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7일 수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4)_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3)뿌리 뽑힌 나무 같은 인생: 범죄한 인간의 실존

우리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때 죽음이란 무슨 뜻일까요?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으로는 살았지만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성경적 이해가 아닙니다. 올바른 뜻을 이해하려면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 보세요. 이게 인간 실존입니다.

제가 사는 LA 지역에는 겨울에 산타아나 광풍이 많이 붑니다. 사막의 얇은 지표에 박혀 있던 나무들이 뿌리가 깊지 않아서, 이 광풍이 불면 큰 아름드리 소나무라도 금방 넘어집니다. 그러면 이 소나무가 죽었습니까? 제가 그 소나무를 보니 넘어진 상태에서 한 6개월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그 순간부터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해서 잎이 시들고 가지가 마르기 시작합니다. 잎이 시들고 가지가 마르는 것이 죽음의 증상들(죽음의 병에 걸렸음,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있음)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바로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증상들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고난들입니다. 신체적 고난이든, 경제적 빈곤이든, 정치적 압제이든, 부부 갈등이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난들은 인간이 다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죽음이 그 힘을 우리 삶에서 발휘하기 때문에 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탕자의 비유를 들어 “너희가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며, 즉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며 제멋대로 살겠다는 아담적 삶을 살려고 하니, 사탄의 통치 아래 떨어져 죽음을 얻게 되고 그 증상들로 고난들을 받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4) 죄의 품삯과 하나님의 은사

바울은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죄의 품삯은 죽음이라”(롬 6:23). 품삯이란 용병들에게 주는 급료라는 뜻입니다. 가령 로마가 용병들에게 “우리 군사로 게르만 민족과 북쪽에서 싸워달라”하고, 싸워 주면 급료를 줍니다. 그것이 ‘품삯’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그림은 사탄이 우리를 자기 왕국의 용병들로 써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항해서 죄를 짓게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을 품삯으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6:23을 이해하려면 그런 그림들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진리를 예수는 탕자의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고자 함은 사탄의 속임수의 통치 아래 떨어져 죽음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이 부요한 아버지의 아비 노릇 하심을 거부하고 자기 분깃을 챙겨 아비에게 등을 돌리고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분깃(자원)으로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줄 알았는데 금방 결핍성에 빠져서 죽음에 이르렀다.” 이 비유로 예수는 청중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런 상황에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임박했다. 아니, 회개하는 자들, 곧 사탄의 통치에서 돌아서는 자들에게는 지금 임한다.”

하나님의 아비 노릇해 주심은 언약신학의 한 개념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일단의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여러 가지 그림언어들(metaphors)로 표현합니다: 아비, 왕, 목자, 신랑, 농부, 사령관 등 노릇해 주심.

그 그림언어의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 주심’입니다. 예수가 그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하나님을 아주 독특하고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마디가 “아빠”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이 세상의 악한 아버지도 자기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빠가 필요한 것을 그 자녀들에게 주시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6:19-34 강해에서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그 창조주 하나님이 부요함 가운데 옛 출애굽 세대에게 다가오는 하루의 양식을 신실히 공급하실 테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여 사재기하고, 도둑질하고, 투기하고, 탈세하고, 재물 많이 쌓으려고 하지 말아라. 누구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건 우상숭배로서 탕자같은 죽음의 길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빠노릇해 주심을 믿고 살아라. 그것이 구원이다.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하루 양식을 주는데, 그걸 2, 3일 사재기했을 때 다 썩었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을 쌓아놓으면 다 썩고 도둑이 들고 동록이 든다.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믿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5) 구원의 잔치와 상속

복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아담같이, 탕자같이 되었으되 하나님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아빠 노릇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회복시킨다는 것을 ‘잔치와 상속’, 두 가지 그림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잔치 중 가장 흥겨운 잔치가 무엇입니까? 바로 혼인 잔치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혼인잔치의 비유로 즐겨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그림은 ‘상속’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이 두 그림을 섞어서, 하나님께서 아담적 인간(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못 먹는 상태, 즉 죽음의 상태에 빠진 인간)을 용서하고 다시 영접해서 우리에게 예복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아들, 곧 상속자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누리는 ‘상속’의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또 다른 그림으로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고, 큰 잔치를 베푸는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잔치하면 풍요가 있고, 부요함이 있고, 배부름과 만족이 있습니다. 또 사랑이 있습니다.

충만한 가운데 나누고 돕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하지요. 이런 연상들을 위해서 예수는 ‘잔치’라는 그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통치 아래서의 아담의 실존을 탕자의 비유로 설명해 주시면서 “너희가 지금 이런 결핍, 곧 죽음의 상태에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나와서 내가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즉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을 덕 입어,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여 신적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면서 죄와 죽음의 통치로부터 나와 믿음으로 의와 생명의 잔치에 들어오라는 초대에 응한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하도 그런 것을 많이 해서 누가복음 7장, 마태복음 11장에 예수의 별명이 세 가지입니다. ‘탐식하는 자요, 술 좋아하는 자요, 죄인들과 창기들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를 깎아 내리고 욕하는 별명들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더러운 자들과 료류하면 내가 더럽혀진다”는 종교의 일반적인 원칙에 의해서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까 예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을 뒤집어서 “죄인들이 예수와 먹고 마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예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많이 하셨습니까? 그 잔치 자체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벌어질 구원의 잔치에 대한 현재적 시위용, 하나의 보증금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의 첫 맛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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