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6)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의 의도 또는 목적
그렇게 한 예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한 목적은 우리를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초대’ 혹은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막 2:17). 죄인들을 사탄의 나라에서 불러내서 하나님 나라로 모으려는 것이 인자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은 언약의 개념으로서 ‘죄인들을 하나님 자녀들이 되게 함, 하나님의 상속자 되게 함, 그래서 아담적 결핍과 피조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신적 충만에 참여케 하여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함’, 이런 것입니다. 예수가 그런 구원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여기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그렇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 예수의 죽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 사역의 끝인 유월절에(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첫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며 종말에 그 출애굽 구원의 재현을 희구하는 절기) 제자들에게 만찬을 베풀었습니다(막 14:17-25).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잔치로 비유하신 분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12명(새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도록 특별히 12명을 세움)과 함께 만찬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께서 하나의 극(드라마)을 하십니다. 최후의 만찬이란 것이 하나의 극(드라마)이지요. 예수께서 이 극을 위해 먹는 것(양식)과 마시는 것(음료)을 극의 재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내일 다가오는 나의 죽음이 종말의 새 유월절 구원으로서 너희에게 양식(생명)을 주는 사건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 떡을 부수고 포도주를 붓는 몸짓(제스처)을 통해서 자신에게 닥칠 잔인한 죽음, 즉 십자가에서 몸이 부서지고 피 흘리는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양식(생명)을 주는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가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사건입니다.
1) 해석의 말씀들: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
그런 후 해설 말씀을 달았습니다. 해설 말씀은 두 마디입니다.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입니다. 예수는 잔의 말씀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어째서 자신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위한 음료가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판으로 보면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막 14:24).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과 “언약의 피다” 두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마디가 다 풍부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이란 말씀은 이사야 53:10의 인용입니다. 거기서 주의 종이 하나님의 패역한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하나님 백성의 죄를 씻어버리고 덮어 버려서 하나님 백성을 속량하는 제사, 즉 대속의 제사로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로 하여금 의롭게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와 ‘의롭게 됨’은 같은 사실을 뜻하는데, 전자는 부정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죄용서 받음’은 그러니까 ‘의인됨’,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이라는 뜻입니다. ‘죄 용서 받음’은 그러니까 ‘의인됨’,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이라는 뜻입니다.
‘죄 용서 받음’은 ‘의인됨’의 이면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는 ‘의인됨’을 법정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해서 칭의론을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사면됨,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의인이라 무죄 선언됨’, 그렇게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의’란 근본적으로 관계론적인 개념이어서, ‘무죄 선언됨’은 동시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인된 사람은 죄 용서(무죄 선언)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 그 속에 서있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피흘림, 즉 ‘속죄제사’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은 어디서 왔습니까? 출애굽기 24:8, 이사야 42:6, 49:8, 예레미야 31:31-34 등을 은유하는 말입니다.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 광야에 모아놓고,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의 피”라며 뿌림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언약이 체결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출 24:8).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못하여, 즉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회초리로 삼아 이스라엘을 징벌하십니다. 그 징벌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기에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그 약속을 지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토로 해방시키고, 그들을 회복시켜서 새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새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하여 다시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 노릇을 하겠다. 이번에는 나의 언약의 법을 시내산의 언약같이 돌판에 새기지 않고 너희 심장에 새겨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동기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하게 하겠다. 그리고 더 이상 너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렘 31:31-34).
이사야 42:6, 49:8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백성을 위한 언약으로 삼으시겠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는 이런 구약의 예언들을 염두에 두고,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옛 시내산 언약에 상응하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을 세우는 ‘언약제사’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 초래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비/왕/목자/신랑 노릇 하심의 덕을 입는 새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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