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하나님 나라 잔치의 역사적 예시로서의 성례전 1 / 은준관 교수

 
하나님 나라 잔치의 역사적 예시로서의 성례전 (The Sacrament as Historic Foretaste of the Kingdom of God) / 은준관 (현대와 신학, Vol.24 No.-, [1999])
 
 
 
.하나님 나라 잔치의 역사적 예시(미리맛봄)으로서의 성례전(Sacrament)
 
 
학문적 논의과정에서 무슨 이유인지 확실치 않지만 설교성례전의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세례성만찬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더더욱 결여되어 있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세례문제는 흔히 견진례’(Confirmation)와는 연결지어 논의되어 왔지만 세례와 견진례 그리고 성만찬의 관계는 여전히 단절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이 틀을 따라 그 기원부터 추적하고 역사변천에서 어떤 관계를 모색해 왔는지를 살필 것이다.
 
 
 
. 그리스도 고난에 참여와 종말론적 순례의 인침으로서의 세례(Baptism)
현대신학적 논의에서 세례문제가 쟁점화된 것은 바르트’(Karl Barth)1943년 한 강의에서 유아세례를 비판한 데서 부터였다.1) 그후로 세례에 관한 연구와 서적들이 유럽과 영국을 증심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 영국교회와 스코틀랜드교회는 유아세례의 의미를 더욱 옹호하고 신학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1927로잔’(Lausanne)1937에딘버라’(Edinburgh)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 (Faith & Order) 모임에서 세례의 신학적 해석을 더욱 강화하였다.2)
 
 
 
A. 세례의 성서적 근거
세례의 신학적 문제는 "세례의 기원(origin)이 무엇이냐?"에서 시작한다. 쿰란의 후속인가? 세례요한의 물의 세례인가? 예수 자신이 받으셨던 세례가 오늘의 세례의 시작인가? 혹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위임(28)에서인가? 또는 오순절 경험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것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세례의 기원을 밝히는 일뿐아니라 세례의 의미와 내용까지도 달리하기 때문에 이 물음은 신학적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세글러’(Franklm M. Segler), ‘콘첼만’(Hans Conzelmann) 그리고 노아크스’ (K. W. Noakes)는 세례의 기원을 레위기와 에스겔에 나오는 신적인 청결의 의미로 사용된 물과 세례요한 당시의 쿰란’(Qumran)공동체가 입회를 위해 철저한 과정을 거쳤던 정결의식에 두는 입장에 서 있다.3) 이렇듯 구약과 쿰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것은 세례요한의 세례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의 회개를 동반한 것이 다른 것이었다. 그러기에 요한의 세례는 의 세례이며, ‘죄의 회개의 세례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4)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요한의 세례는 오시는 이’, ‘메시야에 대한 증언이었으며, 그러기에 그의 세례는 죄의 회개를 통한 메시야적 백성을 모아들이는 잠정적인 예식이었다는 것이다5) 여기서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특히 노아크스’(Noakes)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예수의 수세에 있었다. 예수와 수세가 초대교회에서도 다소 문제가 되었던 것을 인정하면서도, ‘노아크스는 요단 강에서의 예수의 수세는, 특별히 복음서 기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의 수세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의 사역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메시야적 사역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 뿐아니라 예수의 수세는 성령의 임재로 인한 새 언약의 시작이고 또 동시에 새시대의 개막이었다는 것이다.6)그리고 예수의 부활 이후 세례는 교회 안에서 실시된 죄의 회개와 용서, 성령을 받는 일과 교회의 일원(member)이 되는 통로(means)가 되었으며, 바울과 모든 사도들도 이 범주 안에서 세례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세례의 형식적인 시작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왔으나 세례의 구원사적 의미는 예수의 수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마틴’(Ralph p. Martin), ‘헌터’(A. M. Hunter) 그리고 개렛’(T.S. Garrett)같은 이들은,특히 그 중에서도 마틴은 요한복음만이 예수와 제자가 세례를 베풀었다고 증언하고 있을 뿐,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세례를 주었다는 증언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기독교세례의 시작을 오순절 이후 처음 교회가 실시한 공동체에 입회하는 의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7)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28:19)는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 위임이었으며, 그것은 오순절 이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초대교회의 입회예식 (Rite of Initiation)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풀이한다.8)
 
 
 
예수 그리스도의 수세에 중심을 두고 세례를 해석하는 앞의 그룹은 세례를 구원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는가하면, 부활이후 오순절 사건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세례를 초대교회의 입회예식 (ent rite)으로 해석하는 경향은 매우 흥미있는 대조이다. 앞의 것을 세례에 대한 기독론적접근이라 한다면 후자는 세례에 대한 교회론적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는 이상의 두 해석을 하나의 구조로 통합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난 세례를 기독론적교회론적으로 따로 따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웨인라이트에 따르면 기독교세례의 근원은 예수 자신의 수세’(세례받으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수세는 그의 구원사역의 표상(prefiguration)이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웨인라이트는 앞의 학자들의 해석과 일치한다. 요단강가에서의 예수의 세례는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인침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죄의 용서를 위해 갈보리에서 희생 당하는 죽음의 예시 였기 때문이다.9)
 
 
 
여기서 기독교세례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세례에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참여한다는 뜻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일에 참여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6, 2)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세례는 기독론적인 것이다.10) 여기서 웨인라이트는 예수의 수세(요단강)에서 세례의 기원을 찾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세례라는 의미에서 기독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사람, 의로워지는 은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 성령의 인침, 그리고 메시야적 백성으로 인침을 받는다.11) 이것은 세례의 기독론적 차원이다.
 
 
 
그러나 웨인라이트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바로 기독론적 의미의 세례교회론적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세례, 한 그리스도, 한 성령의 의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시는 통일성을 의미한다. 세례의 교회론적 의미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의 구성원들이 되어 영원한 교제’(Koinonia)를 나눈다는 의미인 것이다.12) 이 점에서 웨인라이트는 후자그룹의 학자들의 해석을 수용하여 기독론적 이해와의 연결점을 찾고 있다.
 
 
 
그러나 세례의 성서적 의미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에 참여시킬 뿐아니라 오고있는 종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중생의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 소망 안에서 거듭난다는 의미는 곧 종말론적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여기서 세례는 옛 것은 죽고 새 것을 덧입는 경험을 말하며, 이것은 다시 세계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개인의 삶과 공동의 삶을 세례적 윤리로 살아가고 또 증언함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삶을 하나님의 뜻으로 변화해가는 변혁적 윤리를 동반하는 것이다.13) 이것은 웨인라이트가 성서의 세례를 신학적으로 구조화한 해석이다. 그러기에 세례는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적이며, ‘종말론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인 의미를 가진다. 성서에 나타난 세례는 그 기원을 예수의 수세에 두던, 요한의 세례에 두던, 예수의 대 위임과 오순절 경험 이후에 두던 그 중심적 의미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사함이라는 구원론적 의미(기독론적, 교회론적)와 삶 전체가 변화된(종말론적, 윤리적)역사적 책임을 살아가는 데 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B. 세례의 역사적 변형
그러나 예배와 마찬가지로 세례도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커다란 변화를 동반하였다. 역사적 변화는 크게 두 단계로 대분할 수 있으며, 그 하나는 교부 중세시대를 묶어 동,서방 교회의 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 시대로 나누어 풀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부 중세시대의 세례는 한 마디로 사도시대의 단순성’(Simplicity)으로부터 복잡한 예식(rite)으로 변모하였던14)것이 특징이었다. DidacheJustin은 세례 이전의 교육(Pre-baptismal catechesis)을 강조한 데서 시작하여(준비기간금식, 가르침, 신앙고백, 신앙생활) 세례는 물이 있는 밖에서 침례(Immersion)의 방법으로 실시하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게 하였으며, 세례직후 수세자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공동기도와 평화의 입맞춤을 한 후 곧이어 성만찬(Eucharist)에 참여케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5) 여기서 감독이 세례를 집례하는 주역이 되었으나, 아직은 안수성령의 은사에 대한언급은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세례가 보다 복잡한 예식행위로 변모하게 된 역사적 계기는 3세기 터툴리안’(Tertullian)세례론(De Baptism)히포리투스’(Hippolitus of Rome)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에서 표출된 제문(祭文/formula)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 세례를 변호했던 터툴리안은 세례는 부활절에 실시했으며, 감독이 세례를 물속에서 집례하게 했으며 장로가 기름을 부으면 감독은 안수를 하는 예식으로 바꾸었다. 예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세례이전 3년간 세례를 준비하는 학습기간을 두었던 데 있었다. 그리고 세례전 3주간의 집중적인 준비가 선행되어야 했으며, 세례예식은 침례’, ‘안수’, ‘기름부음’, 성령의 임재기도’, ‘최초의 성만찬으로 이어졌던 것이 특색이었다.16)
 
 
 
존스’, ‘웨인라이트’, ‘아놀드가 공동편집한 연구에 따르면 3세기에 이미 복잡한 예식으로 변모한 세례는 4~5세기, 중세기를 거치면서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었고 또 성직화(감독의 권한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세례 준비기간이 길수록 좋다는 사상이 확산되면서 Ambrose, Augustine, Chrysostom, Jerome때에는 세례 그 자체보다 세례준비기간(catechumenate)의 의식(ceremony)을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부활절 세례 예식을 앞두고 40일 전에 세례받기 원하는 수세자의 등록과정을 철저히 감독하고 강화하였다.17) 이것을 등록의식(Ceremony of Enrollment)이라고 불렀다.18) 그리고 세례의식은 최후의 입회의식’(Rite of Initiation)으로 이어졌다.
 
 
 
입회예식은
 
 
 
세례용 물통(baptistery)의 입장으로 시작하고
 
 
 
감독은 수세자의 콧구멍(nostrils)과 귀를 만지고(서방교회에서만)
 
 
 
마가복음 734절을 아라멕과 라틴말로 반복하고
 
 
 
온몸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고(귀신쫓는 기름)
 
 
 
사탄을 포기하는 선서를 하고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고(동쪽을 향해)
 
 
 
세례물을 축복하고
 
 
 
세번 침례하고(흐르는 물이 무릎까지 닿으면 감독이 머리에 손을 얹고 물밑으로 누른다)
 
 
 
머리에 기름을 붓고
 
 
 
세족식을 가지고(물에 나오면 감독은 수세자의 발을 씻는다)
 
 
 
흰 옷을 입히고(순결의 상징)
 
 
 
성령의 인침을 기도하고
 
 
 
투광’(Illumination)(촛불을 켜고)
 
 
 
성만찬 참여(흰옷을 입고 촛불을 들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 떡과 포도주를 분급 받은 후 우유와 꿀을 마셨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상징이다.19)
 
 
 
그러나 6세기로부터 시작하여 16세기(종교개혁시)에 이르는 중세기의 세례예식은 또 다른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하나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에 따른 예식의 변화였으며, 다른 하나는 세례’(Baptism)견진례’(Connrmation) 사이의 분리였다 개렛’(T. S. Garrett)의 해석에 의하면 세례예식의 변화 뒤에는 한 가지 변인(variable)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독(bishop)들이 모든 예식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했던 데 있었다는 것이다.20)
 
 
 
중세기에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방인들이 신자가 되고, 이 과정에서 세례전의 엄격했던 교육(catechumenate)이 자연히 쇠퇴해간 원인도 문제였지만, 그 보다는 감독의 권한이 교회치리뿐 아니라 세속적 영역으로까지 크게 확대되면서 사실상 모든 세례예식에 참석하여 기름을 붓는 예식(Chrism)과 안수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왔으면서도 예식의 독점권을 포기 않고 계속 주장한 데 있었다. 그 결과 세례와 견진례(Confirmation)을 분리시키든지, 감독이 참여하는 장로들의 집례를 허용하는 선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21) 그러나 동방교회는 서방교회로부터 다른 세례예식을 선택하였다. 장로들의 집례가 허용되었으며, 기름붓는 예식(Chrism)에 사용되는 기름의 봉헌은 메트로포리탄’(Metropolitan-대주교같은 위치)이나 지역 감독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안수는 폐지시켰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허용하였다.22)
 
 
 
그러나 서방교회는 모든 세례의식에 참석이 불가능하면서도 감독이 계속 기름붓는 예식’(Chrism)과 안수를 계속 고집함으로 인해 입회예식(rite of initiation)은 둘로 갈라놓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나는 물의 세례는 유아기로 하게되고 다른 하나는 견진례(Confirmation)는 칠 년 뒤에 감독이 직접 수행하는 예식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세례와 견진례는 사실상 분리되었다. 그후 물은 중생뿐 아니라 성령의 은사도 함께 주어지는 완전한 예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견진례(Confirmation)는 어린 아이들에게 신앙이 성숙되도록 ’(strength)을 더해주는 것으로 바꾸었다.23) 여기서 세례와 견진례는 7년을 공백으로 하는 두 예식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본래 견진례의 어원인 ‘confirmatio’는 주후 640화우투스’(Fautus)라는 사람의 설교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는 물의 세례 이후 성령의 임재를 힘입어 싸움에서 이기는 힘을 주는 성례전적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confirmatio’는 로마교회 뿐아니라 모든 세례예식에 통용되었었다. 그러나 감독의 집례권의 고집으로 입회예식(Initiation Rites)는 세 부분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물의 세례, 견진례(Confirmation)(일곱 살 때), 성만찬은 각각 독립적인 예식으로 분리되고 만 것이다.24)
 
 
 
이렇듯 세례가 교부시대와 중세기에 오면서 복잡하고도 신비스러운 의식으로 바뀌고, 그 뒤에는 감독의 집례독점권이 작용하면서 세례는 사도시대의 단순성은 깨지고 성서에서는 증거되지 않는 기름붓는 예식’, ‘안수같은 요소들이 들어서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성령의 세례와 종말론적이 구원이 물의 세례를 통하여 경험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실천했던 사도행전과는 달리 성령의 임재와 인침을 성례전적 통로 안에 묶어두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터툴리안과 히포리투스에게서 기름붓는 예식안수는 성령의 임재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극히 비성서적이었다.25)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로운 은혜에 속하는 것으로 그 어떤 예식이나 의식에 매어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부시대-중세시대의 세례의식이 고도로 예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기의 세례예식은 비성서적 요소들의 첨가와 감독들의 교권화로 인하여 처음교회의 기독론적, 종말론적 역할을 상실한 성례주의에 빠진 이유가 있다고 본다.
 
 
 
세례의 역사적 변형 두번째 시기는 종교개혁과 개신교시대로 구분되며, 이 때의 종교개혁자들은 이중적인 신학논쟁을 벌여야했다. 하나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라틴의식을 거부하는 일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재침례파(Anabaptist)의 이론과 실천을 반교하는 일이었다.
 
 
 
존스, 웨이라이트, 아놀드는 로마교회의 라틴의식을 반대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이유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그 처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는 물의 세례 외의 다른 의식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름사용’, ‘촛대’, ‘소금등의 사용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본질의 것이 아닌 첨가물들은 모두가 미신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세번째로 빈교회에서나 수시로 실시하는 유아세례는 세례의 교회적 차원(공동적이고 공적인)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네번째로 대부(代父-godparents)선정에 충분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라틴어로 집례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이유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교회의 라틴의식을 반대했다는 것이다.26) 한 마디로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에서 증거되지 않은 비본질적 첨가물들을 신성화하여 세례를 마치 신비적인 의식으로 전환함으로 신앙적 차원으로부터 세례를 분리시킨 로마교회의 세례예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또 다른 싸움을 수행해야했다. 그것은 유아세례를 전면 부인하는 재침례파와의 싸움이었다. 유아세례와 견진례(Confirmation) 모두를 비성서적이라고 보는 재침례주의자들은 세례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연령의 사람에게만 가능하고 유효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유아세례 대신 어린이의 헌신예배는 적극 권장하였다.27)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재침례파의 이론을 다음 다섯 가지 이유로 반대하였다. 첫째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맺으셨으며, 이 언약 안에는 기독교 부모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유대인 어린이가 할례에 의한 언약이었다면, 기독교인 유아들은 세례에 의해 언약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예수께서 어린이를 환영하고 용납한 것처럼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용납해야한다는 것이다. 네번째로 믿는 부모가 거룩하면 자녀도 거룩함으로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다섯번째로 신약의 가정(가문)이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는 어린이들도 포함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는 유아세례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믿었다.28)
 
 
 
그러면서도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유아세례 예식 구조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위의 도식에서 본 것처럼 유아세례에 관한한 루터는 쯔빙글리나 부처 그리고 칼빈보다 훨씬 보수적(예배에서처럼) 반면에 다른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보다 사도시대의 단순성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견진례(Comfirmation)에 와서는 루터와 부처의 입장이 뒤바뀌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견진례에 대해서 루터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발명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루터에게는 견진례가 없었으며, 그 대신 성만찬에 어린이들이 참여하기전 배워야할 대·소 교리문답서(Catechism)를 내놓았다. 여기서 칼빈도 루터처럼 견진례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성령이 증거하지 않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주기도문’, ‘신조’, ‘십계명을 말할 수 있는 때부터 성만찬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세례와 성만찬 사이에 견진례’ (Confirmation)가 아니라 교리문답과 주기도, 신조와 십계명을 다리로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 (Bucer)는 안수와 견신을 그 사이에 둠으로 영국교회와 함께 견진례를 인정하는 보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29)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문제는 보다 깊은 곳에 있었다. ‘존스’, ‘웨인라이트’, ‘아놀드는 종교개혁자들의 문제는 중세 로마교회의 잘못된 세례예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려다가 오히려 해결은 커녕 문제를 더 악화시킨데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입회예식(Initiation Rite)을 유아세례예식 따로, 견진례를 후기로(부처) 분리시킴으로 사실상 로마 교회가 범했던 세례와 견신과 성만찬의 분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했다고 보고있다.30)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방교회만이 유아세례를 포함하는 세례예식(물의 세례)과 견진례(Confirmation)와 성찬식 (Eucharist)을 하나의 의식(Single ceremony)으로 엮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31)
 
 
 
C. 역사-종말론적 순례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인침으로서의 세례-세례신학의 회복
세례의 신학문제는 "세례가 누구에게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교회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초대교회의 질문에서 발화되었었다. 그러나 세례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기독론적의미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된다는 교회론적의미가 연계되어 이해되었고 또 실천되었다. 여기에 웨인라이트는 오고있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중생의 삶을 덧붙혀 세례의 종말론적’, ‘윤리적차원을 심화시켜 해석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교부시대에 들어서면서 세례가 신학적 문제로부터 하나의 의식(rite)의 문제로 전환되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적, 종말론적, 윤리적 통전성의 세례는 그 역동성을 잃기 시작한 데 있었다. DidacheJustin을 통해 드러난 세례는 세례 이전의 Catechesis,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시한 침례, 그리고 곧이어 성만찬에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이것은 통전의식’(single ceresmony)의 의미를 가진다. 세례 따로, 견진례(Confirmation) 따로, 성만찬 따로의 단절된 의식이 아니라 셋을 자연스럽게 입회예식’(Initiation Rite)안에 통합시켰던 것을 의미한다.
 
 
 
중세에 와서 세례는(서방교회) 완전히 세 가지 별개의 의식으로 분리되었다. 세례, 견진례, 성만찬은 시간적으로 서로를 때어놓은 채 사실상 연결을 상실한 의식으로 탈바꿈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수정작업은 몇 가지 비본질적 요소들(기름사용, 촛대, 소금 등)을 제거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나 단절된 세례와 견진례와 성만찬 사이를 이어놓는 데는 미흡하였다 더욱이 처음교회의 세례가 지녔던 기독론적이고, ‘교회론적이며, ‘종말론적이고 또 윤리적차원의 신앙적-신학적 의미를 회복하는 데는 크게 미흡하였다.
 
 
 
그리하여 종교개혁기로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회마다 다른 이해와 실천의 틀을 가지고 방향없는 의식으로 세례를 몰아가고 있었다. 이 때 동방교회만이 세례견진례’(Confirmation)성만찬을통합된 의식(single ceremony)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세례견진례’, ‘성만찬을 분리시켜 실천하고 있다. 영국교회 (성공회)는 루터와 칼빈과는 달리 견진례’(Confirmation)를 세례의 약속을 갱신하는 기회뿐 아니라 성만찬에 참여하는 선행조건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진 채 세례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하나는 세례와 견진례와 성만찬을 각각 분리시켜 실천하는가하면, 다른 하나는 물의 세례만을 성례적 의미로 인정하고 견진례는 성례전이 아니라 약속의 갱신으로만 수용하고 있다. 세번째는 성인세례만을 인정하고, 유아세례와 견진례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32)
 
 
 
오늘의 세례문제는 크게 두 가지 문제로 집약된다. 하나는 세례의 통전적 의미와 의식이 깨짐으로 세례의 신학적 의미가 퇴색된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세례의 신학적 의미가 교권의 한 수단으로(교인만들기)전락한 나머지 세례가 지녔던 깊은 신앙적-신학적 경험을 상실한 데 있다. 세례는 본래 십자가의 죽음을 예시한 세례를 받으셨던 예수의 죽음에 함께 죽고 다시 사신 부활에 참여하는 기독론적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곧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공동체적차원의 참여였다. 교회공동체의 참여는 역사와 삶을 장차 완성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윤리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세례는 이 차원들을 상실한 채 형식과 의식 그리고 교권적 관심의 영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세계교회는 19세기 이후 세례 회복을 위한 교회적-신학적 몸부림을 시도해오고 있으며,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세례회복을 위한 신학적인 갱신 움직임은 19세기 영국의 옥스포드 운동을 계기로 영국교회가 견진례의 성례전적 중요성을 제기한 데서 시작하여, 19세기에서 20세기 그리고 제2바티칸 공의회로 이어지면서 펼쳐온 로마 가톨릭교회의 소위 예전운동’(Liturgical movement)에로 확산되고 있다.
 
 
 
19세기 세계교회의 선교의 확대는 선교지에서 유아세례못지 않게 성인세례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 교회 역사를 완전히 바꾸기 시작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례신학의 회복을 모색하는 길고 지루한 연구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보다 큰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색은 세례와 견진례와 성만찬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실천해오던 옛 구조를 넘어서서 하나의 통합된 기독교적 이니시에이션’(Christian Initiation)의 구조로 바꾸어가려는 경향이다.33) 이는 미래교회 연합운동과 교회일치에도 적지 않은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할 신학운동으로 평가된다.
 
 
 
세례신학을 몇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세례신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제2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향하는 세례신학이다. 유아세례의 신학적 근거를 하나님과 어린이의 새로운 관계 형성에 두고 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아세례를 비판한 바르트에 대한 반교뿐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해야 한다는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교리교육(catechesis)으로부터 기독교교육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또한 성인세례 이해에 있어서도 세례는 기독론적차원과 교회론적차원의 양면을 회복해야하는 것으로 전환하였다. 세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삶 그리고 복종을 위한 성례전이라는 의미에서 세례는 기독론적인 것이다. 동시에 세례는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표현하는 공동의 행위(기도하고 환영하고 참여하는)라는 의미에서 교회론적’(ecclesiological)인 것이다.34)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고도의 성례주의’(sacramentalism)로부터 기독론적이고도 교회공동체적 성례전에로의 전환가능성인 것이다.
 
 
 
세례신학의 두번째 흐름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오는 예배개혁 속에 나타나있다. 1974아크라’(Accra) 문서, 1979년 세례에 관한 루이빌’(Lauisville)협의회 그리고 1982년 세례에 관한 리마본문’(Lima Text)으로 이어지는 진행 속에서 형성된 세례신학은 정교회(0rthodox)와 침례교회까지 포함된 모든 개신교회의 참여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것이다.
 
 
 
에큐메니칼 세례신학은 세례는(유아세례와 성인세례 모두 포함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전사건(total Christ event)에 그 뿌리를 둔다는 신앙적-신학적 고백과 긍정에서 출발하고 있다.35) 예수의 요단강 수세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고난받는 종으로 예수를 인도한 세례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의 예시요, 또 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처음교회가 실시했던 세례의 기독론적 차원의 회복이다. 어떤 방법으로 참여하는가? 성례전으로? 아니다. 참여의 방법은 부활하시고 다시 완성하실 그리스도의 약속과 능력 안에서 새 삶을 살아가는 제자의 길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윤리의 회복이다. 여기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Sign)인 것이다.36) 이러한 신학적 도출은 정교회 대표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침례교회 대표까지 동참한 데서 온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협의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세례를 철저한 신앙고백 위에 두고자 하는 그룹과 세례를 성령께서 인치시는 성례전으로 보는(견진례를 강조하는)그룹사이의 양극적인 대림에 있었다. 결정적인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협의과정은 잠정적인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합의하였다. ‘워그너는 이를 제3모형 (model c)이라고 불렀다. 3모형은 유아세례(침례교회를 제외한 모든 개신교회와 정교회)는 성장후의 신앙적 고백과 헌신을 반드시 동반하는 이니시에이션’(Initiation)-(기독자가 되는), 전 과정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과 헌신은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 데 필요한 세례의 열매로 해석되었다. 여기서 사실상 유아세례와 성인세례가 공히 수용되었을 뿐 아니라 견진례’(Confirmation)(유아세례에 따르는)신앙고백’(Confession)-(성인세례의 근거) 모두를 연결시키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 것이다.37)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았다. 유아세례와 신앙고백과 헌신 사이를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이라는 질문이었다. 이 사이를 견진례’(Confirmation)향유를 바르는 성례’(Chrismation)를 제시하는 그룹과 그것들을 반대하는 그룹 사이에서 또 다시 제3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기독교교육과 기독교적 카테케시스(catechesis)였다. 다시 말하면 유아세례와 신앙고백과 헌신 사이는 교회가 실시하는 신앙양육과 가정에서 부모와 대부가 시행하는 기독교적 양육이 그 다리를 이어줄 수 있다는 권고였다.38)
 
 
 
중요한 것은 유아세례-견진례-성만찬으로 연결짓는 교회나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신앙고백에 근거한 성인세례만을 강조하는 교회 모두가 기독교적 양육이라는 매개를 세례와 연관해야한다는 새로운 인식의 도출이었다. 유아세례는 기독교교육을 통하여 신앙고백과 헌신에 이르게 해야하며, 성인도 기독교교육적 과정을 거쳐 세례에 임해야 한다는 공감대 형성이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제2바티칸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추구하는 신학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같은 에큐메니칼 신학형성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웨인라이트’(G. Wainwright)는 그의 초기 세례신학을 선교신학의 관점을 풀이했으며, 이를 세례신학의 세번째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세례신학의 프리암블’(Preamble)-서장-을 선교에서 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때와 그의 재림에서 오실 때 사이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라는39) 선교신학적 구조에 두고 있는 것은 대단히 인상적인 접근이다. 이것은 선교신학적 접근이기 전에 종말론적 해석이라고 본다.
 
 
 
여기서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아버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도록 위임되었다. 여기서 세례는 선교적 의미를 가진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세례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동시에 그 공동체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뿐 아니라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에 참여하는 의미인 것이다.40)
 
 
 
이 모든 논의로부터 우리는 세례신학의 가능성 몇 가지를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로 에큐메니칼 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우리는 각기 다른 교회의 전통과 신앙고백을 존중해야 하는 방법론적 전제로 수용한다. 여기서 유아세례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신학적인 정죄는 금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차이점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두번째로 더 중요한 것은 차이점들을 초극하고 새로운 신학적 연결을 가져올 수 있는 성서적-신학적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유아세례의 찬반론, ‘견진례에 대한 찬반론으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성서적이고도 역사적인 모티브(motif)에서 찾는 일일 것이다.
 
 
 
세번째로 바로 이 성서적-신학적 패러다임을 웨인라이트는 일찍이 4차원에서 논의한 바 있었으며, 이것은 세례신학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틀이 될 것이다. 그 첫째가 기독론적 차원의 회복이다. 세례는 예수의 수세에 근거를 두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예시하는 세례였다는 점에서 세례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중요한 구원의 매개였던 것이다. 세례의 기독론적 차원의 회복이란 모든 세례는(그것이 유아세례였든, 성인세례이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의미의 회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성례전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구원사적-기독론적 사건인 것이다. 근래의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교회도 세례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세례신학의 두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세례는 동시에 그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적 전제없는 교회 공동체에의 참여는 자칫 세례를 교권의 수단으로, 교회확장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에 빠진다. 세례의 교회론적 차원은 감독이나 주교의 독점이나 신비적인 성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세워가는 공동체에 참여하고, 기도하고, 또 환영하고 교제를 나누는 코이노니아적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세례가 교회 공동체와의 연관이 없는 하나의 성례전적 행사로 전락한 데 있는 것이다.
 
 
 
세례신학의 세번째 차원은 세례는 오고있는 하나님 나라, 완성의 때를 대망하는 종말론적 행위라는 차원이다. 세례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용서함받고 증언하고 선교에 임하는 종말론적 순례를 위한하나님의 인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교육과 기독교적 양육이 자리잡아야 한다. 여기서 기독교교육이란 세례 받은 자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의 고난에 동참케 하며, 하나님 나라 소망을 알게 하고, 믿음으로 응답케하는 모든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세례의 종말론적 차원이란 삶과 역사 그리고 신앙까지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순례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세례신학의 네번째 차원은 윤리적인 삶의 전환이다. 삶과 역사와 신앙 모두를 하나설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 땅에서 증언하고 섬기는 일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만일 세례의 성서적 의미가 이 4차원적 틀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례의 양면성(유아세례와 성인세례)을 수용하면서 그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견진례’(Confirmation)를 하고 않고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달리할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견진례가 지나치게 신비화되거나 교권의 손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넘어서서 세례와 견진례와 성찬이 기독론적이고도, 교회론적이며, 교회론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이며, 종말론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차원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세례의 신학적 문제는 성례전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역사종말론적으로 풀어가는 때 새로운 실천적 가능성까지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 나라 잔치의 역사적 예시로서의 성례전
 
.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잔치의 예시로서의 성만찬
교회역사를 통해 노출된 교회의 분열이 세례문제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해온 성만찬이해를 둘러싸고 일어났다는 아픔을 기독교세계는 모두 안고 있었다. 교파와 교파 사이의 다른 성만찬 신학 이해는 한 성령 한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도 주님의 식탁’(The Table of the Lord)에 함께 앉는 일은 서로가 거부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같은 개신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성만찬 이해는 분열에 또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세계의 큰 비극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거치면서 불기 시작한 신예전운동’(New Liturgical Movement)에서 발화된 에큐메니칼대화는 성공회와 로마가톨릭’, 성공회와 루터교’, ‘루터교와 개혁교회’, 그리고 루터교회와 로마 가틀릭교회사이의 공동연구에로 이어지면서 일대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다.41) 이것은 2000년대의 분열의 아픔을 안은 기독교세계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선택하는 일치의 첫 걸음이었다. 여기에 1982년에 제정되고 발표된 리마예문’(Lima Liturgy)(W.C.C.의 영향과 노고 끝에 합의된)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42)
 
 
 
7성례를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교회까지를 포함하여 기독교세계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공감대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특징이기도 하다. 공감대란 세례와 성만찬은 주님 예수께서 제정하시고 또 명령하신 두 성례이며, 이것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는 이해이다.43)그러나 세례는 단 한번만’(once-for-all)의 성례이고, 그리스도에게 향하는 결정적 전환의 의미(과거를 버리고 새 삶을 덧입는-종말론적)를 가진다면 성만찬은 날마다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이 순례도상에 있는 참과 신앙을 지탱해주기(sustaining)위해 반복되는 성례라는 이해이다. 더욱이 성만찬은 공동식사(meal)의 개념으로 부각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체성(solidarity)을 강조하는 것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다.44)
 
 
 
A.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성만찬의 의미
성만찬의 성서적 증언은 그 용어가 가지는 다양성 때문에 때로는 혼돈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고 또 인용되는 용어는 "최후만찬" - he Last Supper" 이며,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날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눈 식사를 의미한다. 그리고 최후만찬은 그후 초대교회에서 실시한 주의 만찬’(The Supper of the Lord)으로 발전해간45) 근거가 되었으며, 여기에는 ’(bread)포도주’(wine)를 나누는 예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류맨’(John Reumann)은 해석한다.46)
 
 
 
그러나 최후만찬이라는 이름은 초대교회, 특히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고린도전서)에 오면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바뀌었던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든다면 주님의 식탁’(The Table of the Lord)(고전
 
 
 
10:16),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고전 10:16~17), ‘식사’(meal)(고전 11:25), ‘제단제물’(Sacrament of the Altar)(13: 10) 등의 다양한 명칭들이 주어졌다.47)
 
 
 
그중에서도 1800년 동안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 사용되어온 용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였으나, 역설적으로 이 용어는 성서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변인이 하나 깔려있었다. 그것은 2세기에 넘어오면서 성만찬을 식사(Agape Meal)로부터 분리하면서 성만찬을 유카리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48)
 
 
 
이렇게 2세기 이후로 사용되기 시작한 유카리스트가 어떤 성서적인 근거에서 유출되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접근은 학자들마다 다소 다른 자료에 의존하고 있어서 이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계속 남는다. ‘레만’(Helmut T. Lehmann)유카리스트는 특별히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덕을 나눈 감격(agalliasis)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며, 특별히 그 감격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부활의 현존을 경험하는 제자들과의 식사에서 표출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49)
 
 
 
그러나 류맨’(John Reumann)은 비록 신약은 유카리스트라는 말을 직접 사용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2세기로부터 사용된 유카리스트의 어원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축복의 의미가 포함된 유대전통에서 온 것이라는, 특히 베라카’(Beraka-히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016절에 나오는 축복’(eulogia-히랍어)과 고린도전서 1030절에 나오는 감사’(eucharistia), 그리고 요한복음 611절에 나오는 축사’(eucharistein)에서 유카리스트의 어원을 찾고 있는 일반적 접근에 동의하고 있다.50)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카리스트’(Eucharist)는 초대교회의 용어가 아니라 2세기 이후에 사용된 용어였다는 사실이다. 다만 유카리스트는 공동식사로부터 분리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였으며, 그 성서적 근거는 용어사용 이후에 뒤로 소급하여 찾은 것이다. 여기에는 주의 만찬과 부활 이후의 감격에서 찾는 접근과 고린도교회의 주의 만찬에서 찾는 접근, 둘로 나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카리스트’(Eucharist)감격’, ‘축복’, ‘감사라는 신앙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데는 모두가 일치한다.
 
 
 
그러나 성만찬의 성서적 논거는 "성만찬의 기원(origin)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서 보다 복잡하고도 심화된 논쟁으로 확산되어왔다.
 
 
 
성만찬의 성서적 논거에 있어서 하나의 접근은 전통적 방법으로 분류되는 해석이다. 여기에는 훼릭스 써롯트’ (Felix L. Cirlot),51) ‘바클레이’(William Barclay),52) ‘콘첼만’(Hans Conzelmann)53) 그리고 화이트’(James F. White)"54) 등이 속한다. 이들이 시도하는 전통적인 접근방법에는 몇 가지 중요한 공통적인 논제들이 깔려있다. 그 하나는 성만찬의 최초의 기원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예수의 최후만찬(The Last Supper)였으며, 그 최후만찬은 구약의 유월절 식사’(Passover Meal)와 밀접히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강조이다. ‘써롯트’(F. Cirlot)는 최후의 만찬이 유대주의 하브로스’(Haburoth)식사라는 전통에서 온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브로스 식사는 안식일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포도주 축복 키두쉬 (Kiddush) - 그날의 축복 합의 축복 주식사(main meal) 최후의 교제를 위한 술의 축복 찬송으로 끝마침으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초대교회의 사랑의 애
 
 
 
’ (Agape Meal)의 원형이었다는 것이다. 55)
 
 
 
바클레이’(Barclay)는 성만찬의 시작은 예수의 최후만찬에서 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누룩없는 빵을사용한 유월절 식사였다는 것이다56). ‘콘첼만’(Hans Conzelmann)은 고린도교회에서 실시한 말씀사역은 회당예배에서 온 것이었으며, 비신자까지도 참여가 허용된 말씀중심의 예배는 오전 중에 실시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저녁에만 실시된 식사는 주의 만찬’(고전 11:20)이었다는 것이다.57) 그러나 화이트’(James F. White)는 초대교회예배 전체가 희생을 강조하는 성전예식, 말씀과 기도와 축복(berakah)을 강조하는 회당예배, 그리고 최후만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유대가정식사와 전통 모두를 포괄한다고 보았다.58) 표현과 강조는 달랐어도 그들은 성만찬의 기원을 예수의 최후만찬에 두었으며, 그것은 유대전통의 연장 혹은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가장 현대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류맨’(John Reumann)예레마이스’(Joachim Jeremias), ‘로스’(Robert p. Roth) ‘본캄’(G. Bornkamm)의 연구를 배경으로 다락방에서의 주의 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보고 또 유일한 성만찬의 시작으로 보아온 전통적 해석을 부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락방 만찬이 어떤 형태의 것이었고 또 떡과 포도주를 들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가 분명치 않는 현대 성서신학에 근거하고 있다.59)
 
 
 
류맨에게 있어서 다락방 논의보다 더 중요한 차원은 예수의 지상사역 전체 속에 드러내주신 제자들과 죄인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과의 탁상교제와 대화’(table fellowship & talk)였다는 것이다.60) 죄인들을 용서한다는 주제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코이노니아’(교제)의 주제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지상사역에는 5000명과 4000명을 먹이고 기적의 기사(6:31~44, 8:1~10) 가운데도 떡과 물고기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라는61) 축복의 과정은 다락방에서의 최후만찬만을 신비화해오고 또 성례전화해온 역사적 오류에 대해 시정을 가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개랫’(T. S. Garrett), ‘레만’(H. Lehmann), 그리고 콘첼만’(H. Conzelmann)에 의하여 강력한 동조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다락방에서의 최후만찬5000명을 먹이시고 또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신 예수의 식사와는 어떤 관계에 놓이는 것인가? ‘류맨은 여기서 새로운 종합을 시도한다. 다락방 최후만찬만을 성만찬의 근거로 삼았을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에 빠지고 만다. 반대로 죄인과 세리와의 식사와 교제만을 강조하면 자칫 그것은 역사도피적인 종파주의’(sectarianism)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락방에서의 특별한 식사-최후만찬은 예수께서 제자와 죄인들과 함께 나누신 교제와 식사라는 예수의 전 사역의 틀과 관계에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62) 예수의 전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제자와 죄인들과의 식사속의 탁상교제와 대화라는 틀에서 제자들과의 최후만찬을 보고 해석할 때 그 다락방 식사(배신당하신 날 밤)에서의 """포도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63)
 
 
 
이렇듯 예수의 전 사역에서 보여준 죄인들과의 교제와 다락방에서의 제자들과의 최후만찬의 통합된 관점은 초대교회의 실천으로 넘어오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계기를 거치게 된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부활사건이었으며, 부활사신 후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식사였다.64) 그래서 초대기독교인들의 성만찬은 생선식사’(fish meal)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레만은 풀이한다.65) 그러나 부활 이후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식사의 의미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예수의 고난과 죽음 뒤에 숨어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을(부활하신 예수의 현존 앞에서) 새롭게 회고할 뿐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하시는 하나님 나라 잔치(Messianic Banquet)를 미리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66) 이것은 예수의 행적과 십자가를 회고하는 계기뿐 아니라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고 또 대망하는 종말론적 축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증언된 내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한 성만찬의 성서적 논거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남아있다. 하나는 위에서 논의한 성만찬의 성서적 이해(예수의 사역에서 나타난 죄인들과의 식사와 교제-그리고 다락방 최후만찬의 의미 그리고 부활의 감격 속에 나눈 식사)가 초대교회에서는 어떻게 구조화된 경험으로 나타났는가? 라는 역사적 연결의 문제이다. 특별히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나누신 식사와 교제라는 차원과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나누신 예수의 최후만찬이라는 차원이 초대교회에서는 아가페 식사’(Agape Meal)주의 만찬’(Lord’s Supper)으로 구별되면서도 통합된 교제행위로 나타났던 것이다.
 
 
 
사도행전 246"집에서 떡을 떼며"와 고린도전서 1121절이하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갖다 먹음으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를 주석하는 성서학자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고린도교회는 성만찬과 아가페 식사의 분리가 아니라 통합된 의식이었음이 분명하다는 해석에서 출발한다.67) 초대교회는 성만찬(Holy Communion)을 독립적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애찬’(lovefeast) 또는 자선 애찬’(feast of charity)이라고 불리운 아가페 식사와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 졌었다는 의미이다(12). 바로 이 사랑의 애찬과 성만찬은 다음의 틀 안에서 진행되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잔치(feast)는 오후나 저녁시간에 가진다. 여기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가 참여한다. 단 음식은 부자들이 준비한다.
 
 
 
준비된 음식들을 위한 기도와 축복이 주어진다.
 
 
 
공동으로 식사
 
 
 
사랑의 입맞춤’(Kiss of Charity)(벧전 5: 14)으로 식사를 끝마친다.
 
 
 
손을 씻는다.
 
 
 
예언자나 다른 지도자들의 인도하에 기도와 찬송을 부른다.
 
 
 
성만찬(Holy Communion) 혹은 떡을 떼는 일’(고전 11:21,25)6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만찬’(Holy Communion)(주의 최후만찬에서 그 제정의 근거를 찾음)아가페 식사’(이것은 가난한 자와 부자가 모두 초대되고 참여하는 것으로 죄인과 세리들과 식사와 교제를 나누었던 예수의 사역(교제)에서 그 근거를 찾음)가 별개의 예식이 아니라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 불리우는 한 예배, 한 예식을 구성했다는 사실이다.69)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만찬(Holy Communion)은 신비적인 것도, 성례전적인 것도, 교권적인 것도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의 예식인 모든 사람들, 특히 죄인들과 소외된 사람들까지를 초대하는 사랑의 공동식사(Agape Meal)의 틀과 구조 안에서 실시되었던 종말론적인 행위 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B. 성만찬의 역사적 변질
그러나 주의 만찬’(The Supper of the Lord)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남용(abuse)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와 실천의 변질은 여기서부터 온 것이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남용(abuse)이란 가난한 자와 노예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했던 애찬’(Agape Meal)(이는 주의 만찬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부자들이 일찍 와서 모두 먹어치웠던 데 있었다. 그로 인해 가난한 자와 노예들은 배고픔을 안은 채 집으로 가야했던 것이다(고전 11:21).70) ‘먹으러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도록되어있던 애찬’(사랑의 식사)에 가난한 자와 노예들이 노동 때문에 늦게 오는 틈을 타 부자들은 음식을 먼저 먹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고전 11:33).
 
 
 
이러한 부자들의 남용에 대하여 바울은 새로운 해결의 길을 제시했다.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고전 11:34)라는 충고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예측 못했던 결과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함께 나누었던 공동식사, 사랑의 애찬으로부터 주의 만찬을 분리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사랑의 공동식사(Agape Meal)로부터 주의 만찬의 분리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예수의 영적 교제와 대화, 다락방에서 가졌던 제자들과의 최후만찬, 그리고 부활하신 후 나누신 식사 모두를 하나의 종말론적 축제로 수용하고 실천했던 초대교회의 주의 만찬을 둘로 갈라놓는 시점이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성만찬은 독립적으로 분리되면서 애찬은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한 것이다.71)
 
 
 
존 류맨’(John Reumann)에 의하면 성만찬(Holy Communion)과 공동식사(사랑의 애찬) 사이의 분리는 초대예배에 몇 가지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공동식사라는 공동체적 무대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예배는 떡과 포도주만을 강조하는 성례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을 상징하는 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분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점차 그 자체, ‘포도주그 자체의 신빙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 결과 마가복음의 기록 시기나, 고린도전서 기록 시기에 이미 초대교회 안에는 떡과 포도주나 회중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식사와 교제의 관계로부터 떠나 마치 떡과 포도주 그 자체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달’(convey)하는 신비적 매개처럼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주의 만찬의 때(성만찬과 사랑의 공동식사가 함께 진행되었던)는 저녁이었으나, 성만찬이 사랑의 애찬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성만찬은 아침시간으로 옮기게 되었다.72)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은 모두가 참여하는 사랑의 식사’(Agape Meal)로부터 성만찬’(떡과 포도주 예식)을 분리시킨 데 있었다.
 
 
 
이렇듯 초대교회로부터 이미 시작된 성만찬의 역사적 변질은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중세에 이르러 더욱 교권화되고, 제도화되었다.
 
 
 
레만’(Helmut T. Lehmann)의 해석에 의하면 교부시대에 나타난 성례전은 크게 두 가지 신학적 범주로 구분된다. 하나는 성만찬의 상징주의’(symbolism)적 이해이며, 여기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알려진 교부들이 속한다. Athanasius, Eusebius, Gregory, Basil 등의 상징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성만찬을 영적인 양식’(Spiritual food)으로 해석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73)
 
 
 
그러나 두번째 신학적 범주를 실재주의’(Realism)라고 불렀다.74) 실재주의의 특징은 그리스도 자신이 떡과 포도주와 신비적으로 연합된다는데 있었으며, 이는 역으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데 있었다. 실재주의적 성례전을 처음 주장한 Justin은 이미 그의 예배 예전에서 감독(당시 회장으로 호칭된)이 드리는 성만찬 기도’(Eucharistic Prayer)에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였다.75) 성만찬에 대한 실재주의적 이해는 Justin에서 이레니우스’(Irenaeus), ‘히포리투스’(Hippolytus), 예루살렘의 씨릴’(Cyril), 그리고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로 이어졌으며, 여기에는 애굽적인 헬라주의 사상의 마술적 예술’(Magic art of Egyptian Hellenism)을 반영하는 에피크레시스’(Epiklesis)(성령임재) 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한다.76) 이렇듯 성만찬의 신학적 이해와 교회의 실천이 교부시대에 오면서 실재주의로 급변하게 된 역사 뒤에는 임박했다고 믿었던 예수의 재림이 지연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으며, 그 뒤에 심화되어진 로마의 박해가 신앙과 교회를 신비화 방향으로 몰고갔던 것이다.77)
 
 
 
그러나 성만찬의 신학적 이해와 교회의 실천이 중세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 변질되기 전 교부시대의 성만찬을 특색지어준 신학적 사상은 희생’(Sacrifice)이었다. 최초의 희생사상은 순교자들의 윤리적 행위를 위한 기도에서 유래하였다. 그 다음은 제단에 바쳐진 헌물 위에 희생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기서 떡과 포도주는 희생적인 봉헌으로 드려졌었다(이레니우스). 그러나 희생사람이나 헌물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사제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대신 봉헌하는 희생으로 바뀌었다(히포리투스, 씨프리안(Cyprian)). 성만찬의 기도(Eucharistic Prayer)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변하고 또 재연하는 신학으로 바뀌었다.78)
 
 
 
이로서 교부시대의 성만찬은 아가페 식사라는 종말론적 공동체적 교제와의 단절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사제(priest)가 그리스도의 위치에 서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아버지께 드리는 모방(imitation)의 자리에까지 온 것이다. 결국 성만찬은 사제가 바치는 회생제사로 바뀐 것이다.79)
 
 
 
그러나 5세기를 계기로 교부시대로부터 서서히 중세기로 넘어오면서 성만찬의 문제는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현존하는가"(How Christ is present in Eucharist?)라는 교리적 논쟁으로 초점을 바꾸었다. 그리고 암부로스’(Ambrose)어거스틴’(Auigustine)은 각기 상반되는 신학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암부로스가 실재주의적인 관점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떡과 포도주를 설교한 반면에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능력으로 성만찬에 현존한다고 보아 사실상 실재주의를 거부하였다.80) 바로 이 두 사람의 신학적 갈등은 수세기 동안 연속되어온 실재주의’(Realism)상징주의’(Symbolism) 사이의 갈등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특별히 실재주의 사상의 범람에 대해 어거스틴의 사상은 일대 수정 뿐 아니라 성만찬 이해에 새로운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visible thing) 보이지 않는것(invisible)의 징표(sign)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없으며,오히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의 징표들이라는 것이었다.81)
 
 
 
이러한 실재주의상징주의의 사상적 갈등은 9세기 이후 중세에 나타난 두 상징적인 인물들에 의하여 심화되었다. 실재주의는 한 베네딕투스’ (Benedictus) 수도사였던 파사시어스’ (Paschasius Radbertus)(785~860)에 의하여 계승되고 확대되었다. 그의 주의 몸과 피에 관하여(On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에서 파사시어스는 사제가 성만찬 제정을 말하고 떡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나면 마리아에게 나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만이 남는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대답한다.82) 이는 실재주의의 부활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후일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예비하는 신학적 사상이었다.
 
 
 
그러나 중세에 나타난 또 다른 인물은 한 수도사, ‘라트람너스’(Ratramnus)였으며, 그는 파사시어스의 실재주의 사상을 부정하고 나섰다. 그는 성만찬 봉헌 이후에도 떡과 포도주는 그대로 있으며,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설파하였다. 그것도 신앙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영적 변화라는 것이다.83) 특별히 메이씨’(Gary Macy)는 이 접근을 신비적 해석 (Mystical Approach)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는 어거스틴’, ‘라트람너스’(Ratramnus), ‘안셈’(Anselm), ‘아베라드’(Abelard) 등이 속한다고 보았다.84) 여기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이고도 신비적인 연합에서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세기 성만찬 신학은 상징주의적-신비적 해석을 거부하고 화체설’(Tranbubstantiation Theory)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재주의의 부활이었다. 11세기 캔터버리대주교 랜후레인’(Lanfrane), ‘힐데버트’(Hildebert), ‘스테팬’(Stephen), 그리고 특별히 아퀴나스’(T. Aquinas)에 의해 주창된 신학은 화체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본질(substance)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화체(transubstantiated)되고 또 변화(converted)되고, 오직 떡과 포도주의 형태(accident)만이 남는다"는 것이다.85) 드디어 주후 1215년 제4라테란 공의회’(Fourth Lateran Council)는 성만찬의 화체설을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의회는 화체설에 근거한 성례전을 집례하고 참여하는 규칙들을 제정하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중세신학과 교회실천의 방향을 결정짓는 공식적인 교리가 되었다(성례전 외에 삼위일체론, 성육신, 교회론도 포함되어 있었다).86)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봉헌된 떡과 포도주에 임존하기 때문에 둘 중의 하나만 받아먹어도 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교리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결국 평신도에게는 포도주를 거부하는 성만찬으로 합리화되었다.87)
 
 
 
바로 중세기 화체신학의 성만찬 뒤에는 사제의 제사권이라는 것이 깊숙히 깔려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레만은 주장한다. 안수에 의한 사제(Priest)만이 미사를 집례하며,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화체하는 기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동시에 사제만이 인간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희생으로 바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소원을 담은 미사’(Votive Mass)까지 사제의 손에 주어지면서 미사의 ’()는 주간에 50여회로 늘어났으나, 평신도는 언제나 방관자의 위치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평신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1년에 3번으로 제한하기에 이르렀다.88)
 
 
 
이같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교리에 근거한 성체미사에 대해 강력한 반대와 비판을 가한 사람은 루터’(Luther)가 아니라 존 위클리프’(John Wycliff)였다. 1380년 내놓은 성찬론(De Eucharistia)과 그 후의 트리오로고스(Triologus)에서 위클리프는 화체설의 비성서적 논거는 우상경배로 끌고 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사상을 근본에서 왜곡시켰다고 비난했다. 위클리프는 성만찬이 봉헌된 후에도 떡은 떡으로 남는다는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다만 떡과 포도주는 봉헌된 이후 비유적으로(figuratively)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89) 위클리프의 이같은 성만찬 신학은 어거스틴 신학의 재해석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은 화체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도전은 루터의 저항을 자극했으며 후일 영국교회 성만찬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어서 중세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는 다시 루터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희생제로서의 미사, 성만찬의 한 가지만을(떡이나 포도주) 강조함으로 평신도를 소외시키는 미사, 그러면서 그것도 연 1회로 제한하는 미사, 그리고 소원을 담은 미사’(Votive Mass)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90) 루터에게 있어서 이러한 희생제로서의 미사는 자칫 잘못된 종교성을 부추기고, 구원을 마치 인간의 희생(a sacrificium)과 공로(opus bonum)로 혼돈시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1)
 
 
 
그러나 종교개혁운동이 온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주의 만찬’(성만찬) 문제는 오히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첨예한 신학적 문제와 논쟁으로 부각되었다. 특별히 루터’(Martin Luther)쯔빙글리’(Zwingli) 사이의 논쟁은 성례전 신학의 양극으로 치솟았다.
 
 
 
주후 1520년에 내놓은 작은 논문바벨론의 포로(De Captivitate Babylonica)에서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칠(7)성례 중에 네 가지를 비성서적으로 규정하고 세 가지 (3)만을 (세례, 성만찬, 회개) 수용하였다(회개는 그후 성례전적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사실 두 성례만이 인정되었다), 그리나 던스’(Duns) 이후로 성만찬은 성례전의 범주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루터도 성만찬을 세례로부터 분리시켜 그 의미를 추구하였다.92)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성만찬 이해를 흔히 쯔빙글리와의 논쟁에서 접근하는 통상적 방법과는 달리 논쟁이전부터 일관되게 추구해온 루터의 신학사상과의 연관성에서 찾는 제이부르크’(Seeberg)의 접근을 따르고자 한다. 제이부르크에 의하면 루터의 성만찬 이해는 컴뮤니오’(Communio) 사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컴뮤니오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성도와의 교제를 말하여, 모든 축복과 고난, 그리고 섬김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93) 그런데 이 ‘communio’로서의 교제는 떡과 포도주에서 상징되는 주의 만찬에서 오는 것이라고 루터는 믿었다.
 
 
 
여기서부터 루터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bodily presence of Christ)에로 옮겼으며,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은 사랑의 교제인 Communio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로써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은 루터에게 있어서 강력한 신념이 되었으며, 바로 이 근거에서 루터는 1520년 떡과 포도주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화체되고 오직 떡과 포도주는 그 형체(accident)만이 남는다는 화체설을 공식으로 부정하였다.94) 그리고 루터는 자신의 신학적 이해를 제시하였다. "떡과 포도주는 징표들(signs)이며, 그 징표 안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존한다"는 것이었다 "떡의 본질은 그대로 남지만, (화체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주어진다"는 것이었다.95)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은 죄의 용서와 은혜안의 신앙을 돈독케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동기를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96) 이것이 루터의 본래적인 성만찬 이해였으며, 후대에 이를 공존설’(Consubstantiation Theory)이라고 불렀다.97)
 
 
 
그러나 문제는 1522년을 시점으로 성만찬을 순수한 상징으로 보는 보헤미안 형제들의 견해, 홀랜드의 호니어스’(Honius)가 제시한 "이다"는 곧 "상징한다"로 바꾸어 성만찬 제정을 이해한다는 주장, 그리고 칼쉬타트’(Carlstadt)가 주장하는 "이것은"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나를 기념하여 받아 먹으라"는 곧 떡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맞서게 된 루터는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다시 주장하면서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몸이어떻게 (how) 현존하는가? 라는 새로운 해석의 과제를 발전시켜야 했던 것이다.98) 이것은 유명한 쯔빙글리와의 논쟁으로 발전한 계기가 되었다.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경쟁관계는 성만찬 신학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남부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수로 부각된 쯔빙글리와 종교개혁의 바람을 전유럽에 확산시키던 루터 사이의 정치적, 교권적 주도권 경쟁도 그 배경에는 깔려 있었다. 그러나 1524년과 1528년에 걸쳐 성만찬 논쟁은 가열되었으며,99) 그것은 1529‘Marburg Colloquy’로 알려진 토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루터와의 논쟁에 오기 전 쯔빙글리는 자신의 성만찬 신학을 발전시켜 오고 있었다.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는 요한복음 663절에 나오는 "육은 무익하니라"라는 구절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은 하늘에 있으며, 그러므로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육적 현존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서 시작했다. 따라서 성만찬 제정의 말씀들은 순전히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몸의 현존을 부정하는 대신 쯔빙글리는 성만찬기억’(memorial)으로 정의한다.
 
 
 
루터의 육적 현존 이해를 반박하고 루터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가기 위한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는 간단한 것이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희생된 몸과 피의 징표’(sign)이다. 이 징표들은 바쳐진 몸과 피를 드러내고(signify)또 구원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오직 신앙만이 이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나, 참으로가 아니라 신앙의 명상(contemplation)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성만찬에 임재한다"고 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