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7일 금요일

초기 기독교의 형성

 초기 기독교의 형성 ,에티엔느 트로크메 지음, 유상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3



머리말

두 제국 (파르티안 제국과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의 종교였던 유대교에 대해 어느 정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기독교 모임이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두 제국 내 전체 인구의 약 십 퍼센트 가까이 되는 유대인들은 중요한 소수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폭력 사태를 피하기 위해 두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 특권은 때때로 문제시된 적도 있었으나 당시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분리가 이루어진 것은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 유대교가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되면서였다. 성전을 박탈당하고,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어 와해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유대교는 바리새파 랍비들이 주도한 근본적 개혁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기원후 초기의 유대교

수세기 전부터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던 디아스포라는 지역에 따라 상이한, 그러나 독자성을 지키고자 하는 소수집단이라면 어느 집단이나 그러하듯, 견고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 회당이라는 제도는 지역 당국에 대해 공동체를 대표하는 임무 뿐 아니라, 교육과 사법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 회당은 유대인 집단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토라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 집단은 끊임없이 주변의 문화와 접촉하고 있었다. 아람어와 그리스어와 같은 주변 문화의 언어를 받아들여 사용했다는 점에서 접촉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히브리 성서의 여러 책들이 기원전부터 아람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회당의 사람들이 더 이상 히브리어를 이해하는 못하는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쿰란 문서와 70인역의 그리스어 번역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어가 많은 디아스포라의 회당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였음을 증명한다.(p16)

...모든 현상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애착 덕분에 전통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이 성전을 위해 기꺼이 세금을 냈으며,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가 되면 열성적으로 순례여행을 했다. ...모세 율법의 계명 또한 그 해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결속시키는 요인이었다. 한편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는 양적인 측면에서 디아스포라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p17)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활동가들은 파벌적이라고밖에 형용할 수밖에 형용할 수 없는 태도를 취했다. 최고 특권층은 사두개인들로 이뤄졌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봉직하던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그룹은 매우 보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리스의 영향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토라의 핵심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에 있었다. ...도덕적, 사회적 관점에서 계명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옳지 않은 일로 보였다. ... 이들에 대항하여, 그 경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세기부터일부 제사장들이 분리되어 나갔다. 성전 생활에 있어서 잘못된 관습, 각양각색의 정치세력과 타협하는 고위 성직자들, 제사 일정을 바꾸는 등 시대의 조류와 타협하는 상황 등에 분개한 에세네파 사람들은 광야로 들어가 금욕과 고행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운동은 근본적으로 분파적이었으며 유대인 일반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유대인 대중은 이들의 종말론과 메시아에 관한 사유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엄격한 규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풍부한 문헌을 만들어 냄으로써 디아스포라에까지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고 실천 불가능한 사회적 율법을 윤리적 율법으로 변화시켜 유대인 개개인에게 제시하는 방도를 택했다. ...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사회를 조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토라를 윤리적인 법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는 유대인 개개인에게 제안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형제단체"로 규합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이들은 계명을 해석함에 있어 개인의 일상적 삶 속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최후의 상급과 의로운 자들의 부활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들의 열성적 노력은 어느 정도 팔레스타인 유대 민중의 윤리적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이른바 '땅의 사람들'을 경멸했다.

젤롯파의 경우, 이들과 나머지 유대 백성들 사이의 관계는 모든 테러 조직들과 그들의 출신 사회 사이의 관계와 같았다. 이들은 반로마 저항 행동으로 민심을 얻으면서, 제사장 비느하스를 본받아, 힘을 잃은 권력기구를 대신하여 율법을 어기는 자들을 폭력을 사용하여 제거하였으며, 백성들에게 더욱 완벽하게 계명을 지키도록 강요했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엄격한 규율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모두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민중과의 접촉을 멀리한 채 따로 떨어져 제한된 모임을 이루며 사는 수밖에 없었다. (p18~21)

2.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

소수 집단들이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 대중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들과 민중을 갈라놓는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기원후 30여년 동안 있었던 이러한 시도 중 두 가지가 바로 세례 요한과 예수의 경우이다. (p23)

세례 요한이 전했던 임박한 내림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이지 어느 정도 인간의 모습을 한 메시아가 아니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충성스럽게 남아, 디아스포라에게까지 계속하여 그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요한복음서의 앞부분 몇 장은 세례 요한의 제자와 예수의 제자가 대립하는 논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 이것은 기원후 1세기 말 이 복음서가 저술될 무렵에 세례 요한을 종말의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생각하는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이 공동체는 기원후 1세기 말 배교자 제명 때 회당으로부터 축출되어 분파로 담게 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p26~7)

세례 요한의 설교와 비교할 때 예수의 설교는 어떤 점에서 새로웠는가? ...요한 설교의 몇몇 요소들은 그의 옛 제자들에 의해 그대로 유지되었다. 예수의 청중들 속에는 모든 사회 계층과 모든 종교 분파들이 섞여 있었다. 하나님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재차 선포되었고,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가 되풀이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비는 여전히 백성을 향한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열쇠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바뀐 것은 무엇인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가 신비로운 임재로 변화되었으며, 회개에로의 부름을 가능하게 했던 은혜의 시간과 세례의 표적은 이제 끝이 났고,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부터 점유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일을 위해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점 등이다. ... 이 역설적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백성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조직된 집단들로부터 방치된 시골의 하층민들 가운데 있었다. 이들 조직된 집단이나 종교 당국에 대항할 용구를 가지고 있던 예수를 분명 자신의 사명에 관한 ,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매우 강한 자의식이었다. (p30~1)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중을 하나님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려던 두 번의 시도는 모두 지속적인 추후 결과를 얻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 후로는 젤롯당들이 민중을 동원하고(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로 끝남), 다음에는 얌니아에 정착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장악하게 되었다.(p33)

3.예루살렘의 처음 교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전서(15:3~7)에서 언급하고 있는 신앙고백의 내용구성을 볼 때 현현이 두 갈래의 집단과 관련된다는 사실 뿐이다. 그 하나는 예수의 첫 제자들 중의 하나인 베드로와 관계된 무리, 즉 열두 제자와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의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형제인 야고보와 관계된 무리로 "모든 사도들"이 이에 해당한다. ... 베드로를 둘러싼 집단은 베드로와 옛 사이에 유지되었던 밀접한 관계로부터 기인하는 권위를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적 공동체의 모습을 띠고 있는 반면, 야고보는 혈통의 정당성을 힘입어 수임자에게 권위를 위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뿐이다. ...이 두인물은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나란히 자리를 잡게 된다. (p39)

최초의 핵심적 인물들은 갈릴리로부터 온 예수의 제자와 친척으로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들은 부동산을 팔았으며, 그 판 돈을 공동으로 소유한 것처럼 보인다. 예루살렘 이들 집단에 가담한 형제들 중 일부도 이와 같이 했는데, 그들은 이러한 희생의 대가로 "성도"의 무리에 받아들여졌다. ...공동 기금은 "열두 제자"가 맡아서 관리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처음 교회에 끼친 에센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지표일 수도 있다. (p41)

공동체 지도자들의 활동이 운영, 훈련, 예식 등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신도들에게 자신들의 주님을 빼앗아간 비극적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의 삶과 형제 개개인의 삶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의 삶과 형제 개개인의 삶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있었다. 예수의 역설적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 성서는 몇몇 열쇠를 제공했다. 의로운 자, 또는 야웨의 종이 받는 고난에 관한 구절들이 그것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구절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승리와 압제받는 불행한 자들이 새 삶을 얻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에세네파와 마찬가지로 처음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구약의 텍스트를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과 관계된 예언으로 간주했으며, 무엇보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유용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초기 사도들이 베푼 가르침의 또 다른 원천은 에센파가 성서 구절들에 기초하여 수립한 메시아 칭호들로 이뤄진 풍부한 보고였다. ...예루살렘의 처음 교회가 기독론을 만들어 냈고, 이 기독론을 기초로 기독교 사상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p45)

조직되고 교육된 공동체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았다. ...순례지인 성지 안에 살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곧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의 빈번한 접촉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촉은 주로 복음 전파를 위한 노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정기적으로 성전에 드나들고 기회가 생기는 댈 무리에게 선교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인들은 많은 새로운 가담자들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봄과 가을의 축제는 머지않아 예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리라는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기회였다.(p46)

우리는 예루살렘에 정착했고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비팔레스타인 유대인 집단 중의 하나에 관하여 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 집단을 "헬레니스트"라는 매우 일반적인 용어로 이름 붙이고 있는데 이들은 교리적 측면에서 주류 유대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집단은 열두 사도의 승인을 얻어 그리스어 이름을 가진 일곱 명의 지도자를 선출한다. ...일곱자를 선출한 이유는 열두 사도가 처음 공동체 전체에 담당한 것과 동일한 역할을 그리스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을 위해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전에 대하여 그리스말을 하는 자들의 주 대변인이었던 스데반의 공격성은, 공동체를 이끌고 성소에 기도하러 가는 열두 사도들의 태도와는 완절히 단절된 것이다. ... 유대 권력자들이 악착스러운, 그러나 타협적인 열두 사도와 , 이들보다 한층 더 혼란을 야기하는 일곱 지도자의 추종자들을 구별하기는 했지만, 스데반 박해 사건은 유대 권력자과의 사이에 위기를 가져왔다. 이들 일곱 지도자의 추종자들은 수도 산헤드린의 권위를 피해 예루살렘과 유대를 떠나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열두 사도와 가까웠던 공동체 구성원들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을 수 있었고 계속 용인되었다.(p49)

기원후 44년 초반부로 추정되는, 헤롯 아그립바의 박해로 인해 야기된 위기는, 이미 시작된 이러한 변화에 박차를 가하는 역할을 했음이 확실하다. ...이 사건은 최초 기독교 공동체가 평범한 제도에 가까운 교회 생활로 성격이 바뀌게 하는 전환점으로 기록된다.(p51)

(아그립바 박해)이후로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근본적 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그의 발언에 더 이상 결론으로서의 비중을 부여하지 않는다. 거의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영적인 수장에서, 순회 선교사의 위치로 추락한 것이다. 이렇게 그가 상실한 위치는 주의 형제인 야고보에게로 넘어갔다. ...그저 존경받는 인물일 뿐이었던 야고보가 44년부터는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이자 동시에 보편교회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p52~3)

미묘한 상황에서 타협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경향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나감에 있어서도 적용되었음이 확실하다. 처음몇 년 동안 자리를 잡은 엄격한 제도는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매우 엄격했던 공동체 규율은 느슨해졌으며, 재산 공동체는 사라지고 강도 높은 구제활동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구제를 위해서는 외부의 기부금도 환영이었다. ...초기 에세네파의 영향은 형제애라는 바리새파의 영향 앞에 후퇴한 것이다. ...어떤 점에 있어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끈 방침은 엄격했다. 예루살렘의 권위는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의 기독교 공동체 위에 엄정하게 행사되었다. 이 공동체들은 뚜렷한 원심적 경향을 보였으며, 이러한 사실로 인해 헬라파에 의해 세워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공동체나 바울의 개인적 선교 등 기독교 운동의 결속력이 위태로워졌다. 야고보와 그의 주변 인물들은 위협을 ㅂ다고 있다고 생각됐던 단일성을 수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바나바를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보낸 것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큰 호응을 얻게 되자 그로 인한 탈선을 막기 위함이었다.(p55)

70년 이후 교회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베드로와 야고보 시절 모든 외부의 공동체들 위에 행사되었던 영향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62년 이전 교회를 지배했던 강한 중앙집중제도는 이때부터 모든 흩어진 무리에게 호의적인 통합적 회중교회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 유대교는 얌니아에 강력한 본부를 재건했는데, 이 본부는 개혁의 임무를 맡아 모든 회당에 정통교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게 한다.(p59~60)

4."헬라파"의 약진

스데반의 순교에 뒤이어 가해진 박해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난 다른 "헬라파"들은, 베네게와 키프로스와 시리아의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했다. ...선교활동이 회당의 범주를 벗어난 곳인 국제적 대도시인 안디옥에서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그곳에서 헬라인, 아니면 적어도 헬라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했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키프로스 교인 중의 하나인 레위인 바나바를 보내어 위험한 탈선 행동이 아닌지를 확인하게 한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승인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지역 공동체의 책임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리하여 "헬라파"선교단과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단은 하나로 동화하게 된다.(p66)

안디옥 교회는 ...매우 독창적인 면모를 갖게 되었다. 다소 사람 사울(바울)의 개인적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헬라파" 선교부로부터 온 특색, 예루살렘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인 특징, 그리고 대규모 국제도시의 복합적인 사회가 행사하는 압력이 한데 섞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계 복음화의 길로 나서는 데에는 안디옥 교회모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 세계의 순례객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주께서 다시 오시기를 예루살렘에 머물며 기다리는 대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녔던 비정통 선교사들의 길을 따라 가게 됐다.(p67~8)

"헬라파"의 사상을 보여주는 이러한 요소들은 매우 산발적이고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집단에서 비롯된 다른 기록에서 보다 정확한 표현과 보충자료를 찾을 필요가 있는데, 마가복음서의 초기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의 초판은 65년 이전에, 그리고 정경판은 75년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의 서두에 책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즉 예수 그리스도가 전달자이자 동시에 주체가 되는 좋은 소식의 전파에 관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책 전반에 걸쳐 교리보다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선교활동을 강조한다.(p70~71)

이 문서(마가 복음)가 확언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큰 소식"이 구원 역사의 결정적 사건이며, 동시에 모든 이로 하여금 이 사건을 알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라는 점이다. 세례 요한, 예수, 그리고 제자들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알리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신약의 다른 저자 바울도 "큰 소식"에 관해 종종 언급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큰소식"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러한 신념 뒤에는 하나님에 관한 매우 급진적인 사상이 숨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창조주가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나라를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모든 것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놓으려고 결심했다. 이 거대한 뒤집기를 실행할 도구적 존재가 바로 예수이다. 그는 설교와 사탄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이를 실행한다. ...예수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온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복음을 가지고 온 분이며 악과 고난을 물러가게 할 투사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p73~4)

...마가복음서는 "헬라파"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이들이 언급된 다른 어떤 텍스트보다 더 정확하게 드러내 준다. 이 집단은 신학적 사고보다는 행동에 더 가까웠다. ...첫 세대가 사라지자 초기 선교사들의 비상한 활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헬라파"공동체 중 살아남은 첫 세대들은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지구전에 적합하도록 무장된 경쟁 집단의 공세에 점진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운동은 기독교 세대에 몇몇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는데, 베드로를 중심으로 조직된 선교 활동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또한 문화적으로 기독교를 그리스화하는데 기여하여, 셈계의 아시아보다는 로마 제국으로 팽창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가복음서의 처음 판본을 통해 제2세대와 제3세대 기독교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문학적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복음서가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표현 양식이 되었다.(p76~77)

5.바울 :첫걸음

바울이 언제 출생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기원후 10년이 조금 못되어 지적인 활동이 활발하던 활기찬 요새 도시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유대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는 태어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정의 관례에 따라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성서에서 따온 이름인 사울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식 이름인 바울이다. ...바울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친로마적인 경향을 농후하게 드러내 보인다는 사실을 앞으로 보게 될텐데, 이는 그가 아시아에서는 아직 드문 시민권자 중의 하나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p80)

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그의 가족이 그러했듯 매우 충실한 율법 준수자였다. ..."헬라파"가 주류 교회에 대해 독립적 입장을 취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사이에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되자,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행동파 무리에 섞인다.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대한 이러한 열성이 그로 하여금 열심당원, 다시 말해 폭력을 사용해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의무로 하는 열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의 회원이 되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p82)

...돌연한 방향선회...바울은 세례를 받은 후 이전보다 한층 더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느꼈다. 복음을 전하라고 그를 보낸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 ... 바울의 회심은 개종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갑작스럽게 이스라엘의 삶속에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발견했음을 의미한다. (p85)

각 교회에서 선교사들은 예루살렘의 모범을 따라 "장로"들을 지명하여 세웠다. ...주목되는 점은, 사도행전 처음 부분에서 사도직을 규정할 때 사도의 숫자에서 제외되었던 바나바와 바울에게 두 번에 걸쳐 "사도'라는 호칭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80-85년경에는 사도직이 첫 세대 때보다 제한적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수십 년 동안은 성령과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의해 파송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선교사는 사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를 결여한 순회 사도들이 공동체에 혼란을 야기하게 되자 보다 제한적으로 사도직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p93)

선교여행의 긍정적 결과에 자신을 얻은 바나바와 바울은 이들(유대 기독교인)에게 맞선다. 공동체는 이들의 주장을 배격하지 않은 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중재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대표단을 구성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내게 된다. (p94)

베드로와 바울이 나란히 위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기둥"인 야고보, 게바, 요한 측과 바울, 바나바 측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 선교지를 분할하여 유대인 선교는 전자가, 이방인 선교는 후자가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교화의 수장과 선교 책임자, 그리고 신학자가 하나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 다시 말해 궁핍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인정하는 호의를 베푼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으로 개종한 신자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을 포함하지 않은 합의에)바울은 그러한 조건이라면 예루살렘의 합의가 두 종료의 기독교인들의 화합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분노한다. ...바울의 분노가 야고보와 그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들을 향해, 유대교가 회당 출입을 원했던 동조자들에게 제시했던 노아의 명령에서 따온 몇몇 규칙을 따르라고 요구함으로써 이방인과 유대인이 혼합된 교회를 구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조치가 모든 교회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타협적 유대기독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시기는 70년부터 90년 사이의 일들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울이나 그의 추종자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참여 없이 결정된 이러한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p96~8)

6.바울 :전진

이 두 집단(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각기 자신들의 고유한 공동체를 형성해야 했다. 이처럼 사태를 제한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너무도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던 베드로와 바나바까지도 그 효력을 인정하고 안디옥에 거주하는 이방인 출신 형제들과의 교제를 끊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와해를 의미했다.(p99)

결과는 결렬이었다. 야고보,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와도 관계를 끊었고, 베드로와도 헤어졌으며, 오랜 동료 바나바와도 단절했고, 안디옥 교회와도 결별했다. 실라만이 예루살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바울과 연합하여 새로운 선교 여행에 나섰고, 안디옥 신도 몇몇이 계속 바울을 신뢰했다.(p100)

바울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공동체 생활을 위해(갈라디아서) 근본적인 반론을 편다. 바울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공동체 생활을 위해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선물, 그리고 이로부터 기인하는 자유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선물을 폐기하고 부인하는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이는 실재하지도 않는 "다른 복음"에 가담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집어엎는"일이다. 바울의 가르침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이러한 교의를 퍼뜨리는 사람은 누구든 "저주를 받아"마땅하다. (p101)

새로운 기지의 취약함과,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방인을 맡기신 사명의 중대함을 잘 인식하고 있던 바울은, 로마로 가서 그 도시를 비유대인 선교를 위한 중심지로 삼아 유대인 선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균형을 이루게 하기를 원했다. ...마케도니아는 한 단계에 불과했다. 갈라디아 남부와 로마의 중간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는 바울에게 목표 지점에 가까운 중간 기지였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마케도니아에 도착하자마자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로 향했다. ...로마로 가는 도상에 중간 기지를 찾는 사람에게는 합리적 선택이었다. (p105)

...그들은 비아 에그나티아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서 ...중요한 두 도시(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젖혀두고, 곧장 유대인 회당이 있으며, 지방의 수도이자 로마 총독의관저가 있는 데살로니가로 갔다. 바울에게 이 도시는 이탈리아로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중간 지점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주변에 몇몇 유대인과 유대교에 동정적인 그리스인들, 그리고 적지 않은 숫자의 지역 상류사회 부인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자 회당의 지도자들이 거리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바울과 실라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있던 야손과 몇몇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선동죄로 고발하며 관원에게 넘겼다. ...(베뢰아로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그곳에서 회당 지도자들의 방해를 받자) 바울은 가능한 한 신속히 대피해야 했다. (p107~8)

아테네로부터 서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고린도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바울은, 완전한 실패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절반의 실패를 경험한 헬레니즘의 지적 중심지를 떠나 다시금 로마로 가는 길의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 실아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수집된 기금을 가지고 합류하자, 바울은 전적으로 설교하는 일과 유대인 학자들을 상대로 예수의 메시아 됨에 관하여 토론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도 바울은 회당과의 관계를 끊고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섰다. ...고린도 교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로마로 가는 길이 클라우디우스의 칙령에 의해 봉쇄된 상황에서 아가야의 수도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위해 선교 기지로서의 역할을 매우 잘 수행했다. ...바울은 열여덟 달 동안 고린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는 이전에 그 어느 도시에 머물던 기간보다도 훨씬 긴 것이다.(p111)

바울은 에베소의 유대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기를 거부한 채 곧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갔다. 그곳으로부터 교회를 방문한다. 이러한 그의 거취는 다섯 단어로 묘사되어 있는데, 거기서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는 분파에 대해 사소한 양보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안디옥으로 가는데...(실패였다) 바울은 이전에 활동하던 장소로 돌아가서 교회들을 견고히 하고 독자적 선교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이다.(p113)

7.바울 : 교회의 우두머리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은 몇 해 전의 여정을 되풀이 밟으며 갈라디아 남부와 부르기아의 제자들 굳세게 하는 일에 전념했다. ...이 활동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던 듯, 그 영향이 에베소라는 도시의 영역을 벗어나 아시아 전역에 퍼졌으며 바울의 동역자들이 아시아 곳곳에서 여러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명실 공히 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선교사 그룹의 우두머리로서,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앞서 자신이 세운 모든 교회들에 대해서도 권위를 회복했다.(p115~6)

바울에 반대하거나 경쟁하는 자들의 침투가 고린도 교회를 어려움에 처하게 한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이교적 환경, 사회적 구성, 그리고 영적인 무경험 등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이리저리 표류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울의 서신 속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는 한창 탐색중인 집단이다. 유대 도덕이 여전히 준거로 작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바울은 기독교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 해결책의 일부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고, 다른 일부는 종말이 가깝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성령 체험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이 중 마지막 요소, 즉 성령 체험에 관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말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위로부터 오는 이러한 능력에서 복음이 지향하는 새로운 삶의 열쇠를 보았다. 그러나 바울이 생각했던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공동체적 삶이었던 반면, 고린도 교인들은 개인적 차원을 생각했으며 방언, 예언, 치유의 능력등 초자연적 은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바울은 성령의 선물이 다양하다는 점과, 모든 신도들이-가장 미천한 자까지도-한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성령 감화의 개념을 최대한 확장하고자 노력했다. 이리하여 그는 교회 안의 모든 신도들이 따라야 할 가장 높은 길을 규정하기에 이른다.(p119~122)

빌립보와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볼 때, 바울은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로, 또 영감 받은 복음 메시지의 해석자로 생각하는 선교사들 집단의 수장이었을 뿐 아니라, 아가야, 마케도니아, 아시아와 갈라디아에 위치한 열두 개 남짓한 지역 교회들의 인정을 받는 최고 권위자였다. 이들 교회들은 거의 모두 바울에 의해 세워졌으며, 또 회당과의 관계를 단절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도덕과 공동체 생활과 예배의식을 정립해야 하는 필요성과 씨름을 하고 있던 이 교회들에게 사도는 가장 오래된 전승의 증인이었으며, 동시에 영적인 아버지요 하나님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지혜의 전달자였다.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 결과 바울은 그들의 유일한 안내자요 대변인으로 남는 데 성공했다.(p123~4)

당당한 (예루살렘) 사절단의 우두머리로서 바울은 두로,돌레마이,그리고 가이사랴 교회로부터 엄숙한 영접을 받았다. 이 교회들은 스데반이 죽임을 당한 후 계속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헬라파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이끄는 일행은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야고보와 그를 둘러싼 장로들의 영접을 받았다. ...바울은 서약으로 말미암아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하는 네 명의 형제와 함께 성전에 올라가 그들을 위해 모든 비용을 지불하라는 매우 단호한 충고를 받게 되었다. 신도가 된 이방 사람들에 관해서는 협상이 필요 없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태도는 강경했다. 바울은 사절단과 떨어져 나와, 부과 받은 임무를 이행하는 등, 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p128~9)

8.바울 : 신학자, 순교자

대체적으로 바울의 서신은 수신 교회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선택된 특정 문제들에 관한 가르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바울은 독립된 사역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신자들로 하여금 강한 응집력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로 뭉치게 해야 된다는 자신의 소명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리적 차원의 혁신을 꾀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들을 자연스레 묶어 주었던 틀을 이런 식으로 박탈당한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바울 추종자들에게는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해야할 확실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일부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일부는 특정 계명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전혀 다른 데서 삶의 기준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기독교를 당시 로마 제국 내에 널리 퍼져 있던 비교와 매우 유사한 자유로운 성례 정도로 변질시키려는 이런 분산의 위험에 직면하여 바울은, 모든 신도들을 포괄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라는 자신의 권고를 교리화해야만 했다. 도시마다 직면하게 된 이러한 필요성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일종의 고등 교리문답이 탄생했다. 이 교리문답은 신앙의 기본 조항들....에 대해서는 간단한 암시로 만족하고, 두 개의 주요사상에 초점을 맞췄다. 그 하나는 모든 신자들에게 값없이 앞당겨 주어진 죄 사함이고, 다른 하나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집단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 생활의 필요성이다.(p131~2)

로마서를 통해 표현된 바울의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차후의 기독교 사상에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여기서 그 큰 줄기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1세기와 2세기 기독교인들은 이 서신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서간이 문제를 삼는 것이 인류의 운명이지 인류를 이루는 개개인의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p135)

우리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몇 년 후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도 매우 분열된 상태였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조금씩 단결하여 잘 조직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은 64년 네로의 박해라는 끔찍한 시련을 당하고 난 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교회는 1세기가 지나기 전 다른 교회들 사이에서 진정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p138)

...수도를 떠나지 못한 채, 그리고 자신이 희망했던 것처럼 로마의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 놓지도 못한 채 바울이 사망한 것은 63년 아니면 64년이었다. ...바울 말년의 5~6년은 시련의 시기였다. 그 활동적인 선교사가 ...예루살렘, 가이사랴를 거쳐 로마에 이르기까지 운신의 폭이 극히 제한된 무력한 상황에 처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는 방치되고, 자신이 세운 교회들과는 단절된 상태였으며, 매우 분열된 상태였던 로마의 신자들로부터는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했던 바울의 주변에는 몇몇 충실한 동역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했든 지간에,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복음 전파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가 항상 신뢰했던 로마 정권이었다. ...이 소외된 인물의 순교는 로마의 신자들 사이에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문학이나 기독교 예술에서 바울이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로마 사람들에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4세기에 이르러서였다.(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