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6일 목요일

페미니스트 바울?

예수 오빠는 좋지만 바울 아저씨는 싫어?
   
 
 
이민규(교수, 한국성서대 신약학)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3:27-28).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나를 여자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나를 야만인으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랍비 예후다의 기도 중, T. Berakot 7:18).
 
 
얼마 전 <조선일보>에 기독교 환경-여성신학자로 저명한 현경 교수가 한 유교학자와 나눈 대화에 이런 말이 나왔다. 페미니스트들은 예수 오빠는 좋지만, 바울 아저씨는 싫다고 한단다. 이는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가부장적인 종교로 만든 장본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 운동은 처음엔 평등한 종교였는데,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강자의 논리가 됐다는 말이다(<조선일보>, 유교와 페미니즘, 2002318). 사실 페미니스트들은 기독교가 매우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종교라고 주장한다. 현재 현실적인 교회의 모습을 볼 때 이러한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나라와 같은 철저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교회가 사회를 너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서 생겨난 문제이지 원래 초대교회가 추구한 종교상은 아니다.
 
  
사도 바울을 가부장적 기독교를 창시한 장본인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현대 사회의 기준을 고대 문화의 잣대로 삼는 실수로 범하는 것이다. 만약 수천 년 후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이 우리를 판단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미개하게 보이겠는가! 그레코-로마문명은 여성의 인권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던 지독하게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사회였다. 탁월한 사상가요 시대를 앞서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세네카 같은 지식인들조차도 남존여비를 당연시 여겼던 문화였다.
 
그런 문화에서 본다면 바울은 당시 남자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그레코-로마의 문화에서 기독교 안에서 만큼은 여성을 위한 파격적인 권리와 자유를 주장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조차도 하나님을 남성적 이미지인 아버지라 부르고 그가 세운 열두 사도 중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이 만족할 만한 남녀 평등을 실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보수라는 말이 있다. 즉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바울은 이론가가 아닌 선교사였기에 현실적인 복음 전파와 교회 정착을 위해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완전 평등의 이상주의적 대응은 당시 교회에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까지 혼동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세기 그레코-로마의 문화 기준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 당시 여성들의 삶은 아래와 같았다.
 
  
 
유대교의 여성
 
제국주의와 그 영향권에 있던 국가들은 계층과 계급 중심으로 사회 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에 남녀 차별의 현상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유대교에서도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한 국가가 형성되면서 가부장 제도와 남녀 차별이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특히 예수 당시에는 지독히 남성 중심적인 그레코-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사상은 더욱 강해졌다.
 
예를 들어 역사가 요세푸스는 율법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Ag. Ap. 2.23 §201). 유대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여자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Op. Mund. 151-52; Quest. In Gen. 1.33) 집 안에서 격리된 생활을 사모해야 한다고 말했다(Spec. Leg. 3.169-77; Flacc. 89). 당시 현인으로 알려진 벤 시라의 말은 더욱 엽기적이다. “옷에서 좀이 나듯이 여자에게서는 여자의 심술이 나온다. 여자의 친절보다는 차라리 남자의 심술이 낫다. 여자는 치욕과 비난을 자아낼 뿐이다”(집회서 42:13-14).
 
조혼은 당시 보편적 현상이었다. 유대 부모들은 딸이 월경을 하는 나이가 되면 결혼을 시켰다. 결혼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결혼 첫날 신부는 침대보의 혈흔으로 자신의 처녀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혈흔이 결코 신부가 처녀였음에 대한 절대적 증명이 될 수 없기에 당시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이 억울하게 음탕한 여자로 낙인찍힌 신부들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혈흔이 없는 경우 신부의 아버지는 신랑측이 지불한 신부 값을 모두 돌려주어야 했지만 신부의 가족이 마을에서 당할 조롱과 치욕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한 경우 신부는 마을 주민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었다.

유대 남성들은 부인에게 수치되는 일을 발견할 경우(24:1) 부인과 쉽게 이혼할 수 있었는데 유대인의 이혼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수치되는 일에 관한 해석은 다양했다.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오직 간통의 경우만 이혼을 허락했지만 보다 급진적인 힐렐 학파는 거리에서 춤을 추거나 외간 남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저녁식사를 망친 경우, 개한테 물린 상처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보다 매력적인 여인을 만난 경우(아마 아내의 부족함이 원인이라 생각되어)도 수치되는 일로 간주하여 이혼을 허락했다. 그러나 진보적이던 보수적인 집단이던 여성의 이혼의 권리를 논한 적은 없다. 또한 일부 다처제는 권력과 경제력을 지닌 남성들에겐 보편적이었지만 일처 다부제는 절대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미혼 여성은 별궁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기혼 여성은 집 정문까지, 그리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라는 전제 하에 회당의 기도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지로 팔레스타인과는 달리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여성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종교 생활에 관하여도 여성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인 것들에 국한되었다. 공적인 회당은 열 명의 성인 남성이 있으면 공인될 수 있었지만 여성의 수는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유대 여성들에겐 안식일 날 회당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본당 예배는 남자들에게만 허락되어서 칸막이 뒤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안식일 날 집 밖에서 아기를 업거나 안는 것은 노동으로 간주되었기에 아기가 있던 여인들에겐 이조차 그림의 떡이었다. 여성에겐 토라를 낭독하는 일(Megil. 23a), 소리내어 식탁기도를 하는 일(T. Ber. 20b)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성이 유대교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 여성
 
그레코-로마 문화에서 여성들을 가장 심하게 구속한 문화는 그리스이다. 그리스 부모들은 자신의 딸들을 사춘기 이전에 결혼시켰다. 여자가 나이가 들면 처녀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발견된 비석에 의하면 의학적으로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여 해산 중 사망한 소녀들이 많았다. 그리스에서는 소년들은 7살이 되면 철학, 문학, 과학, 정치와 체육 등에 관한 교육을 받지만 평범한 소녀들은 공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리스 여성들의 삶은 창살 없는 감옥의 삶이었다. 여성들은 별궁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숙소는 매우 비좁고 어두웠다. 그리스의 황금기로 불리는 B. C. 475~425년에 아테네의 여성에겐 얼굴을 창문이나 문 밖으로 보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여성이 남자보다 덕이 없으며 도덕에 관한 양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시민 계층의 여성들에겐 가족 이외의 외간남자와의 대화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 출신의 그리스 여인이 자신의 귀신들린 딸로 인해 남자인 예수와 심한 논쟁을 한 사실이 나온다(7:24-28). 이 사건은 그 여인이 얼마나 급박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당시 통념을 깬 그 무엄하고 발칙한 여자(남자들의 입장에서)가 진정 용기 있고 신앙 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남녀 평등에 대한 의외로 발전된 사상을 가졌으나 이는 철학에 머물렀고 사회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리스에서 여성은 나이를 불구하고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으며 보호자되는 남성의 소유물이었다.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나, 그 법적 권리는 아버지나 남편과 같은 그 여성의 보호자가 소유했다.
 
Demosthenes는 그리스 사람은 즐거움을 위해서는 헤타이라이(고급 창녀), 나날의 육욕을 위해서 첩을, 그리고 적법한 아들을 얻고 충실한 가정부를 가지기 위해서 아내를 두었다고 말했다.
 
그리스 사회의 수많은 파티에는 일상적으로 동료란 의미의 헤타이라이라 불린 창녀들이 동반되었다. 이들은 당시 상류층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여성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여선생으로부터 노래, , 그리고 플룻을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들은 명석하고 유머 감각이 탁월한 어린 창녀들 중에서 발탁되었는데 엘리트 남성들을 접대하기 위해 철학을 배울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로마의 여성
 
로마의 소녀들은 14살이 되면 당시 풍습에 따라 결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 전날 여신의 신전에 자신의 인형을 헌납하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생식력의 신인 프리아포스(Priapus)나 무투누수 투투누스(Mutunus Tutunus) 신상과 성행위를 해야 했고, 신상의 남근에 자신의 처녀막을 잃어야 했다.
 
로마의 여성들은 그리스 여성들에 비해 보다 자유로운 편이었다. 로마의 여성들은 그리스의 여성들보다 덜 격리되어 살았다. 실제로 장사를 할 수도 있었으며 정치적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 했고 남편을 따라 외출을 했고 사교 생활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처럼 전문적인 교양이 넘치는 고급 창녀 헤타이라이의 육성은 로마에서 불필요했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은 아버지, 남편, 아들의 순으로 보호자를 두어야 했는데 여성들은 재산을 팔고 살 때, 합법적 유언을 할 때, 이혼 시 보호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로마 사회에서 매춘은 매우 일상적인 것이었다. 일부 고급 창녀들은 청치가나 시인의 보호로 노후의 삶을 연명할 수 있었겠지만 평범한 창녀들은 나이가 들면 비참한 삶을 살았다. 로마에서 창녀를 돈을 버는 여인(meretrix)이라 부른 것은 아마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거의 매춘에 제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리스의 창녀들은 음탕한 여자들이 아니었다. 매춘은 당시 가족이나 남편의 보호에서 제외된 여성들이 생존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성차별에 의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당연한 결과였다. 오늘날도 성차별이 심한 제3세계에서 이혼당한 여성, 부모로부터 버려지거나 팔려간 많은 소녀들이 생존을 위해 매춘을 해야 하는 실정과 마찬가지이다. 로마의 창녀들은 주로 노예들이었는데 전쟁포로보다는 약탈과 유괴의 희생자, 버려진 길거리의 소녀들이었다.
 
  
 
성차별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과 사도 바울의 대응
 
로마제국의 성차별은 극심한 성비율의 불균형이란 결과를 낳았다. 200년경 로마의 역사가 Dio Cassius는 로마제국에 여성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실지로 당시에 로마에는 남자 131명에 여자는 100명밖에 없었고 이탈리아,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에는 남자 140명에 여자 100명이 존재했다. 델피에 있는 비문들을 조사한 결과 600여 가족 중 1명 이상의 딸을 기르고 있던 집은 6가족 밖에 안 되었다. 이는 로마인들의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해 여자 아기를 죽이는 풍습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에게 장애가 있거나 원치 않는 아기를 버리는 행동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래의 글은 한 로마인이 자신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가 아직까지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것을 아시오. 그리고 만일 모두가 돌아가고 나만 알렉산드리아에 남게 되어도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아들에 대하여 잘 돌보기를 부탁하며 월급을 받는 대로 당신에게 부치리라.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아기를 낳는다면, 아들이면 놔두고 딸이면 버리시오. 당신이 나에게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말을 전했지만 어떻게 내가 당신을 잊겠소. 걱정 말기를 부탁하오(N. Lewis, Life in Egypt under Roman Rule, 1985, 54에서 인용).
 
  
또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거나 혹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낙태 역시 많이 행해졌다. 낙태를 원하는 산모는 유산을 유도하기 위해 미량의 독약을 복용하거나 독을 자궁에 주입하여 태아를 죽였다. 그러나 독약의 부작용으로 혹은 죽은 태아를 밀어내지 못해 많은 산모들이 사망하였다. 낙태수술도 유행했는데 비누도 소독약도 항생제도 없던 시절이어서 의사가 갈고리를 산모의 뱃속에 넣어 태아를 끄집어내는 방법으로 행해진 낙태 시술은 많은 여성들의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런데 사회에서와는 달리 기독교 내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훨씬 높았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안부를 전할 때 15명의 여성과 18명의 남성이 언급되었다. 이는 남성이 주로 지도자로 세워졌던 당시 풍습으로 보아서는 상당히 많은 여성이 지도자로 세워졌다고도 볼 수 있고, 또한 로마 교회의 다수가 여성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A. D. 313년 북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있을 때 Cirta 도시의 한 가정교회에는 16개의 남자 겉옷과 82개의 여자 겉옷, 그리고 47개의 여성용 슬리퍼가 발견됐다. 이는 분명히 기독교 교회에 여성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증거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는 여성의 수가 압도적이었을까? 이는 기독교가 여성들에게도 권익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독교는 낙태와 영아살해를 심각한 살인죄로 여겼다. 즉 뱃속의 태아나 영아의 생명을 전적으로 남자의 뜻에 의존해야 했던 불안함을 더 이상 가지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혼, 근친상간, 일부 다처제는 구약의 전통을 따라 혹독하게 비난했다.
  
 
교회가 그들에게 매력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조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혼이 만연한 당시 사회에서 부모의 결정에 따라 이방 여성들이 보통 12살 전후로 결혼한 반면 기독교 여성들은 대체로 당시 수준에서 만혼인 18세의 나이쯤에서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여권 신장에 있어 가장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사도 바울은 성적인 순결에 대하여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똑같이 엄격하게 요구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획기적인 풍습이었다. 기독교인이 된 남자에게는 성적 방탕함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분명히 여성들이 기독교를 선호하게 만든 이유였다.
 
  
사도 바울은 또한 부부간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재혼하거나 부인을 여럿 둔 사람을 교회의 감독 직분에서 제외시켰다(딤전 3:2). 그는 보다 평등한 부부 관계를 위해 권위적 가부장 제도를 사랑의 가부장 제도로 변화시켜 주었다(5:21-33). 이런 제도들은 기독교 여성에게 비기독교 여성들보다 훨씬 더 안정된 결혼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인 과부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이방 여인들은 과부가 되면 당시 사회적 풍습에 따라 서둘러 재혼해야 했다. 실제로 강력한 로마제국의 건설을 위해 인구 증가를 원하던 아우구스투스(Augustus)2년 내로 재혼하지 않는 과부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물론 재혼하면 모든 재산은 새로운 남편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주인을 섬겨야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재혼을 장려하지 않았을 뿐더러 과부의 정절을 높이 평했다(고전 7:8). 또한 교회는 가난한 과부를 돕는데 적극적이었다(비교, 딤전 5:16).
  
 
그리고 사도 바울은 소녀들이 처녀로 지낼 수 있었던 자유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참조, 고전 7:26). 당시 처녀로 지낼 수 있는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었다. 남성에게 매이지 않은 삶을 허락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여성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통한 교육과 선교의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여성의 무대를 집안에서 사회로 확장시켜 주었다. 상거된 바와 같이 고대사회의 여성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인식 수준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여성에게 매우 개방적이었고 많은 자유와 권리를 되찾아 준 종교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들의 활발한 역할로 인해 교회는 더욱 성장했다.
 
바울 서신에서 성차별적이라고 가장 공격받는 부분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고린도전서 1434절부터 36절까지일 것이다. 이 본문을 읽을 때 바울이 여인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이나 지도자 역할을 금지시킨 것으로 사람들은 이해하지만 사실 이는 고린도 교회에서 적당하고 질서 있게(고전 14:40) 행해지지 못한 예언의 은사로 인해 발생한 특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당시에는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서 공인된 종교로 인정되지 않는 디오니소스나 시벨레 제의, 델피의 피티아 제의, 시빌 제의에 참여했는데 이는 주로 황홀경을 통해 신과의 교류를 하던 무속적인 제의였다.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 제의에서는 여성들이 모여 술이나 마약, 환각성 식물이나 연기 등의 도움으로 황홀경에 빠져 찢어지는 듯한 소리(ololygia)를 지르며 파괴적 행동을 하면서 음탕한 말과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헝클어지고 뒤로 제쳐진 머리는 황홀경에 빠져 신과의 접촉을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이는 차별받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억압된 분노와 한을 풀어 나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런 문화가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주었는데 바울은 아마 이런 무속적인 영향이 강한 예언의 은사를 행하던 고린도 여성 지도자들의 행동을 통제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여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교의 열정 속에 바울은 여러 여성들에게 지도자적인 사명을 감당시켰다. 그는 뵈뵈 자매를 겐그리아 교회의 집사로 세웠다(16:1). 초대교회의 집사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교회 지도자였으며 가르치는 역할과 구제와 행정 일을 담당하였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안부를 전한 교회 지도자 중에는 브리스기와 마리아와 같은 여성들(16:3, 6)이 나온다. 여성들은 집 안에 갇혀서 사는 수동적인 삶에서 집사의 직분을 받아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기도 하고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사명 속에 바깥 삶을 체험하고 종교를 근거로 한 사회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바울은 당시의 페미니스트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른 초대교회는 분명히 진보적인 여권 신장의 장소였고 이를 통해 교회는 발전했다.
 
당시 사도 바울이 선교한 초대교회는 여권 신장에 있어 사회보다 훨씬 앞서갔다. 물론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권의 수준은 고대 사회보다 훨씬 발전하여서 초대교회가 보여 주었던 여성의 권익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그러나 여성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페미니즘과 초대교회의 정신을 본받아 남녀가 가장 평등한 사회가 될 때까지 현실을 고려한 지혜로운 방법을 통해 여권 신장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서의 원리로 보건대 설사 사회에는 성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의 신앙 생활은 남성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성 위주의 설교자, 목회자 사이의 성차별, 전도사 사례비에 대한 성차별, 교인들의 사고 구조 속의 성차별, 직분이나 역할을 분담함에 있어 성적인 것이 기준이 되는 문제들은 이제 교회에서 점차 사라져야 한다. 이는 성서적이지 않고 사회에 모범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여권 신장의 가장 앞서가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아직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페미니스트 소리를 들을 때 진정한 성서적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11월 2일 금요일

공동체와 기독교 세계관 (개인주의? 노노!)

공동체와 기독교 세계관 (개인주의? 노노!)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VIEW 학장)
 
윌킨스와 샌포드는 그들의 책 은밀한 세계관에서 우리 문화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어 참된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심지어 왜곡시키는 감추어진 세계관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의 은밀한, 그러나 그만큼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한다. 그런 잘못된 세계관들은 교회 뒷문으로 스며들어 기독교 사상과 뒤섞이고 때로는 기독교적인 견해로 행세하기도 한다” (윌킨스&샌포드, 13). 이렇게 우리를 [은밀히] 조종하는 8가지 이야기중에 그들이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는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어 더욱 위험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각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매우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더 이상 기독교 진리가 되지 못하게 한다” (윌킨스&샌포드, 33).
 
이렇게 은밀하게 스며든 개인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고민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영성을 충만케 하려고해도 성경이 얼마나 공동체적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주기도에서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간구가 끝난 후 이어지는 일상의 은혜를 구하는 세 가지 간구를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를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표현은 우리. 그러나 개인주의에 물든 우리는 이 표현의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부분을 생각해 보자.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개인에게 정말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개개인에게 정말 필요한가? 여기서 우리는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달라고 간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기도가 절실해 지는 것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부터다. 나는 먹을 밥이 있지만, “우리중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 기도는 정말 중요하다.
 

공동체는 신앙의 본질이다
 
성경이 개인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의 몇몇 진술에 근거한 정도가 아니다. 공동체 영성 그리고 그것의 확장인 사회 영성은 복음의 이차적 관심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핵심이다. 복음은 개인 영혼이 멸망된 세상에서 탈출하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개인주의 사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복음은 온 피조세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공동체적, 사회적 영성으로 충만한 소식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이해가 그 토대와 내용이 된다. 이 세 가지 주제 모두에 담긴 공통 주제 중 하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 이해에 있어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다. 삼위일체는 양태론이나 삼신론으로 흐르게 만드는 어떻게 셋이 하나와 같을 수 있냐는 수리적인 수수께끼가 아니라 독립된 세 인격이 한 신성 안에서 상호 침투”(perichoresis)의 교제를 나누며 존재한다는 매우 실존적인 고백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면서 형성된 기독교 유일신론의 새로운 측면이다(라이트, 152-194). 기독교와 유대교가 경전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분명 다른 것은 하나님의 관계성 또는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다. 이슬람의 강력한 유일신 이해는 다양성 속에 일치를 함의하는 신학을 구성할 수 없다. 삼위일체 신론이 함의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성은 기독교 신론의 정수다 (Grenz, 71-76).
 
인간은 어떠한가? 창세기 1-2장이 보여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 또한 공동체성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본질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는 진술에서 확인 된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족족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했던 반면 (둘째 날은 흥미로운 예외다), 2장에는 하나님이 만드셨음에도 좋지 않았던 것이 언급된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에 두시면 주셨던 동산을 경작하고 보살피는 사명은 혼자 이룰 수 없었던 공동체적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좋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면 돕는 짝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사람의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공동체성은 인간의 매우 중요한 본질이다(Provan, 4장 참고).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삶으로 드러나는 장이다. 그런데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는 그의 책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가치들을 지키고 펼치는 데 교회가 소위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실패했다고 진단하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윌슨하트그로브, 22)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 사람 이해 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윌슨하트그로브는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좀 더 포괄적으로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인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전쟁과 낙태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윌슨하트그로브, 59-79, 205-214). 요컨대, 공동체와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강조야말로 참된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본질이다.
 

참고문헌

Grenz, Stanley. Theology for the People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2000.
Provan, Iain. Seriously Dangerous Religion.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14.
이재영. 오두막. 서울: IVP, 2016.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 서울: 비아, 2015.
톰 라이트. 톰 라이트의 바울.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2012.
스티브 윌킨스, 마크 샌드포드. 은밀한 세계관. 서울: IVP, 2013.
 
* 묵상과설교 201611-12월호에 실린 글을 확대 수정한 것입니다.
 
* 사진은 캐나다 퀘벡시티 한 건물의 벽화입니다.

역사로 본 성시화운동 1.성시(聖市)와 성시화운동이란 무엇인가?

<역사로 본 성시화운동 성시(聖市)와 성시화운동이란 무엇인가?> 김중락

 
영어의 ‘city’란 단어보다 더 번역하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도시’, ‘국가’, ‘’, ‘도성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5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저서 De civitate Dei(The City of God)를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국()으로 번역하는 것도 이 같은 혼란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은 우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서양의 고대도시 개념 때문이다.
 
고대 서양에서 도시와 국가의 구분은 모호하였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권국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테네나 코린토스 그리고 스파르타 같은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그 자체로 폴리스’(Polis)라 불리는 도시국가였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로마도 조그만 도시국가 로마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서양인들은 ‘city’라는 용어에 도시와 국가라는 이중적 개념을 부여하고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중세 도시들은 방어를 위해 도시를 두르는 성곽(Wall)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양에서는 주로 도시 그 자체를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물론 동양에서도 고대에는 이 국가를 의미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시는 거룩한 도시인 동시에 거룩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역대의 미국 정치인들이 선거때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들은 동네(도시)를 미국이라는 국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와 국가는 역사적으로 치환 가능한 용어였다.
 
오늘날은 도시가 하나의 국가인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에 한국의 각도시마다 기독교인들이 성시화운동 조직을 만들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성시는 국가보다는 도시를 가리키는 개념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운동도 전국적이고 결국은 성스러운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시화운동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말 그대로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와 국가를 성스럽게 만들자는 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협력해야 될 일이 아니던가? 아니면 이 운동이 방향을 바꾸어야 할까? 그 답을 역사에서 먼저 찾아보자.
 
역사는 기독교회가 탄생한 이후로 수많은 성시화운동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중세의 십자군이 세웠던 예루살렘왕국도 성시를 이루고잔 한 노력이다. 그리고 중세의 수많은 도시들도 나름대로의 성시를 지향하였다. 종교개혁시 칼뱅도 제네바를 성시로 만들고자 하였고,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지도자들과 잉글랜드 청교도 지도자였던 크롬웰도 각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성스러운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종교적 분파들의 성시화 시도가 있었다.
 
이들 성시화 운동은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면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역사적 성시화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보여진다. 먼저, 성시화운동이 기독교권익옹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장은 기독교를 세력화하고 이 세력으로 세속정부에 압력을 넣어 기독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손해보아야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 운동에서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진리로 나타나고, 이익집단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복음의 문은 저절로 닫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운동에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는 말씀이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까지의 많은 성시화 운동이 타종교인들의 개종을 강제화 하거나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이나 신앙고백이 다른 이들을 살해하고 박해한 적이 적지 않다.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이나 에스파냐의 종교재판등이 대표적이다. 양심을 강제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수백년 동안 기독교 지역이었던 북 아프리카에 7세기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기독교가 뿌리조차 사라진 것은 강제화된 신앙이 얼마나 헛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성시화 운동이 성공하려면 역사적 성시화운동의 한계를 먼저 살피고 이들로부터 참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현 성시화운동은 이전의 전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성시는 피켓으로 무장하고 무리지어 시가행진하거나, 수만명 모여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앞으로 연재를 통해 역사적 성시화 운동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 한계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이 연재가 현 한국 성시화운동의 방향전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2011년 대구 성시화운동 특강을 수정보완 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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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락 페이스북에서 퍼온 글임을 밝힙니다.

2018년 9월 26일 수요일

12월 금요기도회 찬양콘티

12월 찬양콘티
  
1.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찬송가 539)
  
2. 주와 같이 길가는것 (찬송가 456) 
 
3.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찬송가 512) 
 
4. 나의 모습 나의 소유 
 
5.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주일 오후찬양 예배
  
1. 주께서 왕이시라 F 
 
2. 왕이신 나의 하나님
  
3. 나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4.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죄악된 세상을 방항하다가)
 
  
 
 
금요철야 기도회 찬양콘티
  
1.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찬송가206) 
 
2. 슬픈마음있는 사람 (찬송가 91) 
 
3. 지존하신 주님 이름앞에 
 
4. 나 행한것 죄 뿐이니 (찬송가 332)
  
5. 내 죄 사함받고서 (찬송가 210) 
 
6. 주안에 있는 나에게 (찬송가 455)
 
 
  
 
주일오후예배 찬양
  
1. 주님께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
 
2. 영광 가장 높은 곳에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4. 주의 강가로 가게 하소서 (새찬양)
 

 
 
주일예배 찬양콘티
 
1. 내 평생 사는 동안 

2. 선하신 목자

3. 주의 강가로 가게 하소서

4. 주님 이곳에

5. 주 예수 내가 알기전 (찬송가 98)

6. 마지막 날에

7.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
 
 
 
 
금요철야 예배 찬양콘티
 
1.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들리라 
 
3. 있는 모습 그대로 
 
4. 주의 강가로 가게 하소서 
 
5.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 기도 
 
6. 나는 길잃은 나그네였네 
 
7. 예수의 이름으로
 
( 나는 일어서리라 - 우린 일어서리라)
  
8. 때로는 너의 앞에
 
  
  
 
주일 오후예배 찬양콘티 
 
1. 빈들에 마른풀같이 (찬송가 172) 
 
2.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드리세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4. 내가 매일 기쁘게 
 
5.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6.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일예배 찬양콘티 
 
1. 찬양하라 내 영혼아 (감사, 기뻐)
  
2.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3. 세상에서 방황할때 
 
4. 주여 인도하소서 (지치고 상한 내 영혼을) 
 
5.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