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4일 금요일

구속사 설교에 대한 견해들(김지찬 교수와 유해무 교수)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

1 구속사적 설교와의 운명적 만남

필자가 대학과 신대원을 다니던 시절 (70연대 후반과 80 연대 초) 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 모델은 구속사적 설교였다. 당시 필자는 모범적이고 예화 중심적인 한국 교회의 설교 형태에 식상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처음 1 년은 구속사적 설교가 지향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광대한 구속사적 전망, 성경 신학적 접근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 웬지 모를 아쉬움과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대원 2 학년에 접어들면서는 구속사적 전망과 성경 신학적 접근은 사랑하면서도, 설교 형태 만큼은 소위 구속사적 설교의 패턴을 벗어나고 있었다. 결국 신대원에서 "설교 연습" 시간에 필자의 설교는 내용도 "구속사적" 이 아닌데다가, 전달의 어조마저 박력이 없어 "복음에 열정이 없다" 는 선언과 함께 "그렇고 그런" 성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필자와 구속사적 설교의 만남은 열애로 시작하였으나, 이렇게 급속히 식기 시작했다. 물론 점수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들이 설교를 하면, 당회장이 불러다 "자네 설교는 구속사적 설교가 아니라" 고 질타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건 아닌데" 라는 반응과 함께 소위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와의 결별은 어쩌면 필자에게는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을 이론적으로 정확히 지적할만한 능력은 없었다. 단지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 한국 교회 안에서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접하고 난 후에 느끼는 지루함과 배타성에 대한 불만이 있을 뿐이었다.


2 구속사적 설교의 오랜 유행

필자는 6 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93 년에 귀환하면서, 구속사적 설교 운동의 한계를 한국 교회가 느끼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을 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구속사적 설교 운동은 그 기세가 조금도 죽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는 구속사적 설교를 비판하는 시드니 크레이다누스 (S. Greidanus) 의 박사 학위 논문인 "오직 성경만으로" 가 한국에 번역 소개되면서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나,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를 다룬 베이커 (D.L. Baker) 의 "두개의 언약, 하나의 성경" (Two Testaments One Bible) 을 "구속사적 성경 해석학"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것을 보면 한국 교회 내의 구속사적 설교가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최근에는 구속사적 설교 운동이 약간의 내부적 교정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1998 년 11 월호 "그 말씀" 잡지의 특집이 "구속사적 설교를 말한다" 로 잡혀 있고, 그 안에 실린 여러 편의 논문들은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를 그대로 유지하고 약간의 변화와 수정만을 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오랜 인기와 유행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1930-40 연대에 화란에서 주로 있었던 해석학적-설교학적 논쟁에서 파생한 것이나, 화란에서는 1944 년 이후에는 소멸된 논쟁이다. 물론 1986 년에 화란의 한 교단 (Vrijgemaakt) 의 설교학 교수 (C. Trimp) 가 소멸된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댕겼다. 그러나 화란 자체에서는 별반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에서 더 큰 반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구속사적 설교가 한국에서야 비로서 제철을 만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3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

물론 구속사적 설교가 지향하는 원리인, "창조-타락-구속" 의 큰 틀과, "그리스도에 의해 이 구속의 역사가 성취되었다" 는 강조점은 구약과 신약을 해석할 때 포기해서는 아니되는 개혁주의적 해석 방법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화란과 한국 교회에서 지금까지 시행되어 온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는 기존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약간의 수정만을 가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장적" (內藏的)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는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인 "모범적 요소의 배척," "그리스도에 대한 지나친 직접 언급" 을 해결한다고 해서 내장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구속사의 틀이 너무 빠르게 본문 주해의 1 차 단계에 들어오는 것이 내장적인 문제이다.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학은 "문법적(문예적)--역사적--신학적(정경적)" 방법이다. 성경 해석자는 먼저 주해할 본문의 범위를 정한 후에 본문의 장르를 결정해야 한다. 본문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서 본문이 속한 더 큰 단락들 안에서 어떤 기능을 갖는지 살피고, 본문 자체의 구조 분석을 통해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의 관계를 찾아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며, 중요한 단어들의 의미론적 특성을 살피는 문법적-문예적 해석에 주력해야 한다. 그 후에 본문의 역사적-지리적-사회적 배경을 살피고, 본문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찾아보는 역사적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후에 마지막으로 현 설교 본문이 다른 성경 본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특별히 신약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정경적-신학적 해석이다.

위의 과정에서 보면 구속사적 설교 원리는 정경적-신학적 해석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 원리는 본문에 대한 1 차적 주해, 즉 문법적-역사적 주해가 끝난 후에, 2 차적인 수준 (구약과 신약과 관계) 에서 본문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보면, "구속사" 라는 틀 (때로는 온당하지 않은 잘못된 구속 개념을 가지고) 이 1 차적 본문 주해를 집어삼킴으로서 본문의 문법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4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고신대에서 가르쳤던 화란인 고재수 교수의 창 12:10-20을 본문으로 한 "아브람의 거짓말" 이란 설교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CLC, 1991], 16-22) 를 실제적인 예로 살펴보자. 거짓말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구속사적 설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고재수는 위 본문이 세가지 요점을 지니고 있다고 피력한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둘째, 아브람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사래의 몸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약속이 위태롭게 되자 사래를 구해내셨다. 고재수는 결론적으로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미 삼천년 전에 우리의 구원을 내다보시면서 사래를 바로의 왕궁에서 건지셨다" 라고 주장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삼천년 후에 믿음의 후손들의 구원을 위해 사래를 왕궁에서 구해내신 분" 으로 믿었다는 것이 과연 창세기 기자의 메시지인가? 오히려 근접 문맥인 창 12:1-3 의 약속과 연결시켜야 하지 않은가? 여호와께서 사래를 바로의 궁에서 건져낸 사건을 통해, 아브람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 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 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성취하는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5. 오직 성경만으로

앞뒤의 근접 문맥에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면서 먼저 본문 자체를 문법적-문예적-역사적 방법으로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절정에 이르는 구속사를 너무 "빠르게" 본문 안에 읽어들인 (reading into) 결과 이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는 성경 본문의 해석을 관장하는 "전체적 태도와 자세" 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1 차적 주해의 과정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서 본문을 오해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이런 내장적 문제가 있는 한, 약간의 교정과 수정만으로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를 지속시킬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오직 성경 본문만으로" 라는 종교 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모범적 설교든, 구속사적 설교든간에 성경 본문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여 한다면 계속해서 구속사적 설교를 고집하기 보다는 본문 중심의 설교로 돌아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성경 본문은 "구속사적 틀" 로 해석해야 비로서 살아나는 해석의 객체가 아니다. 성경은 이미 여호와의 "구속의 계획" 에서 나왔고, "구속의 역사" 를 증거하고 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의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며 다가오는 살아있는 말씀으로서 오늘의 "인간의 구속에 기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선포하는 설교를 진정한 의미의 "구속사적 설교" 라고 함은 지나친 주장일까?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에 반론한다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교수)

기독신문은 개혁주의신학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글을 연재하면서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를 첫 주제로 게재하였다(1998년 11월 4일). 실천신학 전공자가 아닌 구약신학 교수의 설교에 대한 글은 교의학(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토론을 원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나는 여러 부분에서 김 교수의 주장에 동의한다. 특히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는 성경본문의 해석을 관장하는 전체적 태도와 자세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일차적 주해 과정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본문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그의 지적에 전적으로 찬동한다. 성경본문은 '구속사적 틀'로 해석할 때 비로소 살아나는 해석의 객체가 아니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구속사적 해석이 체계(틀)가 될 위험은 얼마든지 있으며, 나 역시 그러한 '체계'를 거부한다.

그러나, 기본 명제에 대한 찬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제기와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있다. 그의 글에 있는 소제목들을 뒤집어서 살펴보겠다.

김 교수는 학교에 다니던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 모델이 구속사적 설교였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모델을 '열애'로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급속히 식기 시작했다. 여러 당회장들이 전도사들에게 '자네 설교는 구속사적 설교가 아니라'는 질타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급기야는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와 결별했다.


구속사적 설교와의 만남?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한국교회에서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가 정착된 적이 있었는가? 과연 70년대 말에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하여 구속사적 설교가 한국과 김 교수가 다닌 학교에 도입되었는지는 그의 글에 나타나 있지 않다. 김 교수에 따르면, 구속사적 설교는 주로 화란에서 있었던 논쟁에서 파생된 것이었는데, 과연 그 논쟁이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었는가?

유학 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구속사적 설교가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오랜 유행"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김 교수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김 교수의 평가대로라면, 본산지인 화란에서도 별로 반응을 얻지 못하고 지나간 주제인데 한국에서 제철을 만났으니 실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교수의 이러한 냉소적인 평가에는 열애가 식어 증오로 발전한 인상까지 받게 된다. 물론 절제된 글로 표현되었기에 필자의 인상이 부정확할 수도 있겠지만.


인기와의 연결을 부적절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다른 나라의 교회와 신학계에 대해서 싸잡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손쉽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김 교수의 글을 읽으면, 귀국 후 이 문제를 제기하는 자신을 마치 구속사적 설교의 인기와 유행의 허를 제대로 밝히고 대안을 제시할 수있는 적임자로 은연중에 부각시키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평가하는 발언으로 김 교수는 예상하지 못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런 투의 이야기는 학자답지 않은 방식일 뿐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논쟁이 화란에서 1944년이후 소멸되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는 인기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성경해석에 유행이 있다는 주장인데, 이를 필자는 경계한다. 소멸된 것이 다른 곳에서 제철을 만났다는 표현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결코 가령 주체성을 상실한 논쟁은 아니다. 설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교회와 설교자들의 왕성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가 유행과는 관계없이 논의의 주제가 된 것은 반길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인기와 연관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또 구속사적 설교가 소멸되거나 불을 댕겼으나 별 반응을 얻지 못한다는 말로 구속사적 설교를 폄하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논쟁이나 유행과는 관계없이 화란의 구속사적 설교를 기본으로 하면서 이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을 한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사실상 구속사적 설교는 인기와 유행을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지 않는가?

김 교수의 화란 교회에 대한 언급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으며, 인기와 유행이라는 말을 사용한 평가의 방식도 그릇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한 지적도 부정확하다. 과연 한국에서 구속사적 설교가 "오랜 유행"을 누리고 있는가? 한국교회 안에는 아직도 여전히 '인기와 유행'에 편승하여 그리스도가 설교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도덕적 훈화와 인간 중심적인 설교가 주도하고 있지 않는가? 두 권의 번역서 제목과 어떤 잡지의 특집 기사를 근거로 새로운 계절의 도래와 오랜 유행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너무 빠르게 읽어들인 본문"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가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경시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 실제적인 예로 화란인 선교사 고재수(N.H. Gootjes)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언급하였다. 이 맥락에서 고재수 목사는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하지 않는 자로 이해된다. 그런데 화란에서 공부한 김 교수는 화란 신학교육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김 교수가 말하는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제대로 못할 만큼 맹목적일까?

김 교수는 "아브라함의 거짓말"이라는 고재수 목사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결론을 인용하면서 고 교수가 근접 문맥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구속사를 너무 '빠르게' 본문 안에 읽어들인(reading into) 결과 이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가 쪽까지 지적하면서 비판한 설교의 본문을 읽으면, 근접 문맥의 창세기 12:2의 언약을 언급하고 있으며(20쪽), 그 다음에 나오는 "이삭의 거짓말"에 대한 설교를 읽으면 그것과 아브라함의 거짓말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도 본문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가 비판적으로 인용한 부분은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즉 김 교수가 개혁주의적 해석 방법론이라고 주장하는 문법적-역사적-신학적/정경적 해석에서 앞의 두 부분을 한 후, 신학적/정경적인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을 결론으로 이야기하는 문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들어서 근접 문맥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구속사를 너무 '빠르게' 본문 안에 읽어들였다고 할 수 있을까?


김 교수는 비판하는 사람의 글의 근접 문맥을 무시하고 설교의 결론을 마치 본문 주해의 과정인양 너무 빠르게 읽어들였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학문훈련을 받은 이가 전후 문맥을 경시한 채 이러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학문적 논의 이전에 있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는 본문을 오해하게 만드는 내장적(內藏的) 문제점이 있으므로 지속시킬 필요가 없고 오히려 '오직 성경 본문만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미 여호와의 '구속의 계획'에서 나왔고 '구속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의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며 다가오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늘의 인간의 구속에 기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경의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선포하는 설교를 진정한 의미의 구속사적 설교라고 주장한다. 결론의 이 말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이면 모두 동의할 것이고, 구속사적 설교를 옹호하는 이들 모두도 이 말에 대해서 동의할 것이다.



"오직 성경만으로"?

그런데 김 교수는 글의 중간 부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이 구속 역사가 성취되었다는 것은 '포기' 해선 안될 개혁주의적 해석 방법론이다"고 이야기했다(강조는 필자). 물론 맞는 말이지만 상당히 부족한 말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구약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는가를 매우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지, 당시의 유대 랍비들의 압력 때문에 구약을 기독론적 성취로 해석하는 것을 '포기'할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적극적성의 배후에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는 말씀이 있다.


동일한 적극적인 정신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함께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의 기치를 선양했다. 우리 역시 머뭇거리지 말고 두 가지를 함께 주장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 구약을 상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여 그리스도에게 오기를 거절했다(요 5:30-41). 그리스도에게 나오지 않는 한 유대인들의 영생이라는 말도 공허한 말이다. 김 교수는 성경을 "인간의 구속"을 위한 말씀으로 바르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말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 더 보강되어야 할 것이다.



의도적인 대립 구도의 "문제"

김 교수의 글은 유려하고 읽기 쉽다. 그러나 무엇이 빈 것 같다. 다시 찬찬히 읽으면 그 글이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비판하면서 대립 구도로 전개됨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일차적인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끝낸 후 이차적으로 신학적/정경적 해석을 해야 하는데, 구속사적 설교에서는 이차적인 작업이 일차적인 주해를 "너무 빠르게" 집어 삼키는데 내장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먼저 철저히 하자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성경해석은 오직 김 교수가 말하는 일차적 주해로부터만 시작해야 하는가?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하면 모든 주해자가 결국 동일한 해석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말인가? 이러한 객관주의를 김 교수가 주장한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김 교수는 그러한 단계론적 구분을 비판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일차적인 작업만 하고 이차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 해석은 없다. 두 단계의 상호의존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구속사적 설교에서도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하며, 근접 문맥이 아니라 성경의 장르를 중시하면서 정경적인 맥락에서 주어진 본문을 살핀다. 그가 거명하면서 비판한 고재수 교수의 {교의신학의 이론과 실제}(디다케, 1992)에 실린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의를 보면 이러한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 원리가 정경적/신학적 해석법에 속한다고 전제하고 비판을 한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가 없는 두 번째 단계는 없는 것이다. 사실 김 교수도 "너무 빠르게"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정도의 문제'로 보지 않고 두 가지의 대립되는 것으로 보면서 글을 전개한다. 말하자면 그는 상상적인 대립 구도를 전제하고서 이를 부수는 해체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를 "너무 빠르게" 비판한다. 마치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사전 정지 작업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표현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건설적 비판을 제안하면서

이 논쟁이 좀더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 교회의 설교의 상황을 좀더 직시 할 필요가 있다. 과연 개혁주의신학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연재에서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가 첫 주제로 취급해야 할만큼 구속사적 설교가 개혁의 대상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김 교수가 염려하는 식의 내장적 문제를 지닌 구속사적 설교가 한국에는 아직도 정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리여 그런 내장적 문제를 지닌 설교라도 정착이라도 하기를 필자는 염원한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설령 내장적 문제를 지닌다 하더라도, 모범적이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가 선포되기를 갈망한다. 한국 교회 안에는 아직도 여전히 '인기와 유행'에 편승하여 설교의 주인공이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도덕적 훈화와 인간 중심적인 설교가 강단을 가히 장악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의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김 교수가 비판하는 구속사적 설교를 '제대로'라도 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이런 상황이 형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병폐를 논의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사실상 구속사적 설교는 인기와 유행을 추구하는 운동은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내장적 문제'를 지닌 구속사적 설교는 한국 설교강단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버려져 있다. 그것은 정말로 '내장적' 문제의 연고가 아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김 교수가 추구하려는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바로 할 수 있는 신학교육과 훈련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교에서 그대로 추구하고 있는지를 살피면 왜 필자가 이런 안타까움을 표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비록 주경학자가 아니지만 문법적-역사적-신학적 주석을 기초로 하여 설교하려고 애쓴다. 교의학자인 나는 이런 주석에 기초하여 구약의 본문도 기독론적일 뿐아니라 '성령론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할 수 없을까를 궁리하고 있다. 즉 '내장적' 문제를 탈피한 구속사적 설교를 나 역시 추구한다. 어차피 김 교수 역시 구속사적 설교를 추구하는 이상, 용어상의 이해 차이를 무슨 엄청난 문제를 내포한 개혁의 대상이라도 되듯 구속사적 설교를 취급하는 인상을 지양할 수는 없을까. 마치 무슨 큰 토론의 내용이라도 있는 듯이 구속사적 설교 일반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아직도 설교가 여전히 바뀌어져야 하는 한국교회에 의구심만 가중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건설적인 비판만이 교회와 설교자들에게 유익을 끼칠 것이다.




유해무 교수의 반론을 읽고

네덜란드에서 1 년간 같은 도시인 캄펜 (Kampen) 에 유학하면서 교제를 나눈 적이 있던 유해무 교수가 본인의 글에 대해 응답을 보인 것은 개인적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교수와 필자는 원래는 같은 학교였으나 분리되어 동일한 도시 캄펜에 정착하여 발전해온 두 신학대학을 서로 달리 다녔고, 한국 교회의 소속 교단도 합동과 고신으로 다른 상황에서 당시 캄펜의 한국인 유학생들은 가능한 한 교리적이거나 신학적인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이 암묵된 관행이었기에 사실상 논쟁 거리가 있는 신학적 대화를 깊히 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먼저 유 교수가 본인의 글의 논지를 잘 요약하고 그 기본 명제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를 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유교수가 제대로 본 것처럼 구속사적 설교의 큰 틀과 방향에 대해서는 본인도 확호한 지지를 보낸다. 그러기에 글의 제목도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 라고 붙인 것이다. 유교수의 말대로 구속사적 설교를 "해체" 하려고 했다면,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고, "구속사적 설교는 이제 그만" 이라고 달았을 것이다. 기존 구속사적 설교의 양태에 들어 있는 큰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급히 개선되기를 바란 것뿐이다.


유 교수는 기본 명제에 대한 찬성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문제 제기와 전개 방식에 이견을 제기하였다. 우선 유 교수는 한국 교회에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가 정착된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구속사적 설교 "논쟁" 이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렇다! 한국에는 "논쟁" 이 객관적으로 소개되기 보다는 "구속사적 설교" 운동의 일방적 소개로 그친 감이 적지 않다. 1989 년에 한글로 번역 소개된 크레이다누스의 학위 논문 (1970 년에 자유대학에서 신학 박사 취득을 위해 제출한) 인 "오직 성경만으로" 는 비교적 이 논쟁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 모범적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를 뛰어넘어 제 3 의 길, 즉 "성경 본문 중심의 설교"를 이미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라고 붙였을 뿐 아니라, 고재수 교수는 이 번역서의 추천서에서 크레이다누스의 방법론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번역서는 충실하게 원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번역-소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제목을 바꾸고, 책의 방법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추천서를 원저자의 동의 없이 번역서의 첫머리에 실음으로서, 한국 독자들이 구속사적 설교 논쟁과 그 이후의 학계의 발전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1989 년에 이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이전에는 구속사적 설교 운동이 일방적으로 소개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본인의 글은 이런 점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좀더 객관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볼 것을 주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본인이 구속사적 설교를 "유행" 과 "인기"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보았다고 유교수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오해이다.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원 발상지인 화란과 비교해 볼 때 오랜 동안 외부의 비판이나 내부의 심각한 문제 제기 없이 진행되어 온 현상을 대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기 바란다. 게다가 이 글은 평신도들도 많이 보는 대중적인 신문에 실린 글인데다가 지면에 제한이 있었다. 따라서 표현상 더 정확할 수 없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더욱이 본인이 "구속사적 설교의 인기와 유행의 허를 제대로 밝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적임자로 은연중 부각시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지적한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과 대안은 앞서 언급한 크레이다누스의 논문에 이미 다 밝혀져 있다. 필자는 단지 이것을 우리식 정서에 맞게 지적한 것 뿐이다. 신문에 실린 짧은 글 안에서의 필자의 문제 제기를 가지고 "구속사적 설교의 폄하, 왜곡" 으로 보는 것은 감정적인 과잉 반응은 아닌가 묻고 싶다.


셋째, 고재수 교수의 구속사적 설교의 한예인 "아브라람의 거짓말" 이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제대로 한 후에 결론부에서 신학적 해석을 제대로 했는데 본인이 "근접 문맥을 무시하고 설교의 결론을 마치 본문의 주해 과정인 양 너무 빠르게 읽어들였다" 고 유 교수는 비판한다. 그러나 고재수 교수의 설교를 자세히 읽어보라. 그의 설교 가운데 문법적-역사적 주해 과정이 얼마나 되는가? 물론 짧은 설교이기에 이를 잣대로 재는 것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더라도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나기에 여기서 언급하려고 한다.


고 교수의 설교는 총 151 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그는 본문에서 도덕적 교훈을 찾아내서는 안된다는 논지로 모범적 설교를 비판하는데 61 줄을 할애하고 있으며, 구속사적 접근을 옹호하는데 10 줄을 쓰고 있다. 그리고는 바로 교훈으로 들어간다. 첫째 교훈은 그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것 (필자가 볼 때는 아브라함의 이전 생애와 연관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준 사건이 없기에 이전 문맥과 관계 없는 주해로 보임) 이라면서, 28 줄을 배려하고 있다. 둘째 교훈은 창 12:1-3 의 약속과 연관해서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18 줄을 할애한다. 셋째 교훈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래를 구원한 것을 보여준다면서 25 줄을 할애하고, 결론으로 6 줄을 언급하고 있다. 유 교수가 말하는 문법적-역사적 주해 과정은 기껏해야 총 151 줄 중에 18 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설교 작성 이전에 고 교수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드러난 설교 본문으로 볼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심술이 없는 한 우리의 논의의 대상은 드러난 설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교수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필자가 의도를 가지고 고 교수의 설교의 근접 문맥을 무시했다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화란에서 제대로 문법적-역사적 주석을 공부한 고 교수는 설교 이전에 이미 (확실치 않으나 그럴 가능성은 충분?) 건전한 주해 위에서 구속사적 접촉점을 찾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유 교수 말대로 제대로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바로 할 수 있는 신학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한" 한국 설교자들이 고 교수의 설교를 보고 문법적-역사적 주해 과정을 거친 후에 구속사적 접촉점을 찾는 구속사적 설교의 과정을 제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넷째 유 교수는 "오직 성경만으로" 와 함께 "오직 그리스도로" 도 강조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필자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은 기존 구속사적 설교가 그리스도를 강조하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의 풍성함을 가리운다고 본 때문이다. 구약 본문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문법적-문예적으로 해석하는 심오한 분석이 없이, 너무 빨리 구속사적 접촉점을 찾으면 소위 "설교학적 합선"을 일으키게 된다. 심층적 분석이 없이 너무 빨리 복음을 이야기하면 복음은 그 깊이를 상실하고 "뻔한 대답" (pat answer) 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뻔한 대답" 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필자는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본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문법적-역사적으로 심도있게 해석을 한후에 본문의 정경적 의미를 신약과 연결시켜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로 연결되는 강한 구속사적 전류를 느끼게 됨을 본문을 주해하며 한두번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필자의 접근은 그리스도를 더 강하게, 더 자연스럽게, 다양하고 영롱한 빛 가운데서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님을 유념해 주길 바란다.


다섯째, 유교수는 필자가 문법적-역사적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의 의도적인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유교수가 오히려 아직도 모범적-구속사적 설교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가 아직도 모범적인 설교가 횡횡하고 있기에, 차라리 그 병폐를 먼저 논의하고 구속사적 설교의 단점을 지적했어야 한다는 유교수의 지적은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필자도 유교수가 말한대로 양자택일의 길 밖에 없다면 모범적 설교보다는 구속사적 설교의 편을 들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범적 설교나 소위 구속사적 설교냐를 떠나서 "본문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 로 통합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본문 안에 모범적 요소가 있을 때에는 모범적으로 설교하면서, 매 설교마다 본문 스스로가 자연스레 구속사적 흐름을 드러내도록 구속사적 전망과 적용을 해내는 소위 "본문 중심의 설교" 로 통합이 되어야 한다. 모범적이냐, 구속사적이냐를 가지고 오랜 입씨름을 벌일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을 때에는 종교 개혁의 정신에 따라 다시 "원천 (성경 본문) 으로 돌아가" (ad fontes)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여섯째, 유교수는 필자의 한국 교회의 설교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유교수와 필자 사이에는 한국 교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설교의 문제점은 인기와 유행에 편승하는 모범적 설교에도 있지만 역사성과 시간성을 무시한 지나친 신학적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무시하고 소위 "4 중 의미"를 내세우며 신학적 해석을 통해 구약과 신약을 체계적으로만 보려고 했던 중세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성경의 곡해를 가져왔는지 교의학자인 유교수는 잘 알 것이다. 그러기에 루터와 칼빈은 성령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만 역사한다고 강조하며,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지지한 것이다. 성경 본문은 신학자나 설교자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필자도 지지하는 구속사적 설교의 틀이라 하더라도 그 틀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해서는 아니된다. 해석은 본문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유교수가 제안한대로 필자는 건설적 비판을 위해 글을 기고한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를 개혁 대상 1 호로 삼아서가 아니라, 역사적 본문을 어떻게 설교하면 좋을지에 대해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에서 언급한 것이다. 신문의 속성상 재미있게 글을 쓰려다보니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일부 인사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 해석은 개인의 과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과제이기에 생기는 아픔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양해될 수 있는 것이라 자위하며, "반론" 에 대한 "재반론" 을 마친다. 벽에 공던지기, 아니면 무차별 인식공격의 무대로 종종 느껴지던 한국 교회 안에 비교적 "점잖게" 반박하며 "되돌아오는 벽" 도 있음을 기뻐하면서 네덜란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유교수를 부러워하며 지면으로나마 안부를 전한다.



1998 년 12 월 26 일 분당에서

김지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