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6일 금요일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신뢰 문화



김형민/호남신학대학교 교수



현대는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과거와는 달리 청소년들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타율보다는 자율의 가치를 중시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러한 개인화의 과정이 현대인들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자율성의 증대로 인해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위험과 책임도 더욱 커졌다. 그런 점에서 개인화는 에고이즘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하지만 개인화를 자아중심적 개인주의로 오해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들이 자주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갈등도 증폭되고 사회구성원들 상호간의 신뢰도 약화되고 있다. 우리가 이기적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성의 회복이다.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우리 공동체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들의 말과 같이 신뢰는 ‘사회자본’이다. 신뢰는 사회의 문화적이며 사회적 협력을 촉진하다. 어느 사회든 신뢰는 신앙과 관습을 통해 전승되었다. 신뢰성 회복을 위한 종교공동체, 특히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긴급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는 결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아니다. 인간적 품성도 덕도 아니다. 신뢰는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시고 신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다. 신학자 본회퍼의 말과 같이 ‘신뢰는 인간의 공동생활의 가장 위대하고, 진기하며, 복된 선물’이다. 불신이 인간의 사회성을 파괴한다면, 신뢰는 인간의 공동체와 우정을 회복시킨다. 이러한 우정의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기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촉진해 나가야 할 ‘신뢰의 문화’이다.

신학자 슈트룽크는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세 가지 차원의 신뢰의 문화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예수를 만나면 자기신뢰가 회복된다. 그동안 우리는 자기신뢰를 잘못된 신앙의 유형으로 생각해 왔다. 자기신뢰보다 자기불신을 겸손한 신앙적 이상과 경건한 삶의 태도로 칭송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숙명적으로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적극적인 신뢰형성을 방해한다. 자신을 불신하도록 종교적으로 교화된 사람이 ‘신뢰의 문화’에 동참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예수는 자기신뢰가 메시아적 신뢰형성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자기신뢰를 불합리한 삶의 태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신뢰’는 이기주의나 자아중심주의와는 다르다. 부자 농부의 비유(눅 12:16-21)는 신뢰를 선물로 인지하는 못한 자아중심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풍성한 추수의 결실을 맺은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대신 오직 자신을 향해 말한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하나님과 예수의 신뢰능력을 의지하는 자기신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가 말씀하신 자기신뢰는 약하고 아픈 자들을 치유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능력이다. 쓰러진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음으로써 상실한 자신의 인간존엄을 회복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다. 마치 병든 자들이 자신의 치유를 예수께 청탁한 것과 같다. 환자들의 청탁은 바로 예수를 신뢰하는 환자들의 자기신뢰를 나타낸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신만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의 치유를 결코 남에게 청하지 않는다.

둘째는 ‘우리 신뢰’의 회복이다. 새로운 자기신뢰는 예수의 ‘신뢰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위한 신뢰’로 확장해 간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신뢰가 자기만을 신뢰하는 자들의 이기적 집단주의로 발전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흥미롭게도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편협한 신뢰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제자 요한이 예수께 와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금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눅 9:50)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던 익명의 치유자가 제자들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익명의 치유자를 자신들의 경쟁자로 생각하며 불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의 치유사역을 금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제자들의 편협한 ‘우리 신뢰’의 태도를 보게 된다. 제자들의 신뢰는 오직 제자공동체 내면만을 향해 있었다. 제자들은 내적으로는 공동체적 신뢰를 공유하면서도, 외적 공동체를 불신하는 자신들의 이율배반적 행위를 인식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익명의 귀신을 쫒는 자가 자신들의 공동체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생각할 뿐,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귀신을 쫒는 자의 소속에만 관심을 두었다. 제자들은 오래 동안 전승되어내려 온 유대교의 사회적 관습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것은 곧 ‘너희를 위하지 않는 자들은 너희를 반대하는 자’라는 원칙이다. 이 원칙을 따른 자들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는 자로 한정했다. 오직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만 신뢰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까지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제시한 놀이이론을 따르는 자들만이 신뢰할 수 있으며, 이를 거절하는 자는 의심하고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행위를 책망하시며 이 원칙을 뒤집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 9:50) 예수의 말씀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려는 삶의 자세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즉 그의 제자공동체는 예수가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예수가 ‘아바’라고 불렀던 바로 그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오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요, 그런즉 그들의 하나님 신뢰는 곧 ‘미래를 향한 신뢰’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셋째로 ‘미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을 바라볼 때 인간은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한 신뢰를 얻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과감히 고향을 등지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미래를 향한 신뢰’는 낙관주의적 삶의 철학과는 다르다. 낙관주의가 과거 지향적이며 무비판적 태도라는 점에서 종말론적 신앙과 구별된다. 낙관주의는 과거에 경험했던 행복을 바로 미래에 투영시킨다. 이제까지와 같이 미래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예수공동체가 품고 있는 미래에 향한 신뢰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다. 과거에 자신을 지배해왔던 힘과 판단과 과감하게 결별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신뢰의 공동체로 부르셨고, 그들을 이제까지 자신을 얽매였던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하셨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의 삶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의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마 19:29)까지 버려야만 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은 금욕적 자기포기가 아니라 전적인 신뢰의 능력이다. 신뢰는 하나님의 미래를 신뢰함으로써 이생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는 무력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창조적 자기절제의 힘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삶의 현실에서 볼 때 수용하기가 어려운 요구이다. 그렇다면 그의 요구를 만족시킬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인간을 긍정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으로 믿기에, 바로 이 믿음에 따라 이웃까지도 신뢰하는 자이다. 어느 날 예수를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부자 청년은 평소 윤리적 삶을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인간의 전형이다(마 19:16이하).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거절하고 예수의 곁을 떠났다. ‘도덕능력’이 아니라 ‘신뢰능력’의 부재가 부자 청년의 문제였다. 그 젊은이는 예수를 따르면 얻게 될 ‘미래를 향한 신뢰’를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뢰가 종말론적 신앙 가운데 미래를 신뢰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서로 나누며 선취해야 할 신앙적 삶의 태도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성의 상실을 염려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정신은 각 개인 사호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가능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뢰는 은혜의 사건이다. 신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감사의 삶으로 응답해야 할 신앙적 책무이다. 그런즉 이웃에게 실망했다고 이웃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수 없다. 너무 많은 신뢰가 어리석음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불신은 불행의 출발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겠다는 뜻에서 ‘신뢰도 좋은 것이지만 통제가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있다. ‘통제도 좋지만 신뢰가 더 좋다.’ 신뢰의 회복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다시 살린다.





김형민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숭실교회 협동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