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7)

2. 문자가 아닌 정신의 강조(2)

그런데 바울의 헬라 세계에서의 선교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특히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가나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는 굉장히 부유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거기에는 유랑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에 휩쓸려 살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고, 진정한 삶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장터나 광장 같은 곳에서 일장 철학 강연을 하고 모자를 돌려서 돈을 걷고, 그 돈으로 먹고 살고, 또 다음 도시로 가서, 똑같이 일장 철학 강연을 하고 또 모자를 돌려서 돈을 거두어 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데살로니가나 고린도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회학적 여건을 상상해 보십시오. “동방의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는데, 우리가 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 바울의 전도단이 고린도나 데살로니가에 가서, 장터나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강연하고 돈을 걷었다고 한다면, 고린도인들이나 데살로니가인들의 눈에 바울의 전도단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유랑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파의 한 부류쯤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복음은 당시 헬라 철학의 일종으로 오해 받았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위해서 복음을 과격히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복음 선포 방식을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의 방법과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값없이, 무료로 선포함으로써 복음의 은혜성을 시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천막 공장에 들어가서 가죽을 다루고 천막을 짓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무료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 선포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불순종한 것입니까? 문자적으로는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의 문자를 거스름으로써 그것의 정신에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문자가 아니라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라는 그 말씀의 정신을 실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어 번 그 말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3:6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가(의지로가) 아니라 오직 영으로 함이니 문자는 죽음을 가져오나 영은 생명을 가져온다”는 말은 곧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율법주의에 사로잡히면 죽음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신이요, 그 정신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가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문자가 아닌 정신을 새로운 상황에서 적용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 말씀을 새로운 조건과 관계없이 문자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죽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정신을 터득하여 새로운 상황에 새롭게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이중 계명

1)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지금까지 바울이 예수 전승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았는데, 모두 문자가 아닌 정신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진짜 중요한 것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까지에 나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질문한 두 번째 문제를 다루는 곳입니다.

질문의 내용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8:1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하여,” 이것이 바울이 답변하고자 하는 질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우상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통하여 도살된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에 대해 질문했는데, 이제부터 내가 그것에 대해서 답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7:1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그들의 구호를 하나 인용함으로써 답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다.” 이것이 고린도인들 중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구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교정해 줍니다. “다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아나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그러면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모르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두 마디가 바울의 원칙들입니다. 즉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과,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어느 관점에서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첫째 ‘이웃 사랑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여 그의 믿음을 세워 올리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교회를 세워 올린다, 서로의 믿음을 세워 올린다, 교회 공동체를 더 거룩하게 세워 올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원칙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 두 원칙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8장에서 10장에 걸쳐 바울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아주 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복음이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가서 그 문화와 충돌을 일으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주 좋은 모범을 제시합니다. 10:31-33에서 바울이 전체 가르침을 결론적으로 요약합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나님 사랑의 원칙).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침돌이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이웃사랑의 원칙).



2) 수미쌍관의 구조(1)

“셩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은 수십 가지일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구조를 잘 볼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두 가지 근본 원칙들은 앞뒤로 서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해서 서로의 갈등을 조장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무시당한 자는 반발한다. 그러나 사랑은 서로의 믿음을 북돋우고 교회 공동체를 세운다”(8:1). 이 말씀은 10:32의 “이웃에게 거침돌이 되지 말라”와 짝을 이루며 이웃 사랑의 원칙을 강조합니다.

한편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8:3).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가?’이다”(10:23)와 짝을 이루며 하나님 사랑의 원칙을 강조합니다. 이런 것을 ‘inclusio’라고 합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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