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30일 토요일

기독교인으로서 동성애에 대한 생각

나는 동성애에 대해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

본격적인 글에 앞서 일단 내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나는 동성애에 대해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 하지만,동성애차별금지법에는 찬성이다. 그리고 이 글을 보는 성소수자분들이나 내가 아는 성소수자분들은 기분이 상하겠지만 난 동성애가 정상적인 성적 지향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다.
또한, 나는 평신도 중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이에 지나지 않기에 내 생각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틀리는 지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현 시점에 생각하고 개진하는 이 의견과 생각은 성경적으로 전혀 틀릴 수도 혹은 어쩌면 성경적 가치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가진 동성애에 대한 의견은 이러하다.
  • 동성애는 성적 지향 혹은 성 정체성이다
  • 동성애가 곧 섹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경 속 "침소"는 남녀관계에 한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섭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 (선택할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동성애는 무언가 방향이 틀어진 화살이지 않을까 싶다.
    동성애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아니라 함부로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deep한 friendship 사이의 혼란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좋아한다는 감정, 이성 간의 사랑과 친구와의 사랑 등등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매우 애매모호한 선상에 있지 아니한가?

동성애 차별금지법은 동성애찬성법이 아니다.

작년 박근혜 탄핵 시국 이후 유독 페이스북등을 통해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게 동성애 차별금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게 상당히 (내 표현으로는) 웃기는 상황인데, 반대의 입장은 굉장한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결코 지우기 힘들다.
대다수 동성애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면,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합법화 반대"로 되어 있거나, "동성 결혼 합법화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 "차별금지법"이었는데 "합법화"로 바뀌어 있다.
(내가 웃기다라고 표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사탄의 시험의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꿔서 없는 내용을 추가하거나 있는 내용을 삭제하거나 말을 바꾸어 놓거나 하는 것인데 이 상황이 딱 그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동성애 차별금지법"에 대해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해당 법안을 찾아보는 거였다. 해서 법무부 입법예고안부터 시작해서 2012년의 김재연 의원 등 10인의 발의안, 2013년의 김한길 의원등 51명의 발의안, 그리고 2013년의 최원식 의원 등 15명 발의안까지 쭉 읽어 보았다. 법 내가 법에 대한 식견이 짧아서 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동성애에 대해 적극 지지한다거나 동성애는 선한 것이다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그들의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을 가하는 행위를 금하는 내용들만을 볼 수 있었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라 규정하나?

이 부분은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혹 성경에 동성애는 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아시는 분은 덧글을 통해 의견을 나누어 보았으면 좋겠다. 우선은 반대 기독교계(?)에서 거론했던 몇 가지 구절을 가지고 보려 한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위기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텍스트 그대로 보자면 여자와 성관계를 하듯 남자와 성관계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듯이 보이기는 하다. 헌데 앞뒤 맥락 전체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레위기 18장의 처음은 가나안 족속의 풍속을 본받지 말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여 그 것들의 구체적인 것을 나열하는 것이 그 후반부의 이야기다.
모세 시대 가나안을 차지하고 있던 7 족속은 매우 음란한 족속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땅으로 들어가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풍속을 따르지 말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한 것은 그들이 동성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따르지 말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의 본래 가치를 버리고 오로지 쾌락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봐야 할것이다. 동성애를 탐욕, 쾌락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해석이라 자신할 수 있을까?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열왕기상 15:12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디모데전서 1:10
이 말씀을 가지고 "남색"을 동성애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남색"을 살펴보면, 열왕기상에서 언급된 "남색"은 קָדֵשׁ(카데쉬)로 '음탕한 우상숭배 하는데 매춘 행위로 바쳐진 남자'를 뜻한다. 디모데전서에서 언급된 "남색하는 자"는 ἀρσενοκοίτης, ου, ὁ(알세노코이테스)인데 이 단어는 매춘 등의 착취를 의미한다고 한다. 1
사실 이 "남색"과 자주 함께 다니는 용어가 "음행"이라는 용어인데, 결국 쾌락을 좇는 행위에 대함이지 동성애와는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과의 섹스와 구분을 좀...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참 기이할 정도로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 사고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짙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equal to 에이즈" 혹은 동성애는 동성과의 섹스라는 기이한 명제다.
나는 이를 두고 혐오적 학습효과라 해두고 싶다. 과거 우리 사회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언론 역시도 그에 부흥(?)하여 동성애가 에이즈를 만들어내고 동성애는 동성끼리의 성관계를 가지는 행위로 치부해버리지 않았나? 그것을 아무 필터링 없이 받아들인 덕분에 지금의 인식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혐오에 익숙하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 하지만 인종에 대한 혐오 (특히 흑인들에 대한), 장애인에 대한 혐오, 여성 남성에 대한 혐오 등등 수 없는 혐오가 넘쳐나고 있는게 현재의 한국 사회다. 동성애는 그 혐오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이성과의 섹스에 미쳐있지 않듯,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마치 동성애자는 병적으로 동성과의 섹스에 미쳐있는 이로 평가하는 경향이 큰데 제발 동성애와 동성과의 섹스는 구분해서 생각하자.
적어도 동성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찾아보든, 기사를 뒤져보든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고 비판할 것을 비판하고 혐오하고 싶으면 그 때 혐오하자.

차별행위의 금지에 대해 찬성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은 늘 크리스쳔으로서 가져야 할 질문일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이 만났던 이들 중에 동성애자는 없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죄인(이라 칭하는)들을 대하신 것들을 보면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 앞잡이와도 같은 민족의 배반자요 구제불능의 세리가 상종 못할 인간으로 취급해야 한다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간음한 여인를 쳐 죽여도 좋다 음행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니 저 여자가 저런 취급을 받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성애에 대해 죄라고 규정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죄라는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아니 설사 그것이 죄라고 규정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차별받는 것이 합당하다라고도 역시 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을 끌어안으셨지 마땅히 저들을 차별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 죄인이라며 낙인 찍지도 않으셨다.
나는 동성애 자체를 지지하거나 (사실 지지라는 용어도 웃기는 용어다 애초에 지지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나?) 동성애를 권장하는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직업을 구할 수 없거나,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한다거나, 치료를 받지 못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차별은 결코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교회들이 앞장서서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항간에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이런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고 교회들로부터 공유된 동영상이나 이야기들이 있다.
검색만 해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니 굳이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이것들은 다수 막연한 무한 상상력과 자기 합리화가 결합되어 탄생한 세기의 거짓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청소년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성교육을 하게 되어 많은 청소년이 동성애자가 될 것이다 라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교육을 하게 되어 청소년이 동성애자가 될 거 였으면 이미 많은 청소년들은 섹스에 환장한 놈들이 되어 있어야 정상 아닌가?
동성애 차별금지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를 죄라고 이야기하면 잡혀가게 된단다. 국내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장애인의 접근성이 개선되지 않은 교회들도 더러 많다. 이상하다 벌써 대거 잡혀 갔어야 할텐데...
교회들이 혹은 교인들이 앞장서서 그릇된 정보를 양산하고 공유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마치 오래전(?) 데이비드 오웬의 예언을 퍼다가 마구 카톡이며 커뮤니티며 날라댔던 것과 무엇이 다를까?
개인적으로 더 코미디스럽다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동성애에 대해서는 온갖 반대의 소리를 내면서 왜 전병욱에 대해서는 온갖 소리를 내지 않는걸까?
교회들이 정말 이야기 해야 할 것은 성적 대상에 앞서 성적 탐닉 자체이지 않을까?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이 정말 동성애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인지, 동성애 자체를 죄로 규정하는 것인지, 동성애자들을 품는 것인지 등등 말이다.
정말 동성애가 죄라 판단된다면, 동성애자들이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섭리대로 돌아도로록 권면해야 할 것이지, 그들이 차별받고 고통받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분명 아닐터다.
혹은 동성애를 죄라 판단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이 차별받고 고통받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 역시 해서는 안 될 일일 것이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을 따르고자 함이지, 동성애자들이 차별 받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들의 인권이 해쳐지는 것을 남의 일로 치부하고 내버려 두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와 공동체의 건강한 성윤리를 지켜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편견, 아집, 편협한 생각, 내 경험, 짧은 지식등으로 함부로 재단하는 것 역시 금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본 글은 펌글입니다.
https://mulder21c.github.io/2017/09/04/about-sexual-minority/

‘동성애, 신앙, 한국 개신교의 선택’ 권연경교수


한국 교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동성애문제는 동성애는 죄라는 불변의 명제하에 지속적으로 에이즈의 위험성만을 내세우며 성경이 정말로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과 반대하는 정통주의적 입장의 성경 텍스트 읽기는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진행됐다.
  
청어람아카데미(대표 양희송)19,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동성애, 신앙, 한국 개신교의 선택이란 주제로 청어람 강좌를 진행했다.
  
19일부터 5주 동안 매주 월요일에 진행되는 이번 청어람 강좌 첫 스타트는 숭실대 기독교학과 권연경 교수로부터 시작됐다.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말하지 않는 동성애란 주제로 강연을 한 권 교수는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혹은 지지하지 않는 양측의 신학적 입장을 소개하며 양측 입장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내렸다.
권 교수는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이 현대적 개념의 동성애는 이상화된 동성애일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상호간의 신뢰와 사랑, 헌신을 바탕으로 한 이성애와 관계와 비견되는 관계는 성경에서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성경에서 비판하는 동성애는 현대의 동성애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비판하는 동성애는 행위에 대한 것이지 그 사람의 성향이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권 교수의 설명이다.
 

권 교수는 성경이 다른 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어 동성애에 무관심하다고도 말했다. 이를 당시 전통적 보수사회에서 논할 가치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동성애를 문제 삼을 의사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섣불리 답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지만, 이런 물음의 중요성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얼마 안 되는 성경의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해석할 때, 우리가 성경적일 것으로 생각하는(전제하는) 전반적 분위기가 개별 구절들을 읽는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라며 동성애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열린 자세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권 교수는 초대교회의 신학적 삶의 자리였던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을 고려할 때, 신약성경이 동성애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적어도 배척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동성애가 만연했던 그리스 로마와 같은 주변문화들과는 달리 신약성서는 결혼 내에서의 이성적 결합만을 창조질서에 합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 또한 레위기 18장 말씀을 근거로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신자를 비난하며 출교를 명한 것처럼(고전 5:1-13:1) 신약시대에는 성문화에 있어서 굉장히 엄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성경에 동성애적 관계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가 바로 룻과 나오미, 다윗과 요나단, 예수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와 마가복음의 청년, 백부장과 그의 종(파이스) 등이다.
권 교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주석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운 논의가 있다는 반응이라며 논의는 모든 관계를 성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일종의 “pan-eroticism”의 표현처럼 보인다. 우리가 누리는 관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어쩌면 성적이지 않은, 친구와의 깊고 절실한 우정,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진한 사랑과 유대, 스승과 제자사이의 깊고 진한 사랑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역시 동성애와 관련된 우리의 논의를 보다 차분한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 관련 구절에 대한 개별적 분석에 들어갔다. 그 첫 번째는 창조기사이다.
전통적 창조기사 읽기는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다. 이는 자녀 출산과 번성의 본래의 사명이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동성애가 창조질서에 반한다는 입장을 확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정통 유대교 랍비이자 동성애자인 스티븐 그린버그(Steven Greenberg)는 유대설화를 근거로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이성애적 결합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창조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경쟁을 해결하기 위한 사후적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창조이야기는 애초부터 인류의 발생 기원을 설명하려는 특정한 의도의 산물이라 생식과 출산이 가능한 관계, 곧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의 차원에서 인류의 시작을 설명하는 것으로 동성애는 창조 이야기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위에서 예를 든 시도들이 주석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조 이야기를 색다르게 읽으려는 이런 움직임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 동성애적 존재방식이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시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는 소돔의 죄악에 대한 내용이다. 권 교수는 퀴어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관계를 맺겠다는 뜻이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 아닌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돔이 멸망했다는 주장에 대해 명확히 말하지만 관계를 맺다는 것은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 맞다. 동성애가 아니라면 왜 남자를 알지 목하는 두 딸을 데려오겠다고 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단지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주장도 타당한 것은 아니라고 권 교수는 말했다. 이미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가득해 멸망시키려 하셨고, 천사들이 소돔에 방문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결정돼 롯 가족을 건지기 위한 것으로 즉 멸망의 1차적 원인이 동성애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은 레위기의 금지명령에 대해서이다. 구약성경에서 동성간의 성행위에 관한 가장 명시적인 금지는 레위기 1822절 및 2013절에 나타난다.


이 구절에 대해 동성애자 랍비 그린버그는 항문성교 외의 동성적 성행위는 명시적 금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금지의 대상이 능동적 파트너라는 사실은 수동적 파트너가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던 당시의 주변 문화와 구별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왜 남자 간의 삽입성교가 금지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린버그는 이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이념과 관계된다. 남녀차별이 당연시된 고대 사회에서의 성행위는 본질적으로 남녀 간의 지배와 종속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남자 간의 성행위는 동등해야 할 둘의 관계를 공격과 굴욕적 비하의 관계로 전락시키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것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 교수는 문법적 역사적 비평의 견지에서 볼 때, 본문의 상황을 항문성교로 규정하는 랍비적 관점은 일견 매우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자와 누움이라는 표현이 애초부터 삽입이라는 제한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이는 성관계에 구체적 정황을 포착하려는 수식이 아니라 성관계의 대상을 특정하는 표현이 아닌가? 또한 현대적 주석의 관점에서 볼 때, 1822절의 대상을 능동적 파트너로 제한하고 이 구절과 2013절 사이의 모순을 말하는 것은 문맥상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지나친 분해주의적(anatomistic) 읽기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율법 속의 많은 규정들이 폐기된 마당에, 굳이 동성애 관련 규정의 유효성만 계속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모순이 아닌가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권 교수는 이런 지적이 원칙적으로는 타당하나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고 말한다. 신약이 율법 전체를 폐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많은 규정들이 해당사항 없는 것으로 무시되었지만, 바울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레위기의 성결법전 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수용된 규정들 또한 많다. 특히 도덕적 규정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동성 성관계 규정이 의식법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 구약 자체는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약은 도덕적 규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권 교수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동성애로 논의를 옮겼다.
  
신약에서도 동성애는 두드러진 주제가 아니다. 도덕적 훈계들이 제시되는 곳에서도 동성애는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그나마 실제 상황을 다루는 경우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동성애와 관련된 구절들은 모두 다른 논점을 다루는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언급들이라며 이런 상대적 침묵에서 어느 쪽으로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먼저 제기된 구절은 로마서 126절과 27절이다. 이는 신약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가 명시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길게 논의되는 유일한 구절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본문을 동성애 반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 구절로 간주한다.
 본문에 대한 전통적 읽기는 이 두 구절은 각각 여자와 남자의 동성 성관계를 다룬다 바울은 인류의 전반적 타락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여기서 동성애적 행태는 그 타락된 본성의 일부다. 더 나아가 동성애적 행태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태도의 필연적 결과다. 동성 간의 성관계는 이성 간의 성관계라는 자연스러운/정상적인 질서,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바울은 동성 간의 성관계를 분명한 범죄로 규정한다 등으로 요약된다.
 
 
권 교수는 물론 본문에 대한 수정주의적 읽기는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 간 성행위를 정죄한다는 전통적 해석에 반대한다. 곧 바울은 동성 간 성관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며, 그에게 있어 이 문제는 윤리적으로 중립적 문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라며 수정주의적 읽기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수정주의적 읽기는 바울은 동성애를 우상숭배적 행태와 연결한 것으로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상숭배적 맥락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권 교수는 이런 논증은 바울의 신학적 사고 속에서 창세기의 타락의 내러티브와 유대 전승에서 나타나는 이방적 우상숭배의 기원 이야기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부자연스럽다. 명시적으로 타락 신화가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로마서 1장은 창세로부터, 창조주, 남자, 여자 등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단어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수정주의적 읽기는 비판의 칼날을 동성애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 배후에 놓인 것으로 추정되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이념으로 돌림으로써 동성애 행위에 면죄부를 주려한다. 곧 바울이 논하는 동성애적 행위에 매우 특수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동성애와 선명하게 구분하고, 이로써 바울의 논의에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권 교수는 고대사회의 성행위가 성별 및 계급 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념적 고려가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주된 혹은 유일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며 물음표를 던졌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성인 남자와 소년의 사랑이라는 동성애적 관계(paiderastia)를 놓고 진정한 사랑의 본질에 관해 나누는 대화가 등장한다. 여기에는 쾌락을 위해 소년의 육체를 탐하는 행동이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맡기는 행동은 진정한 사랑과 무관한 것으로 비난받는다.
  
권 교수는 여기서 보는 동성애적 사랑의 담론은 적나라한 의미에서의 위계질서 확인이나 착취와는 무관해 보인다. 물론 당시에도 이런 형태의 동성애에 관한 염려와 부정적 여론은 널리 퍼져있었고, 비판 역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례하고 나쁜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서 그런 것일 뿐, 절도와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세상이 비난할 이유는 없다고, 향연(심포지움)의 한 참가자인 파우사니우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동성애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울이나 당대의 유대 저술가들은 동성애에도 이런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동성애적 관점에서 성경을 새롭게 읽으려는 이들의 시도는 그 나름의 무리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한 기존 해석의 느슨한 부분들을 폭로하기도 한다4가지 사안에 대해 설명했다.
  
그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읽기 전략이다. 동성애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은 대부분 표면적으로 반동성애적이다. 이성애주의적(heterosexist)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려는 이들은 최대한 성경이 묘사하는 상황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물음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반면 동성애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이들은 최대한 성경이 다루는 상황과 우리들이 직면한 상황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한다. 성경의 해답이 오늘 우리가 고민한 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아님을 확인함으로써, 성경적 권위의 무게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 두 움직임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는 선험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신이 아닌 한, 유사성을 찾으려는 해석 속에도, 그리고 차이점을 부각시키려는 해석 속에도, 모두 나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나는 이성애자로서 관련된 본문을 읽어 왔고, 따라서 동성애적 성경읽기의 가능성에 아직 의문이 많지만, 동성애적 읽기의 많은 사례들은 나의 주해와 해석학적 판단 방식에 대해 지속적인 물음을 던진다. 나는 열린 마음으로 이 물음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고도 말했다.
다음은 해석학적 투명성 혹은 일관성이다. 동성애적 성경읽기의 색다른 읽기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해석학적 일관성에 관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이런 사례는 내가 성경의 권위를 크게 고백한다고 해서 내 읽기가 더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성경의 권위를 고백하는 것과 그 고백에 어울리는 해석을 추구하는 것은 별개다. 이런 엄연한 사실은 동성애 관련 대화에서 보다 전통적 입장에 선 사람들이 깊이 숙고해야 할 사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동성애 문제와 관련된 성경과 그 해석이다. 보스웰이나 마틴 같은 동성애적 관점의 논객들은 종종 이성애주의자들의 성경읽기가 순수한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관점에서 출발한 사후적 정당화라고 비판한다. 성경 자체로부터는 그런 관점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성경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권 교수는 이런 비판이 늘 옳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 이성애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정서의 생김새를 고려해 보면, 성경이 우리 사고의 선구자가 아니라 우리 편견의 사후처리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며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 호모포비아적 토대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성서비평과 문화비평이다. 이성애주의적 저자들은 종종 문화비평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다. 성경의 시대와는 달라져버린 현대문화의 관점에서 성서적 메시지에 대한 비평적 읽기가 필요한 것처럼,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적 메시지의 관점에서 역사의 부침에 좌우되는 현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읽기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텍스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성경의 표면적 비난이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와는 무관한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언제나 매우 특수한 동성애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살아가는 동성애적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말한다.
 
권 교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다른 도덕적 규정들에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다. 가령 바울은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와 성관계를 맺는 신자를 출교시키라고 고린도교회에 명령한 부분에 있어서 이것이 성경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배후에도 상속 문제와 같은 모종의 사회경제적 요인이 얽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때 그런 사회경제적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계모와의 성관계가 허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권 교수는 어쩌면 우리는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는,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권 교수는 혼전순결이나 동성애 같은 주제는 부담스럽다. 이런 부담의 많은 부분은 현실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믿는 성경의 메시지와 현실 사이의 격차다. 그리고 이 둘의 목소리 모두 무시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 사회적, 신학적 소수자의 자리에 선 동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며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런 상황적 절박함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적 절박함은 성경의 텍스트에 대한 폭력으로 변환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권 교수는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성애라는 현대적 현상에 대해 보다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나와 같은 이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동성애라는 불편한 현상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며 강연을 마쳤다.

존 스토트가 말하는 ‘동성애 논쟁, 제3의 길’

존 스토트가 말하는 동성애 논쟁, 3의 길
호모포비아와 호모필리아 사이에서

존 스토트 목사.
이제 그가 답할 차례다.
 
미국과 서유럽 등 기독교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동성애와 관련해 홍역을 치른 바 있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는 일찍이 <현대 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Decisive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속 동성애 항목을 따로 묶어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동성간의 결혼도 가능한가?(Same-Sex Partnerships?, 홍성사)>로 편찬할 정도다.
제목부터 동성애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걸 보면 서구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다.
 
존 스토트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윤리적 도전 가운데서 동성애혹은 게이논쟁만큼 급진적인 것은 없다며 동성애 논쟁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와 성경의 주요 본문에 대한 입장, 동성애 지지자들의 5가지 주요 주장 등을 다루고 있다.
물론 존 스토트는 동성애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입장이고 우리도 이를 다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떠한 논리를 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 주제가 매우 민감하다고 인정하는 존 스토트는
호모포비아 (동성애 공포증)’호모필리아 (동성애 애호)’로 양극화된 상황에서 이들 대안 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성에 대한 성경적 사고방식을,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성경적인 태도와 접목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 그리고 성과 결혼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언급한 성경 본문은 네 곳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돔 이야기(창세기 19:1-13)와 레위기(18:22, 20:13), 바울의 로마서(1:18-32)와 두 서신(고전 6:9-10, 딤전 1:8-11)이다.
소돔 이야기는 기브아 이야기(19)와 흡사하다. ‘호모필리안들은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이같은 언급이 네 차례에 불과함을 든다.
또 이 본문들이 말씀의 주요 취지에서 벗어난 주변적인 언급일 뿐이고,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고까지 항변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손님 대접이 부실해 멸망했고, 레위기 본문들은 이교 의식을 금지한 것이며, 로마서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방탕함을, 두 서신에서는 남성간 성매매를 지적한다는 주장이다.
 
 
존 스토트는 말한다.
 
이러한 결론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그렇게 다룰 수는 없고 기독교가 동성애 행위를 거부하는 근거는 전통적 해석을 뒤엎는 몇몇 따로 떨어져 있고 모호한 번문들때문이 아니다나로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게 불편하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인금기는 인간의 성과 이성애 결혼에 대한 창세기 1-2장의 긍정적인가르침에 비춰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동성애 허용론자들은 이성애와 동성애를, 이성애자들의 결혼과 동성애자들의 동반자 관계를 의도적으로 대등하게 양립시키는 전략을 편다.
하지만 존 스토트는 이것이 성경에 비춰볼 때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창세기 1-2장의 결혼에 대한 기본 진리는 인간은 동반자를 필요로 하고 인간의 욕구를 위해 하나님은 남자에게 여자를, 여자에게 남자를 준비하셨으며 그 결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생겨났다는 3가지다.
스토트는 본문에 나타나는 이성애의 성관계는 육체의 결합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서로 보완되는 인격간의 융합이며 이를 통해 소외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인간의 풍성하고 창조된 하나됨이 다시 경험된다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완적인 성 기관은 훨씬 더 깊은 영적 보완성을 육체적 차원으로 보여주는 상징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이성애적 일부일처제가 아닌 다른 어떤 종류의 결혼이나 성관계를 구상하고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른 대안을 마련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 성관계를 특별히 정죄해야 할 죄로 떼내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모든 종류의 성적 관계나 행위-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 동거와 비밀 결혼, 가벼운 만남과 한시적 관계, 간음과 이혼, 그리고 동성애 관계-가 사실상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성경이 숙고하고 있는 유일한 한 몸의 체험은 한 남자가 자신의 살 중의 살이라 인정하는 아내와 가지는 성적 결합이다.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의 반격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
그러나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성과 이성애 결혼 제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동성애 동반자 관계의 합법성을 변호하려 몇몇 반론을 제시한다.
 
성경과 문화라는 논거=성경은 모든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여겨지지만,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성경의 저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믿을만한 안내자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첫째, 성경 저자들은 자신의 문화에 얽매여 있어 이들이 동성애와 관련해 가르치는 내용이 적절치 않고 둘째, 타고난 동성애 성향등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부분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토트는 금지의 본문들만 찾아본다면 이같은 반대의견에 답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일단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제도에서 보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하나님의 계시 원칙이 생긴다성경에서 동성애를 금지하는 이유는 오늘날 서로 사랑하는 동성애 동반자 관계도 정죄돼야 하는 이유와 같은데, 그것은 바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이성애 일부일처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창조와 자연이라는 논거=하나님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만드셨다는 사람들, 동성애 행위가 원시 사회에서는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다는 사람들에게 존은 이렇게 답한다.
이러한 논거들은 무엇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가에 대해 매우 주관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창조 과정을 통해 성과 결혼에 대한 기준을 세워놓으셨으므로, 정상성이나 자연스러움을 정하는 영원한 기준이 없다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동성애가 초대교회에서 우선적 문제가 아닌 자유를 허락한 부차적 문제라거나 여성 안수와 같이 두 가지 타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이슈라는 주장에는 초대교회에서의 부차적 문제들은 주로 신학적이거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었는데 동성애 행위는 그렇지 않고, 결혼에서의 성별 차이는 사역에서의 성별 차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라고 논증한다.
 
관계의 질이라는 논거=크리스천들의 레즈비언과 게이 운동단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는 성경의 진리와, 1960년대 이후 사랑이 모든 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새로운 도덕혹은 상황 윤리개념-예를 들면 더 이상 왼손잡이에 대한 비난 이상으로 동성애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관계의 성격과 질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스토트는 여기에 세 가지 반제로 맞섰다.
첫째, 동성애 관계에서는 평생 지속되는 결혼과 흡사한 정절의 개념이 신화인 경우가 많고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둘째, 게이들의 일반적 성행위에 따른 피해와 위험에 비춰볼 때 동성애 관계가 이성애 결혼과 동일한 사랑의 방식이라 보기 어렵다.
셋째, 사랑에는 이를 인도할 율법(계명)이 필요하므로, 위 주장의 기본 전제 자체를 성경적 그리스도인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등이다.
 
정의와 인권이라는 논거=성별, 피부색, 인종 때문에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듯 성적 기호에 따라서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론에는 그들이 멸시받고 거부당하거나 동성애 공포증의 희생자라면 그들의 불만은 정당하고 시정돼야 하지만, 이들이 불평하는 부당함또는 불의가 동성애 관계를 이성애 결혼과 동등하게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라면 정의에 대한 논의는 부적절하다고 해설한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의하면 성관계는 이성애 결혼 관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게이 해방은 우리 자신의 도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한 목적에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적 반항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덧붙였다.
 
 
용납과 복음이라는 논거=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하는 게 복음이라는 데 대해서는 복음을 심하게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용납이란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용서한다는 뜻이지 우리가 죄를 계속 짓는 것을 묵인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토트는 우리가 서로 용납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회개자로, 동료 순례자로 용납하는 것이지 계속해서 죄를 짓기로 결심한 죄인으로서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에이즈는 정말, 하나님의 심판일까?
 
그러나 동성애를 찬성하는 미국인들은 늘어나고 있다.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에이즈를 동성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자신있게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여기에 신학적으로 그렇다아니다’, 둘 다 답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이 재난을 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정한 심판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정절을 지킨 기혼 여성들이나 어린아이 등도 걸린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 혹은 악한 행동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도덕적 세계에 새겨두신 질서인 것 같다이러한 심판은 문란한 성관계에 성 해방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자유방임적 사회를 향해 계속 허풍을 떨어보라는 도전과도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목회적으로는 그들을 멀리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지역교회는 교회나 그 지역사회 내 에이즈 환자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실제로 호스피스 운동이 에이즈 환자에게까지 확장된 데는 그리스도인들의 덕이 컸다.
또 철저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무지와 편견, 두려움 그리고 문란한 태도와 싸우는 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에이즈의 위기는 우리를 행위와 진리의 모든 면에서 진정한 교회, 곧 치유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도록 큰 도전을 안겨준다우리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치유 공동체 자체가 그리스도의 용서로 치유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바울이 제시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삼각대 속에서
 
기존의 해묵고 반복되는 동성애 논쟁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존 스토트는 동성애를 하나님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로 본다면 이들에게 동성애 행위와 관계의 중단을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며 믿음과 소망, 사랑의 측면에서 이를 풀이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부르심=스토트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간명하게 정리한다.
이에 따라 믿음은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이성애 결혼이 아니라면 독신과 금욕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성 경험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지만 인간이 충족을 누리는 핵심이 아니고,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동성애는 믿음의 문제라 말하면서 성욕으로 가득한 이들에게도 독신이 가능함을 설득한다.
 
소망이라는 부르심=지금까지 그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치유의 가능성에 대한 소망이다.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그는 동성애자들은 부모 중 동성과의 관계에서 결핍을 경험했고, 이를 같은 성 혹은 동성애 관계로 보상하려 한다이는 결핍과 욕구가 한 쌍을 이룬다는 말이고, 부모의 돌봄을 대체하는 관계도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해결책은 성적 행위 없이 동성을 만나는 데 있고, 특히 교회 안에서 이러한 관계를 통한 치유가 가능하다.
 
사랑이라는 부르심=안 그런 것 같지만, 교회는 사실 동성애자들을 대하면서 사랑을 보여주는 일에 주로 실패한다.
바로 공포와 적개심, 혐오감이 뒤섞인 호모포비아.
동성애자들에게 그 습관을 버리라고 요청하듯 이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은 호모포비아를 버려야 한다.
그는 레즈비언과 게이 크리스천 운동 단체가 존재하는 자체가 교회를 책망하는 표시라 생각한다고 일갈했다.
동성애 성향의 핵심에는 깊은 외로움과 상호적 사랑에 대한 본능적 갈증, 정체성의 추구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교회 가족 내에서 이를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현을 쓸 자격이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랑과 이해, 용납과 지지가 바로 제3의 길이다.
 
스토트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 성향을 공개할 필요는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그러나 마음의 짐을 털어놓을 사람, 자신을 경멸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우정과 기도로 지지해 줄 절친한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하나님의 가족 내에서 발전해 나가야 하고, 하나님은 각각의 지역 교회가 따뜻하고 용납하며 지지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는 진정한 사랑과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자세가 서로 양립 불가능하지는 않다동성애자 그리스도인의 딜레마가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의 기준과 이를 지탱하는 은혜를 받아들일 믿음, 현재의 고통을 넘어 미래의 영광을 보는 소망, 서로를 돌보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실 것이라고 결론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