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우리시대 실패한 정치의 징후들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1)

본고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16집(2020): 327-358에 게재된 논문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연재하는 것임을 일러둔다. - 저자 주

우리 시대 정치신학의 필요성 혹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전제는 우리는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우리의 정치는 삶을 더 정의롭고 풍요롭고 공평하고 넉넉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 근대로부터 이어진 인간해방의 꿈은 소위 ‘호모 데우스’라 불릴 극소수 특권계층의 형성으로 신기루처럼 부서지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던 경제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정치(政治)는 결코 정치(正治)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주지와 삶을 의미하는 단어로부터 유래하는 경제(eco-nomy)는 결코 삶을 가능케 하는 체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자유도 온전한 평등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자유민주주의의 물질적 성장엔진이었던 자본주의는 그 성장의 끝이 도래했다고 말해진다.

자본주의는 폐허들을 양산하면서, 불안정하고 취약한 인생들의 숫자만을 성장시킨다. 안나 씽은 이를 “불안정성의 범지구적 상태”(1)라고 표현한다. 모든 것이 정처없이 표류하고, 가치가 의미를 상실하고, 기준은 권력의 힘과 크기를 의미할 뿐인 우리 시대의 핵심적 문제들 중 하나가 ‘정명’(正名, to retify names)의 실패라고 크로켓(Clayton Crockett)은 주장한다. 즉 사물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기호자본주의의 시대, 법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 등과 같은 이름들이 올바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 이름은 금융통화처럼 정처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2)

이런 가운데 신자본주의의 범지구적 질서에 맞서 지역주의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와 종교의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이를 “종교의 귀환”(the return of religion)으로 부르기도 한다.(3) 모든 것이 불분명해진 시대를 종교적 전통의 가치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종교의 귀환은 곧 샹탈 무페의 표현처럼 “정치적인 것의 귀환”(4)이기도 하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종교의 부흥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이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 차원”으로서, 우리의 모든 정체성은 관계성, 말하자면 내외의 경계성으로 구성된다. 이는 외부 타자에 대한 적대관계를 통해 우리의 경계가 설정된다는 칼 슈미트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5)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이러한 모습으로 귀환하는 것은 도착적 귀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가 맞이하고 있는 급박성은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로 인해 ‘예외 없이’ 모든 생명이 존재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급박성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친구/적의 경계를 설정하는 예외적 주권권력의 힘을 자신의 정치신학(6)의 토대로 삼았던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논리는 그 어떤 예외도 허용치 않는 오늘 우리 지구행성의 위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 시대에 정치신학을 재규정할 필요성을 인식한다.

생태계 위기와 기후변화는 지구 위에 살아가는 생명의 공멸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제 정치신학의 주제는 해방이나 반란 혹은 저항보다는 ‘공생’(co-life)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공생’이란 그저 관계적으로 얽힌 존재들이 서로 좋게 상리공생(相利共生)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신학적 의미에서 혹은 기독교 신앙적 의미에서 ‘공생’이란 서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끼리의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기존사회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들을 하나님의 동등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는 기획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것은 현사회구조 하에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를 예를 들어, 노예와 여자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고 품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모든 존재가 신분제 위계질서로 규정된 사회구조 하에서 그들은 기존의 위계적 사회질서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기준으로 재구성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 박해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즉 기독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른 정치체재를 전개하는 정치적 공동체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두를 적/아군의 이분법으로 재구성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아군을 결집해 정치세력화해내는 칼 슈미트적 정치신학과 정반대로, 적/아군 혹은 친구/적의 이분법을 허물고, 동등한 존재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하의 존재(the inhuman)를 형제와 자매로 호명하며, 존재를 회복시켜주는 정치, 즉 공생의 정치였다. 캐서린 켈러는 이를 ‘정치적인 것의 귀환’으로 선포하고, 신학적으로 성찰한다.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신학은 제도권 정치를 넘어, “우리의 우주정치적 얽힘들의 위태로운 유한성과 ‘다중다성적 리듬’(polyrhythmic)의 복잡성”(7)을 포착하고, 거기서 “새로운 정치적 행동주의를 위한 시간”을 열어(8), 현재의 제도권 선거정치를 넘어서는 “민주적 투쟁성(democratic militancy)”(9)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여기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은 배제와 혐오의 정치 즉 친구와 적의 이분법적 정치신학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논리를 기후변화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종말의 상황 속에서 대안적으로 실현하려는 신학적 노력이다. 신학을 세속의 한복판에 실현할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는 “세속화된 신학”(theology secularized)(10)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배제와 혐오가 아니라 “창생 집단체”(the genesis collective)(11)의 관계성 속에서 비존재로 밀려난 이들을 존재로 회복하여, 피조세계에 참여시킨다는 의미에서 성화(sanctification)의 정치신학이기도 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Anna Lowenhaupt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6.
(미주 2) Clayton Crockett, Radical Political Theology: Religion and Politics After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1), 1.
(미주 3) Ibid., 2.
(미주 4) Ibid., 2;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Political), 4쇄 (서울: 후마니타스, 2012), 11.
(미주 5)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2012), 13.
(미주 6)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라는 용어가 독일의 보수적인 법 이론가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1921년 출판된 책 제목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매우 역설적인데, 그는 “국가에 관한 근대 이론의 모든 중요한 개념들은 세속화된 신학적(theological) 개념들”이라고 주장했다(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8).
(미주 7)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2018), 39; 폴리리듬(polyrhythm)은 서로 다른 리듬이 중첩되어 연주되는 것으로서, 재즈같은 분야에 쓰이는 음악용어로부터 유래한다.
(미주 8) Ibid, 39.
(미주 9) Ibid, 40.
(미주 10) Ibid, 162.
(미주 11) Catherine Keller, On the Mystery: Discerning Divinity in Proce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8), 47.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_ 이정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개인의 안전과 위생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그렇다고 더럽다는 말도 아니다). 삶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만큼만 적당히 조심하고 적당히 씻는 사람이라 처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질 때만 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확진자 수가 20명 언저리 넘어갈 때. 뉴스는 연일 코로나19였고, 주변 사람들이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도 '메르스 때도 그렇고 대충 넘어갔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먹고 마셔 댔다. 다시 말하지만 부끄럽다.


이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때에는 신천지 관련하여 집단감염이 대규모로 터진 2월이었다. 대규모 감염 뉴스를 들은 날은 우리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를 출발하기 전날이었고, 나는 이 수련회를 취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대규모 감염이 터지기 전부터도 수련회 취소에 대한 말들은 나왔지만, 열심히 준비한 청년들이 낙심할 것이 염려되기도 해서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이후에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서둘러서 여러 회의를 열었고, 그날로 수련회 취소를 결정했다. 그 주에는 주일예배를 축소해서 드렸고, 그다음 주부터 지금까지 나는 주일에 사랑하는 성도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후 많은 분이, 한국교회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태 앞에서 여러 주장과 논의를 쏟아 냈다. 특히 주일 공예배 회집 방법과 연관하여 엄청난 논의가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쏟아지는 듯하다. 사실 필자는 이러한 담론들에 보탬이 될 정도로 사태를 잘 알지 못하기에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다만, 현실 목회자로서 실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행동 강령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실천하고 있고, 또 실천하려 하는 몇 가지 행동들이다. 가능한 한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공예배와 교회 형태에 대한 입장이 어떻든지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자원 흐르게 하기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도 아주 많은 성도가 경제적으로 급속히 어려워졌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교회 상황이 그럴 것이다. 이 와중에 관찰한 현상이 하나 있다. 이 상황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은(심지어 이 상황 때문에 더 형편이 좋아진) 성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열망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자신들만 경제적으로 평탄하다는 사실에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고, 가진 자원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예로, 분당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미자립교회 월세 대납 운동에 20억 넘는 거액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보라. 목회자들은 여기서 신실한 중개인이 될 수 있다. 설교와 광고 시간을 이용하여 교회에 연약한 사람들을 돕도록 호소하고, 방법을 마련해 줄 수 있다. 두 가지만 예를 들겠다.

- 구제 지정 헌금

성도들끼리 교제가 활발했다면, 성도들은 이미 같은 구역이나 소그룹 내의 어려워진 형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두렵기도 할 것이고, 또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해야 하는 원칙에 위배될까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의기소침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돕고자 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구제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는 헌금을 교회에 하고, 교회가 누가 헌금했는지 밝히지 않고 대상자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헌금을 만들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원할 경우) 헌금한 사람에게 투명하게 밝히면 된다. 성도들 모두에게 이 시스템은 잘 알려져 있고, 제직들에 대한 신뢰가 높은 교회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는 것을 볼 것이다.

- 마스크 나눔

마스크 대란이긴 하지만, 성도들 중에는 많은 마스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정죄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스크 대란 뉴스를 보며 찔림을 받는다. 교회는 이들에게서 마스크를 기부받아 없는 집에(그리고 지역사회에) 나누어 줄 수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마스크를 기부받아 배달하러 다니기도 했다. 마스크가 쌓여 있는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길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을 누릴 것이고, 마스크를 받은 사람들 역시 돌봄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목회자는 이 사이를 중개함으로 굉장한 보람을 누릴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교제 흐르게 하기

코로나19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공동체 내의 활발한 교제가 없었던 교회는 정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전에 교회 내에서 교제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은 없고 그냥 예배하기 위한 종교 기관으로서만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온라인으로 예배하면 되는데 왜 내가 예배당까지 가야 하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공동체 내에서 사랑과 교제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 시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 시기에 더 많은 전화 심방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의 첫째 방안을 행하려고 하면 자연히 전화 심방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지, 어느 집에 마스크가 없는지 알지 못하면 도울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전화로 심방할 때, 서로 사정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연락하라고 권면할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착하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가 성도들이 잘 순종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서로를 돕고 살피라"고 권면하면 즐거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 많은 경우는, 따지고 보면 동기 부여를 제대로 해 주지 못했든지, 권면의 내용이 터무니없기 때문일 수 있다. 서로를 섬기라고 권면하는 것은 성경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수준 높은 동기부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간에 연락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어색한(?) 통화라도 나누어 보도록 권면해 주라. 특히 교회 내의 약자들을 세심히 살피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세속 사회 향해 자비 흐르게 하기

개신교는 천주교나 불교처럼 모두를 관할하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주일에 문을 닫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분간 한국교회가 세속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우리 교회는 달라요!"라고 말해 봤자 말이다). 그렇다면 그냥 세속 사회 평가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 지역사회에 마스크를 나누는 일도 할 수 있고, 어려운 분들을 찾아 도울 수도 있다. 두 가지만 더 제안해 보려고 한다.

- 공무원들에게 따뜻하게 협조하기

물론 정부로서는 교회가 안 모이는 것이 최선이겠고, 또한 많은 교회가 동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 모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방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정부에 할 수 있는 한 협조하는 것이 옳다. 하나 확실한 것은, 최소한 일선 공무원들이 '흠, 이번 기회에 기독교를 박해해야겠어. 예배를 금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만일 더 윗선의 정치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틀렸다고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그냥 그분들은 '빨리 이 코로나19 사태 끝났으면 원이 없겠다' 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주말에 누군들 돌아다니며 일하고 싶겠는가.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 주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작은 선물(예컨대 작은 음료수라도)이라도 내밀라. 그리고 꼭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말자.

- 복지 기관들 돌아보기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복지 기관에 기부를 많이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시기에 가장 먼저 지출을 제한하는 돈 역시 기부금이다. 따라서 복지 기관은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체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기부금이 끊긴 상황에 대해 하소연할 곳도 없을 것이다. 구제 헌금으로 걷은 돈을 약간이라도 전달한다면, 그리고 작게나마 연락을 통해 사랑을 전한다면 감사를 표현할 것이다.

여담으로, 이러한 상황은 선교사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님이 한국교회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번 주 선교비를 보내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전화를 받고서도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한다. 사실 이들은 미자립 교회보다도 더 약자인 경우가 많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보내 드릴 돈이 없을 수 있다. 따뜻한 전화와 기도 제목 요청이라도 해 준다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예배 형태 바뀌면서 생기는 약자들 챙기기

특히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교회는 이 부분을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 교회 내의 어르신들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송출해도 보시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분들은 누르면 바로 볼 수 있는 링크를 전달해 드리거나, 그것도 힘들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들을 붙여 주어야 한다. 예배할 마음이 없으셨다면 모르거니와, 예배하고 싶은데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예배할 수 없게 되면 대단히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역시 전화로 세심하게 심방하며 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챙겨 드린다면 쉽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신경 써야 하는 분들이 있다. 가족 중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밖에 없는 분들이다. 청년들 중에도 이런 분이 많고, 특히 자녀와 배우자 모두가 신자가 아닌데 자신만 신자인 경우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가족끼리 모여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혼자 방에 숨어서 몰래 핸드폰으로 예배를 시청해야 하는 경우도 그나마 나은 상황이다. 자기 방이 따로 있지도 않고, 어디 나갈 곳도 없는 분들은 온라인 예배도 그림의 떡이다. 이런 분들 중 원하는 분들은 방역상 아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고 극소수가 모여서 예배하도록 배려해 줄 수도 있고, 그것도 어렵다면 연락을 지속하며 목양적인 배려를 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


다섯째,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설교하기

이러한 사태에서 가장 지혜롭지 않은 방식의 설교는, 정부나 특정 단체를 비난하며 공격하고 자신을(그리고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정부는 ~을 하고 있습니다!"라든지, "지금 모여서 예배하지 않는 저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지금 모여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메시지들이다. 물론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이 사태 때문에 교회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질까 봐 조바심이 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들은 "나는 의롭고 저들은 악하다"는 식으로만 들리기 쉽다. 성도들은 결국 "나는 이런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어! 저런 나쁜 교회들과는 다르지!" 하며 자기 의에 빠지든지, "나는 설교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저 설교자는 왜 저렇게 교조적이지?" 하며 반감만 품게 되기 쉽다(덩달아 무의미한 죄책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는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지, 또는 이러한 상황까지 왔는데도 꼭 모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원리도 궁금해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과연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신정론에 관한 논의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교파나 교단마다, 혹은 설교자 개인마다 신정론에 관한 견해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는 선하다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는 것. 때로 우리 눈으로 볼 때는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고통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합의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답이 아닌지는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건 답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답이라면 왜 하나님 자신이 고통으로 뛰어드셨겠는가? 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시며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겠는가?

그분은 고통을 안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버려 두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 은혜를 사랑 어린 마음과 눈물로 전하라. 정말 성도들은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가 고난 가운데서도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힘을 공급할 것이다.

세속 언론이 교회를 호의적으로 언급해 줄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호의적으로 보도해 줄 만한 일을 많이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냥 억울해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낫다. 최소한 우리의 선행을 받는 사람들은 안다. 혹여 그들이 몰라 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보신다. 이 위기는 우리가 은혜를 행하는 연습을 할 기회이다. 교회가 코로나19를 전염시키는 원흉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 억울하거나 괴롭다면, 은혜를 전염시킬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자. 특별히 지역 곳곳에서 교회를 섬기느라 분투하는 모든 목회자가 은혜 안에 거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힘내세요!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새가족반>(복있는사람) 저자

[출처: 뉴스앤조이]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

우리 시대 자유민주주의의 실패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2)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democracy)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체제이다. 즉 자유주의(liberalism)과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이념적 대립이 ‘자유’와 ‘평등’ 혹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담지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공동의 적, 즉 절대주의와 권위주의적 전통들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투쟁의 결과였다.(1)

하지만, 이미 보수적 정치학자 칼 슈미트(Karl Schumitt)가 지적했듯이, 자유와 평등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란 이 갈등의 자리를 “긴장의 장소”(the locus of tension)(2)로 간주하고, 이 “구성적 긴장”(3)을 “여러 다른 헤게모니적 배열들 간의 끊임없는 협상과정”으로 삼는 정치적 절차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지배로 인해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했고, 이제 ‘평등’의 이념은 ‘공정한 경쟁’으로 대치되어, ‘개인의 권리’로 환원되어버린 껍데기뿐인 ‘인권’ 개념으로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다.(4)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었고,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선거 시행과 인권 수호”의 초라한 구호들로만 존재해고 있을 뿐이다.(5) 즉 우리는 “대중주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이 침식”된 “포스트 민주주의의 상태”(6), 즉 ‘자유주의’ 체제가 승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공평성, 다르고 다양한 문화와 믿음들에 대한 관용, 인간 존엄성의 수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의 신장을 외쳤던 자유주의 체제는 “실제적으로는 거대한 불평등을 낳고, 획일성과 동종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영적 퇴화를 부추기고 그리고 자유를 침해”(7)했다. 자유주의가 이상적으로 주장했던 것과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 차이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해방하는 수단들이 우리를 감금하는 철장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그래서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와 불만족이 증폭되고 누적되고 있으며, 때로 마녀사냥의 대상을 찾아 정의(justice)의 이름으로 분노를 광장으로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유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 금융귀족같은 소위 신-엘리트들의 출현(8), 그에 따른 대중들의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가 자제력과 숙고의 능력 그리고 민주적 정부를 만들어가기 위한 절차들보다는 “정치적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는데 소진되고 있다.(9)

자유주의(liberalism)의 핵심에는 “권리를 담지한 개인이 자신만의 훌륭한 삶을 추구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인간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10)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자유주의 모델 정치체제는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주장하며,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각 개인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동의한 소위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설을 발명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주창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점점 더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확장되고 있고, 시민들은 정부가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멀리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세계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시민들을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그리고 각자도생의 삶으로 몰아갈 뿐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가 유일하게 확보해준 개인의 권리란 오직 충분한 부와 지위를 확보한 이들의 권리와 자율뿐이라고 느낀다.(11) 따라서 시민들은 현 체제가 ‘실력주의’(meritocracy)가 되었고, 소위 능력있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세습하고, 교육 시스템은 인성이나 소명을 찾는 장이 아니라 사회의 소위 ‘루저’(loser)를 솎아내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고 느낀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와 결탁하여,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로 대치하였고, 사회적 경쟁의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적 구조가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는 현실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 불안정성과 심화되는 불평등의 격차를 값싼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무마시키려 노력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공정성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승자로부터 패자를 채로 거르는 시스템을 통해 심화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격차가 초첨단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의 격차로 이어져, 정말 소수의 초부유층이 자신들을 수퍼휴먼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현실이 소위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하라리는 “불평등의 업그레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2) 세계화가 초래하는 무한경쟁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논리로 포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대의 모두는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발전의 혜택을 누린다는 위로 아닌 “위로”가 주어지기도 한다.(13) 분명한 것은 이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세계화 경제가 현세대의 누구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드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총체적 난국이 자유주의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그 본연에 충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진단한다. 즉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14)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총체적인 좌절과 실패는 바로 우리가 “자유주의의 이상들에 맞추어 살아내는데 실패”(15)했다는 잘못된 분석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liberalism)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 이데올로기의 동굴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비교를 통해 알려줄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보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이다.

현재 우리 시대의 실패는 자유주의의 전적인 성공에 따른 결과라는 드닌의 진단과 병행하여, 샹탈 무페는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의 무능이 이 실패를 부추긴 주요원인들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즉 현재 서구 정치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요구들이 진보적 해답이 필요한 민주주의 요구라는 것을” 좌파 정치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16) 즉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일구어낸 타협이 우리 시대 유래없는 승자와 패자의 격차를 양산해 내고 있으며, 이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외치는 함성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로 반영되는 민주주의적 열망들이 낙오자와 실패자의 좌절과 분노로 응집되고, 그 분노의 감정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적대와 혐오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중산층의 최소한의 이익도 지켜내지 못한”(17) 진보정치인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성공적인 실패’는 “더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18) 즉 ‘성공보다 나은 실패’를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은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성공을 양산해내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화에 의존한 결과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안정성이 극히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교적 경제변화와 상관없이 정치적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 혹은 폐지되고, 전 지구를 시장경제라는 우산 하에 두고자 기획되었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다문화’ 시대에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인 다문화’가 자유주의 기획의 일부로 고립되어 게토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모순을 대변한다. 그래서 정치는 차라리 실패했었던 것이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실패를 경험했더라면, 지금같은 극단적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해도 말이다.


미주

(미주 1)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승원 역,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 2쇄 (서울: 문학세계사, 2019), 28.
(미주 2) 앞의 책, 29.
(미주 3) 앞의 책, 30.
(미주 4) 앞의 책, 31.
(미주 5) 앞의 책, 31.
(미주 6) 앞의 책, 34.
(미주 7) Patrick J. Denneen,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8), 3.
(미주 8) 이를 샹탈 무페는 “서구 사회의 과두제화”(oligarchization)로 표현하고 있다(『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3).
(미주 9)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xiv.
(미주 10) Ibid., 1.
(미주 11) Ibid., 3.
(미주 12) Yuval Noah Harari,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London: Harvill Secker, 2015), 346.
(미주 13)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10.
(미주 14) Ibid., 3.
(미주 15) Ibid., 4.
(미주 16)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9.
(미주 17)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노정태 역, 『진보의 몰락』(Death of the Liberal Class) (서울: 프런티어, 2013), 25.
(미주 18)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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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죄로 간주하는 나는 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가

 1. 동성애는 성경적 관점에서 죄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 나는 우리 신앙과 행위를 위한 최고 기준을 성경이라고 받아들인다. 어느 것도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성경보다 높은 권위는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열린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만, 나는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동성애를 사랑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게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륜인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경우에도 신앙적 관점에서 여전히 죄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죄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는 모두 탐욕적 성향과 이기적 성향을 안고 태어난다. 선천적으로 도벽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도둑질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성경적 관점에서는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차별도 성경적 관점에서 죄다

하지만 동성애가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죄라는 말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을 죄라고 가르친다(약 2:8-9).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롬 2:11).

누군가 죄를 짓는다고 그를 미워하거나 박해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예수님께서 세리를 용납하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만났을 때 원수 지간인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처럼,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게 옳다(약 3:9-10). 우리가 사랑할 이웃은 우리에게 문안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마 5:46-47). 오히려 우리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누군가 도둑질했다면 그것은 죄다. 범죄행위에 맞게 적절히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전과자라고 하더라도 사적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물건을 팔지 않거나 출판물로 공개적으로 모욕해서도 안 된다. 도둑질이 옳아서가 아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적절한 처벌을 벗어난 대응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녀 훈육은 부모에게 주어진 의무다. 어떤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해서 밥 먹이지 않고 폭력적으로 대하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부모는 처벌받게 될 것이다. 국가에서 훈육을 금하지는 않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자녀를 죽였기 때문이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죄다. 하지만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대부분 처벌이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이 신정국가가 아닌 이상 성경적 규범은 대한민국 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샤리아나 불교의 법이 대한민국 국법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성경 속 모든 규정이 대한민국 법이 될 수는 없다. 간음이나 이혼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국가에서 처벌하는 일이 불가하다. 성경에서는 우상숭배가 가장 큰 죄이지만, 우상숭배를 대한민국 국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동성애자라서 모욕한다거나, 왕따한다거나, 능력이 있는데도 회사에서 여러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차별을 미리 방지하자는 법이다. 아무리 신앙적 관점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합리한 차별을 당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법이다.

범죄 혐의자에게 미란다원칙을 적용하고, 변호인 도움을 받도록 보장한다. 범죄 혐의가 있다고 피의 사실을 미리 공표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죄를 짓는 게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보면 분통 터지는 일일 것이다. 경찰이 자기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보호하는 모습을 볼 때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죄를 지었다고 피해자 가족에게 폭행당하고 죽임 받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그 사람이 행한 게 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의미에서다. 이와 비슷하게 차별금지법은 차별이라는 불합리를 막자는 법이다. 이것은 성경적 가치에 해당한다.

인간은 악해서 다수가 되면 횡포를 부리기 쉽고, 소수는 다수의 횡포에 차별을 받아 정말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당하기 쉽다. 차별금지법은 차별하지 못하게 해서 모두가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성경적 가치를 담고 있다.


3. 신정국가가 아니기에 불신자들 행태에 상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우상을 찍어내 버리고 산당을 제거하라고 규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을 인정하셨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절간에 잠입해 기드온처럼 용감하게 부처상들을 파괴하는 일이 옳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만 섬기기로 시내산 언약을 통해 계약 맺은 신정국가에서나 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는 곳은 신정국가가 아니다. 성경 율법을 국가의 법으로 가지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이 세상 법칙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우상을 찍어 버리지는 않았다. 바벨론은 신정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한 가르침은 바울서신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 우상숭배하거나 음행하는 자들이 있다면 출교시키라고 명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상숭배한다고 해서 절교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신경 쓰지 말라고 권면했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고전 5:12-13). 교회가 할 일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니다. 동성애자들을 찾아가 죄라고 지적할 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불신자들과 거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상에게 바친 물건일 가능성이 있어도 묻지 말고 사서 먹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고전 10:25).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도들에게도 장사하면서 살아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 불신자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한다.

동성애자에게 케이크 주문이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케이크를 파는 일은 신앙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 집을 타 종교인들에게 파는 일도 문제가 아니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관계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불교도들처럼 산속에 들어가 혼자 고고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기 때문이다.


4.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동성애자들과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이나 반기독교적 성향이 있는 세력을 우리의 영적 대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물리적 방법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를 과시해 입법을 막고, 단체로 몰려가 시위하는 방법으로 굴복시키려 한다. 전화 돌리거나 문자 폭탄을 돌려 우리 힘을 보여 주어 온갖 이 세상 세력을 굴복시키는 일을 영적 승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대적은 그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영적 싸움 대상은 마음속에서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고, 탐욕적으로 만들고, 음욕을 품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고,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게 만드는 사탄이다(엡 6:12). 사탄은 우리의 신앙 열정을 교만으로 바꿔서 망하게 만든다. 사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공로로 바꿔 버리고, 주님을 향한 헌신을 자랑거리로 바꿔 버린다. 이러한 영적 대적과 싸워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우리 대적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 그 대적이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이며, 힘겨루기를 통해 그들을 짓밟아 버리는 것을 영적 승리라고 속삭이는 사탄의 속임수에 곧잘 넘어갔다. 그래서 베드로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잘라 버렸다. 예수님을 체포하는 자들을 칼을 써서라도 물리치는 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는 무리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다.

타락할 대로 타락했던 중세 기독교는 십자군을 동원해 이슬람 사람들을 박멸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전쟁에 순수한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자원했다. 그러한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을 이용한 자들은 정치권이고 장사치였다. 자신들의 정치적·물질적 이익을 위해 신앙으로 십자군 전쟁을 포장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이 이용만 당했다. 역사는 십자군 운동이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기록한다. 기독교는 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 칼을 쓸 때 오히려 기독교는 망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동성애자들을 향해 기독교가 힘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싸움에서는 반드시 질 수밖에 없다.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빛과 소금 역할 감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다

힘을 과시하는 방법으로는 동성애자들 마음을 얻을 수 없고, 그들을 회개로 인도할 수 없다. 힘으로는 우리보다 이 세상이 더 세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기신 싸움을 하고 있으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은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동성애는 죄이자 하나의 우상이기에, 결코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들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경 가르침대로 아름답고 건전한 가정을 이루어 산다면, 그들은 비로소 우리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다. 옛날 다신교를 믿던 사람들이 유일신을 섬기던 유대인을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생각하고 돌아섰던 것처럼 말이다.

진리에는 힘이 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은 가장 강력한 전도 방법이다. 우리가 음란하게 살며 온갖 매체를 통해 목사들 비리와 성 추문이 방송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동성애가 죄라고 외치면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만 들을 것이다. 이 세상은 오히려 동성애자들 편에 서게 될 것이다.

- 보수 교계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진정한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을 창립했다. 


6. 차별금지법은 신앙의자유 억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종교의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헌법적 권리이기 때문에 하위법인 차별금지법에 따라 제한될 수 없다. 일각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성경이 불온·금지 서적 취급받게 되고, 신앙의자유가 박탈될 것이며,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온갖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외국 사례들을 언급하며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과도한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시행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전히 신앙의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고용이나 직업 문제에서,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는 학교에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행정 서비스를 받을 때 차별하는 일을 금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네 가지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분야는 문제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동성애 관련 주장이 담긴 책을 쓰는 일 등은 대상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를 반대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직장에서 해고됐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러한 주장도 억지다. 동성애를 반대해서 경찰에 잡혀가거나 직장에서 해고된 게 아니다. 현행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일을 하다 도로교통법을 위반했거나, 집회 신고까지 마친 정당한 집회를 방해했거나, 반동성애 강의를 하는 중에 성희롱적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다가 처벌받기도 하고 불이익당하는 것이다. 동성애에 반대하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동성애에 반대했기 때문에 핍박당한 것이라고 우기는 일은 옳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쉽다. 그게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방식이다. 우리는 자녀가 잘못했을 때 윽박지르거나 가혹하게 때려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범죄행위다. 교회 분쟁이 일어났을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무찌르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옳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다른 편 예배를 방해해도 괜찮고, 반대편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폭력을 써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동성애가 죄라는 생각이 들면, 종종 동성애를 반대하는 모든 행위가 정당할 것이라고 착각하고는 한다. 법을 어기거나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신고를 마친 그들의 집회를 물리력으로 방해해도 괜찮다고 여기기도 한다. 강의할 때 동성애를 반대한답시고 성희롱적 발언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이런 일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을 때 동성애를 반대했기 때문에 받는 억울한 처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칭찬받을 게 없기 때문이다(벧전 2:20).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더라도 강단 위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종교의자유는 헌법적 권리이고, 일개 법이 헌법을 능가할 수는 없다. 길거리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외치는 일은 제지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가 신정국가가 아니고, 다양한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를 인정받는 민주국가이기에 당연하다. 아무리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민주국가 내에서 남의 집 우상을 부술 권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길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선포하고 싶겠지만, 그러한 행위는 결코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했던 것처럼 먼저 접촉점을 찾아 대화하며 마음을 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사람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외치는 일은, 팀 켈러 말처럼 다이너마이트를 바위 옆에서 터트리는 것과 같아서 바위를 그슬리게 할 뿐 쪼개지는 못한다.


7. 서구 교회 몰락은 차별금지법 때문 아니다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퍼트리는 주장이 있다. 프랑스에서 차별금지법을 막지 못했기에 학교에서 동성애 교육을 하고, 교회에서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교회가 문을 닫고 술집으로 변했다는 내용이다. 프랑스에서 교회가 문을 닫은 게 정말 차별금지법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맞는가? 오히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꼰대처럼 굴어서 우리에게 그런 꼰대 같은 종교가 필요 없다고 느끼게 만든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나그네든 과부든 고아든, 약자를 돌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게 성경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이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고 하는 옹졸한 바리새인 같은 마음이 더 문제 아닐까.

프랑스에 차별금지법이 있지만 교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교회 내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칼뱅주의·개혁주의적 교회도 프랑스에서 성장하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들도 잘 활동하고 있다. 세상은 동성애를 잘못된 방식으로 반대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적어도 생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다원화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지내야 한다.

사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었다. 미국에서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 대우하면 처벌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미국 내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에서 그렇게 설교하고 있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모욕 주거나 사회생활할 때 차별하는 일은 금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차별금지법이 아주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지만 수많은 교회가 여전히 부흥하고 있다.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는 아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다 너의 그런 행동 때문"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원인에 갖다붙이는 방식으로는 아이 행동을 교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승전 동성애, 기승전 차별금지법이라고만 외치는 일은 일부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8. 차별금지법은 미래의 우리를 위한 법이다

사실 차별금지법은 결국 결국 우리를 위한 법이다. 우리가 지금은 다수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사회에서 소수가 될 수 있다. 청소년 중 기독교 신자 비율이 3% 미만이라 한다. 머지않아 기독교는 소수가 될 게 자명하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혐오하면서 왕따하고, 거래에서 불이익을 주고, 직장에서 차별 대우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없다면 말이다. 여당일 때 했던 말을 야당이 됐을 때 뒤집고 야당일 때 했던 말을 여당이 됐을 때 뒤집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우리도 그때 가서는 말을 뒤집을 것인가. 항상 역지사지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다양한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살기 위한 최소한의 법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유리한 법이다. 옛날 바울 사도가 로마법 보호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차별금지법 때문에 보호받을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집을 매매하는 것이나 세입자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할 수 있다.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차별을 받아 승진을 거부당할 수도 있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도 입사를 거부당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행위 자체를 못 하게 돕는 좋은 법이다.

그래서 나는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다.


9. 학교에서 동성애가 나쁘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된다는 우려에 대하여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학교에서는 동성애를 비판하는 말을 전혀 할 수 없게 되고, 만일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분이 많다. 그건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함부로 동성애에 대해 비판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다시 질문해 봐야 한다. 과연 우리가 믿는 바를 공적 영역에서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게 옳은지 말이다.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개인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자신에게 기독교 신앙이 있고 예수님을 믿는 일을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하더라도 부하 직원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공적 영역에서 강요할 수 없다. 부대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가진 부하들을 존중해 줘야 한다. 부대 내 다른 종교 시설물들을 함부로 처분해서도 안 된다.

내가 창조론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칠 수는 없다. 물론 진화론과 창조론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신앙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우상숭배가 악한 일이라는 신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학교에서 불교인을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종교의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믿는 바를 공적 영역에서도 강요할 수 있게 허용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면 우리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개인의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강요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나쁜 일이 아니다.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법이다. 

학교에서 동성애가 나쁘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학교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아무리 성경에서 금하더라도, 이혼하는 것이 죄라고 가르칠 수 없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다. 우상숭배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고, 이자를 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으며,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고도 가르칠 수 없다. 그렇게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면, 타 종교가 대한민국 다수를 차지할 때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라고 가르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이제 전적으로 사적 영역이다.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줄 때, 세상은 비로소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진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국진 / 신학 박사, 전주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 전북극동방송 신앙 상담 프로그램 '아그런가' 진행자, 이국진TV 운영 유튜버, 각종 매체 칼럼니스트. 아가페 성경 편찬책임자를 역임했고, 저서로는 <아, 그런가?!>·<두들겨 보기>(WBS), <사람이 여물어 교회가 꽃피다>(홍성사), <사랑>(아가페북스), <예수는 있다>(국제제자훈련원) 등이 있다.

[출처: 뉴스앤조이] 동성애를 죄로 간주하는 나는 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