴 그가 하나님과 다르면, 하나님보다 조금 열등하면, 하나님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원숭이가 사람을 완벽하게 나타낼 수 없고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완전히 나타낼 수 있듯이, 예수가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거기에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초월자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 사랑을 시위하셨기에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요, 그것을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요체를 알아야 성경을 더 올바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찌하여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으로 전화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복음을 두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나 하나의 구원의 봉우리를 바라보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 봉우리를 향해 가시면서 구원을 예고하고 약속하며 구원에 참여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봉우리를 되돌아보면서 종말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일어났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복음과, 서신서들에서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이런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성경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구원론적 복음 선포(1)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은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사로 죽음에 넘겨 주셨고(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죽음을 죽었고)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켜 그것을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속죄제사로 드려져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역사적 구원의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건은 오늘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메시아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덕입게 되는데, 그 덕입어 얻는 구원을 신약성경은 여러가지 그림언어들로 표현합니다: ‘구속(속량)’, 죄용서/칭의, 화해, 입양, 새 창조 등.

이 그림언어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뜻을 가진 것들로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덕입어 살게 되었다는 것, 즉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속전을 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그림을 연상케 하는 ‘구속(속량)’이라는 언어를 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또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골 1:13),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을 덕입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사실을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 주심을 덕입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얍’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었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7)

5. 사도적 고백/선포(2)


좀 더 되돌아보니 다니엘 7:14에 근거하여 그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임을 주장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옳다고 했으니 ‘과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이구나. 그의 죽음은 새 언약과 대속의 제사로서의 죽음이었구나’ ‘그의 죽음이 새 언약과 대속의 제사라고 가르친 것을 하나님이 다 옳다고 인정했다. 그 결과 우리를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창조하신다고 함이 다 옳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고전 15:3)라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인식한 제자들이 부활의 이편에 서서 볼 때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어 구원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그의 죽음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어 구원을 얻게 하였다. 그것을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켜 확인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후자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했다’보다, ‘그의 죽음으로 그렇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이루셨다’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되풀이하지 않고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셨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오신 종말의 구원자이시다, 곧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상속받은 아들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주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더 나아가서 메시아적 행위를 더 이상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예수가 실제로 하신 일, 즉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 스스로를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바쳐 우리 죄를 씻어버리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심(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받게 함), 즉 우리를 아담적 죄와 숙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충만에 참여하게 하심(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을 덕 입어 살게 함)이 진정한 메시아(종말의 구원자)의 행위이고, 예수가 바로 그런 구원을 가져온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적 행위 또는 사건을 그의 죽음과 부활로 보고,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셨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데 집중한 것입니다(고전 15:3-5).


<2> 사도적 복음 선포 양식


1. 기독론적 선포(1)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서신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도적 복음 선포 양식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예수가 메시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대행하신 분이다. 그리고 지금 주이시다”라는 소위 기독론적 형태로서의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사도적 공통 케리그마(선포)에 쓰이는 칭호들이고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기독론적 칭호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만 해도 예수에 대해 “말씀(로고스)이다, 어린양이다, 하늘에서 온 떡이다, 세상의 빛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선한 목자이다, 양의 문이다, 포도나무이다” 등의 칭호들이 있고, 히브리서에는 “대제사장이다,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다”, 바울서신에는 “종말의 아담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지혜다”, 요한계시록에는 “알파와 오메가다, 하나님 말씀이다, 유다의 사자다” 등등 아주 많습니다.

이런 기독론적인 칭호들 중 “예수가 메시아이다”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칭호입니다. ‘메시아’란 말을 헬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란 말은 ‘종말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란 칭호는 항상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사건을 언급할 때 쓰입니다. 그리스도가 기본 칭호이고, 그 외의 칭호들은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로서의 여러 면들, 여러 가지 의미들을 특별히 부각시키기 위해 동원된 그림언어들입니다.

‘주’라는 칭호는 예수가 부활 승천하여(“하나님 우편에 앉아”)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이는 칭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자기 우편에 앉혔다는 것입니다.

시편 110:1에 시인이 “야훼가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등상이 되게 할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하리니”라고 합니다. 발등상이 되게 한다는 말은 완전히 굴복시킨다는 말입니다. 발등상이란 옛날 근동에서 왕이 앉을 때 발을 딛는 발판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할 때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빌립보서 2:6-11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유명한 찬송시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이셔서 만유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할 때 여기서 만유에 뛰어난 이름은 곧 하나님 이름 ‘야웨/퀴리오스/주’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이나, 땅 아래 있는 악령들까지도 그에게 무릎을 꿇고(무릎을 꿇는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말) 예수를 “주시다”라고 부르짖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시인하게 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주 약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배 때 “주여”라고 부르짖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르짖는 행위는 그의 도움을 청하고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는 행위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니까 온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에게 무릎 꿇고 예배하며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부르짖게 했다는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주’라는 칭호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나타낼 또 윤리적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 통치를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이므로 바울은 윤리적 권면을 줄 때 ‘주’ 예수의 요구를 강조합니다(예: 롬 14:5-9, 고전 7:10-11, 빌 4:2, 살전 4:1).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6)

2)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예수의 죽음의 결과

그러므로 잔의 말씀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두 범주들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죄제사’와 ‘언약제사’. 예수는 자신이 이사야 42-53장의 “주의 종”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속죄제사’로 바쳐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여 그들을 의롭게 하겠고, 또 ‘언약제사’로 바쳐 그들을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창조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사탄의 사주(통치)를 받아 하나님께 대항하고 자기주장하며 살아온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들을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 사건, 그들을 하나님의 아비/왕/목자/신랑 노릇 해 주심을 덕 입는 하나님의 새 자녀들/백성/양떼/신부가 되게 하는 사건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에 들어가게 하는 사건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죄인들에게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탄의 나라에서 나와서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들어오라”고 부르고(막 2:17, 눅 15:1-34 등),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 백성이 되어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주겠고 그의 충만한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는 죄인들에게 “새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충만함에 참여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로 약속한 바를 성취한 사건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은 출애굽 때 모형으로 보여 준 첫 유월절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새 자녀들/백성/양떼/신부가 되어 하나님의 아비/왕/목자/신랑 노릇 해주심을 덕 입는 삶, 즉 우리의 피조물적 결핍/죽음을 벗어나 하나님의 충만(상속/잔치)을 덕 입어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판 최후의 만찬 말씀에서는 이렇게 요약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요 6:53).


4. 하나님에 의한 예수의 부활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이 일으키심, 즉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사건이므로 이것은 창조주의 행위, 초월의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부활을 자주 신적 수동형으로 표현합니다. 대표적으로 바울 이전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는 로마서 4:25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죽음에 넘겨졌고, 우리를 의인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일으켜졌다”고 합니다.

“일으켜졌다”는 말이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잘못 번역되어서 “살아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동형이 한국말에서는 익숙한 표현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능동형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원어로는 “일으켜졌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일으키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어법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정한 인간의 입술로 담기를 꺼려해서 수동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범죄함을 인해 넘겨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를 우리를 위해 내어/넘겨주었다”는 말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을 “그 ‘사람의 아들’이 넘겨진다”는 형식으로 예고하였는데(예, 막 9:31, 10:33, 14:21, 고전 11:23), 그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과연 하나님께서 예수가 예고한 대로 그를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의 제사로 죽음에 넘겨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구나라고 깨닫게 되어 로마서 4:25 같은 신앙고백/복음 선포 양식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에 넘겨졌고, 우리를 의인되도록 하기 위해서 일으켜졌습니다. 즉 하나님이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요한, 야고보, 안드레, 베드로 등 예수의 제자의 입장에 서보기 바랍니다. 그들이 예수의 이 모든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대행하면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그분의 죽음을 그 당시에는 알아듣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왜 그 당시에는 이 사람들이 알아듣기를 거부합니까? 자기들의 메시아 기대와 너무 동떨어지니까 귀담아 듣질 않고 알아듣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부활시키신 것을 보고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죄인들을 위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라고 하며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 구원을 덕 입게 하는 사건이라고 가르친 예수가 옳다고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5. 사도적 고백/선포(1)

여기까지 도달한 제자들이 부활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선언하심’의 관점에서 되돌아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이 과연 자기 죄에 대한 죄 값으로서의 죽음이 아니고 그가 최후의 만찬에서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던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제사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죽음이 과연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된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였구나. 그의 죽음이 출애굽기 24:8에 시내산 언약에 상응하는 종말의 새언약의 제사였구나. 이사야 42:8, 49:6에도 주의 종이 백성에게 언약으로 바쳐진다고 했는데, 예수가 주의 종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대속의 제사로만 바쳐진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도 바쳐진 것이었구나.’ (계 속)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2014년 9월 17일 수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5)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6)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의 의도 또는 목적

그렇게 한 예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한 목적은 우리를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초대’ 혹은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막 2:17). 죄인들을 사탄의 나라에서 불러내서 하나님 나라로 모으려는 것이 인자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은 언약의 개념으로서 ‘죄인들을 하나님 자녀들이 되게 함, 하나님의 상속자 되게 함, 그래서 아담적 결핍과 피조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신적 충만에 참여케 하여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함’, 이런 것입니다. 예수가 그런 구원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여기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그렇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 예수의 죽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 사역의 끝인 유월절에(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첫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며 종말에 그 출애굽 구원의 재현을 희구하는 절기) 제자들에게 만찬을 베풀었습니다(막 14:17-25).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잔치로 비유하신 분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12명(새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도록 특별히 12명을 세움)과 함께 만찬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께서 하나의 극(드라마)을 하십니다. 최후의 만찬이란 것이 하나의 극(드라마)이지요. 예수께서 이 극을 위해 먹는 것(양식)과 마시는 것(음료)을 극의 재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내일 다가오는 나의 죽음이 종말의 새 유월절 구원으로서 너희에게 양식(생명)을 주는 사건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 떡을 부수고 포도주를 붓는 몸짓(제스처)을 통해서 자신에게 닥칠 잔인한 죽음, 즉 십자가에서 몸이 부서지고 피 흘리는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양식(생명)을 주는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가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사건입니다.


1) 해석의 말씀들: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

그런 후 해설 말씀을 달았습니다. 해설 말씀은 두 마디입니다.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입니다. 예수는 잔의 말씀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어째서 자신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위한 음료가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판으로 보면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막 14:24).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과 “언약의 피다” 두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마디가 다 풍부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이란 말씀은 이사야 53:10의 인용입니다. 거기서 주의 종이 하나님의 패역한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하나님 백성의 죄를 씻어버리고 덮어 버려서 하나님 백성을 속량하는 제사, 즉 대속의 제사로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로 하여금 의롭게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와 ‘의롭게 됨’은 같은 사실을 뜻하는데, 전자는 부정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죄용서 받음’은 그러니까 ‘의인됨’,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이라는 뜻입니다. ‘죄 용서 받음’은 그러니까 ‘의인됨’,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이라는 뜻입니다.

‘죄 용서 받음’은 ‘의인됨’의 이면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는 ‘의인됨’을 법정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해서 칭의론을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사면됨,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의인이라 무죄 선언됨’, 그렇게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의’란 근본적으로 관계론적인 개념이어서, ‘무죄 선언됨’은 동시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인된 사람은 죄 용서(무죄 선언)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 그 속에 서있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피흘림, 즉 ‘속죄제사’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은 어디서 왔습니까? 출애굽기 24:8, 이사야 42:6, 49:8, 예레미야 31:31-34 등을 은유하는 말입니다.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 광야에 모아놓고,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의 피”라며 뿌림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언약이 체결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출 24:8).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못하여, 즉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회초리로 삼아 이스라엘을 징벌하십니다. 그 징벌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기에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그 약속을 지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토로 해방시키고, 그들을 회복시켜서 새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새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하여 다시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 노릇을 하겠다. 이번에는 나의 언약의 법을 시내산의 언약같이 돌판에 새기지 않고 너희 심장에 새겨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동기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하게 하겠다. 그리고 더 이상 너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렘 31:31-34).


이사야 42:6, 49:8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백성을 위한 언약으로 삼으시겠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는 이런 구약의 예언들을 염두에 두고,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옛 시내산 언약에 상응하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을 세우는 ‘언약제사’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 초래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비/왕/목자/신랑 노릇 하심의 덕을 입는 새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4)_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3)뿌리 뽑힌 나무 같은 인생: 범죄한 인간의 실존

우리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때 죽음이란 무슨 뜻일까요?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으로는 살았지만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성경적 이해가 아닙니다. 올바른 뜻을 이해하려면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 보세요. 이게 인간 실존입니다.

제가 사는 LA 지역에는 겨울에 산타아나 광풍이 많이 붑니다. 사막의 얇은 지표에 박혀 있던 나무들이 뿌리가 깊지 않아서, 이 광풍이 불면 큰 아름드리 소나무라도 금방 넘어집니다. 그러면 이 소나무가 죽었습니까? 제가 그 소나무를 보니 넘어진 상태에서 한 6개월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그 순간부터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해서 잎이 시들고 가지가 마르기 시작합니다. 잎이 시들고 가지가 마르는 것이 죽음의 증상들(죽음의 병에 걸렸음,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있음)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바로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증상들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고난들입니다. 신체적 고난이든, 경제적 빈곤이든, 정치적 압제이든, 부부 갈등이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난들은 인간이 다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죽음이 그 힘을 우리 삶에서 발휘하기 때문에 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탕자의 비유를 들어 “너희가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며, 즉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며 제멋대로 살겠다는 아담적 삶을 살려고 하니, 사탄의 통치 아래 떨어져 죽음을 얻게 되고 그 증상들로 고난들을 받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4) 죄의 품삯과 하나님의 은사

바울은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죄의 품삯은 죽음이라”(롬 6:23). 품삯이란 용병들에게 주는 급료라는 뜻입니다. 가령 로마가 용병들에게 “우리 군사로 게르만 민족과 북쪽에서 싸워달라”하고, 싸워 주면 급료를 줍니다. 그것이 ‘품삯’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그림은 사탄이 우리를 자기 왕국의 용병들로 써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항해서 죄를 짓게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을 품삯으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6:23을 이해하려면 그런 그림들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진리를 예수는 탕자의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고자 함은 사탄의 속임수의 통치 아래 떨어져 죽음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이 부요한 아버지의 아비 노릇 하심을 거부하고 자기 분깃을 챙겨 아비에게 등을 돌리고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분깃(자원)으로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줄 알았는데 금방 결핍성에 빠져서 죽음에 이르렀다.” 이 비유로 예수는 청중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런 상황에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임박했다. 아니, 회개하는 자들, 곧 사탄의 통치에서 돌아서는 자들에게는 지금 임한다.”

하나님의 아비 노릇해 주심은 언약신학의 한 개념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일단의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여러 가지 그림언어들(metaphors)로 표현합니다: 아비, 왕, 목자, 신랑, 농부, 사령관 등 노릇해 주심.

그 그림언어의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 주심’입니다. 예수가 그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하나님을 아주 독특하고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마디가 “아빠”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이 세상의 악한 아버지도 자기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빠가 필요한 것을 그 자녀들에게 주시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6:19-34 강해에서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그 창조주 하나님이 부요함 가운데 옛 출애굽 세대에게 다가오는 하루의 양식을 신실히 공급하실 테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여 사재기하고, 도둑질하고, 투기하고, 탈세하고, 재물 많이 쌓으려고 하지 말아라. 누구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건 우상숭배로서 탕자같은 죽음의 길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빠노릇해 주심을 믿고 살아라. 그것이 구원이다.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하루 양식을 주는데, 그걸 2, 3일 사재기했을 때 다 썩었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을 쌓아놓으면 다 썩고 도둑이 들고 동록이 든다.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믿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5) 구원의 잔치와 상속

복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아담같이, 탕자같이 되었으되 하나님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아빠 노릇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회복시킨다는 것을 ‘잔치와 상속’, 두 가지 그림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잔치 중 가장 흥겨운 잔치가 무엇입니까? 바로 혼인 잔치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혼인잔치의 비유로 즐겨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그림은 ‘상속’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이 두 그림을 섞어서, 하나님께서 아담적 인간(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못 먹는 상태, 즉 죽음의 상태에 빠진 인간)을 용서하고 다시 영접해서 우리에게 예복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아들, 곧 상속자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누리는 ‘상속’의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또 다른 그림으로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고, 큰 잔치를 베푸는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잔치하면 풍요가 있고, 부요함이 있고, 배부름과 만족이 있습니다. 또 사랑이 있습니다.

충만한 가운데 나누고 돕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하지요. 이런 연상들을 위해서 예수는 ‘잔치’라는 그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통치 아래서의 아담의 실존을 탕자의 비유로 설명해 주시면서 “너희가 지금 이런 결핍, 곧 죽음의 상태에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나와서 내가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즉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을 덕 입어,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여 신적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면서 죄와 죽음의 통치로부터 나와 믿음으로 의와 생명의 잔치에 들어오라는 초대에 응한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하도 그런 것을 많이 해서 누가복음 7장, 마태복음 11장에 예수의 별명이 세 가지입니다. ‘탐식하는 자요, 술 좋아하는 자요, 죄인들과 창기들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를 깎아 내리고 욕하는 별명들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더러운 자들과 료류하면 내가 더럽혀진다”는 종교의 일반적인 원칙에 의해서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까 예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을 뒤집어서 “죄인들이 예수와 먹고 마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예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많이 하셨습니까? 그 잔치 자체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벌어질 구원의 잔치에 대한 현재적 시위용, 하나의 보증금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의 첫 맛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_

1)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그 사람의 아들(3)


예수께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고,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의 대행자 노릇하는 분, 곧 하나님 나라의 부왕이기에, 이 땅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대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마 11:25-17; 눅 10:21-22).

어떻게 보여 주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죄인들에게 용서,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회복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등,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우리에게 대행하심으로, 다시 말해 “치유”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때 “치유”를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한 치유는 바로 ‘죄인들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치유’하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장애인을 고치고, 나병환자를 고친 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아주 피상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려면 그보다 좀 더 깊이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한 치유는 ‘죄인들을 하나님께 회복시키는 치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일 많이 행하신 ‘아주 예수적인 행위’는 바로 ‘죄인들과 먹고 마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고 서로를 회복시킴’, 이것이 예수께서 가장 많이 행하신 치유인데, 성경은 가끔 병자들을 고친 치유를 극적으로 클로즈업시켜서 예수의 치유활동을 시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예수가 한 치유는 그런 것밖에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들은 몇개의 특수한 경우이고, 사실은 예수께서 가장 많이 한 치유는 죄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회복시킨 것입니다. 누가는 삭개오의 치유/회복을 클로즈업시켜 이러한 예수께서 집중한 치유의 한 예를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부왕으로서, 성경 숙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를 선포하고 그 통치의 힘을 시위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더 깊이 새겨서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를 자제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통치로 얻는 구원의 열매인 “영생”을 강조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경 숙어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는 세상은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적으로는 영생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덕 입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그 삶은 ‘신적인 삶’입니다. 그것을 그림언어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지하심, 전능하심, 영원하심, 무소부재하심의 모든 자원들을 상속받는 자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삶이 성경 숙어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말은 지금 같은 삶을 시간적으로만 영원히 늘여 뺀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영생이란 언어로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를 대치합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탕자의 비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비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덕 입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이면 저면들을 여러가지 비유들로 선포하셨는데, 그중에서 제일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거기서 탕자가 누구입니까? 탕자는 아담입니다. 예수께서 듣는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아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덕 입어 하나님의 대행자로 이 땅에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 모든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하나님의 대리자’)으로 세워서 자신의 땅에 대한 통치를 대행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덕 입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대행하게 했는데,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뱀으로 형상화된 사탄이 아담에게 와서 “네가 하나님같이 되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것 없이 네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고 속임수를 썼지요.

그 이야기를 예수께서 어떻게 묘사하십니까? 아버지의 부요함을 누리면서 사는 아들이 자기 분깃을 요구하고 아버지를 등지고 멀리 떠납니다. 아담이 자기 내재의 자원, 자기 속의 조그마한 지혜와 능력, 이런 것으로 자기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 뜻을 관철하면서, 자기 주장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예수께서 이 탕자의 비유로 인간의 아담적 상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거부하고 자기의 내재의 자원으로 살려고 할 때 금방 자기 내재의 자원의 한계성을 느낍니다. 한계성은 결핍, 지혜의 부족, 능력의 부족, 사랑의 부족, 시간과 공간의 갇힘 등의 결핍성으로 나타납니다. 이 결핍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께서 탕자가 자기 분깃을 가지고 부요한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리 가서 궁핍에 빠지게 된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탕자가 이방인의 종이 됩니다. 이 말은 곧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방인이 그에게 돼지치는 일을 시킵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가장 불결한 짐승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노예로 가장 불결하고 더럽고 죄스러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이 탕자가 돼지 먹는 음식도 못 얻어먹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적 실존인 것입니다.

아담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모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청중에게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너희가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주장, 이웃에 대한 자기주장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창조주의 아버지 노릇 필요없다. 내 뜻대로 살겠다.” 그게 주된 내용이지요. 그러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같이 됩니까?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한계성에 빠지고 결핍성에 갇혀서 숱한 고난을 겪게 됩니다. 이 고난들이 바로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

1)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그 사람의 아들(2)

‘메시아’란 말은 보통으로는 머리에 기름부음받는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은 자를 뜻하여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왕들, 제사장들, 선지자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었고, 심지어는 유다를 바빌론으로부터 해방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사 45:1).

그러나 이른바 제2 성전 시대의 유대교(신약시대 전후의 유대교)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실 구원자를 뜻하는 하나의 칭호로서 고유명사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아’(또는 문자적인 헬라어로 번역하여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 뜻은 예수가 ‘종말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실현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유대 백성이 기다리던 종말의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종말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구원자다.” 사도들이 이렇게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종말의 구원자’로서의 행위라고 선포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종말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왜 사도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서로 다른 복음들입니까? 아니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그것을 단순히 선포하신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통치)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분으로서, 즉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함으로써 ‘하나님 나라’(통치)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했다”는 말의 구약적 배경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니엘 7:13-14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다니엘 7:13-14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니엘의 환상 중에 하나님의 어좌 앞에서 천사들이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괴롭히는 이방 왕조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그런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습니다. 시각적, 회화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자가 되다’는 말입니다. 성경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상속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들’을 성경 숙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숙어로서 ‘아들’이란 말의 기본 의미는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전권을 상속받은 이, 신적 능력과 신적 지혜와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상속받아서 하나님 대신 통치를 대행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근동의 궁중의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우편에 앉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요새 언어로 말하면 부왕(왕에 버금가는 왕이라는 뜻으로 왕세자를 일컫는 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7:12-14의 나단의 신탁 전승이 구약 여러 곳에서 재해석되고 재적용되는데(가령 시편 2편, 89편, 134편, 이사야 2장, 9장, 11장 등), 그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아들)을 일으켜 다윗의 왕좌에 앉히고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아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교의 메시아적 대망의 가장 중요한 뿌리였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유대 백성이 계속 짐승 같은 이방 왕조들(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통치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씨/순/아들”을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통치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메시아적 대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중요한 메시아 칭호들이 된 것입니다. 이 대망이 유대 민족이 주전 168년 경 시리아의 셀루키드 왕조의 혹독한 통치(유대교 말살 정책) 아래 고생할 때 다니엘 7장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짐승”같은 이방 왕조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키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단 7:18-24), 즉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바로 다니엘 7:13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 말한 것입니다. 사복음서들에 공히 예수가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한국어 성경에는 ‘인자’로 번역]이라고 합니다. 다니엘 7:14에 의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습니다. 성경언어로 말하면 상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자신이 다니엘에게 환상 중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로 나타나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 즉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다니엘 7:9에는 “왕좌가 놓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이 부정확한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단수 복수를 구별해서 쓰지 않는 것입니다. 단수 복수의 구별이 없다보니 의미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번역은 사실 “왕좌들이 놓이고”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정확히 읽으면 하나님의 어좌가 두 개 놓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에는 ‘옛적부터 계신 이’(하나님)가 앉아계시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구름을 타고 나와서 그 어좌에 앉아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습니다. 고대 근동의 궁중의식에서 우편에 앉는다는 말, 즉 부왕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서 시편 110:1은 구약 본문들 중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된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신 것을 보고 이 시편의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사 자기 우편에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우편에 높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 됨,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분이 됨, 그래서 주 Lord가 됨’이라는 말입니다.

주 Lord라는 이름이 원래 하나님의 이름이었는데, 이제는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이양받았으니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분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이 된 것입니다(빌 2:9-11).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아버지와 그 전권을 상속받은 아들의 관계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의 숙어들 혹은 시각적, 회화적(그림)언어들입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이런 숙어들과 그림 언어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_김세윤교수

<1> 복음의 핵심


1. 서론: 복음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성

이번 글들은 “신약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는 제목 아래 “서신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 다음에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런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소개하려는 내용은 영국의 데이빗 웬함과 스티브 월튼의 책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대한 개론입니다. 개론서란 어떤 책을 누가 저작했고, 언제 쓰였고, 어떤 독자를 위해 쓰였는지를 밝혀 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하여 그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돕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글이 그런 역할을 하며, 평신도들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입니다. 원래 영국의 신학대학의 교재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이상을 나온 평신도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글입니다.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선 영국의 존경받는 신약학자 하워드 마샬, 스티븐 트레비스, 이안 폴이 공저했던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의 도움을 받으면 좋습니다.

또한 보스턴에 있는 고든 콘웰의 구약 교수였던 더글러스 스튜어트와 신약 교수였던 고든 피가 함께 펴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론도 소개하지만, 성경 각 책의 내용들을 잘 요약해 놓아서 신약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서유니온 운동, 한국에서 줄여서 QT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아침마다 짤막짤막한 본문을 읽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성경의 구절들을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기가 어렵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터득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신들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가르치는 편지들입니다. 그래서 서신들을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전에 평신도들을 위해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했었는데, 그때의 내용이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복음서, 서신서, 사도행전, 계시록 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전체적인 이해없이 서신들이나 복음서들을 그냥 읽으면 전체 숲을 못 보고 단편적으로 나무 몇 그루만 보는 셈이 되고, 그 결과 균형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가장 먼저 어떤 문제가 떠오릅니까? 공관복음서라고 하는 세 개의 복음서들,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이 공관복음서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서신서들을 보면 한결같이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QT때 성경을 조각조각 읽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삶에 대해서 반성하기도 하고, 새로운 위로를 얻기도 하고, 권면을 받기도 하고, 지침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해서는 성경의 깊이를 알기가 어렵고 복음의 진리를 터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 가치관을 얻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윤리적 판단이나 선택을 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QT도 중요하지만 지성인 성도들이라면 그것을 넘어서 좀 더 성경을 체계적으로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이 깊어지고, 균형이 잡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앙을 이성과 동떨어진 것으로 신비화해서 지성인 성도들을 무력화시켜 목회하기 쉽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왜곡되고, 사실은 발생하지 말아야 할 신학적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이단 사설에 휩쓸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꾸 신앙을 미신화하고 복음을 세속화하여 온갖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을 피하려면 성경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어째서 그의 사도들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신앙이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고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하는 엉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한, 좀 생각할 줄 아는 평신도들은 ‘이것이 어떻게 하나의 복음일까? 이것이 어떻게 연관될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우리가 믿는 바가 이런 것이구나!”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가 선포하는 바가 이것이구나!”하는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1)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그 사람의 아들(1)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막 1:15).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도적 케리그마(kerygma, 선포라는 뜻의 그리스어)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사도들은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 그래서 예수가 바로 메시아다”라는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고전 15:1-11).



작가소개: 김세윤 교수는 현재 미국 풀러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있으며,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학 박사과정(D.Min)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 이글은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에서 2008년 출간된 책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발췌하였다 ◈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