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4일 수요일

성서와 국가권력(1)

국가권력의 책임은 백성에게 있다- 사무엘상 8장과 12장을 중심으로






사무엘상 8-12장은 부족사회에서 군주제 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에 있었던 국가권력 논쟁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이행에 따른 사회적 변화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어서 이로부터 당시 국가권력의 기본적인 성격을 추출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대한 구약성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이 장은 적절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특히 그 변화들은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전 9-8세기 이후 이스라엘 사회를 규정할 생산관계의 단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8-12장의 통찰은 근본적이고 또 예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시간적 거리를 감안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함께 고려하면, 그 내용들은 현대 국가권력 일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먼저 이행에 관한 논쟁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권력의 ‘지향점’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관심은 본문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물음보다는 본문의 현재 형태에 집중하게 한다. 그렇다 해도 형성사적 사유가 배제되지는 않는다.

8장과 12장은 사울의 즉위에 관한 9-11장을 감싸며 이 사건과 아울러 군주제 자체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해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찾아와 그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8장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짜여 있다.

I 4절 <나아오다:돌아가다> 22b절
II a 5a, b절 <부패와 ‘다른 나라처럼’ : ‘다른 나라처럼’과 전쟁> 20b, a절
b 6절 <기도:기도> 21절
c 7a절 <응답: 왕을 세우라 : 응답: 왕을 세우라> 22a절
III a 7b-8절 <백성: 하나님의 왕권 거부 : 하나님: 백성의 구원 요청 거부 경고> 18절
b 9절 <경고:거절> 19절
IV 10:11-17절 <군주제 설명>



8장 4-22절은 이처럼 전체적으로 교차법 구조를 보이고 II와 III은 그 안에서 평행법 구조로 되어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복잡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는 I이 보여주는 대로 단순하고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군주제 도입을 위한 그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차법 구조로 되어 있는 II의 5절과 20절은 이스라엘이 군주제를 요구하는 배경을 밝혀준다. 그들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내적으로는 부패에 있고 밖으로는 전쟁의 효율성에 있다. 이때 방점은 후자에 놓인다. 그리고 이것은 사울 선택의 정당성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확증되는 것에서 확인된다.(9-11장) 사울에 대한 무시와 비방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군주제가 시작된다.(11:12-15 참조)
군주제는 III의 19절에서 이스라엘이 11-18절의 경고를 거부하고 왕의 필요성을 완강히 주장하기 때문에 도입이 허용되지만, 그 도입 요구에 대한 평가는 이를 하나님의 왕권 거부로 간주하는 7b절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1)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들은 엘리와 사무엘(!)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토대를 갖춘 제왕적 통치자가 아니라 군사적 구원자이든 정치·사법적이든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실현하는 제한적/카리스마적 대행자들일 뿐이다.(삿 8:23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이 사사들에 의해 이상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사기의 대부분은 오히려 정반대의 양상을 보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 왔던 하나님의 왕권 제도지만, 이제 전쟁 위기 앞에서 백성들은 이를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판단에는 4장에 보도된 언약궤의 실패도 한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언약궤 때문에 블레셋 지역은 여러 가지 괴로운 일들을 겪었고 또 언약궤는 독자적으로 돌아왔다.(5:1-7:1) 뿐만 아니라 사무엘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굴복시키고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7:2-17) 이를 다 목격했는데도 이스라엘은 사무엘 이후 자신들을 다스리고 자신들을 위해 싸울 자를 사사,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왕에게서 찾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그들이 앞으로 군주사회에서 고통을 겪을 때 그에게 호소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또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이 이민족의 억압 때문에 울부짖으면 그가 듣고 구원 활동을 시작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군주제 도입은 백성이 군주에게 의지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제도적 거리가 생김을 뜻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논쟁 한 가운데 위치하는 IV는 군주제 도입이 백성에게 미치는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결과들을 아우른다. 11-12절은 아들들에게 부과되는 군대 관련 부역과 노역, 13절은 딸에게 부과될 노역, 14절은 토지수용, 15절, 17a절은 농업․목축 생산물의 십일조 세를 다루고, 17b절은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각종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백성을 ‘종’이라고 규정한다. 군주제 요구는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밖으로부터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며, 이러한 안전과 자유의 교환이 권력 출현의 배경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군주제를 요구함으로써 이집트에서와 달리 자기 땅에서 자발적으로 권력의 종이 되려 한다는 것이 본문의 경고다.
엘리와 그 아들들의 경우가 이미 보여준 것처럼, 사무엘의 부재와 그 아들들의 부패가 앞으로도 있을 전쟁에서 안전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와 불안을 덜어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무군주사회에서 군주사회로의 전환을 꾀하지만 이스라엘이 그 결과 얻을 것은 종의 지위뿐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 12장에서2) 사무엘은 이에 따라 왕으로 선택되고 검증된 사울을 이스라엘 앞에 세운다. 그의 왕 즉위는 출애굽 이후 하나님을 잊고 버려온 역사의 귀결로 간주된다. 비록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선택한 군주제의 운명은 여전히 이스라엘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경외하며 그의 법을 지키는지 여부가 관건이다.(12:14-15, 24-25) 6-12절의 이스라엘 역사 회고는 이 조건의 이행에 대해 긍정적 답을 내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이 14절의 소원을 낳는다.

오, 너희가 야훼를 경외하고 그를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야훼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너희나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나 다 너희 하나님 야훼를 따른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셈이다. 이것은 동시에 군주제 도입의 폐해를 완화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야훼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왕과 지배세력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 야훼의 말씀은 군주제 사회의 헌법과 같은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권력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작은 규모의 군대 유지, 부의 축적 자제, 많은 아내 금지, 야훼 경외와 그의 말씀 준수 등을 말하는 신명기 17장 14-20절의 본문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야훼 경외와 그의 말씀 준수가 반복된다. 따라서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들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사무엘서를 포함한 보다 넓은 신명기적 역사서를 고려할 때 드러난다. 사무엘하 8장 16절과 열왕기상 3장 3절, 10장 9절은 군주제의 목표와 이상이 정의와 공의 실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군주제 사회에서 ‘종’으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하고, 더 나아가 왕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둠으로써 군주제 도입으로 발생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제도적 거리를 극복하는 길이 된다.
정의와 공의는 예언서들에서도 군주들이 실현해야 하는 과제로 언급된다. 미가는 정의를 아는 것이 군주제 사회 통치자들의 본분이라고 역설한다.(3:1) 예레미야는 정의와 공의가 번영의 길이라고 설파하며, 정의와 공의는 약자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하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22:3, 15) 그렇기에 이사야는 미래의 왕이 공의로 통치하는 꿈을 꾼다.(9:1-7; 11:1-9; 32:1) 그 꿈이 실현된 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군주제 도입의 계기가 되었던 전쟁이 폐지되고(사 2:1-4; 미 4:3),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과 훼손되었던 평화로운 삶이 회복된다.(미 4:4 또한 사 65:21-23도 참조) 이러한 사회의 모습은 시편기자가 노래하는 대로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하는 세상이다.(시 85:9-13 또한 사 32:15-18; 45:8도 참조) 이러한 정의와 공의 이해 배후에는 야훼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다. 야훼는 정의를 사랑하고(사 61:8),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이다.(렘 9:24)
정의는 야훼의 말씀의 한 축이기에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정의 실천을 낳는다.3) 그리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야훼를 사랑하는 길이다.(출 20:6; 신 5:10; 또한 요 14:15.21; 15:10도 참조)4) 따라서 야훼의 말씀은 군주제 사회로의 전환으로 발생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신학적 장치이자 정치적 장치인 셈이다.
12장 15절과 24-25절에서 눈길을 끄는 현상은 진술의 초점이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인을 왕과 그 제도보다는 그 제도를 선택한 백성에게서 찾는 것은 권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본문은 백성이 권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중심은 왕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이 현실적으로 지배 권력을 행사함에도 그는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권력은 양도된 것이 아니라 위임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임자는 하나님의 동의를 얻어낸 백성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부침은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정치 현실과 일치하지 않고 또 실제로 역사 속에서 찾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이해이지만, 그 진술 자체의 의미는 반감되지 않는다. 위임받은 자가 권력을 남용하여 위임자인 백성을 억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러한 진술은 - 물론 보다 세밀한 논의가 있어야 하지만 - 적어도 그러한 권력행사에 대한 반론권 내지 백성의 권력 통제권을 보장할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상 8장과 12장은 국가권력의 생성을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는 것으로 최종 이해하면서도, 그 전제 아래 국가권력의 목표를 설정하고 말씀에 의한 통제 가능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 국가 권력의 시작은 창세기 3장이 보도하는 인간의 새로운 인식 능력 획득과 비교될 수 있다. 그 능력과 국가는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기본조건에 해당하는데, 각각의 시작을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대의 층인 12장 17절과 19절은 국가권력의 태동시키는 왕 요구가 하나님을 거부한 ‘큰 악’이라고 한다.

구약성서는 백성에게 국가권력에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백성과 국가권력이 모두 지키고 순종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곧 ‘말씀’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은 권력에 짓밟히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은 순종이 아니라 오히려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다. 정의와 공의를 지향하도록 이끄는 책임이 백성에게 있어서다.
이에 비춰 신약 특히 로마서 13장의 국가권력 이해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구약의 국가권력 이해가 신약에서의 이해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반쪽 진실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시작은 하나님과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백성의 요구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추인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구약성서가 보도하는 이스라엘에서의 권력 생성과정을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권력의 생성과정을 이해하는 범례로 사용하고자 하며, 그렇게 해도 큰 무리가 없기만 바란다.) 바울은 권력의 목적을 하나님의 일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에서 그 예를 찾는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가권력의 운용이 문제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경우에도 바울의 말을 적용하여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예컨대 선을 장려해야 할 국가권력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억압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밝힌 입장을 따라 간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뜻밖에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그의 태도를 결정한다. 이를 국가권력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국가권력의 남용을 어떤 이름으로 미화해도 그 질문은 실체를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보다 작은 권력의 영역에서이기는 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공회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라고 반문한다.(행 4:19) 그렇다면 국가권력을 따르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로마서 13장은 국가의 비정상적 권력행사가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그 말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나님은 국가권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행사가 약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도록 이루어지는 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다시 사무엘상 8장 5절, 20절로 돌아가자. 이 구절들은 국가권력 태동의 동인을 미래에 대한 백성들의 불안과 그에 따른 안전과 안정 욕구에서 찾는다. 그 때문에 자신의 자유와 소유를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 그 불안과 욕구는 지배적이다. 이것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국가권력의 지배와 통제를 기꺼이 용인할 수 있고, 권력남용조차 감수할 수 있고 자신을 종의 상태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고 또한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해도 국가권력의 행사가 정의와 공의와 평화를 지향하도록 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불안과 욕구를 권력의 형태와 힘을 빌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방식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에서 발견된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자못 심각한 질문에 대한 답은 ‘평범하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었다. 이때 이웃이란 내가 아는 범위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이웃은 고통과 외로움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상처를 싸매주는 것이 예수가 말하는 사랑이다.(눅 10:25-37) 이것이 구원과 영생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길이다. 그 길을 가는 자들의 공동체가 예수가 세우기 원하는 공동체다. 그 속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자기 훈련이 이루어진다. 불안을 서로 나눠 짊어지고 타인과 그의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그 공동체에는 권력이 설 자리가 없다. 모든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려 하는 폭압적 권력에 누구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말씀 곧 법의 전부이다. 법을 지킴으로써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에 그렇다.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사무엘상 12장은 바로 이스라엘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때에 지배적 힘이 되고자 하는 권력이 제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권력은 정의와 공의를 지향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상기 | 박사는 한신대(M. Div)와 독일 뮌스터 대학(Th. D)에서 구약을 공부하고 현재는 한신대와 감신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쓴 책으로 『레위기 1』이 있고, 주요관심사는 지혜문학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복음주의(evangelicalism)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권위 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이 정리한 “베빙턴의 사각형”이다. 그는 역사적/신학적/사회적으로 기독교 복음주의를, ‘오직 성경’이라고 종교개혁에서 강조한 성경주의, 18-19세기 영미 복음주의에서 시작된 회심주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한 십자가 중심주의, 사회정의를 위해 참여하는 행동주의라는, 네 개의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각형처럼 그려냈다. 베빙턴의 사각형은 본질적으로 배타적일까? 아니면 포용적일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속죄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배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복음을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속죄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포용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가 배제적인 것인지 포용적인 것인지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의 본질 그 자체를 깊이 탐사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음(福音)은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좋은 소식을 뜻한다. 영어로는 Good News! ‘선한 소식’이라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뉴스에는 알리는 주체가 있고 듣는 객체가 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은 누가 보내는가? 선하신 하나님이다. 누가복음 6장 43-44절에 보면 예수님은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고 하시며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고 하셨다. 그렇기에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하신 분”이 없다고 하셨다. 그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소식이니 그 소식은 좋은 소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다. 또한 그 소식은 좋으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소식이다. 그러한 복음이 과연 본질적으로 배타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에 소개된 영국 신학자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선하신 하나님』(The Good God)을 보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요한1서 4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언한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단독자로서의 유일신이 되실 수는 없다. 사랑이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대상을 전제로 한다. 단일한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사랑한다 해도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영원하지 않기에 하나님도 영원히 사랑으로 존재할 수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 사랑이시려면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추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히 자기를 내어주시면서 사랑과 응답을 나누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로 하나 된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해서도 자기를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그분의 생명과 선하심을 아낌없이 내보내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된다. 독생자를 주시는 사건과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좋은 소식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주신”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믿음 이전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것이 복음의 본질인 것 같지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이 복음의 기원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칼뱅을 키워낸 스승인 마르틴 부서(Martin Bucer)는 제자 칼뱅이 “진리에 기초한 사랑”을 주장한 데 반해 “사랑에 기초한 진리”를 강조했다. 필자는 부서의 “사랑에 기초한 진리”가 “진리에 기초한 사랑”보다 복음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기에 진리를 아는 “믿음”이 가능했음을 계시하고 있다.
종교개혁가 칼뱅은 『기독교강요』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두드러진 신적 속성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의 자기사랑과 대립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이자 풍부한 출처로 묘사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모든 사랑과 선함의 근원이다. 리브스는 성부가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는 “성자를 향한 성부의 영원한 사랑이 성자를 믿는 자들에게도 있게 하고, 성부께서 성자를 즐거워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자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그분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아버지이시지 결코 이슬람에서처럼 책을 한 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목적이고 영생의 내용이다.
서아프리카 잠비아에서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태어나고 자랐던 라민 산네(Lamin Sanneh)는 자신이 코란을 버리고 성경을 택한 계기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과 조우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예일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어 서아프리카 기독교와 이슬람 선교의 최고 권위자로 활동하는 그를 기독교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회복된 교제”로 초대하는 복음이었다.
이처럼 복음은 그 기원과 과정과 목적 모두에 걸쳐서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언제나 활발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이 복음 속에는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 되었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이 계신다. 종교개혁가 루터의 선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교환”(wondrous exchange)을 통해 인간의 나쁜 것을 가져가시고 대신 그분의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본질적으로 배타적일 수 없다. 배제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수 없다. 복음은 생래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을 통해 진리를 세워가는” 포용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실로 하나님은 복음의 과실을 사랑의 쟁반에 담아 주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산타클로스처럼 인간의 삶의 방식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선물을 뿌리는 분은 아니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베풂과 용서』(Free of Charge)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 오히려 복음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도록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게 하셨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과 똑같이 행하며 살도록 계획하셨다. 따라서 좋은 소식을 베풀어주시고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처럼 교회도 좋은 소식을 나누며 선물을 나누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서 아낌없이 선물을 베푸는 선한 자가 되도록 인간의 형상을 빚으셨다. 이제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복음을 받은 교회가 그 복음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선하게 베푸는 그리스도의 몸을 취하게 하신다.
은혜의 신학을 회복하면서 공식적인 정체성으로서의 복음주의가 시작될 수 있게 했던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로 여긴다. 그 선물의 수여자(giver)이신 하나님은 선의 원천이시다. 그분의 선은 인간에게 베풀어지고, 인간은 수령자(receiver)로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음의 선물을 받는다. 여기서 복음은 선물의 내용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교회에게로 다시 세상으로 퍼져가는 동심원(同心圓)을 그린다. 그 파장을 타고 인간은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계속 나누며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확장한다.
시카고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캐더린 태너(Kathryn Tanner)는 복음의 ‘선물수여’(gift-giving)는 신적인 삼위일체를 ‘반영’(reflection)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교계와 신학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용어가 “복음주의”라는 엄연한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복음, 곧 기쁜 소식을 강조하면서 중심에 두는 신앙유형이자 사조인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본질적으로 사랑에 기초한 진리의 고백이자 실천이어야 한다. 복음이 본질적으로 배제적인 것이 아니라 포용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선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속성과 위격과 활동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을 조망해보자.

총체적, 전 세계적, 전 교회적 복음주의 신앙고백서로 잘 알려진 1974년 1차 로잔 대회의 로잔 언약, 1989년 2차 로잔 대회의 마닐라 선언, 2010년 3차 로잔 대회의 케이프타운 서약은 현대 복음주의가 배제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포용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이정표와 같다. 잘 알려진 대로 1974년의 로잔 언약은 미국의 복음전도자 빌리 그래함과 영국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가 주도했다. 로잔 언약에는 서구권과 다수세계를 포괄하면서 보수적인 구원신학과 진보적인 정치신학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시도가 담겨 있다. 당시 나온 핵심 주제가 ‘심층’ 전도였다. 복음 전도는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의 다양한 측면과 구조를 고려하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억누르고 왜곡하고 있다고 보았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저자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가 성경 말씀이 ‘경제적 코이노니아’의 회복과 함께 전해져야 복음이 온전해진다고 강조했던 1977년은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 시기였다. 기독교 복음에서 강조하는 회심의 ‘총체성’과 ‘사회적 제자도’를 직시한 짐 윌리스(Jim Willis)의 목소리도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만약 기독교 복음을 예전처럼 개인구원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복음주의는 제한적 속죄에 걸려 배타적이 될 위험성이 농후해졌다. 반면 복음을 사회구원의 차원까지 확장하면 복음주의는 십자가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보존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린 포용적인 태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 스토트 중심의 입안자들은 복음전도를 여전히 우선하는 입장에 서면서도, 사회참여가 전도의 한 영역으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형태로 로잔 언약을 구성했다. 이것은 진리와 사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식이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의 두 날개와 같다.
로잔 언약은 우리의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이시며 복음도 오직 하나임을 천명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복음 전도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한 것이다. 즉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대화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치러야 하는 ‘제자도의 대가’를 말해준다. 로잔 선언은 “사람과의 화해가 곧바로 하나님과의 화해”라고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1989년 마닐라 선언에서 복음주의는 1974년 1차 대회에 이어 계속해서 종교다원주의, 상대주의, 혼합주의와는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로잔 전통의 복음주의는 종교다원주의와 상대주의와 혼합주의적 태도는 교회가 전해야 할 복음, 즉 구원의 진리 자체가 심각하게 흔들렸거나 대부분 상실되었기에 그 어떤 사랑의 마음이 있다 해도 정작 전해 줄 선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복음주의는 사랑을 우선하지만 진리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학과 유일한 구원의 토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 고백은 복음주의가 전하고자 하는 선물의 내용이다. 선물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이기에 전하는 방식도 은혜와 진리여야 한다. 그래서 십자군 운동이든 혼합주의든 관계없이 그러한 태도는 복음을 전하는 옳은 방식이 될 수 없다. 둘 다 그 안에 은혜도 진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닐라 선언은 “과거 우리가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무지, 거만, 무례 혹은 대적의 태도를 취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우리는 이에 회개한다”라며 잘못을 깊이 시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는 이슬람 등에게 “힘으로 전도하려던 기독교의 태도가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반면에 마닐라 선언은 “이슬람 국가들이 복음에 대해 좀더 개방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또한 복음을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전하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듣는 이가 전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단하게 하겠다”고 서약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닐라 선언은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민감하고자 하며, 그들의 회심을 강요하는 어떤 방법도 거부한다”고 했다. 복음 전도의 획기적/인격적 전환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선언은 기독교를 믿는 신앙에 대한 자유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종교의 자유를 갖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담아냈다.
2차 로잔 대회의 마닐라 선언 뿐 아니라 2010년에 남아공에서 열린 3차 로잔 대회의 케이프타운 서약 또한 모두 세계인권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이 두 선언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신앙의 고백과 신앙의 실천과 신앙의 전도의 자유를 “상호 인정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슬림과 친구가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본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한 영생을 전도하기에 앞서 그들의 삶을 통해 그 믿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반영’(reflection)함이 옳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빠뜨리거나 건너뛰면 안 된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그렇게 하지 못한 과오에 대한 뼈저린 자기성찰이다. 이제 복음주의는 “진리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 종교에 관한 거짓과 왜곡을 조장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대중매체와 정치적 수사를 통해 인종차별적 편견과 증오와 공포를 일으키는 것을 고발하고 이에 저항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또한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가 의미 있는 활동임을 확언”하고, “이러한 대화는 기독교 선교의 일부로서 타당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타인에 대한 경청의 태도와 결합된 모습”이라고 표명했다.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는 복음주의 헌장인 로잔 언약, 마닐라 선언, 케이프타운 서약은 이렇듯 근본주의로도 자유주의로도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존 스토트(John Stott)가 적절하게 평가한 것처럼, 개인구원과 사회참여를 “가위의 양날, 또는 새의 양 날개”로 삼아 지난 40년을 달려왔다. 최근에 뜨거운 논쟁을 한국교회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는 사회적 공공선을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적 대화와 공적 현안을 담아냈다. 이것은 반세기에 걸친 복음주의 로잔 운동의 거대한 물결을 타고 항해하는 건강한 복음주의 정치신학의 최선봉으로 무난히 평가받을 수 있다.

사실 기독교 선교 역사를 보아도 복음은 빵과 함께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복음에는 구원의 특별은총(special grace)만이 담겨 있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상 복음은 창조의 일반은총(common grace)도 함께 담는 것이다. 칼뱅은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복합적 인식을 단 한순간도 분리한 적이 없다. 그는 구원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정의한다. 예수님과 하나 되며 우리는 구원받는 그분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하나님께 이중적 은총(duplex gratia)을 선물로 받는다. 그것이 바로 칭의의 선물(justifying grace)과 성화의 선물(sanctifying grace)이며 특별은총의 구체적 내용이다. 구원의 특별은총은 창조의 일반은총과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중적 은총이다. 그래서 칼뱅은 은혜는 보이지 않는 원리요 선물은 보이는 작용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복음은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선물로 나누는 이중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복음은 필연적으로 진리를 사랑으로 전해야 한다. 일반은총을 통해 특별은총을 베푸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칼뱅도 제네바의 개혁을 교회의 강단에서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조우하는 사회적 약자와 난민들의 삶을 보듬으며 수행했다. 한국교회 선교의 초기역사를 보면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처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교육, 구제, 의료 사업을 동반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라를 잃고 독립을 갈망하는 백성들과 함께 했던 교회였기에 복음은 꾸준히 토착화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일반은총 리스트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 바 있다. “시민의 덕목, 가정적인 느낌, 자연스러운 사랑, 인간적인 덕목의 실천, 공공 의식의 개선, 진실성, 사람들 사이의 상호 신뢰, 그리고 경건히 누룩으로서 사는 삶을 찾아 살피는 일”이다. 이 목록은 『광장에 선 기독교』와 『알라』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함께 추구하기를 바라는 사회적 공동선에 관해 볼프가 제시하는 내용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 볼프가 『알라』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양쪽에 대해 바라는 것은 진실과 관용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정확히 일치한다. 복음이라는 바구니에는 진실과 관용이라는 두 개의 열매가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배타적/폭력적/강제적/일방적 자세를 취하게 되면 그 비관용적 태도로 인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진실은 전해질 도리가 없다. 문화비평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표현은 복음의 메시지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디어에 사랑이 없는데 사랑의 메시지가 어떻게 전해질 수 있겠는가? 미디어가 왜곡된 만큼 메시지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포용적 메시지는 미디어에 반영되어야 한다.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일 수가 없고, 상대를 배려하는 가운데 감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카이퍼는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드러나겠지만 아직 온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래 참는 사랑의 덕목을 키워가야 한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주의는 “신과 장차 올 세상에 관한 것”에 집중하느라 “신과 지금 세상에 관한 것”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살고 있다. 장차 올 세상을 위해 지금 세상에 배타적이 되는 함정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주의는 볼프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비신자들을 구원에 관련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는 방식을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슬람 선교와 관련해서 복음주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고심하던 중, 정승현 박사의 “이슬람을 향한 사도, 사무엘 즈웨머”에 관한 최근 연구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보수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 학생자원운동의 승리주의와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1867-1952)는 1890년 아랍 베이루트에서 이슬람 선교를 시작할 때에는 이슬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현장에서 26년을 무슬림들과 깊이 교제한 후, 그는 강렬한 복음의 열정과 함께 이슬람에 대한 건설적, 포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면서도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접근한 것이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진실과 오류가 공존함을 지적했다. 처음에는 언어로 메시지를 전했지만 나중에는 삶으로 십자가를 전했다. 무슬림을 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점점 친구로 대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는 것이 복음이라 주장했다. “나는 무슬림의 마음에 다가가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임을 확신합니다.” “선교사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방법과 선교사의 열정이 십자가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을 절대로 우리의 적들로 간주하지 마십시다. 대신 그들에게 기독교의 신조가 아니고 십자가와 그 영광의 권능이 가득한 삶으로 우리가 그들의 친구임을 증명하십시다.” 즈웨머는 그리스도인 안에 십자가의 영이 존재하다면, 그것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통해 무슬림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가 탁상에서 내린 신학적 결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내린 영성적 결론이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주의는 결국 교회와 선교단체 같이 눈에 보이는 기관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비신자들에게로 선하신 삼위일체의 사랑의 교제가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즈웨머는 “만약 기독교가 이슬람을 이겨낸다면 그것은 힘이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즈웨머는 60대가 되어 프린스턴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로 초빙받았다. 신학생들은 그에게 무슬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절대로 이슬람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전하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도록 무슬림들을 다정하게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슬람 선교 현장에서 사랑하는 어린 두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고, 친동생의 죽음까지 겪었고 끝내 막내딸까지도 무슬림 선교에 헌신했던, 하나님의 한 위대한 종의 고백이었다. 즈웨머는 처음엔 진리를 위해 선교지로 향했다. 그러나 점차 사랑으로 그 땅을 포용해 갔다. 그것이 진리이신 주님을 전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즈웨머가 걸었던 길은 훗날 라민 산네가 하버드 강좌에서 행한 고백 속에서도 발견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 희생적으로, 사랑을 담아, 확실하고, 열렬하게 -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 가지는 것뿐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