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2일 화요일

해석·관찰·적용으로 이어지는귀납적 성경연구법

해석·관찰·적용으로 이어지는귀납적 성경연구법
 
- 목회와 신학 20123월호
 

진지한 성경 연구의 필요성
 
 
1.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몇 년 전, 성경의 한 본문을 연구하다가 다른 목사님들은 어떻게 설교하시는지 궁금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매우 놀라운 경험을 했다.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구성 면에서 주요 해석과 적용은 말할 것도 없고 표현까지 비슷한 것이 아닌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을 드리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을 하고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일 텐데, 어쩌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설교를 베끼게 됐을까? 원래부터 다른 사람의 설교로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성경에 있는 내용보다는 다른내용, 즉 독특하게 생각할 만한 것을 찾고 전하려 한다는 데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식의 독특한 설교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부교역자로 있는 목사님에게 성경 한 본문을 보여주면서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충실하게 본문의 메시지를 잘 설명했는데, 담임목사님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거 말고, 좀 특이한 거 없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으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또한 조금만 자세히 살펴도 하지 않았을 수준 낮은 설교를 왜 매주 하는 걸까? 이와 관련해 어떤 분들은 목회적 상황이 그리 만만치 않고, 또 앉아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와 관련된 원인들을 좀 더 찾아보고자 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더 깊은 차원의 원인을 단 몇 가지만이라도 살펴본다면,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뒤틀려진 목회관과 성경관
 
먼저 목회에 대한 생각이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회관의 핵심은 교회 성장 지상주의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들은 목회의 모든 활동에서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없고 좋아할 만한 교회가 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걸림돌 없이 들어올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때문에 이들은 큰 교회가 하는 것을 따라하기 바쁘고, 유행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데 열심이다.
 
설교도 이런 전반적인 목회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선 설교가 목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설교도 교회 성장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본다. 설교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현장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만드는 시간으로 간주한다.
 
그러니 설교를 위해 성경에서 설교거리를 찾을 때도 성경 본문의 어떤 특이한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줄까하는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다. 이런 분들은 자신보다 교인 수가 적은 동료 목사나 후배 목사에게 성경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야”, “설교가 다가 아니야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 목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는 듯하다. “기독교란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교다”?1 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들은 자신이 전하고 강조하는 설교,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프로그램들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지 교회에 사람들의 숫자만 늘어나면 된다는 실용주의 정신이 그 어떤 성경의 진리보다 우선한다.
 
이런 목회관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성경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4:12),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성경(딤후 3:14~17)에 대한 믿음이 없다.
 
만일 그들이 이를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날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온전히 살아가도록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고 예배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해 말씀 선포에 힘쓰지 않겠는가? 교회의 목표와 그에 따른 인적·물적 자원 배분, 각종 행사나 프로그램 등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 뜻대로 정하지 않겠는가? 경영자 또는 상담가로서의 목회자 상()은 그에게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며, 남의 설교를 참고는 할지언정 성경연구를 통해 먼저 자신이 배우고 믿어 순종한 후 그것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려고 할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을 때 쇠퇴기에 빠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다는 로이드 존스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2
 
 
 
3. 진지한 성경 연구의 필요성
 
한 목회자가 변하면 한 교회가 변한다. 현재 나타나는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첫 번째 원인은 바로 목회자. 목회자가 먼저 변해야 한다. 목회자가 변하면 목회자는 바른 설교를 할 것이고, 그 설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성도들이 변할 것이다. 이는 즉, 교회가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길밖에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지한 성경 연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로 서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그 성경 말씀으로 생명에 이르고 그것이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원천임을 믿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신 이유가 말씀을 가감 없이 온전히 선포하라고 주신 사명임을 믿고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자의적인 판단이나 개입을 자제하며 본문 내용의 객관성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지 않고 그 아래 있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이 제시하는 길로 걸어가고자 하며, 그 말씀이 주는 지혜와 능력으로 새롭게 될 때 목회자는 변한다. 그것은 이 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계속돼야 할 과정이다.
 
 
 
성경연구방법론
 
24년 동안 매주 신학대학원에서(현재 15개 신학대학원에서 활동) 신대원생들에게 성경 연구방법과 성경을 가르치는 동안 축적된 연구방법론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일반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기존 방법론에서 좀 더 발전시킨 방법론의 전체 그림을 제시하려고 한다.
 
 
 
1. 올바른 성경 연구의 전제
 
첫째로 성경에서 특별한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성경 연구는 특별한 해석, 남들과 다른 해석, 남들이 하지 않았던 해석을 하려는 생각을 버릴 때 시작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통찰(insight)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를 종종 성경 본문의 의미와 상관없는 독특하고도 주관적인 해석으로 오해한다. 통찰이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들을 보다 올바르고 통합적이며 바른 신학적 관점에서 그 관계의 의미를 재조합해 내는 일이다. 선입견이나 상투적인 해석과 설교를 조심하면서 본문 자체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의미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며, 해석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할 때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기 전에 본문을 붙잡고 수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석이나 설교집 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앙의 선배들이나 뛰어나신 분들의 글은 귀한 교회의 유산으로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연구하기 전에 그런 글들을 접하면 오히려 연구에 많은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성경 본문 그 자체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분석 혹은 종합하고 이해하며 묵상하는 식의 연구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회자는 무엇이든 쉽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귀한 신앙의 선배들 모두가 다 그 시대에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있었지만, 성경 본문을 붙잡고 수고하고 땀 흘리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해석을 위한 관찰
 
1) 관찰은 왜 어렵게 느껴지는가?
 
귀납적 성경 연구는 성경 본문 자체를 강조하기에 관찰 방법이 발달해 있다. 그래서 문제도 발생한다. 15년 가까이 목회자와 신대원생들에게 성경 연구를 가르치면서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 관찰과 관련된 것이다. 성경 본문을 반복적으로 읽고 다양한 관찰 방법을 사용하다 보면 2~3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그런데 많은 경우 수고한 만큼의 해석이란 성과가 없어 지치곤 한다. 즉 효과적인 관찰을 하지 못한 것이다. 성경 말씀을 잘 연구하고 올바로 이해해서 말씀을 잘 전하려고 성경 연구를 시작했는데, 시간만 많이 소요되고 그 성과는 별로 없다면 얼마나 힘이 빠지겠는가?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관찰과 해석이 분리됐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해석을 위한 관찰이 아니라, ‘관찰을 위한 관찰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르칠 때마다 관찰과 해석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며, 관찰은 해석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찰은 절반의 해석이다란 표어도 그래서 만든 것이다.
 
어느 모임에서 이렇게 가르치자, 한 전도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해석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해석을 몰랐다. 해석을 몰랐기 때문에 해석을 위한 관찰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석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호한 말인가? 한 절 한 절 다 설명할 수 있으면 해석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쯤 멈추면 되는가? 해석을 하다가 중간에 멈추면 어느 정도 해석이 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 하는가? 이와 같이 해석 자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을 위한 관찰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해석 중심의 성경 연구
 
성경연구방법론이나 성경해석학을 다룬 여러 책들을 보면 해석 개념이 어렵게 설명돼 있다. 원어와 당시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는 해석이 멀게만 느껴진다.
 
실용적으로 해석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 성경 연구를 하는가? 성경 말씀의 내용뿐만 아니라 의미’, 즉 하나님의 뜻(메시지)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만 하나님의 뜻을 알면 되지 않는가? 즉 연구자가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은혜를 충분히 받는다면, 또한 설교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면 해석은 된 것이 아닌가? 혹 이 과정에서 역사적·문화적 배경 이해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원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더라도 해석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우선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Main Idea)을 알아야 한다. 성경 본문의 통일성을 인정한다면, 일정한 성경 본문은 하나의 중심사상을 갖는다. 그 하나의 중심사상을 말하기 위해 그 본문 내용이 있는 것이며, 그 본문은 그 중심사상으로 통일성을 갖는다. 둘째로 하위사상(Sub Idea)을 알아야 한다. 하위사상은 중심사상을 지지하는(supporting) 진리요, 메시지다. 중심사상을 전개하기 위해 그 본문은 여러 개의 하위사상들을 갖는다. 중심사상과 하위사상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셋째로 중심사상과 하위사상을 통합하는 흐름(문맥)과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연구자는 해석을 위해 관찰을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서 혹은 여러 관찰 방법을 사용하면서 중심사상, 하위사상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와 본문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 좋은 관찰은 해석을 하는 관찰이다. 이렇게 무엇을 위해 본문을 읽고 관찰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안다면 보다 효율적인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찰이 아니라 해석이 이끄는 성경 연구의 기본구조로 이해하는 것이다(<1> 참조). 이렇게 해야 관찰 방법 자체에 매몰돼서 수고했음에도 그 결실이 적은 아쉬움, 관찰과 해석이 분리되는 비효율적인 연구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1>
 
기존 구조 관찰 해석 적용
 
새로운 구조 해석 관찰 적용
 
 
 
 
 
3) 어떻게 하면 잘 관찰할 수 있는가?
 
성경연구법을 다룬 책들을 보면 관찰 방법이 많고 복잡하다. 그 많은 관찰 방법을 다 따라야 하는가? 정답은 없겠지만 대략의 생각을 말해본다면, 첫째로 가장 일반적이고도 필수적인 관찰 방법을 알아야 한다. 특별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에 주목하기보다는 어떤 본문이든 적용할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은 수의 방법을 잘 사용하자.” 둘째로 관찰을 자꾸 방법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그냥 읽기로 이해해야 한다. 방법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방법 없이 그냥 읽게 되면 중요한 내용들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 연구에 익숙한 분들은 방법 없이 그냥 읽으면서 필요한 내용들을 다 파악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안 되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에게는 약간의 관찰 방법이 필요하다.
 
가장 필수적인 관찰방법은 후에 다루겠다. 여기서는 관찰의 기본으로 읽기를 다루고자 한다. 성경은 자세히 읽어야 한다. ‘자세히 읽기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생명과 경건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갖는 진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자세히 읽어야 하냐?”고 질문한다. 그냥 자세히 읽으면 되는데 자세히 읽기에도 방법이 필요한가 보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참고해 제시하자면 체계적 읽기’, ‘꼼꼼히 읽기’, ‘낯설게 읽기’, ‘적용적 읽기등이 있다. 체계적 읽기는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를 구분하면서 읽는 것이다. 꼼꼼히 읽기는 본문의 한 자 한 자가 다 필요해서 기록됐다고 믿고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읽는 것이다. 낯설게 읽기는 선입견이나 익숙함에 의해 간과하는 부분이 없도록, 아무리 익숙한 내용이나 표현이라 할지라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대하는(‘거리 두기’) 것이다. 적용적 읽기는 적용의 방향을 먼저 나에게 향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말한 몇 가지만 유의해도 충분히 제대로 된 관찰, 즉 효율적이면서도 유익한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필자가 가르치면서 느낀 목회자들이 흔히 빠지는 어려움들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기본 개념이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니, 나머지 필요한 정보들은 여러 좋은 책들을 참고해서 얻기 바란다.
 
 
 
3. 원리에 기초한 해석
 
1) 해석의 3대 원리
 
앞에서 관찰할 때 해석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을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정리한 중심사상, 하위사상 등이 잘못된 것이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해석 원리가 필요하다.
 
해석 원리는 성경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을 거쳐 교회 안에서 정립된 원리다. 이 원리는 여러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원리들을 좀 더 쉬운 표현으로 세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문맥에 적합한 해석’, ‘하나님 중심적 해석’, ‘본문에 근거한 해석이다. 이 외에도 여러 해석 원리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적용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알아 가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해석 원리는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가장 중요한 원리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주석서들을 보면 이 원리에 따라 주석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문맥에 적합한 해석 원리는 문맥, 즉 글의 흐름을 단어나 문장 혹은 문단의 의미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한 단어나 한 문장은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문맥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앞에서 말한 중심사상은 문맥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특히 중심사상과 문맥은 해석의 방향도 잡아주기 때문에 부분적인 난제를 쉽게 해결하는 해석적 유익도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 중심적 해석 원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인격],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사역] 대해 먼저 주목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자, 하나님에 대한 계시다. 연구자들은 이 두 번째 원리에서 가장 많은 실수를 한다. 연구할 때나 설교할 때, 사람 편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살리신 것에 대해 증거하는 종교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한두 마디만 나오더라도 주목해야 한다. 설령 본문에 그것이 나오지 않더라도 전후 문맥 속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어떤 식으로 이 본문에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배후로 작용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통해 행위 이전에 은혜를, 명령법(imperative) 이전에 직설법(indicative)을 붙잡을 수 있다.
 
끝으로 본문에 근거한 해석 원리는 성경 본문에서 많이 다루고 강조하는 내용에 집중하는 원리다. 이 원리는 특이한 해석으로 멋지고 능력 있고 탁월하게 보이려는 의도로 본문을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말씀의 종이지,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고. 특이하게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동의할 만한 것을 더 깊이 더 본문에 충실해서 새롭게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설교의 능력은 특이하거나 남들과는 다른 독특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겸손히 받아 그것을 신실하게 믿고 충성스럽게 선포할 때 나타나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을 배우지 않았는가? 본문에서 많이 말하고 반복해서 말하는 강조점을 찾고, 명백하게 말하는 것을 이해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방법이 아니다. 즉 성경을 읽을 때 자연스러운 관점이 돼야 하고 몸에 밴 습관이 돼야 한다. 이 원리에 입각해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고 연구한다면, 대부분의 결과는 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2) 3대 원리에 따른 관찰 방법
 
해석 원리를 아예 관찰 방법으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앞에서 구체적인 관찰 방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을 기억할 것이다. 몇 가지 방법을 나열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찰 방법은 해석 원리에 근거해 설정돼야 한다.
 
<2>
 
해석 원리 해석 원리에 따른 관찰법
 
문맥에 적합한 해석 문단 나누기
 
하나님 중심적 해석 하나님 찾기
 
본문에 근거한 해석 강조점 찾기
 
  
 
위의 <2>를 보면 각 해석 원리에 따라 문단 나누기’, ‘하나님 찾기’, ‘강조점 찾기라는 관찰 방법이 연결돼 있다. 이렇게 한다면 해석 원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또한 이 세 가지가 가장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관찰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관찰 방법들이 원칙 없이 소개되며, 그것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접근은 대단히 중요하다. 배운 대로 여러 방법을 사용하면서 관찰을 열심히 하지만, 왜 하는지 몰라서 즉 어떤 원리에 근거해 그 방법이 도입됐는지 알지 못해서 결실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수고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원리적인 접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귀납적 방법의 약점을 극복하는 복음적 해석
 
그레엄 골즈워디는 귀납적 연구 방법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접근 방법(귀납적 방법-인용자)은 실질적으로, 본문이 성경 전체의 통일성과 어떻게 부합하며, 따라서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지 혹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엄청난 가정들을 창출한다. 그것이 일종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3 흔히 귀납적 성경 연구라고 하면 한 본문을 자세히 살피고 그곳에서 신자의 삶에 유용한 몇 개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본문을 다른 성경과 동떨어진 외딴 섬처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귀납적 성경 연구가 아니다. 하나의 독단이 형성되기 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귀납적인 연구는 철저히 성경 본문 그 자체에 근거를 두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작게는 한 본문, 크게는 성경 전체를 텍스트로 보고 연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성경의 각 부분(한 문단, 한 장 혹은 한 권)은 성경 전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때 온전한 본모습을 갖출 수 있다.
 
그래서 복음적 해석을 해야 한다. 복음적 해석이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뜻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됐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다 알려졌다(1:8~10). 즉 복음이 선포된 것이다. 만유의 주로 높이 들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이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가시면서 다스리신다. 오늘 우리는 신약시대, 교회시대, 성령의 시대, 은혜가 충만한 구원의 시대에 살고 있는 목회자들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며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창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원역사의 발전과 전개, 즉 구속사를 공부해야 한다. 사람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야 한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교회의 탄생에 대해 낱낱이 검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중요성과 만유의 주로 높이 들리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일하시는(1:10)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한다. 목회자는 이를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이다.
 
 
 
5. 적용
 
해석이 성경 연구의 꽃이라면, 적용은 열매다. 적용을 통해 성경 연구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계속 성경 연구를 할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다. 교회사를 볼 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항상 경건 혹은 거룩의 필요성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적용하지 않는 성경 연구는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는 적용할 때 놓치기 쉬운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원리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원리화란 성경 본문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타당성을 갖는 영적·도덕적 혹은 신학적인 원리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다. 성경 해석의 일차적 목표는 성경 시대 당시의 의미와 원리지만 그때 거기서(then and there)’의 원리를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그대로 지금 이곳(now and here)’에서 적용할 때 잘못된 적용이 될 수도 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살전 5:26)란 본문을 생각해 보자.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문화가 지금도 통용되는 곳도 있겠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그런 인사를 하기 위해 접근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결코 그 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중심사상적 적용을 해야 한다. 적용을 할 때 흔히 범하는 실수는 적용하고 싶은 것만 적용한다는 점이다. 당장 필요한 것만 취하려 하고, 자신의 생각과 삶을 크게 바꿔야 하는 도전적인 말씀은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회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에서 가장 주력해서 말하는 중심사상(혹은 그와 더불어 하위사상)과 관련된 것을 적용점(application points)’으로 붙잡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그것이 연구자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히 받고 순종하려는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셋째로 구체적인 적용을 해야 한다. 피상적인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는 또 하나의 전략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어느 때, 어떤 사람들과 관련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고민할 때 그 말씀은 살아서 힘 있게 다가올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그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며 살아내지 않는 자가 어찌 참된 설교자가 될 수 있겠는가?
 
 
 
맺음말
 
케빈 J. 밴후저는 성경 연구의 네 가지 자세를 정직성, 개방성, 집중성, 순종이란 해석의 덕목으로 제시한다.4 이런 덕목들은 성경 연구가 어떤 정신과 관점 위에서 이뤄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경 연구에 게으르거나, 설교와 가르침 등의 실용적 목적으로만 말씀을 연구하는 기능적인 접근이나, 성경적 관점이 아닌 개인의 필요 또는 세속적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성경을 오용하는 잘못된 신학적 태도는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 연구를 할 때 꼭 고려해야 할 네 가지를 정리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경 연구는 교회 안에서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깨달음과 거룩한 지식의 축적(교리나 성경신학 등)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성령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혼란은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마치 기독교가 20세기에 시작된 것처럼 역사와 전통을 외면했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주장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소위 QT식의 성경 읽기를 극복해야 한다. 다소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요즘 잘못된 성경관을 근거로 성경을 주관적이고 상대주의적으로 읽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내게 주신 말씀이란 말은 이 유행을 잘 반영한 표현인데, 성경은 교회에 주신 보편적인 말씀이지, 내게 주신 개인적이고 특수한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내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나의 느낌이나 주관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정해지는 것인가?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성경 본문에 기록된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읽는 이의 주관적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객관적이고 보편적 의미에 기반을 둔 함께 성경 읽기가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셋째로 성경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수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한다. 성경 연구를 지적인 작업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다 이해한 말씀을 적용하려고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자 손을 뻗는 그 순간에 이미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하시는 내적 증거(Inner Witness)의 역사, 성경을 연구할 때 그 말씀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조명(Illumination)의 역사,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을 주시며 굳어진 마음을 녹이고 고집을 꺾으시는 성화(sanctification)의 역사를 행하신다.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성경 연구는 이렇듯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하는 과정임을 믿고, 목회자는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성경을 대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이 소위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중세 로마카톨릭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지 못했기에 그토록 이단적 사설이 만연하고 부패와 타락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성경은 어렵기 때문에 평신도가 봐서는 안 될 것으로 주장했던 로마카톨릭에 대항해,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명료성(Perspicuity of Scripture)’이란 진리로 맞섰고, 모든 성도들의 손에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들려주기 위해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 아닌가? 일주일에 한 번도 성경을 진지하게 읽지 않고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을 구원받은 자로 인정해주는 현대 교회의 흐름과 문화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연구하는 것(Daily Bible Study)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필자 정보 - 이혁
 
아나톨레 대표.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B.A.), 동 대학교 대학원(M.A.), 총신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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