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2일 화요일

해석·관찰·적용으로 이어지는귀납적 성경연구법

해석·관찰·적용으로 이어지는귀납적 성경연구법
 
- 목회와 신학 20123월호
 

진지한 성경 연구의 필요성
 
 
1.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몇 년 전, 성경의 한 본문을 연구하다가 다른 목사님들은 어떻게 설교하시는지 궁금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매우 놀라운 경험을 했다.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구성 면에서 주요 해석과 적용은 말할 것도 없고 표현까지 비슷한 것이 아닌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을 드리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을 하고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일 텐데, 어쩌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설교를 베끼게 됐을까? 원래부터 다른 사람의 설교로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성경에 있는 내용보다는 다른내용, 즉 독특하게 생각할 만한 것을 찾고 전하려 한다는 데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식의 독특한 설교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부교역자로 있는 목사님에게 성경 한 본문을 보여주면서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충실하게 본문의 메시지를 잘 설명했는데, 담임목사님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거 말고, 좀 특이한 거 없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으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또한 조금만 자세히 살펴도 하지 않았을 수준 낮은 설교를 왜 매주 하는 걸까? 이와 관련해 어떤 분들은 목회적 상황이 그리 만만치 않고, 또 앉아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와 관련된 원인들을 좀 더 찾아보고자 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더 깊은 차원의 원인을 단 몇 가지만이라도 살펴본다면,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뒤틀려진 목회관과 성경관
 
먼저 목회에 대한 생각이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회관의 핵심은 교회 성장 지상주의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들은 목회의 모든 활동에서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없고 좋아할 만한 교회가 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걸림돌 없이 들어올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때문에 이들은 큰 교회가 하는 것을 따라하기 바쁘고, 유행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데 열심이다.
 
설교도 이런 전반적인 목회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선 설교가 목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설교도 교회 성장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본다. 설교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현장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만드는 시간으로 간주한다.
 
그러니 설교를 위해 성경에서 설교거리를 찾을 때도 성경 본문의 어떤 특이한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줄까하는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다. 이런 분들은 자신보다 교인 수가 적은 동료 목사나 후배 목사에게 성경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야”, “설교가 다가 아니야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 목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는 듯하다. “기독교란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교다”?1 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들은 자신이 전하고 강조하는 설교,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프로그램들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지 교회에 사람들의 숫자만 늘어나면 된다는 실용주의 정신이 그 어떤 성경의 진리보다 우선한다.
 
이런 목회관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성경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4:12),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성경(딤후 3:14~17)에 대한 믿음이 없다.
 
만일 그들이 이를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날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온전히 살아가도록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고 예배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해 말씀 선포에 힘쓰지 않겠는가? 교회의 목표와 그에 따른 인적·물적 자원 배분, 각종 행사나 프로그램 등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 뜻대로 정하지 않겠는가? 경영자 또는 상담가로서의 목회자 상()은 그에게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며, 남의 설교를 참고는 할지언정 성경연구를 통해 먼저 자신이 배우고 믿어 순종한 후 그것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려고 할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을 때 쇠퇴기에 빠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다는 로이드 존스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2
 
 
 
3. 진지한 성경 연구의 필요성
 
한 목회자가 변하면 한 교회가 변한다. 현재 나타나는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첫 번째 원인은 바로 목회자. 목회자가 먼저 변해야 한다. 목회자가 변하면 목회자는 바른 설교를 할 것이고, 그 설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성도들이 변할 것이다. 이는 즉, 교회가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길밖에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지한 성경 연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로 서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그 성경 말씀으로 생명에 이르고 그것이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원천임을 믿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신 이유가 말씀을 가감 없이 온전히 선포하라고 주신 사명임을 믿고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자의적인 판단이나 개입을 자제하며 본문 내용의 객관성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지 않고 그 아래 있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이 제시하는 길로 걸어가고자 하며, 그 말씀이 주는 지혜와 능력으로 새롭게 될 때 목회자는 변한다. 그것은 이 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계속돼야 할 과정이다.
 
 
 
성경연구방법론
 
24년 동안 매주 신학대학원에서(현재 15개 신학대학원에서 활동) 신대원생들에게 성경 연구방법과 성경을 가르치는 동안 축적된 연구방법론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일반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기존 방법론에서 좀 더 발전시킨 방법론의 전체 그림을 제시하려고 한다.
 
 
 
1. 올바른 성경 연구의 전제
 
첫째로 성경에서 특별한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성경 연구는 특별한 해석, 남들과 다른 해석, 남들이 하지 않았던 해석을 하려는 생각을 버릴 때 시작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통찰(insight)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를 종종 성경 본문의 의미와 상관없는 독특하고도 주관적인 해석으로 오해한다. 통찰이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들을 보다 올바르고 통합적이며 바른 신학적 관점에서 그 관계의 의미를 재조합해 내는 일이다. 선입견이나 상투적인 해석과 설교를 조심하면서 본문 자체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의미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며, 해석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할 때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기 전에 본문을 붙잡고 수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석이나 설교집 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앙의 선배들이나 뛰어나신 분들의 글은 귀한 교회의 유산으로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연구하기 전에 그런 글들을 접하면 오히려 연구에 많은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성경 본문 그 자체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분석 혹은 종합하고 이해하며 묵상하는 식의 연구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회자는 무엇이든 쉽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귀한 신앙의 선배들 모두가 다 그 시대에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있었지만, 성경 본문을 붙잡고 수고하고 땀 흘리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해석을 위한 관찰
 
1) 관찰은 왜 어렵게 느껴지는가?
 
귀납적 성경 연구는 성경 본문 자체를 강조하기에 관찰 방법이 발달해 있다. 그래서 문제도 발생한다. 15년 가까이 목회자와 신대원생들에게 성경 연구를 가르치면서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 관찰과 관련된 것이다. 성경 본문을 반복적으로 읽고 다양한 관찰 방법을 사용하다 보면 2~3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그런데 많은 경우 수고한 만큼의 해석이란 성과가 없어 지치곤 한다. 즉 효과적인 관찰을 하지 못한 것이다. 성경 말씀을 잘 연구하고 올바로 이해해서 말씀을 잘 전하려고 성경 연구를 시작했는데, 시간만 많이 소요되고 그 성과는 별로 없다면 얼마나 힘이 빠지겠는가?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관찰과 해석이 분리됐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해석을 위한 관찰이 아니라, ‘관찰을 위한 관찰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르칠 때마다 관찰과 해석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며, 관찰은 해석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찰은 절반의 해석이다란 표어도 그래서 만든 것이다.
 
어느 모임에서 이렇게 가르치자, 한 전도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해석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해석을 몰랐다. 해석을 몰랐기 때문에 해석을 위한 관찰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석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호한 말인가? 한 절 한 절 다 설명할 수 있으면 해석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쯤 멈추면 되는가? 해석을 하다가 중간에 멈추면 어느 정도 해석이 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 하는가? 이와 같이 해석 자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을 위한 관찰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해석 중심의 성경 연구
 
성경연구방법론이나 성경해석학을 다룬 여러 책들을 보면 해석 개념이 어렵게 설명돼 있다. 원어와 당시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는 해석이 멀게만 느껴진다.
 
실용적으로 해석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 성경 연구를 하는가? 성경 말씀의 내용뿐만 아니라 의미’, 즉 하나님의 뜻(메시지)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만 하나님의 뜻을 알면 되지 않는가? 즉 연구자가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은혜를 충분히 받는다면, 또한 설교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면 해석은 된 것이 아닌가? 혹 이 과정에서 역사적·문화적 배경 이해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원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더라도 해석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우선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Main Idea)을 알아야 한다. 성경 본문의 통일성을 인정한다면, 일정한 성경 본문은 하나의 중심사상을 갖는다. 그 하나의 중심사상을 말하기 위해 그 본문 내용이 있는 것이며, 그 본문은 그 중심사상으로 통일성을 갖는다. 둘째로 하위사상(Sub Idea)을 알아야 한다. 하위사상은 중심사상을 지지하는(supporting) 진리요, 메시지다. 중심사상을 전개하기 위해 그 본문은 여러 개의 하위사상들을 갖는다. 중심사상과 하위사상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셋째로 중심사상과 하위사상을 통합하는 흐름(문맥)과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연구자는 해석을 위해 관찰을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서 혹은 여러 관찰 방법을 사용하면서 중심사상, 하위사상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와 본문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 좋은 관찰은 해석을 하는 관찰이다. 이렇게 무엇을 위해 본문을 읽고 관찰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안다면 보다 효율적인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찰이 아니라 해석이 이끄는 성경 연구의 기본구조로 이해하는 것이다(<1> 참조). 이렇게 해야 관찰 방법 자체에 매몰돼서 수고했음에도 그 결실이 적은 아쉬움, 관찰과 해석이 분리되는 비효율적인 연구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1>
 
기존 구조 관찰 해석 적용
 
새로운 구조 해석 관찰 적용
 
 
 
 
 
3) 어떻게 하면 잘 관찰할 수 있는가?
 
성경연구법을 다룬 책들을 보면 관찰 방법이 많고 복잡하다. 그 많은 관찰 방법을 다 따라야 하는가? 정답은 없겠지만 대략의 생각을 말해본다면, 첫째로 가장 일반적이고도 필수적인 관찰 방법을 알아야 한다. 특별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에 주목하기보다는 어떤 본문이든 적용할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은 수의 방법을 잘 사용하자.” 둘째로 관찰을 자꾸 방법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그냥 읽기로 이해해야 한다. 방법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방법 없이 그냥 읽게 되면 중요한 내용들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 연구에 익숙한 분들은 방법 없이 그냥 읽으면서 필요한 내용들을 다 파악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안 되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에게는 약간의 관찰 방법이 필요하다.
 
가장 필수적인 관찰방법은 후에 다루겠다. 여기서는 관찰의 기본으로 읽기를 다루고자 한다. 성경은 자세히 읽어야 한다. ‘자세히 읽기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생명과 경건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갖는 진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자세히 읽어야 하냐?”고 질문한다. 그냥 자세히 읽으면 되는데 자세히 읽기에도 방법이 필요한가 보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참고해 제시하자면 체계적 읽기’, ‘꼼꼼히 읽기’, ‘낯설게 읽기’, ‘적용적 읽기등이 있다. 체계적 읽기는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를 구분하면서 읽는 것이다. 꼼꼼히 읽기는 본문의 한 자 한 자가 다 필요해서 기록됐다고 믿고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읽는 것이다. 낯설게 읽기는 선입견이나 익숙함에 의해 간과하는 부분이 없도록, 아무리 익숙한 내용이나 표현이라 할지라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대하는(‘거리 두기’) 것이다. 적용적 읽기는 적용의 방향을 먼저 나에게 향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말한 몇 가지만 유의해도 충분히 제대로 된 관찰, 즉 효율적이면서도 유익한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필자가 가르치면서 느낀 목회자들이 흔히 빠지는 어려움들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기본 개념이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니, 나머지 필요한 정보들은 여러 좋은 책들을 참고해서 얻기 바란다.
 
 
 
3. 원리에 기초한 해석
 
1) 해석의 3대 원리
 
앞에서 관찰할 때 해석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을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정리한 중심사상, 하위사상 등이 잘못된 것이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해석 원리가 필요하다.
 
해석 원리는 성경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을 거쳐 교회 안에서 정립된 원리다. 이 원리는 여러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원리들을 좀 더 쉬운 표현으로 세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문맥에 적합한 해석’, ‘하나님 중심적 해석’, ‘본문에 근거한 해석이다. 이 외에도 여러 해석 원리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적용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알아 가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해석 원리는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가장 중요한 원리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주석서들을 보면 이 원리에 따라 주석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문맥에 적합한 해석 원리는 문맥, 즉 글의 흐름을 단어나 문장 혹은 문단의 의미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한 단어나 한 문장은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문맥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앞에서 말한 중심사상은 문맥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특히 중심사상과 문맥은 해석의 방향도 잡아주기 때문에 부분적인 난제를 쉽게 해결하는 해석적 유익도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 중심적 해석 원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인격],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사역] 대해 먼저 주목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자, 하나님에 대한 계시다. 연구자들은 이 두 번째 원리에서 가장 많은 실수를 한다. 연구할 때나 설교할 때, 사람 편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살리신 것에 대해 증거하는 종교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한두 마디만 나오더라도 주목해야 한다. 설령 본문에 그것이 나오지 않더라도 전후 문맥 속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어떤 식으로 이 본문에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배후로 작용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통해 행위 이전에 은혜를, 명령법(imperative) 이전에 직설법(indicative)을 붙잡을 수 있다.
 
끝으로 본문에 근거한 해석 원리는 성경 본문에서 많이 다루고 강조하는 내용에 집중하는 원리다. 이 원리는 특이한 해석으로 멋지고 능력 있고 탁월하게 보이려는 의도로 본문을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말씀의 종이지,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고. 특이하게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동의할 만한 것을 더 깊이 더 본문에 충실해서 새롭게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설교의 능력은 특이하거나 남들과는 다른 독특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겸손히 받아 그것을 신실하게 믿고 충성스럽게 선포할 때 나타나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을 배우지 않았는가? 본문에서 많이 말하고 반복해서 말하는 강조점을 찾고, 명백하게 말하는 것을 이해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방법이 아니다. 즉 성경을 읽을 때 자연스러운 관점이 돼야 하고 몸에 밴 습관이 돼야 한다. 이 원리에 입각해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고 연구한다면, 대부분의 결과는 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2) 3대 원리에 따른 관찰 방법
 
해석 원리를 아예 관찰 방법으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앞에서 구체적인 관찰 방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을 기억할 것이다. 몇 가지 방법을 나열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찰 방법은 해석 원리에 근거해 설정돼야 한다.
 
<2>
 
해석 원리 해석 원리에 따른 관찰법
 
문맥에 적합한 해석 문단 나누기
 
하나님 중심적 해석 하나님 찾기
 
본문에 근거한 해석 강조점 찾기
 
  
 
위의 <2>를 보면 각 해석 원리에 따라 문단 나누기’, ‘하나님 찾기’, ‘강조점 찾기라는 관찰 방법이 연결돼 있다. 이렇게 한다면 해석 원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또한 이 세 가지가 가장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관찰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관찰 방법들이 원칙 없이 소개되며, 그것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접근은 대단히 중요하다. 배운 대로 여러 방법을 사용하면서 관찰을 열심히 하지만, 왜 하는지 몰라서 즉 어떤 원리에 근거해 그 방법이 도입됐는지 알지 못해서 결실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수고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원리적인 접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귀납적 방법의 약점을 극복하는 복음적 해석
 
그레엄 골즈워디는 귀납적 연구 방법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접근 방법(귀납적 방법-인용자)은 실질적으로, 본문이 성경 전체의 통일성과 어떻게 부합하며, 따라서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지 혹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엄청난 가정들을 창출한다. 그것이 일종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3 흔히 귀납적 성경 연구라고 하면 한 본문을 자세히 살피고 그곳에서 신자의 삶에 유용한 몇 개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본문을 다른 성경과 동떨어진 외딴 섬처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귀납적 성경 연구가 아니다. 하나의 독단이 형성되기 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귀납적인 연구는 철저히 성경 본문 그 자체에 근거를 두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작게는 한 본문, 크게는 성경 전체를 텍스트로 보고 연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성경의 각 부분(한 문단, 한 장 혹은 한 권)은 성경 전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때 온전한 본모습을 갖출 수 있다.
 
그래서 복음적 해석을 해야 한다. 복음적 해석이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뜻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됐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다 알려졌다(1:8~10). 즉 복음이 선포된 것이다. 만유의 주로 높이 들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이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가시면서 다스리신다. 오늘 우리는 신약시대, 교회시대, 성령의 시대, 은혜가 충만한 구원의 시대에 살고 있는 목회자들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며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창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원역사의 발전과 전개, 즉 구속사를 공부해야 한다. 사람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야 한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교회의 탄생에 대해 낱낱이 검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중요성과 만유의 주로 높이 들리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일하시는(1:10)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한다. 목회자는 이를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이다.
 
 
 
5. 적용
 
해석이 성경 연구의 꽃이라면, 적용은 열매다. 적용을 통해 성경 연구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계속 성경 연구를 할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다. 교회사를 볼 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항상 경건 혹은 거룩의 필요성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적용하지 않는 성경 연구는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는 적용할 때 놓치기 쉬운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원리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원리화란 성경 본문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타당성을 갖는 영적·도덕적 혹은 신학적인 원리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다. 성경 해석의 일차적 목표는 성경 시대 당시의 의미와 원리지만 그때 거기서(then and there)’의 원리를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그대로 지금 이곳(now and here)’에서 적용할 때 잘못된 적용이 될 수도 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살전 5:26)란 본문을 생각해 보자.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문화가 지금도 통용되는 곳도 있겠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그런 인사를 하기 위해 접근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결코 그 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중심사상적 적용을 해야 한다. 적용을 할 때 흔히 범하는 실수는 적용하고 싶은 것만 적용한다는 점이다. 당장 필요한 것만 취하려 하고, 자신의 생각과 삶을 크게 바꿔야 하는 도전적인 말씀은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회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에서 가장 주력해서 말하는 중심사상(혹은 그와 더불어 하위사상)과 관련된 것을 적용점(application points)’으로 붙잡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그것이 연구자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히 받고 순종하려는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셋째로 구체적인 적용을 해야 한다. 피상적인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는 또 하나의 전략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어느 때, 어떤 사람들과 관련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고민할 때 그 말씀은 살아서 힘 있게 다가올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그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며 살아내지 않는 자가 어찌 참된 설교자가 될 수 있겠는가?
 
 
 
맺음말
 
케빈 J. 밴후저는 성경 연구의 네 가지 자세를 정직성, 개방성, 집중성, 순종이란 해석의 덕목으로 제시한다.4 이런 덕목들은 성경 연구가 어떤 정신과 관점 위에서 이뤄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경 연구에 게으르거나, 설교와 가르침 등의 실용적 목적으로만 말씀을 연구하는 기능적인 접근이나, 성경적 관점이 아닌 개인의 필요 또는 세속적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성경을 오용하는 잘못된 신학적 태도는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 연구를 할 때 꼭 고려해야 할 네 가지를 정리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경 연구는 교회 안에서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깨달음과 거룩한 지식의 축적(교리나 성경신학 등)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성령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혼란은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마치 기독교가 20세기에 시작된 것처럼 역사와 전통을 외면했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주장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소위 QT식의 성경 읽기를 극복해야 한다. 다소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요즘 잘못된 성경관을 근거로 성경을 주관적이고 상대주의적으로 읽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내게 주신 말씀이란 말은 이 유행을 잘 반영한 표현인데, 성경은 교회에 주신 보편적인 말씀이지, 내게 주신 개인적이고 특수한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내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나의 느낌이나 주관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정해지는 것인가?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성경 본문에 기록된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읽는 이의 주관적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객관적이고 보편적 의미에 기반을 둔 함께 성경 읽기가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셋째로 성경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수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한다. 성경 연구를 지적인 작업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다 이해한 말씀을 적용하려고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자 손을 뻗는 그 순간에 이미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하시는 내적 증거(Inner Witness)의 역사, 성경을 연구할 때 그 말씀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조명(Illumination)의 역사,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을 주시며 굳어진 마음을 녹이고 고집을 꺾으시는 성화(sanctification)의 역사를 행하신다.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성경 연구는 이렇듯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하는 과정임을 믿고, 목회자는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성경을 대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이 소위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중세 로마카톨릭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지 못했기에 그토록 이단적 사설이 만연하고 부패와 타락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성경은 어렵기 때문에 평신도가 봐서는 안 될 것으로 주장했던 로마카톨릭에 대항해,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명료성(Perspicuity of Scripture)’이란 진리로 맞섰고, 모든 성도들의 손에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들려주기 위해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 아닌가? 일주일에 한 번도 성경을 진지하게 읽지 않고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을 구원받은 자로 인정해주는 현대 교회의 흐름과 문화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연구하는 것(Daily Bible Study)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필자 정보 - 이혁
 
아나톨레 대표.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B.A.), 동 대학교 대학원(M.A.), 총신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토라, 무궁무진한 해석의 보물 창고

토라, 무궁무진한 해석의 보물 창고
 
- 목회와 신학 20123월호


 
토라의 다양한 음성과 모습들
 
랍비들은 토라가 70개의 얼굴을 지녔다고 말하면서 토라의 다성적 속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토라의 각 본문에 담긴 잠재적 의미들이 다양한 단면에서 광채를 발하는 보석 같다고 본다. 전 세계 인구를 망라하는 그들의 방법이 세계 70개국과 인간의 70개 언어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토라를 가리켜 70개의 얼굴을 지녔다고 한 것은 모든 인간이 제각기 토라 본문에서 다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후기의 신비주의자들은 토라에 대하여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인구수와 비슷한 숫자 60만 가지의 모습을 가진 것으로 유사하게 말하기도 한다.
 
모든 시대의 각기 다른 독자들은 토라의 본문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독자는 각 성경 본문의 다양한 부분들에 주목하여 그것들을 다른 본문들과 병렬시킴으로써 무한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다. 이는 특히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가 유동적이고, 현재 시제가 과거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이야기를 전부 설명하는 데는 제한이 있으나 본문의 재창조인 해석은 무궁하다고 할 수 있다.
 
바벨론 탈무드의 단편 산헤드린 34a에서 발견되는 전통은 토라 본문의 무한한 음성들과 고유한 의미를 예증하는 데 자주 인용된다. 단편 산헤드린이 주로 법정 질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아가다 전통들은 그 속에 포함된다. 랍비 아바예는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62:11)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한 줄의 성경 구절이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랍비 이스마엘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 바위를 쳐서 (많은 조각들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3:29)라고 가르쳤다.
 
한 반위가 많은 조각들(니쪼쪼트, nitzotzot)로 쪼개지는 것 같이 성경 구절 하나도 수많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부스러뜨리는해석 과정은 각 성경 구절에서 다양한 의미를 창조해냄을 의미하며 해석은 본문 말씀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예레미야 본문의 은유들처럼 랍비들이 사용하는 상징 역시 아주 명쾌해 보인다. 바위는 본문을 나타내며 방망이(망치)는 본문의 해석 과정을 말한다. 방망이로 두드린 바위가 많은 조각을 내듯 본문도 수많은 해석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이 구절을 대부분 독자들이 이해한 보편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말씀을 좀 더 집중해보면 모호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방망이를 닮아 있다. 여기에서 방망이는 대부분이 생각하는 대로 해석 과정이 아니라 본문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곧 본문 자체를 상징하는 방망이의 시각적 이미지는 바벨론 탈무드 샤바트(Shabbat) 88a에서 발견되는 전통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여기에서는 랍비 이스마엘의 학교의 가르침이 또 다른 아모라였던 3세기 팔레스타인의 랍비 요하난에 의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랍비 요하난은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68:11)를 인용하며 이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공포된 각각의 말씀들이 70개의 언어로 나뉜다고 말했다. 또 랍비 이스마엘은 “() 바위를 쳐서 (많은 조각들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에서 한 방망이가 많은 파편들(니쪼쪼트, nitzotzot)로 쪼개지는 것 같이 거룩한 이로부터 나온 모든 말씀도 70개의 언어로 나뉜다고 가르쳤다.
 
이 두 구절들의 핵심은 반석을 칠 때 많은 불꽃을 튀기는 방망이다. 당시 불꽃을 튀기는 방망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평범한 이미지였다. 어떤 유명한 교사들은 대장장이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이어갔으며, 방망이를 휘둘러 반석이나 모루를 내리치는 대장장이들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방망이에서 튀는 수많은 불꽃들은 마치 파편 부스러기처럼 보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 속에 새겨져 있으며 토라는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를 산출한다. 그리고 70개의 언어로 상징화되는 각 독자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본문을 이해한다.
 
 
 
다바르 아헤르(Davar Aher): 양자택일의 의미들이 미드라쉬 해석의 핵심이다
 
토라 본문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듯이 랍비들도 같은 맥락에서 토라를 다룬다. 미드라쉬 랍비들의 미드라쉼(모음집)은 결코 조화될 수도, 조화되어서도 안 되는 성경 해석의 불협화음으로 묘사된다. 미드라쉬는 성경 본문 자체의 모호한 속성에서 연유한 성경 구절의 모순된 해석들을 의미하곤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불확실성은 랍비 해석자들로 하여금 무수한 해석을 낳게 했는데 거기에는 항상 또 다른 해석다바르 아헤르(davar aher, 문자적으로는 또 다른 말씀을 뜻한다)가 있으며 같은 개체가 그들 중 몇 가지의 해석을 제공하기도 한다. 가령 랍비 하마 b, 하니나는 창세기 29:2~3에 대해 6개 이상의 해석을 내놓았는데 어떤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전형적으로 미드라쉬는 이런 모순들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과 상반을 미드라쉬의 구조 안에 짜놓는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병렬과 배치는 랍비적 본문의 해석자들로 하여금 본문에 담긴 수많은 함축적 의미와 대화하게 한다. 마치 성경의 특정 본문을 두고 랍비적 해석자들끼리 토론하며 그들만의 본문 해석 방식을 후세대가 거듭 재창조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중세 초반까지만 해도 성경의 어떤 본문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종종 모순점이 발견된다 해도 모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가령 13세기 초반에 살았던 Sefer Ha Hokhmah(쎄이페르 하 호크마)의 저자인 랍비 엘르아자르 벤 유다 오브 윔즈는 73개에 달하는 미드라쉬 해석, 지혜에 이르는 문을 목록화하여 그것이 각각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동시에 동일한 구절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도 증명했다. 그는 본문에서 모순이 파생된다 할지라도 그것에 영향 받을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토라 본문에 함축된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해석될 만큼 풍부하기 때문이다.
 
 
 
파르데스(The Pardes): 해석의 4단계-
 
프샤트(Peshat), 레메즈(Remz), 드라쉬(Derash), 쏘드(Sod)
 
토라는 참으로 끝없는 지혜의 원천이다. 여기서의 목표는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분석 단계를 이해하고 숙지하는 것이다. 의미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는 단어와 구, 구절의 단순하고 평범한 의미인 p-sh-t를 어근으로 하는 프샤트(peshat) 단계다. 프샤트는 본문에 대한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단계에서 스스로 어떠한 해석을 내리지 않고 본문 말씀에만 집중하게 된다. 토라의 모든 말씀은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의 첫 단계부터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랍비들은 문맥에 따라 형성된, 어떤 특정 본문의 원래 의미인 프샤트(peshat)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하는데 이를 강조하면서 구절에는 프샤트가 빠질 수 없다는 유명한 격언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프샤트를 고려하지 않고 토라 본문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에 대한 경고다.
 
우리가 독자 입장에서 문자적 의미로만 고정하려고 하는 본문 중 하나가 아가서다. 아가서는 다섯 두루마리 중의 하나로, 유월절 공휴일에 읽혀지는 쉬르 하-쉬림(Shir ha-Shrim)의 매우 심오한 해석의 단계로 이동하기가 쉬워 이 사랑시의 단순한 아름다움과 강력한 비유적 표현을 간과하기가 쉽다. 그럼 2장 초반부에서 연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매혹적인 은유들을 통해 이 본문에 대한 프샤트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그러나 이 시대의 랍비들은 스스로 문자주의와 맞서 싸웠다. 그들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라고 하며, 정작 자신들이 프샤트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에 제한되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프샤트가 본문의 원래 의미보다는 2세기의 랍비 아키바나 오늘날의 학습자를 무론하고 독자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성경 본문의 해석을 지지하기 때문에 거부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암시또는 언급을 의미하는 레메즈(Remez)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라 본문의 표면적 의미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 의미에 함축적인 해석을 첨가한다. 레메즈를 지닌 토라의 말씀은 종종 은유화되어 다른 설교의 영역으로 환치된다. 알레고리(풍유)를 통해 본문의 말씀이 보존되는 동안 우리는 본문이 진실로 이야기하는 바를 배우게 된다. 이것이 헬라의 작가들이 알레고리를 히포노이아(목적은 숨겨진 의미) 또는 본문에 대한 심오한 이해로 언급하는 이유다. 랍비들은 문자적 의미와 심오한 의미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프샤트 또는 문자적 의미는 독자를 토라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은 단계의 이해로 안내한다.
 
기독교인들은 아가서 본문을 예수와 교회의 관계로 이해하는 데 반해 랍비들은 전체 두루마리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의 관계를 풍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레메즈에 대한 기성품적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쉬르 하-쉬림(Shir ha-Shirim)에 대한 랍비들의 풍유적 해석들은 미드라쉬 라바를 보완하는 또 다른 10개의 작품, 쉬르하-쉬림 라바(Shir ha-Shirim Rabbah)의 주요 부분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7세기경 팔레스타인에서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가서 구절들에 대한 다양한 연속적 논평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에 대한 다음 해석은 랍비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풍유적으로 다뤘는지 보여준다.
 
 
 
랍비 후나는 () 구절을 세속적 권력의 압제로 적용했다. 백합화와 같이, 북풍이 불어올 때 가시나무 가운데 있다면 남쪽으로 휘어지며 가시에게 찔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은 여전히 위를 향해 있다. 이스라엘도 그와 같다. 지나친 과세와 조공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에게 고정돼 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145:15)라고 기록된 것처럼.
 
 
 
3세기에 살았던 초대 아모라인 랍비 후나는 여기에서 가시나무를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했던 로마 권력과 동일시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겪었던 가혹한 고통과 생계 부담과도 동일시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백합은 바람에 쉽게 휘어지는 속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을 향하고 있다.
 
드라쉬(derash)는 모든 세대에게 의미를 가르친다. ‘드라쉬라는 용어는 성경에 대해 찾다또는 탐구하다, 성경 본문을 탐구하여 뜻을 분별함을 의미하는 어근 d-r-sh에 근거한다. 이 동사를 최초로 사용한 에스라 7:10을 보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결심하였었더라(리드로쉬 에트 토라트 아도나이, Lidrosh et Torat Adonai).
 
 
 
같은 어근을 가진 드라쉬, 미드라쉬 양식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랍비들의 문학을 창조하는 데 있어 최고의 양식인데, 그것은 본문에 집중하며, 구조적이고 주제적인 요소들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때때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핵심적인 주제 말씀에 근거한 다른 성경의 구절들을 병렬시킬 수도 있다.
 
드라쉬는 필수적으로 본문의 프샤트와는 다른 뜻인 읽어들임을 포함하고 있다. 드라쉬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2:2)에 관한 미드라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표면적 의미들을 바꾸기도 한다.
 
랍비 이삭은 이 구절을 리브가에게 적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25:20).
 
만일 이 구절이 그녀가 밧단 아람 태생이라는 것을 알려줄 의도였다면 왜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다고 또 진술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사기꾼이요 그녀의 오라비도 사기꾼이며 그녀의 집안 모든 족속이 사기꾼이었으나 그들 중에 유덕한 리브가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그녀가 무엇을 닮았는가?”에 대한 답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드라쉬는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 리브가에 적용해본다면 그녀가 악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미덕 있는 여인임을 칭송한다. 이는 주변 사람들의 악덕에 영향을 받아 반드시 악한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랍비들이 인용한 창세기 구절에서 불필요한 부분들을 알아챘기 때문에 그들은 이에 대해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 본문에 브두엘과 라반이 모두 아람 족속이었다고 나오는데 왜 그들이 밧단 아람 태생이었음을 첨가하여 군더더기를 삽입했을까?”
 
그들은 이 첨가된 문구가, 거꾸로 하면 사기꾼을 의미하는 람아이(ram' ai)로 읽을 수 있는 아라미(arami, 아람 족속)의 동음어이므로 리브가의 아버지와 오라비가 사기꾼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문을 이런 식으로 읽음으로써 랍비들은 다른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높이는 동시에 여자 족장 중 한 여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토라 연구의 네 번째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는 해석의 신비적 영역인 쏘드(Sod, 신비). 이는 하나님의 설교와 말씀에 대한 카발리스트(유대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적 관념을 가리킨다.
 
쏘드는 본문에 관한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차원의 해석을 상징하기도 한다. 토라 본문이 무한한 깊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독자가 하나님을 조우하도록 인도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아름다운 구절을 조하르(Zohar)의 프리즘을 통해 본다면 우리는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해석의 심오한 신비적 속성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작품인 조하르는 13세기에 살았던 카발리스트 랍비 모세 드 레온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랍비 아키바의 제자, 랍비 시몬 바 요하이의 가르침과 동일시된다.
 
랍비 히스기야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이.” 여기에서 백합화는 누구인가? 바로 이스라엘의 회중이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가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을 지닌 것 같이 이스라엘의 회중도 공의와 자비를 지니고 있다. 백합화가 13개의 잎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회중도 사방으로 에워싼 13개의 자비적 속성을 갖고 있다. 엘로힘이 언급된 그 순간부터 그는 13개의 말씀을 가져와 이스라엘 회중을 둘러싸고 보호했으며 그 다음 (엘로힘)의 이름이 다시 언급됐다.
 
 
 
표면적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다른 현현, 즉 쎄피로트(Sefirot)에 관한 전혀 다른 측면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10개의 쎄피로트는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속성과 전능하심 그리고 주요 말씀에 언급된 성경 인물들의 이름에서 딴 각기 폭넓은 은유와 관련해 있음을 알려준다. 문자적으로 왕의 직위를 뜻하는 쎄피로트 중 하나는 토라와 동일시되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회중과 동일시된다. 창세기 1:1의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Elohim, 하나님)의 이름은 또 다른 쎄피로트 중 하나인 비나(Binah, 지혜)와 동일시되며, 엘로힘이 처음 언급된 곳과 창세기 1:2의 두 번째 언급 사이에 끼어 있는 13개의 단어들은 말쿠트(Malkhut)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비나에서 나온 자비적인 속성 13가지를 나타낸다. 이러한 암시들은 무한한 신비적 해석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신비적 전통은 토라를 항아리(히브리어 kad) 안에 있는 물로 비유하여 결코 마르지 않는 우물로 묘사한다. 히브리어에서는 문자 하나하나에 가 쓰이는데 ‘1’에 해당하는 알레프(aleph)‘2’에 해당하는 베이트(bet) 등등 모든 문자는 숫자로도 쓰인다. 단어 ‘kad’에 대한 숫자 또는 게마트리아(gematria)24. 이것은 정경에 포함된 24권의 책들이 하나님의 가려진 현현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토라의 신비한 깊이를 결코 알아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일부 분파는 토라의 의미에 대한 무한한 이해의 가능성을 훨씬 더 확장한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엽에 살았던 하시딕의 실권자인 베르디체프의 레위는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51:4)를 미드라쉬적으로 해석하여 이는 새 토라가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것은 토라 두루마리의 흰 여백조차 문자, 즉 의미로 구성되어 있으나 우리가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하나님은 이 여백의 의미를 계시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의 의미다.
 
 
 
교차 본문: 다른 본문들을 함께 엮기
 
파르데스 프샤트(pardes-peshat), 레메즈(remez), 드라쉬(derash), 쏘드(sod)가 각기 다른 방법의 주석을 의미하거나 본문에 대한 다른 단계의 이해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연구된 토라의 가장 뛰어난 해석 방법은 드라쉬다. 미드라쉬야말로 토라를 학습하는 가장 특색 있는 방식이며 현대 유대인들까지도 본문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다.
 
미드라쉬적 해석은 개별적인 성경 구절에 집중한다. 그러나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미드라쉬 해석의 특징적인 방법은 교차 본문이다. 본문들은 서로 반향하고 상호작용하며 서로 적용한다. 랍비들은 성경의 한 구절을 다음 구절에 연결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먼 평행 구절끼리 연결지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토라의 모든 구절은 상호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고리는 벤 아자이가 구절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을 때 그 주위에서 춤을 추던 불에 관해 언급하는 쉬르하-쉬림 라바(Shir ha-Shirim Rabbah)의 한 구절에서 볼 수 있다. 벤 아자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구절들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계시에 대한 원래의 경험을 재창조한 것이었다. 교차 본문은 토라 본문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토라의 교사가 의미를 전달하고자 구절들을 서로 연결할 때 학습자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방한다.
 
토라를 미드라쉬적으로 해석할 때 교차 본문은 두 가지 단계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데 첫째, 성경은 다양한 구절들과 문구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교차 본문의 해석은 성경 자체에서 뚜렷하다.
 
또 토라의 어떤 구절들과 문구들은 다른 구절들에 의지해 확대되거나 해석된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 17:21~22의 안식일 준수에 관한 규례를 보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이 말씀은 신명기 5:12~14을 근거로 하여 해석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십계명의 어투에 명백히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구절들의 병렬에 기초한 본문 해석의 문화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것의 고유한 첫 산물이기도 하다.
 
랍비들은 성경 내부의 교차 본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성경 구절들을 좀 더 결합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언어학적이고 주제적인 관계들을 드러냄으로써 구절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입증된 해석적 관계를 나타내는 새로운 의미들을 창조한다. 어떤 문맥에서는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던 본문일지라도 독자가 본문들 간 상호작용의 관계를 올바로 찾아낼 때 그 본문의 의미는 명확해질 수 있다. 3세기의 유명한 팔레스타인 교사였던 랍비 요하난은 본문들 간의 연결을 통해 그 모호성이 해소되며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다고 이해한다. 그는 “(성경) 구절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것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른 구절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타나크의 또 다른 구절들이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병렬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는, 므힐타(Mekhilta) 1장에서 우리가 분석했던 씨프레이 드바림(Sifrei Devarim)과 같은 미드라쉬 문학이며 출애굽기 본문을 한 구절씩 진행하는 미드라쉬 주석과 같다. 이것은 각 구절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하며 씨프레이 드바림(Sifrei Devarim)처럼 팔레스타인에서 아모라임(3~5세기) 시대에 편집됐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12:6에 따르면 니산월 10일에 구매한 유월절 어린양을 14일까지 간직하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해 랍비 마티아 벤 헤레쉬는 표면적으로는 이 구절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에스겔서 16장 구절과 비교하는데, 그것의 첫 부분은 할례의식에 인용된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하고(6)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7~8).
 
 
 
왜 성경에서 잡기 전에 4일을 요하는 유월절 어린양의 구매를 필요로 했는가? 이에 대해 랍비 마티아 벤 헤레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이는 거룩하신 이, 복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녀들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리라고 선언하신 맹세를 이행할 때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더 나아가 이르기를 ‘()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와 같이 계명에 대하여 벌거벗음을 뜻하는 구원에 이르게 할 계명(미쯔보트 mitzvot)이 없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이, 복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 가지 계명을 주셨다. 이같이 기록되었으되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이러한 이유로 유월절 어린양을 구매하여 잡기 전에 4일이 요구되는데 이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상급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에스겔서의 이 구절과 유월절 어린양을 언급한 출애굽기 구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관련짓게 하는가? 2세기 중엽의 팔레스타인 교사였던, 랍비 마티아 벤 헤레쉬가 인용한 에스겔서 16장 구절은 그 문맥 자체에서 획득된 것이어서 선지자가 이집트 노예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어떻게 랍비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구절들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 교차 본문은 출애굽기 12:12(“내가 두루 다니며[버 아바르티, ve' avarti]”)과 에스겔 16:8인데, 두 구절에서 같은 동사 아바르(avar, 지나가다)’가 사용됐다. 문자적 반향은 여기에서의 연결을 도우며, 랍비들은 이집트의 구속과 약속의 땅을 향한 광야 여행이 뒤따르는 시기를 언급함으로써 사랑을 할 만한 때를 강조하는 데 이용한다. 랍비 문학에서 시내산으로의 광야 여행은 실제 결혼식으로 보이는 시내산에서의 계시를 지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구애 기간으로 묘사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포로의 전 기간을 통하여 성숙해졌으나 계명(미쯔보트 mitzvot)에 벌거벗은이 구절에 근거해볼 때 아직까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어떻게 그들이 그 명령들을 준수할 수 있었는가?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셨다. 하나는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확인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적 상징인 할례, 곧 충성과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창세기 17장에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할례 행위를 준수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 두 가지의 예비적인 시내산 계명을 지켰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지나치시며 에스겔서 16장에 따라 그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뒹구는 것을 보셨다.
 
또다시 B.C.E 586년 이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있었던 때를 언급하는 이 후기의 선지서 본문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그들이 할례 시 흘리는 피를 보며 너는 너의 피로써 살라를 두 번 이르셨다. 이 말의 반복은 두 가지 피의 의식을 언급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 할례 의식에서 모델이라 불리는 할례 집례자는 어린아이의 입에 포도주 몇 방울을 떨어뜨린 후 바로 이 말씀을 암송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하다. 특히 메시지는 이 구절(“상급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의 막바지 절정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은 계명의 준수와 특별히 할례와 같은 의식적인 명령에 대한 준행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증할 것이라는 메시지다. 또한 각 개인이 자발적인 의지로 피를 제공함으로써 그 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은 2세기의 로마의 지배 하에서의 삶을 가르치는 한 모범이 되기도 했다. 그들을 유대인답게 하는 특별히 주요 의식과 명령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초대 기독교회는 일보다 신앙을 강조하며, 랍비들은 계명 즉 규율과 할례 의식에 대한 최우선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기독교는 예수의 보혈의 구속적 은혜를 강조하나 랍비들은 그들의 미드라쉬적 방식으로, 각각의 이스라엘 남자들이 흘린 피의 능력을 강조한다.
 
 
 
세대 간의 대화
 
미드라쉬의 핵심은 과거와 성경 구절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대화다. 보다 넓은 의미로 토라는, 주어진 성경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 창조되었으나 해석자와 교사, 세대 간 대화를 통해서도 창조됐다. 토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의식 안에 있는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까지 계속되는 대화로, 변증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랍비들의 본문을 연구할 때는 편집자들이 어떠한 특정 순서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구성했는지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이는 특히 한눈에 근본적으로 다른 논평의 잡집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미드라쉼 주석의 경우에 그러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종종 다른 세대의 다른 교사들에 의한 시리즈 내에서의 논평들 간 관계가 우연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병렬함으로써 발생하는 명백한 긴장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통찰력과 의미를 제공해준다.
 
대조적으로 두 교사가 쟁론 형식의 유형으로 보이는 것을 인용했을 때 (어느 한 구절에 관한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랍비 A가 이것을 말하는 동안 랍비 B는 저것을 말함) 그들의 관점은 빈번하게 서로를 보완하거나 쟁점에 대한 매개 변수를 정의한다.
 
현대 독자로서 우리는 수세대에 걸쳐 발전해온 토라와의 계속적인 이 대화 속으로 침잠한다. 우리는 토라가 그것을 창조하는 역사적 다른 배경을 반영할 때 토라의 의미 속으로 침잠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유대인 고유의 정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 토라의 학습자들이 광의적으로 정의한 바와 같이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본문들에 대한 작가들의 의도를 이해하도록 요구되는데 이는 성경 그 자체가 되는 것이거나 고대 현자들의 작품이 되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 또는 수많은 미드라쉼, 탈무드 주석들, 법전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진 상황 안에서 읽히고 분석돼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은 항상 이 구절이 기록될 때 편집자나 후대 편집자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가 돼야 한다. 그러나 토라를 더 많이 연구하는 것이 현대 학습자들의 의무다. 일단 본문에 대한 단순한 전통적 의미인 프샤트를 이해하게 되면 현대 독자들은 개인에 대한 고유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유로워져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이 과정을 본문의 재() 상황화로 묘사한다. 우리는 주어진 본문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까지 해야 한다. 여기에서 관건은 우리 자신을 본문에 관한 오래된 대화의 일부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본문과 우리 개인의 삶이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
 
 
 
 
 
:: 필자 정보 - 변순복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구약학 교수, 탈무 에듀아카데미 토라연구소장. 서울기독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구약학, Th.D.), 미국 베서니신학대학(신학사), 미국랍비대학원(랍비 과정 수료), 서던캘리포니아신학대학교(구약학, Th.M., Ph.D.)에서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