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30일 토요일

‘동성애, 신앙, 한국 개신교의 선택’ 권연경교수


한국 교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동성애문제는 동성애는 죄라는 불변의 명제하에 지속적으로 에이즈의 위험성만을 내세우며 성경이 정말로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과 반대하는 정통주의적 입장의 성경 텍스트 읽기는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진행됐다.
  
청어람아카데미(대표 양희송)19,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동성애, 신앙, 한국 개신교의 선택이란 주제로 청어람 강좌를 진행했다.
  
19일부터 5주 동안 매주 월요일에 진행되는 이번 청어람 강좌 첫 스타트는 숭실대 기독교학과 권연경 교수로부터 시작됐다.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말하지 않는 동성애란 주제로 강연을 한 권 교수는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혹은 지지하지 않는 양측의 신학적 입장을 소개하며 양측 입장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내렸다.
권 교수는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이 현대적 개념의 동성애는 이상화된 동성애일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상호간의 신뢰와 사랑, 헌신을 바탕으로 한 이성애와 관계와 비견되는 관계는 성경에서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성경에서 비판하는 동성애는 현대의 동성애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비판하는 동성애는 행위에 대한 것이지 그 사람의 성향이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권 교수의 설명이다.
 

권 교수는 성경이 다른 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어 동성애에 무관심하다고도 말했다. 이를 당시 전통적 보수사회에서 논할 가치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동성애를 문제 삼을 의사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섣불리 답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지만, 이런 물음의 중요성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얼마 안 되는 성경의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해석할 때, 우리가 성경적일 것으로 생각하는(전제하는) 전반적 분위기가 개별 구절들을 읽는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라며 동성애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열린 자세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권 교수는 초대교회의 신학적 삶의 자리였던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을 고려할 때, 신약성경이 동성애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적어도 배척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동성애가 만연했던 그리스 로마와 같은 주변문화들과는 달리 신약성서는 결혼 내에서의 이성적 결합만을 창조질서에 합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 또한 레위기 18장 말씀을 근거로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신자를 비난하며 출교를 명한 것처럼(고전 5:1-13:1) 신약시대에는 성문화에 있어서 굉장히 엄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성경에 동성애적 관계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가 바로 룻과 나오미, 다윗과 요나단, 예수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와 마가복음의 청년, 백부장과 그의 종(파이스) 등이다.
권 교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주석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운 논의가 있다는 반응이라며 논의는 모든 관계를 성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일종의 “pan-eroticism”의 표현처럼 보인다. 우리가 누리는 관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어쩌면 성적이지 않은, 친구와의 깊고 절실한 우정,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진한 사랑과 유대, 스승과 제자사이의 깊고 진한 사랑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역시 동성애와 관련된 우리의 논의를 보다 차분한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 관련 구절에 대한 개별적 분석에 들어갔다. 그 첫 번째는 창조기사이다.
전통적 창조기사 읽기는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다. 이는 자녀 출산과 번성의 본래의 사명이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동성애가 창조질서에 반한다는 입장을 확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정통 유대교 랍비이자 동성애자인 스티븐 그린버그(Steven Greenberg)는 유대설화를 근거로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이성애적 결합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창조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경쟁을 해결하기 위한 사후적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창조이야기는 애초부터 인류의 발생 기원을 설명하려는 특정한 의도의 산물이라 생식과 출산이 가능한 관계, 곧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의 차원에서 인류의 시작을 설명하는 것으로 동성애는 창조 이야기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위에서 예를 든 시도들이 주석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조 이야기를 색다르게 읽으려는 이런 움직임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 동성애적 존재방식이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시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는 소돔의 죄악에 대한 내용이다. 권 교수는 퀴어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관계를 맺겠다는 뜻이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 아닌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돔이 멸망했다는 주장에 대해 명확히 말하지만 관계를 맺다는 것은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 맞다. 동성애가 아니라면 왜 남자를 알지 목하는 두 딸을 데려오겠다고 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단지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주장도 타당한 것은 아니라고 권 교수는 말했다. 이미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가득해 멸망시키려 하셨고, 천사들이 소돔에 방문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결정돼 롯 가족을 건지기 위한 것으로 즉 멸망의 1차적 원인이 동성애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은 레위기의 금지명령에 대해서이다. 구약성경에서 동성간의 성행위에 관한 가장 명시적인 금지는 레위기 1822절 및 2013절에 나타난다.


이 구절에 대해 동성애자 랍비 그린버그는 항문성교 외의 동성적 성행위는 명시적 금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금지의 대상이 능동적 파트너라는 사실은 수동적 파트너가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던 당시의 주변 문화와 구별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왜 남자 간의 삽입성교가 금지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린버그는 이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이념과 관계된다. 남녀차별이 당연시된 고대 사회에서의 성행위는 본질적으로 남녀 간의 지배와 종속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남자 간의 성행위는 동등해야 할 둘의 관계를 공격과 굴욕적 비하의 관계로 전락시키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것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 교수는 문법적 역사적 비평의 견지에서 볼 때, 본문의 상황을 항문성교로 규정하는 랍비적 관점은 일견 매우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자와 누움이라는 표현이 애초부터 삽입이라는 제한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이는 성관계에 구체적 정황을 포착하려는 수식이 아니라 성관계의 대상을 특정하는 표현이 아닌가? 또한 현대적 주석의 관점에서 볼 때, 1822절의 대상을 능동적 파트너로 제한하고 이 구절과 2013절 사이의 모순을 말하는 것은 문맥상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지나친 분해주의적(anatomistic) 읽기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율법 속의 많은 규정들이 폐기된 마당에, 굳이 동성애 관련 규정의 유효성만 계속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모순이 아닌가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권 교수는 이런 지적이 원칙적으로는 타당하나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고 말한다. 신약이 율법 전체를 폐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많은 규정들이 해당사항 없는 것으로 무시되었지만, 바울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레위기의 성결법전 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수용된 규정들 또한 많다. 특히 도덕적 규정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동성 성관계 규정이 의식법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 구약 자체는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약은 도덕적 규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권 교수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동성애로 논의를 옮겼다.
  
신약에서도 동성애는 두드러진 주제가 아니다. 도덕적 훈계들이 제시되는 곳에서도 동성애는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그나마 실제 상황을 다루는 경우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동성애와 관련된 구절들은 모두 다른 논점을 다루는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언급들이라며 이런 상대적 침묵에서 어느 쪽으로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먼저 제기된 구절은 로마서 126절과 27절이다. 이는 신약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가 명시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길게 논의되는 유일한 구절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본문을 동성애 반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 구절로 간주한다.
 본문에 대한 전통적 읽기는 이 두 구절은 각각 여자와 남자의 동성 성관계를 다룬다 바울은 인류의 전반적 타락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여기서 동성애적 행태는 그 타락된 본성의 일부다. 더 나아가 동성애적 행태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태도의 필연적 결과다. 동성 간의 성관계는 이성 간의 성관계라는 자연스러운/정상적인 질서,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바울은 동성 간의 성관계를 분명한 범죄로 규정한다 등으로 요약된다.
 
 
권 교수는 물론 본문에 대한 수정주의적 읽기는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 간 성행위를 정죄한다는 전통적 해석에 반대한다. 곧 바울은 동성 간 성관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며, 그에게 있어 이 문제는 윤리적으로 중립적 문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라며 수정주의적 읽기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수정주의적 읽기는 바울은 동성애를 우상숭배적 행태와 연결한 것으로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상숭배적 맥락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권 교수는 이런 논증은 바울의 신학적 사고 속에서 창세기의 타락의 내러티브와 유대 전승에서 나타나는 이방적 우상숭배의 기원 이야기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부자연스럽다. 명시적으로 타락 신화가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로마서 1장은 창세로부터, 창조주, 남자, 여자 등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단어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수정주의적 읽기는 비판의 칼날을 동성애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 배후에 놓인 것으로 추정되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이념으로 돌림으로써 동성애 행위에 면죄부를 주려한다. 곧 바울이 논하는 동성애적 행위에 매우 특수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동성애와 선명하게 구분하고, 이로써 바울의 논의에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권 교수는 고대사회의 성행위가 성별 및 계급 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념적 고려가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주된 혹은 유일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며 물음표를 던졌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성인 남자와 소년의 사랑이라는 동성애적 관계(paiderastia)를 놓고 진정한 사랑의 본질에 관해 나누는 대화가 등장한다. 여기에는 쾌락을 위해 소년의 육체를 탐하는 행동이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맡기는 행동은 진정한 사랑과 무관한 것으로 비난받는다.
  
권 교수는 여기서 보는 동성애적 사랑의 담론은 적나라한 의미에서의 위계질서 확인이나 착취와는 무관해 보인다. 물론 당시에도 이런 형태의 동성애에 관한 염려와 부정적 여론은 널리 퍼져있었고, 비판 역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례하고 나쁜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서 그런 것일 뿐, 절도와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세상이 비난할 이유는 없다고, 향연(심포지움)의 한 참가자인 파우사니우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동성애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울이나 당대의 유대 저술가들은 동성애에도 이런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동성애적 관점에서 성경을 새롭게 읽으려는 이들의 시도는 그 나름의 무리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한 기존 해석의 느슨한 부분들을 폭로하기도 한다4가지 사안에 대해 설명했다.
  
그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읽기 전략이다. 동성애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은 대부분 표면적으로 반동성애적이다. 이성애주의적(heterosexist)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려는 이들은 최대한 성경이 묘사하는 상황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물음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반면 동성애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이들은 최대한 성경이 다루는 상황과 우리들이 직면한 상황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한다. 성경의 해답이 오늘 우리가 고민한 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아님을 확인함으로써, 성경적 권위의 무게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 두 움직임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는 선험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신이 아닌 한, 유사성을 찾으려는 해석 속에도, 그리고 차이점을 부각시키려는 해석 속에도, 모두 나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나는 이성애자로서 관련된 본문을 읽어 왔고, 따라서 동성애적 성경읽기의 가능성에 아직 의문이 많지만, 동성애적 읽기의 많은 사례들은 나의 주해와 해석학적 판단 방식에 대해 지속적인 물음을 던진다. 나는 열린 마음으로 이 물음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고도 말했다.
다음은 해석학적 투명성 혹은 일관성이다. 동성애적 성경읽기의 색다른 읽기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해석학적 일관성에 관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이런 사례는 내가 성경의 권위를 크게 고백한다고 해서 내 읽기가 더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성경의 권위를 고백하는 것과 그 고백에 어울리는 해석을 추구하는 것은 별개다. 이런 엄연한 사실은 동성애 관련 대화에서 보다 전통적 입장에 선 사람들이 깊이 숙고해야 할 사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동성애 문제와 관련된 성경과 그 해석이다. 보스웰이나 마틴 같은 동성애적 관점의 논객들은 종종 이성애주의자들의 성경읽기가 순수한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관점에서 출발한 사후적 정당화라고 비판한다. 성경 자체로부터는 그런 관점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성경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권 교수는 이런 비판이 늘 옳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 이성애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정서의 생김새를 고려해 보면, 성경이 우리 사고의 선구자가 아니라 우리 편견의 사후처리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며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 호모포비아적 토대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성서비평과 문화비평이다. 이성애주의적 저자들은 종종 문화비평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다. 성경의 시대와는 달라져버린 현대문화의 관점에서 성서적 메시지에 대한 비평적 읽기가 필요한 것처럼,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적 메시지의 관점에서 역사의 부침에 좌우되는 현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읽기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텍스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성경의 표면적 비난이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와는 무관한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언제나 매우 특수한 동성애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살아가는 동성애적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말한다.
 
권 교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다른 도덕적 규정들에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다. 가령 바울은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와 성관계를 맺는 신자를 출교시키라고 고린도교회에 명령한 부분에 있어서 이것이 성경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배후에도 상속 문제와 같은 모종의 사회경제적 요인이 얽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때 그런 사회경제적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계모와의 성관계가 허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권 교수는 어쩌면 우리는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는,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권 교수는 혼전순결이나 동성애 같은 주제는 부담스럽다. 이런 부담의 많은 부분은 현실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믿는 성경의 메시지와 현실 사이의 격차다. 그리고 이 둘의 목소리 모두 무시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 사회적, 신학적 소수자의 자리에 선 동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며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런 상황적 절박함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적 절박함은 성경의 텍스트에 대한 폭력으로 변환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권 교수는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성애라는 현대적 현상에 대해 보다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나와 같은 이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동성애라는 불편한 현상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며 강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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