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7일 화요일

오순절 단회적이냐 반복적이냐? 김영재 교수(합동신학원)

오순절 단회적이냐 반복적이냐?


오순절파 교회의 등장과 그 운동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오순절파의 대표적인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가 대교회로 성장하면서 소위 '성령운동'이란 말이 '성령의 은사운동'을 지칭하는 말로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오순절파적 성령 이해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교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순절파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반복되고 사도시대의 은사를 지금의 성도들도 받는다고 하며, 성령세례는 중생과는 별도로 받는 것이며 특히 방언과 치유의 은사 받음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1930년대의 장로교 평양신학교의 성령론 교재를 보면 오순절파의 성령론을 상당히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 교재에 따르면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도 나타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를 보통 성령 받음과 구별하면서, 믿는 자들이 무력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받아야 하는 필수적 은혜라고 강조하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론은 1930년대 초부터 장로교 신학교육에 공헌한 조직신학자 박형룡목사에 의하여 좀더 고전적인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성령론으로 정리되었다. 박형룡 목사의 성령론은 성령의 사역을 자연계를 지탱하는 일반 사역과 죄인들을 구원하고 보존하는 특별 구원 사역으로 이해하며, 특별 구원 사역으로는 성령의 세례, 충만, 내주, 기름부음, 인치심, 보증, 조명, 증언, 중재간구, 인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사죄 및 중생과 동일시하며 성령충만과는 구분하였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인 사건이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특별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주어졌던 것으로 교회 시대에는 중단되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성령 이해는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의 성령론을 따르는 것이면서 동시에 개혁주의 신학에 보편화된 이해였다.


이러한 종래의 이해에 새로운 성령론으로 도전함으로써 파문을 던진 이가 바로 총신대의 차영배 교수이다. 차영배 교수는 1973년 「신학지남」 여름호에 "성령강림을 위한 기도의 타당성을 부인한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의 견해 비평"이란 논문을 실었다. 그의 비평은 카이퍼의 신학적인 이해를 주로 따르던 한국장로교회의 성령 이해에 대한수정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이 논문을 위시하여 그 후 계속 발표된 그의 글들은 주로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세례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차영배 교수는 장로교의 전통적인 이해를 따라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말하면서도 반복성 혹은 계속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령세례를 중생과는 별도로 성도가 경험하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그의 성령 이해와 유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장로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그의 성령 이해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동시대에 활동하였으며, 카이퍼 및 워필드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바빙크(Herman Bavinck)의 신학에 의존한 것이었다.

차영배 교수의 성령 이해는 많은 장로교 신학자들로 하여금 성령론에 관심을 갖게 하고 성령 이해를 재고하도록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공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그의 성령 이해를 좇게 된 것으로 안다. 게다가 영국의 복음주의의 대부(代父)격인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가 역시 성령세례를 중생과는 별도의 제 2경험으로 말하고 있어서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목사들과 신학자들 가운데 그러한 성령 이해를 따르는 이들이 있게 되었다. 고신대학에서는 안영복 교수가 차영배 교수와 비슷한 견지에서성령론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자들은 차영배교수의 성령론에 반대하는 견지를 표명하면서 오순절 성령 사건은 구원의 서정적 측면에서보다는 구원을 위한 단회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합동신학교의 신약교수 박형용 목사는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견지에서, 특히 그의 은사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개핀 교수의 지론을 따라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주장하면서 차영배 교수에 반대한다. 그리고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한 총신대학의 서철원 교수 역시 카이퍼의 성령론에 입각하여 차영배 교수의 성령론을 비판한다. 그 밖에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의 정규남 교수는 차영배 교수가 성령에 관한 성경말씀의 내용을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일면을 보인다고 지적하면서 보다 주석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필자가 맡은 논제에 충실하려면 여러 신학자들이 성령 이해를 두고 논의한 것을 어느 정도 자상하게 소개하고 평가해야 하겠으나, 그것은 서로 어긋나는 견해들을 엉성하게 재구성하는 데 그칠 것이며, 평가를 하거나 비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것에서 못할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필자는 성령 이해를 두고 논의되고있는 문제점들을 필자 나름의 이해를 피력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이해에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성령세례와 물세례

신약성경에서 '성령세례'라는 말씀은 주로 요한의 세례와 대조하여 쓰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성령세례'라고 할 때 그것은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성령 세례' 즉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이라는 말의 구성을 보면 '세례'는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일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고 '성령'은 세례의 성격을 규정해 주는 말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논의하자면 오순절 시간에서부터 시작하기보다는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세례의 뜻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해야 한다. 요한은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로서,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알리고(요3:28), 천국이 임한다고 외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면서 요한은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 1:33∼34).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도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고넬료의 가정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실을 보고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하면서 세례를 베푼다(행 10:47). 또한 베드로가 이 사실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고하면서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말한다(행 11:16). 이 문장에서 주격(主格)이 되고 있는 요한과 제자들이 대구(對句)가 아니고 말씀하시는 예수께서 주격임을 유의해야 한다. '너희'이하의 수동형을 능동형으로 고쳐서 읽으면,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리라"는 말씀이 된다. 이 말씀에서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우리는 재삼 확인하게 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에서 '성령'은 문법적으로 전치사 εν+3격(dative) 명사로 되어 있어서 물과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성령이 세례를 위한 단순한 수단이나 재료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문법적으로는 '성령'이 수단의 3격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주격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주격이시지만, 성령은 단순히 수단이 아니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받는 세례를 유효케 하시는, 즉 우리의 죄를 씻기시는 주격이시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세례 주시도록, 즉 우리를 씻기시도록 하신다"는 말씀임을 유의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실 성령세례를 언급한 것은 자기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를 전제로 하고 준다는 뜻이었다.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였다. 메시야의 오심과 더불어 임하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천국 백성이 되려면,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푼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면서 요한이 예고한 대로 성령으로써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요한과 마찬가지로 물로써 세례를 주신 것이었다(요3:21). 물론 요한복음의 말씀과 같이 예수께서는 손수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주도록 하셨다(요4:1 ∼2). 예수께서는 직접 물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주었음을 강조하는 복음서 저자의 설명은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씀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은 제자들이 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말씀으로 보인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앞으로도 제자들이 할 일이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백성들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이 때'이름으로'(ειζ το ονομα)는 방향을 말하는 전치사에 따르는 4격이다. 믿는 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도록 하는 세례, 즉 성삼위 하나님께로 연합하는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하시면서 요한과 마찬가지로 물로만 세례를 베풀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아직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때가 되지 못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를 주실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서였다.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게 하는 성령의 세례는 예수에서 십자가에 달려 속죄제물로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구속사업을 완성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이는 그의 죽으심과 함께 죽는 참된 의미의 세례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롬6:3∼4). 죄사함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으로 죄사함을 주신다. 그러나 그러한 죄사함을 위하여 구약시대의 희생 제물의 제도는 결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전제로 한 것이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어서 비로소 죄를 사하시는 참세례, 즉 성령세례가 있게 되었다는 말은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있은 후에 그 사건과 연결되어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사함과 구원을 주시려고 마련한 터 위에 이를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어서 비로소 성립된다. 세례의 본래적인 효능을 따라 회개하고 믿는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이 곧 성령세례이다.

물로 받는 세례는,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죄씻음을 받고 정결함을 받아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성령세례의 징표이다. 그것은 마치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징표인 것과 같다. 성령세례는 물세례가 상징하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게 하는 성령의 일하심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죄를 고백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씻기시므로 진정으로 정함을 받고 거듭난 새사람이 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요3:5)"하는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아 거듭나지 않으면"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또한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가리킨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물세례와 성령세례 가 대등한 위치의 것이므로 별도로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물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말도 아니다. 이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아 거듭나야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로 알지 못하느뇨"(로마서6:3)하는 말씀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씀인데,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그의 살으심과 함께 사는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물세례는 다만 참세례인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징표이다.


그러므로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대칭이 되는 두 개의 독립된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이다. 하나라는 말은 물세례가 곧 성령세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성령세례가 참세례 이고 물세례는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징표라는 뜻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물세례는 성령세례가 있어서 비로소 의미가 있는 의식(儀式)이며, 은혜주시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인치심의 표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임하심을 선포하는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뒤에 오실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었다.

'성령세례'는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독립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근거로 일하시며, 그것을 계승하여 일하심을 함축한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는 개념이다. 성령의 사역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

우리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죄의 종노릇하던 삶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함을 얻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생활을 시작한다.



2.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설명

성령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구속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예수의 구속사역이 '단회적'(εφαπαΣ,once for all)이듯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도 '단회적'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단회적'이라고 할 경우, 비록 그 말이 성령의 오심 자체보다는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심으로 사도들에게 있게 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며,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은 지양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죽으심으로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단회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표현이다. 그것은 성경에도 있는 말씀이다(히 10:10).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시어 역사세계에 강림하신 성육신의 사건과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사건이 구속사건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여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역시 '단회적'이란 말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오심을 다 같이 '강림'이라는 같은 말로 표현하지만, 그 내용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하셔서, 나서죽기까지 한 인생의 여정을 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으로서 사신 반면에, 성령께서는 역사세계를 초월함과 동시에 내재하시는 영으로 계시고 일하시면서 강림하신다. 그리스도의 성육(成肉, Incarnation)을 위한 오심과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를 위한 오심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 안에 역사적인 존재로 사시면서 고난을 당하시곤 단 한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셨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에 이루신 구속 사역의 효능이 성도들에게 계속 유효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사건은 믿음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속사건을 성도로 하여금 늘 믿도록 역사 하시는 주관적인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오고 오는 세대의 사람들을 감화시키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씻기시며 의롭다고 하시고, 그들을 성화(聖化)시키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늘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초월하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오심과 그 계속적인 사역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수 있는 '단회적'이란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모든 은사나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모두가 단 한번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도들이 말씀을 깨닫고 전파하는 은사는 설교자들에게도 주시는 은사이며, 사도의 설교를 들은 백성들이 회개하게 된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는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 사건에는 말씀을 전하고 듣는 사람이 회개하는 역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이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역사(役事)이며 사건인데,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을 '단회적'이라고 말하면, 이를 다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은 불가하다.


'단회적'이란 개념은 성령의 강림이 오순절에 단 한번 있었으며, 그 이후의 성령의 역사는 내재하시는 성령의 역사일 뿐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아니 그런 이해를 '단회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단회적'이란 말로 성령의 강림하심까지 제한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단회적'이란 말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주장에 반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단회적'이란 말은 '반복적'이란 개념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므로, 결국 '반복적'이 란 개념을 유발한다.'단회적'이란 말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경우, 사람들은 곧 '반복적'이라는 개념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동일하지 않고 변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개입하시는 일을 두고 '반복'이란 말을 적용하여 서술하는 것은 잘못이다.'반복'이란 이미 행한 일이나 행동을 처음과 같이 다시 되풀이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결국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오해와 잘못된 주장을 낳게 한다. '반복적'이란 말 대신에 '계속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 개념은 별로 다를 바 없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비로소 처음으로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오신 것으로 혹은 처음으로 인류에게 오신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만물을 초월하심과 동시에 세계 안에 내재하시며 만물을 운행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영이시므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혹은 백성들 가운데 계시면서 동시에 위로부터 오시는 영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내주'는 영적인 내주이다. '내주'를 공간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위로부터 오신다는 것을 마치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오듯이 이 세상에 진입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령의 강림하심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특정한 사람에게, 혹은 사람의 무리에게 오시는 강림하심이다.


성경에는 성령강림에 대한 기술이 여러 곳에 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서 말씀을 전하였을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란"(행10:43∼44) 사실을 보도한다. 베드로는 여기서 경험한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보고하면서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던 때와 같이 임하셨다고 말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 또한 바울이 에베소에서 경험한 사실을 두고도 성경은 역시 그와 같이 말씀한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행 19:6). 신약에 나타나 있는 대로만 하더라도, 성령께서는 오순절 이전에도 임하셨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다고 말씀한다(마3:16).천사가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에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라고 표현되고 있다(눅 1:35).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나심을 전후하여 여러 시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일하심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구약 민수기 11장에는 모세와 70인의 장로에게 하나님의 신이, 즉 성령께서 임하신 것으로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민 11 :25). 사사기에는 옷니엘에게와(삿3:10) 삼손에게(삿14:19), 사무엘상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하심을 말씀한다.


성령께서는 세계를 초월하심과 동시에 세계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필요에 따라, 하시고자 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보내심을 받아 언제든지 신자들에게 임하신다. 성령께서 "언제든지, 임의로 혹은 자의로" 오신다고 하여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한 사건과 그 전에 혹은 그 이후에 신자들에게 임하신 사건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은 여러 면에서 특이(unique)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임하심 자체가 특이한 것이라기 보다는, 성령께서 임하신 역사적인 시점이 다르고 성령을 맞이한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에, 오순절에 성령께서 행하신 사역은 특이하고 유일한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보혜사로서 단번에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효능이 계속 발효되도록 교회와 성도들 각자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보존하시는 일을 위하여 오시는 성령의 임하심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서 구원이 만백성에 미치게 되는 구원 역사의 한 전기(轉機)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보혜사 되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교회의 초석이 되는 사도들에게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게 하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터가 되어야 하는 사도들로 하여금 사도의 직능을 다하도록 역사 하셨다. 그러므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의 위에 임하니"라는 등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임하심에 동반된 현상에 대한 묘사도 특이하며, 사도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 역시 특이하다. 특히 방언의 은사가 특이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사도들에게 주신 특이한, 상징적인 의미를 띤 현상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발이 오순절 강림에서부터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부터인가를 묻고 따지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비로소 교회가 서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세우셨을 뿐 아니라 신자들의 모음이 이미 구성되고 있었던 사실을 보아서 교회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논의는 전도소와 교회, 조직 교회와 미조직 교회를 두고 교회설립 일자를 따지는 것과 비슷한 논의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120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였으며 사도들은 사도의 조직을 재정비한 것이므로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이미 형성된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모임을 이루고 있는 이 무리에게 강림하신 것이다.

여하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바 되었으며,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출발하게 된 것이었다. 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무리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설교하게 되었으며,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회는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3. 오순절 성령강림과 사도들의 은사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사도들처럼 방언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도들이 방언한 것은 고린도교회의 일부성도들이 방언한 경우와는 아주 다르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누구나가다 방언을 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했다는 말씀은 없다. 구스 내시는 빌립에게서 자기가 읽고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지체 없이 세례를 받았다(행 8:26∼39).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는 말씀이 있고 그가 성령에 충만했다는 말씀은 거듭 발견할 수 있으나 방언 했다는 말씀은 없다(행 6:78∼7:60). 그러므로 방언이 사도시대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있었던 일반적인 은사는 전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아 방언을 했다고 말씀하는 두어 사례를 주의 깊게 검토해보면, 방언은 필요에 따라 주신 성령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때문이었다(행 10:44∼46). 성령께서는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고넬료의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하신 것이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같이 음식을 나눈 사실을 가지고 비평하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고넬료 집안사람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아 성령께서 그들에게 세례 주심을 알 수 있었다고 보고한다(행11:15∼18). 그 보고를 듣는 사람들은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방언은 이러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에베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이었다. 성령과 성령의 세례에 대하여서는 무지한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임하심의 현상을 알 수 있도록 표적을 주신 것이었다(행19:1 ∼7). 사도행전 8장에는 유대인들과 종교적인 전통을 달리하면서 오랫동안 대립 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았으나 성령을 받지 못했었는데, 사도들이 가서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여기서 방언을 했다는 말씀은 없으나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성령의 임하심의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시고 구원이 이르렀음을 보여주신 것이었다(행 8:4∼19).

비슷한 사례는 구약에서도 발견된다. 위에서 이미 인용한 모세와70인 장로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70인 장로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예언을 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신이 모세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임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었다. 사울이 일시적으로 예언하게 된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성령은 한 성령이시지만 사람을 따라 맡겨주시는 직분과 은사는 각각 다르다(고전 12:4∼7). 그것은 개교회를 구성하는 지체와 혹은 보편적인 교회나 교회의 역사를 보아서도 역시 그러하다. 성령께서는 시대와 상황을 따라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도록 각기 필요하고 알맞는 은사를 주신다. 그러므로 방언만 하더라도 역시 달리 주셨음을 신약성경 안에서도 발견한다.


사도들이 받은 방언과 일부 고린도의 성도들이 받은 방언이 같지 않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방언은 남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그것은 자신의 신앙에 도움은 되었을지라도 남에게는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이었다. 그와 반면에 사도들의 방언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에서 온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남을 위한 방언이었다. 사도들에게 있었던 방언은 성령이 최초로 교회에 임하심을 확인케 하는 현상임과 동시에 복음증거의 수단이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성령께서는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확신하게 하시고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오순절에 여러 나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게 하신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오심에 대한 복음을 선포할 사도들에게 방언을 주심은 그리스도의 교회 성격과 목적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전파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주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만백성을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만백성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성경은 사도들이 오순절 이후에도 계속 방언을 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사도들의 방언은 교회가 출발할 즈음에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유일하게, 일시적으로 주신 은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과 같은 은사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사도적인 현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계신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일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방언을 주시고 병고침을 주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능력과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사도와 같이 될 수 있다든가 사도들이 받았던 능력과 기사가 오늘에도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종들에게 임하신 같은 성령이시고 한 성령이지만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고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동일하지 않으며, 그들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이 다르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그들의 사명이 다르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사도가 해야할 일을 한 것이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들(마 16:18; 엡 2:20)에게 임하셔는 그들의 직분을 잘 수행하도록 능력을 주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고, 다른 세대의 직분자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특이한 은사를 주신 것이었다.

사도들의 병고치는 능력만 해도 그러하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가운데서 서로 죄를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야고보서는 말씀한다(약5:13∼18).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킨 일은 야고보서에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나타난것과 같이 권위 있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병고치는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와는 달리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능력이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일은 메시야적 사역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는 일과 나란히 병 고치시는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복음전파로 인한 이방인의 회개와 교회의 설립과 성장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행하심은 그의 교훈과 함께 전도자가 전해야 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고침을 받는일이 일어남을 인식하고 있고, 병고치는 은사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병고치는 능력을 과시하거나 그것을 주된 관심사로 삼는 은사운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복음운동의 본 궤도를 벗어난 운동이다. 성경은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단순히 믿어야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기적을 희한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자세는 불신기적인 태도라고 말씀한다.


성령께서 예루살렘의 일반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사도들이 행하는 능력과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하셨다. 백성들은 그 일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행 2:42 이하).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였을 때, 성령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굳어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거절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시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쓰고, 서로 물건을 나누어 쓰고, 재산을 팔아 서로 돕고,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등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였다(행 2:37∼47).


성령이 임하심으로 사도들이 일차적으로 한일은 복음 전파였다.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모든 전도자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은사이다. 교회의 모든 전도자는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의 증언, 기록된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도들과는 다르다. 사도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와 그 후 교회의 사역자들이 받는 성령의 은사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동반된 역사의 현상을 두고만 분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 있는 여러 말씀에서 사도직의 특이성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 때 사도에게 주신 바와 같이 능력을 주시고 또한 복음의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사람들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나님을 섬겨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받도록 해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4. 고린도 교회 방언은 예언과는 다르다

사도시대의 교회에는 흔히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성령의 은사였으나 그 후대의 교회에는 종결된 것으로 말하는 주장이 있다. 방언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나타내는 은사로서 예언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은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의 방언과 사도들이 한 방언의 다른점을 지적하면서도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하면서 방언의 은사를 '오순절 성령사건은 단회적'이라는 도그마에 포함시켜 방언의 은사도 단회적인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볼 수 있는 방언과 예언에 대한 말씀을 검토하면 방언은 같은 범주에 속하는 은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방언과 예언을 같은 범주에 속한 은사로 보는 견해는 바울이 방언에 대한 논의에서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견해이다. 마치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무슨 정경성(政經性)의 가치라도 지니는 것처럼 이해하게 만드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나 주장은 고린도교회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방언의 은사가 현재에도 있다고 믿는사람이나 실제로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방언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방언을 경험한사람들은 그들의 방언이 바로 성경에 언급되고 있으므로 그것을 아주 중요한 은사로 생각하는데, 방언의 단회성을 말하여 반대하는 주장은 오히려 방언하는 사람들의 신념을 더 굳혀줄 뿐이다. 방언하는 사람이나 방언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나 양편이 다 방언의 계시성(啓示性)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이다.


먼저 우리는 사도시대의 초대 교회에서 방언하는 일이 흔히 있었던 일처럼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님을 인식해야 하겠다. 바울의 여러 서신 가운데 방언의 은사나 병고침의 은사에 대한 언급은 고린도전서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서신에서도 성령에 관하여, 그리고 은사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지만 방언의 은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므로 방언이 초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화된 현상은 아니고 고린도교회에만 있었던 특수한 현상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오순절에 사도들이 받은 방언과 다름은 물론이요 고넬료의 가정 혹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있었던 방언들과는 다른것이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도들이 받은 방언은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역할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며, 또한 그 진리를 선포하게 하시는 것임에 반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방언은 자기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며 남이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에게만 다소 유익이 되는 방언(고전 14:1)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른 것이었다.


고넬료의 가정과 에베소인들이 한 방언을 사도들의 방언과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같은 방언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언급이 없다. 설령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말과는 내용과 의미가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제 전도를 받아 성령의 임하심으로 말하게 된 사람들의 방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함으로써 화답하는 방언이었지 결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적인 방언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방언한 일이나 고넬료의 가정과 에베소인들이 방언한 일은 성령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그들에게 임하심을 보여주시는 일시적인 현상이었음에 반하여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수시로 사용하는 지속적인 은사로 언급되고 있다(고전 12:4∼11, 28∼31,14장).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시는 은사로서의 방언은 사도들이 한 방언과는 여러 면으로 다른 것임을 인식하면서, 성경이 방언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고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방언은 기독교 아닌 이방 종교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며 교회 역사에서도 방언이나 그와 같은 은사를 추구한 사람들이 거의 다 기독교의 진리에서 탈선하는 길을 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영을 분별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상고해야 한다. 성경이 방언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상고하는 일이다. 그 본문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각 지체가 되는 성도에게 교회를 섬기며,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각기 다른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 가 받은 은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남이 받은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타이른다. 그리고 무슨 은사를 받았든지 간에 먼저 그 어떤 것보다 큰 은사인 사랑을 가져야 하므로 그것을 갖도록 사모하라고 말씀한다. 믿음, 소망과 더불어 사랑은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말씀한다. 은사는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므로 각자는 사랑을 가지고 겸손한 가운데 자기가 받은 은사가 교회와 형제들을 위하여 무슨 유익을 주는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바울은 방언을 은사라고 인정하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의 덕을 위하여 장려할만한 은사가 못됨을 말씀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말씀한다. 성경에서는 방언 은사의 유익한 점은 하나님과 자신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므로 혹시 자기에게는 유익이 되어도 교회에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덕이 되지 못하는 것임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할 경우, 설사 기도 가운데 축복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여 아멘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고전14:15∼17).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으로서 어떤 신비적인 힘에 사로잡힌 것임을 알게 하므로 믿지 않는 자가 희한한 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므로 결국은 믿지 않는 자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기보다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언을 하는 것이 남에게 유익이 되고 덕을 세운다고 말씀한다(고전 14:22∼25). 방언을 하려면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을 하게 하여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잠하여 자신에게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한다(고전 14:28). 통역을 할 경우 적어도 예언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고전 14:4∼13).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한다(고전 14:4∼5). "너희가 다 방언하기를 원한다. 그러나"라고 한 말씀은 방언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목회적인 배려에서 하는 말씀이지 방언을 장려하는 말씀은 아닌 것이 14장에 계속하는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방언보다는 예언하는 것이 낫다는 뜻의 말씀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은사로 말하고 있으므로 오늘날도 방언의 은사가 있을 수 있다고 할 경우, 그러면 예언의 은사도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럴 경우 예언을 빙자하여 교회를 어지럽히거나 새로운 계시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일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방언의 성격을 성경말씀에서 규명해야 하듯이, 예언의 성격도 규명해야 한다. 예언은 흔히 이해하듯이 장래 일을 미리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아가보의 예언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행11:28,21:11). 그것은 예언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예언은 백성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하여금 대언하게 하신 모든 말씀이었다. 그러나 모세와 같이한 70인의 장로에게나 사울에게 성령이 임할 때 그들이 일시적으로 하게 된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내용에 대한언급은 없으므로 그저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심을 나타내 보여 주신 징표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설사 그들이 예언한 말이 어떤 내용을 담은 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의 예언, 즉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는 구별되어야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예언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내용의 말씀이었다(고전 14:3). 그리고 그것은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어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는 말씀이었다(고전 14:24). 말하자면, 고린도교회의 예언은 신자들의 구원과 경건 생활을 위하여 주신 말씀이었다. 신약 성경이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대에, 또 기록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마다 기록된 말씀이 순환되지않고 있던 그러한 시대에, 예언은 기록된 말씀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가리켜 사도라고 하였으며, 복음 전도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선지자(혹은 예언자)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칭호는 2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교회가 사도들에 의하여 기록된 말씀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 말씀에 근거하여 설교하고 권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는 바람에'선지자'라는 직분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게 된 때문으로 이해한다. 아닌게 아니라 교회 역사에서 사도들에 의하여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두고,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무슨 계시를 받았다거나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다 거짓 선지자임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거짓 선지자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예언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설교하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예언과 방언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탁하셔서 당신의 뜻을 알리시는 내용을 담은 말(message)이었음에 반하여, 방언은 혼자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단으로서 영적인 신비를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결코 계시의 내용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한다. 이것이 예언과 방언의 큰 차이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단으로서의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예언의 은사는 성경말씀이 있으므로 종결된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예언의 은사는 사도시대 이후에 와서는 곧 기록된 성경말씀을 깨닫고 설교하며 가르치는 은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방언을 통역하는 경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것인데, 방언의 통역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축복하는 기도자의 말, 즉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의 말 이상은 아니다. 방언을 가지고 엉뚱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고 하고, 그러기 위하여 통역한다고 하면,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도 없었던 방언이요 통역이다. 그러한 방언과 통역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방언이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악령의 희롱일 뿐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경험한 사람은, 그리고 자기가 경험한 방언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으로 확신하는 사람은 기도할 때 방언이 나오면 고린도전서에 있는 말씀대로 조용히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 방언의 은사는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는 직접적으로 유익이 없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하여 교회 앞에서는 잠잠해야 하며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도움이 되는 보다 나은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5.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이 있어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고 죄씻음과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지칭한 반면에, 성령충만은 성령께서 임하셔서 회개와 죄씻음의 측면과는 또다른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한 성령의 임재하심이며 역사이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그를 온전히 붙드셔서 예언을 하거나 큰 사역을 하도록 하는 성령의 크신 역사이다.

신약성경에서 '성령 충만'이란 말은 주로 누가가 쓰고 있는데, 복음서에 의하면 '성령세례'는 멀지 않은 장래에 있을 미래적인 약속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닫고 예언하며 찬양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성령께서 같이하시는 것이며, 그들을 온전히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눅 1:15)고 말씀한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인사를 하자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으며 그때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에게 인사하며 그녀를 축복하였다(눅 1:14)고 말씀한다. 요한이 난 이후 부친 사가랴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 예언했으며(눅 1:67), 누가복음 4장 1절에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고 돌아오셔서는 광야로 성령에게 이끌리어 가셨다(눅4:1).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충만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온전히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상태임을 말씀한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의 강림사건에 대한 서술에서 성령세례라는 말씀은 없고 대신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말씀한다.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임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를 받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였다(행 2:4).사도들은 또한 복음사역을 돕도록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도록 하였다(행 6:3). 그 가운데서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고,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고 말씀한다(행 6:5,8, 7:55). 사도행전 11장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소개한다(행 11:24). 또한 사도행전 13장에서는 바울이라 하는 사울이 선교를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쳐다보면서 경고한다(행 13:9).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하면서 핍박을 받으나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말씀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이들이 예수님을 비롯하여 예언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 들이었음을 볼 수 있는데,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성도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고한다. 즉 세상의 나쁜 습관을 좇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권고한다(엡 5:18∼21).

성령세례는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죄씻음을 주는 성령의 역사를 일컬음에 반하여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복음의 사역을 하도록 하거나 혹은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도록 하는 성령의 임재하심이요 주장하심이다.



6. 구원의 서정으로서의 성령세례와 오순절 성령세례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또한 베드로의 설교에서 구약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하였음을 말씀하는 바와 같이 성령의 부어 주심이었다.

성령세례가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중생하게하는 성령의 역사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었으며(마 16:16이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들이 이미 정결함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므로, 죄사함을 받고 중생하는 것과는 별도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가 회개하고 믿어 중생함을 받는 일과는 별도로 성령세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로 오순절파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는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2)"하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제자들이 이미 성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성령이 감동하심을 받는 것과 성령세례는 별개의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면 성령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이 시점에서 성령을 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숨을 내쉬신 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시는 상징적인 행위 (prophetical symbolism)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비록 부활하셔서 영광의 몸이 되셨으나 아직 지상에 계시면서 직접 성령을 주시는 일을 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며(요 16:7),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지칭하시며,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요 14:16, 26)을 보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 서방교회의 고백이지만, 그것은 영원 세계의 신비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숨을 쉬시는 가시적인 행위를 두고 성자께서 즉석에서 성령을 주신 행위로 볼 수는 없다.




여하튼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일은 오순절 이전에도 있었다. 믿음도 있었고 신앙고백도 있었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성경에서 요한의 물세례에 대조하여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성령세례는 물세례가 상징하는 참세례로 이해해야 한다. 하니님께서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죄씻음을 받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언약의 표로 물세례를 제정하셨다. 요한의 물세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므로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요한이 베푸는 물세례를 받으셨다. 요한은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참 세례 주실 분이신 예수께서는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물세례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받으셨다. 세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에 들어갈 모든 신약시대의 백성을 위하여 제정하신 언약이요 제도이다(요1:33∼34). 그런데 이 물세례는 참세례인 성령세례를 전제하고 상징하는 것이며,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죄사함의 세례가 발효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제도가 확립되고 시행되는 데에는 순서가 있고 절차가 있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안에서 진행하신 모든 경륜이 그렇게 성경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논할 때처럼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두고 한 측면에서만 논리를 전개해서는 안된다. 사도들이 이미 오순절 이전에 성령의 감동함을 받고 신앙고백도 한 터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질서에 따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위시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구약에서 할례는 난 지 8일 되는 갓난아이가 개별적으로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할례의 제도를 세우실 때, 다시 말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처음 할례를 받을 때, 그를 비롯하여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모든 권속이 다함께 할례를 받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이해하면 된다.

고넬료의 가정에서는 물세례를 받기 이전에, 그리고 에베소 사람들의 경우는 물세례를 받은지 오랜 후에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았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이러한 사례에서도 성령의 부어주심이 모두 물세례와 관련해서 일어났음을 말씀한다. 이러한 사례는 누구든지 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참세례인 성령세례를 받아야 함을 시사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받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전혀 별도로 받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한 물음이다.

물세례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시적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는 의식이요 제도이며, 성령세례는 불가시적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役事)이므로, 물세례를 받듯이 성령세례를 반드시 가시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참된 교회의 지체가 되기 위하여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죄씻음을 받고 정결함을 받아야 하며, 거듭난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며 말씀을 좇아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사실이다.


성령세례는 개개인이 믿고 회개하게 하며 죄씻음을 얻어 새사람이 되게 하는,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성령의 일하심인데, 성령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차원에서보다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각성과 더불어 새 출발을 하게 하신다. 오순절에 120명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그밖에 무리들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교회의지체인 각자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역사 하시는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하여, 그것을 계기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어 새사람이 되고 새사람으로서 삶을 시작한다. 오순절을 계기로 제자들은 모두 의심하고 비겁한 가운데 두려워하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들이 되었다.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는 새언약의 백성이 된 것이었다. 또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오순절에 사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이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고넬료의 가정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에베소인들이 다 사도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전파와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간증을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과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한 사도들의 사역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역사적으로 성장하고 확산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로 직접 만난 바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와"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간증과 선포를 통하여 중생하게 된 것이었다. 바울은 결코 별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함으로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되고 사도가 된 것이었다. 에베소사람들이 요한의 물세례는 이미 받았으나 성령세례는 바울을 통하여 받은 사건 역시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 한국 교회도 선교를 받아 교회가 조직되어 성장할무렵에 성령의 임하심으로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성령충만함을 받아 살아있는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1907년을 전후로 하여 일어난 부흥운동의 역사를 가리켜 선교사들은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칭하는가 하면 '한국 교회의 중생'이라고도 표현하였다. 이길함(Graham Lee)선교사는 장대현교회의 통회하는 부흥의 역사를 가리켜 '성령세례'라고 하였다. 그가 어떤 신학적인 견지에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나, 그 말은 한국 교회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단계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영적으로 새로워져 생동성 있게 성장하는 교회로 출발하게 하신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실을 가리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말(고전10:2)과 같은 의미의 말이었다. 바울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완전히 놓여나 이제는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을 가리켜한 말씀이다.


성령의 강림과 역사하심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선물이었다. 한국 교회의 대부흥을 가리켜 선교사가 '성령세례'라고 칭했다고 하여 개개인이 이미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시인하고 고백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화의 삶을 힘씀에도 불구하고 무슨 징표를 동반하는 성령세례를 새삼스럽게 또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로 비약되어서는 안된다. 변화를 주시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변화된 삶을 살도록 성령의 역사를 힘입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성례전의 세례, 즉 물세례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구원론적인 견지에서보다는 교회론적인 견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물세례가 가리키는 참 세례인 성령세례는 구원론적으로 당위성을 가진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개개인을 중생하게 하는 역사이며, 개개인이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게 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아 성령을 좇아 살고 그 일을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하고 간구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신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므로 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간구 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만일 세례를 받은 개인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띤 교회 공동체가 구속의 은혜도 모르고 성령에 관하여 무지하거나 성령을 존중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살지 않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성령세례를 받아 거듭나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설교되어야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결코 성령세례가 제2차의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경륜에 속한다. 성령의 임하심이 우리의 소원이나 기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측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우리사람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성령께서 임하심을 소원하고 기다리면서 기도해야 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서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9∼13)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며 마땅히 해야하는 일임을 시사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도 역시 같은 말씀이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분부하신 대로 약속하신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혀 힘쓰는 가운데 오순절성령강림을 맞이하였다.

경건주의 이후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이나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기도할 마음과 열심을 부어주셔서 성령의 부어주심을 간구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신다. 성령을 존중하고 그의 오심을 고대하고 간구하는 사람이나 공동체에게 성령 부어주심이 있었음을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맺는 말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의 신자들에게 오심은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이면서 동시에 구약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였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요한으로부터 비롯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물세례의 효능이 참으로 발생하도록 하는 성령세례를 위한 성령의 오심이었다. 성령께서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살아있는 교회로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된 교회를 위하여 언제든지 임하시며 내주 하시는 성령의 임하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도적인 직분과 은사가 특이하고 유일한 것임을 간과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도적인 능력을 행한다고 자처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나타나게 되며, 사람들은 쉽게 미혹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성령세례는 물세례가 상징하는 참세례이며, 성도로 하여금 믿고 회개하며 중생하게 하시는 성령의 부어주심이요 역사임을 이해하지 않고 이것과는 별도로 체험해야하는 소위 제2축복인 것으로 말하는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자들로 하여금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경건생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독교적인 종교생활과 윤리생활에 힘쓰기보다는 방언, 치유등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게 만든다. 신비적인 체험, 즉 초자연적인 능력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가시화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얻는다는 가르침은 기복신앙을 조장하여 결국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인간의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에 대한 경계심에서 다른 극단을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일어난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서 상호 관련된 사건이라고 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지칭할 때처럼 '단회적'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단회적'이라고 할 경우, 그러한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에 언제든지 임하시고 내주 하시며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령이여 강림하사…"하는 찬송을 주저하면서 부르게 만든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적인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 행하심이 오늘날에도 나타날수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하는 일에 대체로 소극적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그러한 교회는 이신론자(理神論者)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 하심에 대한 신앙이 실제로 희박한 것을 본다.

미국 장로교회의 경우, 18, 19세기에 있었던 부흥운동에 대하여 다른 교파에서와는 달리 소극적인 견해를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많아서 교회가 일시적인 분열(1741 ∼1758)을 경험하 기도하였다. 미국 장로교회의 교세가 침례교나 감리교의 교세보다 훨씬 떨어지게 된 것이 우연한 사실이 아님을 고려해야 한다. 장로교회 내에서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교회의수는 다른 교파 교회에 비하여 훨씬 적을 뿐 아니라 보수적인 장로교회 혹은 개혁파교회의 성장이 다른 복음주의적인 교회에 비하면 정체적이 라는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개신교의 선교가 성령의 주관적인 역사를 강조한 18세기의 경건주의자들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며, 19세기의 세계 선교는 경건주의적인 부흥운동의 열매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은 이들이었으며, 한국의 복음주의 적인 교회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신학적 전통을 표방하는 한국 장로교회 역시 부흥운동을 경험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 온 사실을 인식한다.


17세기 중엽에 나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 조항이 빠졌었다. 객관적인 진리를 강조하는 일에 너무 관심을 쏟은 나머지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1903년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성령에 대한조항과 선교에 대한조항을 첨가하였으며, 예정교리가 선교에 저해되는 교리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객관주의에 치우친 신학은 주관주의에 치우친 신학과 마찬가지로 결함이 있음을 인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세례에 관하여서도, 그것이 성령론의 실마리가 되고 있으므로, 균형 잡힌 신학적인 이해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주(註)-----------------------------------

1. 조용기, 「성령론」(영산출판사, 1971), 「순복음의 진리상」(영산출판사, 1979), 「5중복음과 삼박자축복」 (영산출판사, 1983);국제신학연구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서울서적, 1993).

2. 1930년대에 평양신학교에서는 중국인 가옥명의 「성령론」을 정재면 목사가 번역하고 당시의 조직신학 교수 이눌서(W. D. Reynolds)가 감수하여 그의 서문과 함께 1931년에 출판한 것을 교재로 사용하였다(김명혁,"한국교회와 성령론," 정암신학강좌 미출판 논문).

3. 차영배, 「성령론」 (경향문화사, 1987년)은 주로 「신학지남」에 실렸던 논문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4. 차영배 교수는 그의 논문, "오순절 성령운동과 개혁신학의 원리"(「신학지남」 1981년 여름호)에서 "오순절운동이 객관적 원리에 의존하는 내적 신앙보다는 그 신앙의 결과로 얻어지는 은사에 치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객관적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이 결핍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성령의 세례나 신유에 관한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귀중하게 받아들이고 바른 해석을 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차영배, 「성령론」, 216쪽).

5. D. M. 로이드 존스/정원태 역, 「성령세례」,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년.

6. 안영복은 그의 글, "성령론 이해의 문제점에 관한 성격적 고찰, " 「고려신학보」 제 13집 (1987년 5월, 87∼101)에서 1) 중생과 성령세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2)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하나의 사건으로 그 시초가 성령세례요, 그 결과가 성령충만이라는 것이며, 3) 능력을 최초로 힘입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하고 그결과 계속 반복되는 동일현상을 성령충만 이라고 보며, 4)성령의 신자 안에 내주(來住)하심과 성령충만을 성령께서 신자의 의식의 배후인 존재의 어떤 숨겨진 성소에 거하고 있는 것과 자신이 거하는 집을 전부 소유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5)오순절 성령 강림은 대표적 원리가 적용될 수 없는 사건으로 본다(같은 글, 100쪽).

7. 그의 신학교재 「교회와 성령」 (합동신학교, 1993년) 참조.

8. 서철원, 「성령의 사역」, 한국 로고스연구원, 1990년, 참조

9. 정규남, "오순절과 현대교회에 있어서의 성령역사",「성경과 신학」, 1986년 5월, 259-279쪽.

10. 1993년 11월 8일에 있은 "정암신학 강좌"에서 합동신학교의 김명혁 교수는 한국교회의 성령론을 일별하면서 여러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견해를 충실히 소개하였다.

11. 필자의 이하의 논의는 「신학정론」 제 11집 2호, 1993년 11월호에 쓴 글,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세례에 대한 역사신학적 논구"를 대부분 소개하는 것임을 밝힌다.

12. βαπτιζεσθαι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13. 마태복음 3장 11절의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하는 말씀에서 '불'은 '물'과 대조가 되는 것으로 성령께서 죄를 사하시고 도말하시는 능력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14. υμειζ δε πνευματι βαπτισθησεσθε αγιω

15. 「기독교 강요」 Ⅳ, 14, 1 이하 : 오토 베버 / 김영재역, 「칼빈의 교회관」, 125-137쪽 참조

16. 차영배 교수는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표의 원리를 따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단회성을 말하는 개핀(R. B. Gaffin)의 견해를 반대하며, 개핀이 의미하듯이, 바빙크가 εΦαπαζ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변증한다(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에 관한 개핀 교수의 견해와 그 문제점", 「신학지남」1989년 봄 여름 : 위 「성령론」, 67쪽이하).

17. 오순절 강림사건이 단회적임과 동시에 반복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말은 변중법적 표현이어서 사람들의 이해에 혼란을 야기시킨다고 본다. (차영배, 「성령론」, 8∼19쪽, 그의 신학교재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 i∼xiv, 참조).

18. 서철원, 앞의 책, 23쪽 참조

19. επεσεν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ον

29. 요엘 2:28; 겔 11:19, 36:26∼27, 37:14, 39:27; 사 32:15, 44:3.

30. 고린도전서 1절22장 이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마태복음 12장 38∼39절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31.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와 성화에는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 연관이 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제 2의 경험으로 보고 성령충만과 동일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그의 지론을 뒷받침하는 성경말씀을 인용함에 있어서 일관성을 결여하고있다. 로이드 존스, 위의 책, 128쪽 이하 참조

32. 엡 2:20, 3:5; 마 16:18; 고전 12:28, 눅 6:13 등.

33. 개핀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예언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내는 계시로 보며, 또한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과 같은 것으로 본다. 리차드 개핀 저, 권성수 역,「성령 은사론」, (Richard B. Gaffin, Jr., Perspectives on Pentecost ), 85∼102쪽.

34. 이 말씀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등등의 말씀과 같이 진정한 회심과 회개를 촉구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I말씀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35. 17새기 말에서 18세기초에 걸쳐 일어난 미국의 제 2차 각성운동에도 장로교 목사들 가운데는 이 운동을 조직화하는 일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감리교와 침례교가 급속히 성장하게 된 데 반비례하여 장로교의 성장은 둔화되었다.

2014년 6월 12일 목요일

불링거(Heinrich Bullinger)가 이해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거룩_박동근 목사

불링거가 이해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거룩

< 박동근 목사강변교회 교육목사 >

시작하는 말

쮜리히의 종교개혁자였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창세기 17장을 통해 은혜 언약의 본질적 내용을 발견하고 표현한 중요한 신학자였다.

불링거는 언약의 주제를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원칙으로 인식하고언약 주제를 최초로 논문으로 작성한 첫 번째 개혁신학자였다신학사적 의미를 갖는 이 소중한 논문의 제목은 De Testamento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첫 판이 나오기 2년 전인 1534년 10월에 출판되었다.

따라서 불링거의 언약신학의 가치는그가 언약의 주제를 최초로 종교의 주요 요점으로 제시하고 그러한 위치에서 언약을 조망하려 시도한 첫 인물이었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불링거에게 있어 언약은 전 성경의 표적이었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언약은 전 성경이 가르치려는 교훈의 핵심이며그렇기 때문에 전 성경의 해석학적 틀이기도 하다.

1. 불링거가 이해한 언약신학

불링거는 창세기 17장에서 전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요약해내고 있다.

불링거에게 있어 창세기 17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대한 공공의 기록으로 여겨지며언약의 단순한 상태를 표현하는 장으로 간주하고 있다그리고 창세기 17장에 대한 불링거의 해설을 살피는 일의 가치는그가 은혜 언약이라는 해석학적 틀즉 해석의 렌즈를 통해 구원의 서정을 조망한다는 데 있다.

구원의 서정을 언약의 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일은 몹시 중요해 보인다구원의 서정을 언약의 렌즈를 조망하면,구원의 서정이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특별히 언약으로 구원의 서정을 조망함으로써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일과 거룩한 삶의 추구가 어떻게 조화되는지에 대한 더욱 큰 통찰을 얻을 수 있다구원의 서정이 구원을 직선적으로 조망한다면언약은 구원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언약적 조망 안에서는은혜 언약의 조건성과 관련해 은혜와 행위믿음과 행위에 대한 더욱 풍요로운 시야를 가질 수 있다언약신학은 구원이라는 주제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구분 아래서 조건약속위협 등의 요소들의 구분을 통해 여러 각도로 바라보도록 돕기 때문이다불링거는 칭의와 성화를 언약의 렌즈를 통해 드려다 보고 있다.

2. 창세기 17장에 나타난 언약신학

불링거가 창세기 17장에서 발견한 중요한 진리는 무엇인가불링거는 창세기 15장과 17장에서 언약의 의미를 조망한다불링거는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약을 맺으시는 행위를 하나님의 황송한 자기 낮추심으로 여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연약함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다그런데 이 언약 안에는 조건(condition)이 존재한다곧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아브라함을 조건을 따라 서로 묶으셨던 것이다.

행위 언약에서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고 그 순종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각각 약속과 위협의 요소로 갖는다행위 언약에서 조건으로서 순종은 구원의 원인이며 조건을 의미한다그러나 은혜 언약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연합 안에서 공로의 믿음에 의한 전가와 성령의 내주를 통해 성화가 발생한다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믿음이란 도구를 통해 오직 은혜로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진정한 연합을 통해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이들에게 조건으로써 순종은 구원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은혜 언약 안에서 조건으로 제시되는 조건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불링거는 창세기 17장에서 은혜 언약 안에 조건성을 통찰한다곧 불링거에 따르면은혜 언약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조건을 따라 아브라함을 자신에게 결속시키신다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은혜 언약 안에도 순종의 요구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아브라함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Walk before me and be upright, 창 17:2). 여기에서 순종의 요구는 구원의 조건으로 혹은 공로신학적 의미로 요구되지 않는다불링거는 이 순종이 오직 은혜의 모토와 모순되지 않는 의미로 요구됨을 통찰한다이러한 조건성순종의 요구가 공로신학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첫째언약의 주도권과 기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인간의 공로로 인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인 순수한 선하심으로부터 이러한 언약을 제공하신다는 점에 있어 그러하다고 가르친다곧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생각할 때하나님과 그의 자비와 주권만이 종교의 기원이며 주안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둘째불링거는 언약의 조건을 지킬 수 없는 유아들을 아브라함과 후손에 포함시킨다.

재세례파처럼 유아들의 구원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불링거에게 있어 언약의 조건들만 고려하고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무시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3. 언약신학에서 본 믿음과 순종의 관계

불링거에게 있어 은혜 언약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불링거는 본문에서 순종의 요구에 앞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고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서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El Shaddai)는 순종의 요구에 있어 전제이다곧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하나님의 존재와 완전성에 대한 믿음이 언약적 관계의 적용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고그를 모든 사람의 보수자이신 하나님으로서(히 11믿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창세기 17장 1절의 말씀은은혜 언약 안에 순종의 요구가 주어지지만언제나 그 조건의 성취는 하나님의 능력 공급하심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그리고 언약을 맺으시는 대상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엘 샤다이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주권과 은혜를 전제로곧 하나님 자신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에그리고 너에게 능력을 공급할 것이기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불링거는 은혜 언약의 조건성을 해설한다그에 따르면성도의 삶의 결백과 순결함을 가진 믿음의 신실성은 은혜 언약 백성이 따른 바른 길이다오직 은혜로 받는 구원은 결코 순종의 삶을 배제하지 않는다그러나 그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적 의미로 추구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불링거에 따르면창세기 17장의 은혜 언약은 전 성경의 두 가지 중심 주제를 함축한다그것은 칭의와 성화이다성경은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는 진리를 전한다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칭의를 받게 하는 수단인 믿음은 순종을 낳게 한다.

마치는 말

불링거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거룩한 삶의 요구라는 은혜 언약의 두 중심 주제를 십계명 서문에서도 발견한다십계명 서문에는 율법이 주어지는 정황으로써 은혜를 말씀하고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이 십계명이 주어지는 정황을 살펴보면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을 구원하셨다먼저 은혜를 주시고약속 안에서 순종을 명령하셨다계명이 은혜를 앞서지 않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셔서 애굽의 군사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주셨다이 일이 십계명을 주시는 사건을 앞서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타겟으로서 은혜 언약은 오직 은혜를 통한 구원과 은혜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는 요구를 그 중심 주제로 포함하고 있다그리고 은혜 언약 안에 이 두 중심 주제는 신구약의 통일성 안에서 은혜 언약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언약적 관점에서 구원의 서정이 해설되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불링거의 가르침은 칼빈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안에서도 메아리치고 있다(Calvin, Comm. on Genesis. 17:1-4; Zacharias Ursinus,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99 참조).

<교수 은퇴 기념 고별 강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_박영선 목사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 박영선 교수, 남포교회,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

이 원고는 2013년 11월 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의 내용을 강의안에 의존하여 임의로 발췌한 것입니다원고의 일부 내용 중 미흡한 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발췌자 송영찬 국장>

인류 역사 속에서 보수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 그다지 깊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보수주의는 이 시대에 과연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하지만 그 보수주의를 통해 누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실패한 적이 없으셨다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이런 점에서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가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Text(역사적 사실)와 Context(역사적 의미)

보수주의는 역사성의 인식에서부터 자유주의와 다르다보수주의는 역사곧 사실을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의 시행으로 본다반면에 자유주의는 역사곧 사실보다는 실존의 공감과 이해에 우선을 둔다그 결과 사실보다는 그 의미에 치중한다보수주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한다반면에 자유주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다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사실(text)을 담고 흘러간다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8-11)라고 선언하신다.

그렇지만 역사라고 하는 시공간 속에서 사실(text)과 정황(context)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정황(context)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구체적으로 개인의 신앙체험에서 보듯이, text가 context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text는 그 특정한 context 이외의 것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이러한 점은 자유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특히 인문학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context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text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반복'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인생을 '윤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그들은 역사 속에 녹아든 tex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이것은 마치 학교를 보는 것과 같다학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학교 자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매년 학생들이 입학하고 승급하고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윤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또한 해마다 학생들의 입학과 졸업이 반복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정황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역사의 틀은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하지만 그 각각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찾아오심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밭에 감춰진 보화는 그 context의 보잘 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text 자체를 무시케 하게 만든다그와 같이 말구유는 역사지만 그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조작되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보수주의는 text를 감싸고 있는 context를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곧 text를 존중한다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 text를 보여주신다그것이 바로 계시이다특히 구약이 그렇다구약에는 문맥이 있다그 문맥이 없다면 신약조차 있을 수 없다이런 이유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만이 주도권과 능력을 행사하시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학 원리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text를 context 없이 전하면다만 고함과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그러니 context 속에서 text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전후 사정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를 보아야 한다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충돌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다그것이 바로 계시였으며 이 계시는 전인격적인 성숙을 그 목적으로 주어졌다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context와 text 자체또 이해와 설득이 모두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따라서 역사의 내용과 사실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근거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이에 대하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야곱이 경험한 벧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창세기 28장 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신다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다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시며동시에 야곱의 하나님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며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서 하신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2.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실제가 된다곧 역사라고 하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야곱은 역사의 문맥인 정황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가 있다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유산(모태 신앙), 체험(극적 회심), 기복(현실)이 동기가 되거나 정황(context)을 가지는 경우이다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서 text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개인 현실에서 느끼는 실존적 결단현실적 필요정체성의 질문 등에 의해 구체화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도 갖게 된다그리고 이 정황(context)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특성을 전부 가지거나 균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정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인정한다감리교에서는 헌신과 열정을 강조하게 된다순복음에서는 체험적 신앙을 그 정점으로 가진다이런 것들은 모두 text의 정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그 결과 설명이 달라진다본문즉 text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그것을 가지고 서로 신학이 다르다고 매도하면 안 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정황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다양성즉 그 장점들이나 또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증언을 하게 된다이것이 변증이고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균형과 종합을 위해 하나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이런 점에서 각각의 신학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방식과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황 이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자유주의에서는 context를 공감하고 납득하는 방식을 취한다거기에는 남다른 열심과 정열이 있다심지어 감동과 환희사색과 성찰도 있다그들은 누구보다 이 방면에서 많은 고뇌를 한다하지만 그 결과는 체험주의이거나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황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시도들 때문이다반면에 보수주의특히 장로교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보수주의는 일종의 원어민과 같다고 할 수 있다신앙이 모국어인 자신들은 실상 자기가 가진 유산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를 한다특히 문법과 철자를 사용함에 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원어민들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신앙 그 자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성경 원어나 성서 역사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왜냐하면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히브리어희랍어라틴어독일어 심지어 불어까지도 공부한다그리고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그러나 정작 그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언어()는 역사와 유산으로 만들어 진다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text를 대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인정한다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찾으며 마침내 역사의 완성을 보고 있다이것이 다른 점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체험(확인), 헌신(열정), 공감(실존등이 결국 하나님의 크기와 약속과 능력 그리고 성품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이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혹시 그와 같은 모든 정황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보수주의는 결국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자기 자신이 속한 역사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황을 해석하고 변증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신학이라거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름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사실을 교회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처음에 가톨릭에서는 장엄한 형식과 아름다움에 text를 담아 자신들의 진심을 표하는 방식을 강조했다그래서 가톨릭은 성상이나 성화와 미사 혹은 화려한 예식(일곱 성례)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형식이 오히려 text를 가린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로써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이것들은 모두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그래서 개혁자들은 선포 위주의 방식을 택했다이때부터 설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몽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설명이 강조되기 시작했다그래서 사람들은 정통적인 선포 위주의 설교를 설명 위주의 설교로 바꾸게 되었다그러한 설명을 통해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신앙을 납득시키고자 했다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실이 중시된 선포에서 사실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이로써 사실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게 되었다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방식이다이 자유주의에서는 내용의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

3. 자유주의를 향한 질문

자유주의에서는 text보다는 context의 의미가치이해공감 등에 강조점을 둔다때문에 그들은 초시간적 추상적 개념들에 초점을 둔다한마디로 이것은 환상적이다그러기 위해 그들은 이 추상적 개념들을 도입함에 있어 실존성을 강조한다왜냐하면 context의 의미가치이해공감 등을 실감해야 할 자아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고무적이다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앙으로 이끄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자칫하면 이 길만이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인식론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곧 인간이 다만 신적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주의 곧 개혁주의는 답을 해야 한다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명예요 영광이다.

둘째그러나 인간의 공감과 이해에 의해 성립되는 신의 존재나 의지일 수 없다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피조물로서의 한계와는 진정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셋째신앙인의 감격은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그의 선하심과 능력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상의 사실들을 증거한다곧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언한다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진술이다생각한다고 해서 존재 있는 것이 아니다존재하기 때문에 생각도 하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그러나 그 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존재만 인정하게 되면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성경 본문에 충성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그러나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생각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한다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인간의 이해에 묶인 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반면에 자유주의가 말하듯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거나 출발점은 되지 못한다나와 현재라는 정점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한편하나님의 임재가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여러 죄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그래서 선지서들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그것은 도덕이 아니며윤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곧 하나님의 없음이 벌이고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을 볼 때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분명해진다.

먼저 (1) 교리를 외우듯이 거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누려야 한다이 교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교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된다거기에 인격이 따라야 한다곧 하나님의 일하시는 정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타인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는 것과 같다.

집나간 자식이 정신 차리는 문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증명한다반면에 집에 있는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책임도 말하고 있다큰 아들에게 있어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비난이 전부라면 결코얘야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부요함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누리고 있어야 한다여기에는 큰 법칙이 있다.곧 교회 안에서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원칙이다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요함과 신실함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역설이 담긴 text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수주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그 첫 번째가 바로 보수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과제이다곧 (1) 유신론 안에서 전체 세계관이 항상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 교회가 (죽은전통주의 항목context가 배제된 채로 text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녀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성경으로서 text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필연과 자유를 관념의 세계에서 생각지 않고, '신 앞에 서 있다하는 현실에서 생각한다면그리고 내가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동시에 '모든 것은 내개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명제를 두 개의 분할된 타당성의 영역에 돌림으로써 내가 살아가야 할 역설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또는 어떤 신학적 기교로써 이 둘의 관념적 화해에 도움을 주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스스로 취하여 함께 살아야 하며또한 함께 살 때만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모든 정황에 네가 들어가 살아라.”이 명령을 기억하라이럴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반면에 text에서 보이는 역설을 잘못 수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신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이해한 진술이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비역설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2) 대부분의 비역설적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끝을 맺는다즉 그들은 펠라기안이거나 극단적 초칼빈주의로 흐른다펠라기안주의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로 책임을 넘긴다.초칼빈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넘긴다.

3) 역설을 의지하는 것의 약점은 멈취야 할 지점(경계)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한계를 정할 외적인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역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그런데 사실 그 지점을 알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5. 신학과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

과연 신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하나님에게인가아니면 인간에게인가여기에 하나님과 학문의 대립이 있다계시와 인식의 대립이 있다사실과 의미의 대립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곧 신학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하는 거다마찬가지로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식을 필요로 한다인식을 위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사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의미를 가지기 위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이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이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우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의미와 이해와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억지가 된다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은 우연으로부터인가필연으로부터인가우연이면 사실은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허무주의에 불과하며역사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곧 역사가 우연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반면에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그 필연을 만드신 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어느 것 하나도 역사의 사실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곧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패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곧 인간은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대부분은 내용보다 어떤 주류나 인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그래서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만 지도자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보전 하려고 한다자기가 아닌 칼빈이나 박윤선을 내세우는 것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려 한다그리고 칼빈을 모르면박윤선을 모르면 신학이 다르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거나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라고 하면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를 내세운다그런데 그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복종한 무지하고 순종적인 병졸들 때문이었다우리는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병졸들을 보아야 한다.

병졸들의 무지와 순진은 절대적 다수에게 준 복이다그러니 지도자들이라면 우월함으로 자신을 확인하려말고 유통업자 같은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여기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기쁘신 은혜에 속한다여기에는 우리의 승인이나 획득이 필요하지 않는다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공감하거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의존의 책임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가지는 것이다때문에 교육과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시켜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여기에서 우리는 실존적인격적 요소인 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1) 실존적이라는 말은 관념적이지 않고구체적이라는 것이다바울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롬 12:1). 삶으로써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2)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계적이지 않고 더 풍성하고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6. 결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그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욥 40:6).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욥에게 보이신다그러자 비로소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라고 실토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고백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그리고 땅을 보라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보라이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바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곧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내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다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이유와 자격 없이 어느 시대나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셨고 세우셨음을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