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1일 토요일

코로나19와 면 마스크의 관계

[코로나19: 면 마스크]

가끔씩 ‘해석’이 바보 같은 뉴스를 보면 화가 난다. 지난주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발표한 천(면) 마스크 실험 결과를 보도한 어떤 뉴스가 그렇다. 사실 이 실험은 5마이크로미터 이상 크기의 비말로 전파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필터 없는) 일반 천 마스크로도 막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정반대로 나왔다. 찬찬히 살펴보자.


1. 이 실험의 애초 목적은 강동구 주민이 직접 제작한 필터를 부착한 면 마스크가 미세 입자를 막는 데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를 보면, 필터를 부착한 면 마스크는 0.6마이크로미터 입자를 평균 80~95% 차단 효과를 보였다. 이는 KF80 보건용 마스크와 비슷한 성능이다.

2. 대다수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필터가 없는 면 마스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차단 효과가 없다”고 해석했다. 정말로 그럴까? 아니다. 실험 결과를 보면, 필터 없는 일반 면 마스크도 0.6마이크로미터 입자를 평균 16~22% 차단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입자의 크기가 0.6마이크로미터였다는 것이다.

3. 감염내과 전문의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비말(물방울)의 크기는 5마이크로미터 이상이다. 면 마스크가 0.6마이크로미터 입자를 평균 16~22%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면, 5마이크로미터 이상으로 그보다 열 배 정도 큰 비말의 차단 효과는 훨씬 더 높아질 것이라 보는 게 합리적이다. 비말이 침방울, 즉 액체라는 걸 염두에 두면 더 그렇다.

4. 실제로 이런 해석을 염두에 두고서, 보건환경연구원 담당자도 “일반 면 마스크도 큰 사이즈(3마이크로미터 이상) 비말은 차단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들이 코로나19 비말 크기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 탓인지, 이런 담당자의 해석은 적극적으로 보도되지 않았다.

5. 실제로 보건환경연구원 담당자와 통화를 했더니, 나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다만, 보건환경연구원의 실험 기기 자체가 미세 먼지 차단 마스크의 효과를 검증하는 것이다 보니 5마이크로미터 입자의 차단 효과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기자님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6.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 일상생활에서는 필터를 부착하지 않은 일반 면 마스크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옮기는 5마이크로미터 이상의 비말을 막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다. (그보다 10분의 1 크기의 0.6마이크로미터 미세 입자 차단에도 16~22% 효과가 있었다.) 그러니, KF80, KF94 마스크를 구하려고 애쓰지 말고 면 마스크 두세 개를 세탁해서 깨끗이 사용하면 충분하다.

7. 사회적 거리 두기를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마스크를 사느라 마트, 우체국 앞에서 몇 시간씩 길게 줄을 서는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방역 당국이나 일부 감염내과 의사 등도 처음에 했던 틀린 조언을 계속해서 우기지 말고, “일상생활에서는 면 마스크도 충분히 바이러스 감염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정리해서 발표하라.

2020년 4월 1일 수요일

2019년 기독서적 올해의 책 11

2019년 기독서적 올해의 책 11


작년 12월부터 올해 11월까지 출간된 기독서적 중 11권을 선정했습니다. 선정은 ‘제가 읽은’ 책들 중에 좋다고 생각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외의 좋은 책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선정기준은 가독성, 신학적 건전성, 내용의 참신성에 있습니다. 순위는 책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좋았던, 그래서 추천하고픈 순위입니다.


1. 제임스 스미스, 『왕을 기다리며』, IVP

제임스 스미스의 예전신학 시리즈 3부작 중 마지막이며, ‘삶을 형성하는 예전’ 신학을 공공신학에 적용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전작 두 권과 더불어 올해 나의 신학공부와 신학형성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책이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는 이미 “왕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며, 따라서 복음으로 교회가 형성될 때만이 세상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나는 올해 이 책을 세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통찰과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을 강력하게 경험했다. 전작들(『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과 함께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성화, 예배, 교회됨에 대해 아주 긍정적이고 강력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 러셀 무어, 『폭풍 속의 가정』, 두란노

이 책을 1위로 올려놓을까 아니면 2위로 놓을까를 많이 고민했다. 뭐랄까.. 가족 이해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나 할까. 러셀 무어는 가족의 문제를 복음과 십자가의 렌즈로 바라보며, 표류하는 가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섬세한 목회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해결한다. 가장 탁월한 부분은 Part 2 부분인데, 십자를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 결혼, 성, 이혼, 자녀, 부모를 보며 재해석하게 해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가족의 문제에 직면하여 우리가 짓는 죄와 우리가 받을 구원을 모두 보게 된다. 설교자들은 교회 내의 가정 문제 상담에 거대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반드시 읽어보길!

3. 우병훈, 『기독교 윤리학』, 복 있는 사람

이 책을 통해 내가 누린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장 실천적으로 좋은 부분은 윤리학을 전개할 때 성경 본문을 인용할 뿐 아니라, 주해의 과정을 보여줌으로 목회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철학과 윤리학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 윤리의 고유성과 탁월성을 드러냄으로 변증에 도움을 준다. 회중들이 비록 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철학이 제시하는 전제들을 ‘받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에 철학적 윤리학과의 대화를 보며 기독교 윤리를 변증하는 과정은 설교에 아주 도움이 된다. 본래 탁월한 저술이 늘 그렇듯, 이 책 안에서는 아이들도 첨벙거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수부도 심해어를 발견할 수 있다.

4. 채드 버드, 『어느 방탕한 사역자의 노트』, 그리심

여러 번 눈물을 훔치며 읽었다. 저자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그는 촉망받는 젊은 구약학자였으며, 지역교회 목사였고, 신학교 교수였으며, 이후 간음을 범했고, 이혼했으며, 트럭 운전수로 연명하다, 직업을 가지게 되고, 재혼했는데 7개월 만에 또 이혼을 했다. 여기까지 묘사하면 이런 사람이 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나 싶지만, 그는 정직하고 반성 어린 마음으로(하지만 과하지 않게) 자신의 죄악됨을 묘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묘사한다. 남성으로서, 목사로서, 하지만 언제든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같은 죄인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언제든지 감동적인 일이다. 주제의 유니크함에 있어서도 가치 있는 책이니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다만 몇 부분에서 성화에 대한 그의 이해가 내 이해와 충돌하는 부분이 불편하긴 했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쓰이진 않을 것이다.

5. 김형익, 『은혜와 돈』, 복 있는 사람

김형익 목사는 국내에서 가장 탁월한 강해설교자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의 설교는 주해적으로 탄탄하며, 신학적으로 정교하고, 평범한 성도들의 희노애락을 아우른다. 그가 돈에 대해서 한 여덟 편의 강해설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약에서 네 편, 그리고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네 편인 그의 설교는, 매번 성도들과 돈의 관계를 정확하게 짚어내면서도 율법주의를 피해간다. 돈, 헌상(헌금)에 관한 한 이 책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다. 다만 주의하라!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나와 같다면, 돈을 쌓아 두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서 쓰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손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기쁨으로 드리는 것을 넘어, 헌상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6. 앨빈 플란팅가, 『지식과 믿음』, IVP

사람들은 흔히 과학은 지식을 전달해 주고, 종교는 믿음을 말해준다고들 생각한다. 그리고 전자는 보편타당하고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후자는 선택적이며 개인의 취향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플란팅가는 자신의 철학적 역량을 총동원해 사실 세상의 많은 것의 배경에 믿음이 있으며, 기독교야 말로 참되게 믿을 수 있는 지식이라고 강변한다. 기독교 믿음은 합리적이며 이치에 맞고, 따라서 보증되고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맞서는 수많은 반론들(예를 들어, 역사 비평과 다원주의, 그리고 악의 문제)에 답하며 기독교 신앙의 보증됨(Warranty)를 입증해 낸다. 철학자의 저서이면서도 성도들이 읽기 어렵지 않다. 변증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7. 이성호, 『직분을 알면 교회가 보인다』, 좋은씨앗

직분자는 교회의 재앙일 수도, 교회의 자랑일 수도 있다. 사실상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들이 직분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장 슬픈 것은 사람들이 직분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즉, ‘직분자’가 수행하는 ‘직분’이 무엇인지 모른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장로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심방이랍니다.”라고 말하면 경악하는 사람들이 많다. “엥? 장로님 심방하는 것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요?”라는 말 듣기 일쑤니. 늘 간명하고 깔끔하게 글을 쓰는 저자답게, 이번에도 직분의 본래 의미와 역할에 대해 128페이지로 정리해 냈다. 직분자 교육용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8. 팀 켈러, 『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두란노

본문 주해, 적용, 적용을 위한 상황화, 신학적 숙고, 그리스도 중심적 결론에 있어 팀 켈러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다. 독자는 본문을 통해 올바른 사역이 어떤 것인지도 배울 수 있고, 신자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으며, 높아진 자아가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지를 추적할 수도 있고, 삶의 많은 부분이 어떻게 죄악될 수 있는지 배울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복음으로 배울 수 있다. 요나서를 연구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봐야 할 책이다. 당신의 요나서 읽기를 새롭게 할 것이다.

9. 데이비드 폴리슨, 『악한 분노, 선한 분노』, 토기장이

분노는 무조건 악한 감정인가? 기독교 상담학자이자, 성경적 상담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데이비드 폴리슨은 분노의 이면에 있는 동기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 이면에 때로는 정의가, 때로는 죄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심지어 자비로운 마음도 선한 분노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분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볼 수 있고, 또한 어떤 심리적 기저가 있는지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치료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폴리슨이 소천했는데, 그의 탁월한 저술이 이번을 계기로 주목받기를 바란다.

10.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이레서원

이미 오래 전에 나왔던 책이지만 새로운 옷을 입고 재출간 되었다. 당연히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고 익숙해져야 하는 책이다. 즉, 이 책의 내용은 읽고 지식으로 쌓아두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읽고 소화하며 실습해보고 능숙해져야 한다. 때로는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해봐야 삶이 변화되지 않더라. 윤리를 설교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심지어 변화된 삶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나로서는 모든 설교자들이 6장의 8가지 방법론만 읽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아주 상세하게 살펴보고 숙고해 보기를 바랄 뿐이다.

11. 존 파이퍼, 『강해의 희열』, 두란노

존 파이퍼는 이 책 말고도 설교에 관한 책을 쓴 적이 있다. 그가 40대인 1990년에 쓴 The supremacy of God in preaching(복 있는 사람에서 『하나님을 설교하라』로 역간)이라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설명하여 설교에서의 하나님 중심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책 『강해의 희열』에서는 에드워즈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 중심성을 강조한다. 30년 이상 한 교회의 강단을 섬기며 하나님 중심적 강해설교를 줄기차게 해온 파이퍼의 설교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존 파이퍼의 설교를 통해 엄청난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설교를 듣기만 하면서 느꼈던 점을 그의 글로 직접 확인하게 되어 참으로 기뻤다. 파이퍼의 설교를 전혀 접해보지 못한 설교자들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참고로 『성경과 하나님의 영광』, 『초자연적 성경읽기』에 이은 3부작의 완결판이니, 참고하면 좋겠다. 세 권을 연달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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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더 추가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책들

D. A. 카슨, 『하나님의 사랑』, 죠이북스
로드 드레허, 『베네딕트 옵션』, IVP
마르틴 루터, 『갈라디아서』, 복 있는 사람
토드 빌링스, 『슬픔 중에 기뻐하다』, 복 있는 사람
마크 데버, 그렉 길버트, 『설교』, 개혁된실천사
팀 켈러, 『팀 켈러의 인생질문』, 두란노
샘 스톰스, 『터프 토픽스 2』, 새물결플러스


사이버 성찬식은 가능한가?

사이버 성찬식은 가능한가?

유경재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처음으로 사이버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사이버 예배가 가능하다면 사이버 성찬식도 가능하다고 보고 정성들여 영상을 준비하였고, 더불어한교회 교인들에게 미리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도록 고지를 하였다. 설교 후에 성찬식 순서를 진행하였는데 리마예식서를 따른 사순절 성찬식으로 준비하였다(말미에 예식순서를 올렸다). 우리집에서는 막내딸네 가족 네 사람과 우리 부부 두 사람 모두 여섯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사진에 보는 대로 빵과 잔을 준비하였고, 영상을 따라 성찬식을 행하였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눈물이 날만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설교 후에 찬송가 227장 성찬찬송 2절 가사 “자녀될 자격 내게 없어도 주 나를 용납하여 주소서”를 부를 때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가족들도 모두 은혜로웠다고 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사이버 성찬식도 가능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신학적 논의도 필요한다고 본다.

사이버성찬식을 준비하면서 리미문서인 <BEM문서>(이형기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를 다시 한 번 들추어 보았다. 우선 성찬의 정의를 보면 “본질적으로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의 성례전”(34)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행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에 생명을 주시고 성도 하나하나를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다. 결국 목사나 사제가 집례를 하지만 실제로 빵과 잔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모든 일이 가능하기에 교회라는 공간 안에 함께 모일 때나 각 가정에서 예식을 따라 행할 때나 성령은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본다면 사이버 성찬식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BEM문서는 성찬의 의미를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로, 성찬은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찬양의 대제사”이다. 성찬은 우리가 베푼 잔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푼 잔치에 우리가 초대된 것임으로 이 잔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여 계시고, 초대된 우리는 우리를 은혜의 잔치에 초대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힘껏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어 하나님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둘째로, 성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anamnesis)”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념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 구원의 사건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기념은 그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을 오늘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그와의 교제(communion)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성찬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의 식탁임을 뜻한다.

셋째로, 성찬을 성찬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찬 때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하도록 하시며, 성찬 제정 때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을 성취”하신다고 하였다. “성령은 성찬을 가능케 하시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 되신다. 성찬의 기념이 단순한 회상이 아닌 현재적 경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이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찬 사건의 근원이 되시며 궁극적으로 성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찬의 중심인 성육신 하신 아들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로 체험케 하시는 성령의 힘, 결국 성찬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를 동시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며, 아울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우리가 체험하게 된다.

넷째로, 성찬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자리이다. “교회의 삶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성찬적 사귐은 동시에 교회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교제함을 말한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충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성찬을 통해서이다.” 성찬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확실하게 세워지게 된다. 동시에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 확립만이 아닌 세계 공동체 확립에까지 확장되어야 함을 뜻한다. “성찬 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 간의 화해와 동참을 요구하며, 사회․경제․정치적 삶 속에서 합당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끊임없는 도전”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할 때 모든 종류의 부정의․인종차별․인종분리주의․자유의 결핍이 근본적으로 도전 받게 된다”고 하였다. 성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함을 뜻한다. 성찬을 통한 성도의 교제는, 이 세계 속에 깃들인 모든 악과 투쟁하여 마침내 모든 세계민이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찬은 개교회 안의 교제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모든 성도와의 교제를 지향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 성찬식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끝으로, 성찬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이 땅에 나타난 그 나라의 징표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임해 오는 하나님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기념하고 또 고대하는 축제”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성찬은 미래의 이상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미리 맛봄이요, 동시에 그것을 지향해 가는 밥상임을 뜻한다. 성찬은 완전한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미래의 공동체를 미리 체험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별이 극복되어야 하며,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할 것을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성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가 된다.(35-43쪽)

이런 성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사이버 성찬도 이런 의미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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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성찬예식

【초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을 맞아 우리가 지금 주님의 거룩한 성찬상에 함께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이 예식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신 것은 그 안에 머물러 새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에서입니다. 사순절에 주님은 우리를 그의 성찬상에 부르심으로 그의 겸손과 비하, 그리고 고난당하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힘쓰도록 촉구하십니다. 주님의 겸손함을 본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이 식탁에 초대합니다.
【처음 기원】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희의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깨어진 세계를 새롭게 하시려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으셨으며, 저희의 약함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고, 저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징계를 받으셨으며, 저희의 병을 낫게 하시려고 매를 맞으셨습니다. 주여, 저희의 눈을 밝히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상처를 보게 하시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인내와 겸손을 알게 하소서.
오 주님! 주의 거룩한 성찬상에 둘러앉은 이 시간 저희의 무지를 일깨워 주셔서 생명의 양식인 떡과 포도주를 감사함과 두려움으로 받게 하옵소서. 저희가 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므로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하심을 본받게 하시고 그의 순종하심을 따라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 멘.
※ 다같이 찬송 621장을 부르시겠습니다.
【성령의 임재의 기원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거룩하시며 주의 영광은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주께서 일찍부터 세상 가운데 보내셨던 성령을 지금 또다시 이 거룩한 예전에 보내 주시어 이 식탁이 성별되게 하시옵소서. 이 떡과 이 잔이 저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몸과 피가 되게 하시고, 저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정사】 이 성찬의 식탁은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까지지도 씻어 주시고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낮아지시어 인류를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시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 받아 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자, 마셔라. 이것은 죄의 용서를 위해 너희를 위해 흘린 내 피로 맺은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신비가 크고 또 놀랍습니다.
【마지막 기원】 성령과 더불어 하나되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모든 영광과 존귀가 지금부터 영원무궁토록 주님의 것이 옵니다. 아멘

【분병례】 ※ 각자 준비된 빵을 손에 들기 바랍니다.
목사: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회중: 아멘.(성가대 송영 229장 2절)
※ 함께 드시겠습니다.
※ 각자 준비된 잔을 손에 들기 바랍니다.
목사: 이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회중: 아멘.(성가대 송영 229장 3절)
※ 함께 드시겠습니다.

【감사의 기도】
※ 다같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오 주 하나님, 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저희를 새롭게 하시고 강건케 하시며,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오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저희로 하여금 주님께서 앞서 가신 섬김의 길을 따라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섬김의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저희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