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8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최주훈 역/주/해제

*본문 발췌: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최주훈 역//해제 (서울: 감은사, 2019)에서
 
<사면증의 효력에 관한 논제>(95개 논제)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이를 밝히려는 열망으로,
 
비텐베르크의 문학사이며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임명받은 교수 마르틴 루터가 이하의 논제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서신으로 토론하길 요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1.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4:17] 명령하셨을 때, 그 뜻은 신자의 모든 삶이 돌아서는 것이다.
 
2. 이 말씀은 사제가 집례 하는 고해성사, 즉 죄의 고백과 보속으로 이해될 수 없다.
 
3. 또한 이 말씀은 마음을 돌려세우는 내적 참회만 뜻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니다. 마음의 회개가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회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4. 사람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미워하는 한, 죄에 대한 징벌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마음의 회개이다. 우리가 하늘나라가기까지 이 회개는 계속되어야 한다.
 
5. 교황은 자신의 판결 혹은 교회법의 판결에 따라 부과한 형벌 외에 어떤 죄도 사면할 권세나 의지를 갖지 못한다.
 
6. 교황의 사면권은 제한적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인정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이 사면의 권리를 무시하는 사람의 죄도 그대로 남는다.
 
7.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워진 사제에게 하나님 대하듯 순종하지 않고, 그를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 죄도 용서치 않는다.
 
8. 참회의 규정은 오직 산 자에게만 적용되며, 죽은 자에겐 적용될 수 없다.
 
9. 그러므로 성령은, 교황이 가진 권세가 죽음이나 어떤 곤궁한 사례에선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선하게 역사하신다.
 
10.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은, 죽어 연옥에 있는 자들에게 교회법이 정한 형벌을 적용하는 사제들의 행동이다.
 
11. 교회법을 위반하여 생긴 죄벌을, 연옥의 형벌로 바꿔치기 하는 가라지는 확실히 주교들이 잠자는 동안 심겨진 것이다[13:25].
 
12. 예로부터 참회에 부과되는 보속은 사제의 사죄선언 후가 아니라 이전 단계였다.
 
13. 임종하는 사람은 그의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는 교회법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므로 교회법이 부과한 징계에서도 완전히 풀려난다.
 
14. 영적인 강건함과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공포를 초래할 것이다. 온전함을 채우지 못한 만큼 그에 따른 공포도 커진다.
 
15. 다른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연옥의 고통은 이 두려움과 공포만으로도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과 공포는 절망과 맞닿아 있다.
 
16. 지옥, 연옥, 하늘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지옥은 절망이고, 연옥은 절망에 이르는 길이며, 하늘은 거기서 확실히 건져진 상태이다.
 
17. 연옥에 있는 영들은 공포가 감소하고 사랑이 증가되어야 마땅하다.
 
18. 연옥에 있는 영들은 결코 공로를 얻을 수 없으며, 사랑도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은 그 어떤 이성의 근거와 성서로도 증명할 수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19. 비록 우리가 모두 각자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 한들, 연옥의 영혼들이 자기 구원에 대해 최소한의 것이라도 확신하고 있는지 증명할 길은 없어 보인다.
 
20.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죄를 완전히 사면한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죄를 사면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교회가 부과한 징계에 한하여 사면한다는 뜻일 뿐이다.
 
21. 그 때문에, 교황의 사면증이 모든 죄의 형벌을 풀고,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의 말은 모두 엉터리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의 영들의 어떤 형벌도 사면할 수 없다. 교회법을 위반한 형벌은 살아있는 동안 치렀어야 할 일이다.
 
23. 만일 모든 죄벌(罪罰)에 대한 완전한 사면이 누군가에게 허락된다면, 이는 가장 완전한 사람에게만, 즉 매우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24.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죄의 모든 형벌에서 해방된다는 무제한적이고 허울 좋은 약속에 속고 있는 것이다.
 
25. 모든 주교와 사제도 자신에게 맡겨진 관구와 교구에서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세를 동일하게 행사할 수 있다.
 
26. 교황이 연옥에 있는 영들의 형벌을 사면하기 위해 열쇠의 권위 대신 중보기도를 사용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사실 교황의 권세는 연옥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27. [연보궤 안에 넣은] 돈이 상자 속에서 울리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이 빠져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교설을 외치는 것이다.
 
28. [연보궤 안에 넣은] 돈이 상자 속에서 울리는 순간, 이득과 탐욕은 증가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교회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르는 것이다.
 
29. 성 세베리누스(St. Severinus)과 파샤시우스(St. Paschasius)에 관한 전승이 알려주듯, 연옥에 있는 모든 영이 거기서 구원 받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그 누가 알겠는가!
 
30. 자기가 행한 회개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완전한 사면을 받았다고 어떻게 확증할 수 있겠는가!
 
31.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자가 드물 듯, 순전한 마음으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분명히 드물다.
 
32. 누구든지 면죄부를 받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렇게 가르치는 저들의 선생과 함께 영원히 저주 받을지어다!
 
33. 교황의 사면증을 가리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케 하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34. 왜냐하면 이것이 전해주는 은혜는 단지 인간이 정한 형벌, 즉 성례전적인 보속을 요구하는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참으로 비기독교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돈을 주고 연옥의 영혼을 구해 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특별증서(confessionalia)를 구입하면 더 이상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설교하는 것이다.
 
36. 참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황의 사면증이 없어도 죄와 형벌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누린다.
 
37.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나 죽으나 가릴 것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소유한 모든 유익을 함께 누린다. 하나님께선 이 모든 것을 사면증과 상관없이 주셨다.
 
38. 그러나 교황의 공적인 사면 선언과 징계에 대한 관여를 결코 무시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그것은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사면을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39. 사면증의 유익과 참된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한 자리에서 가르치는 것은 학식 있는 신학자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40. 참으로 회개하는 죄인은 죄에 따른 형벌을 달게 받는다. 반면에 수많은 사면증들은 형벌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고, 형벌을 멀리하게 만들며, 적어도 이런 일에 대한 빌미를 제공한다.
 
41. 사도적 사면권을 설교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보다 나은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히 가르쳐야한다.
 
42.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선한 사랑의 실천을 사면증 구입과 비교하는 일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며, 이것은 교황의 의도와 상관없다.
 
43.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궁핍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은 사면증을 구입하는 것과 비할 바 없이 선한 일이다.
 
44. 왜냐하면 선행을 통해 사랑은 성장하고, 그 일을 통해 인간은 더욱 선한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면증으로는 선하게 될 수 없고, 오직 형벌에서 벗어날 뿐이다.
 
45.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궁핍한 자를 지나치면서 사면증을 구입하는 사람은, 교황의 사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들이는 것이다.
 
46.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재산이 풍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가족을 위해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고, 사면증 구입에 낭비하면 안 된다.
 
47.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사면증 구입 여부는 선택사항이지 강제할 일이 아니다.
 
48.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교황이 사면증을 발행하면서 진실로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져오는 돈이 아니라 더욱 경건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49.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교황의 사면증은 사람들이 그것에 신뢰를 두지 않을 때만 유용하다. 사면증에 매달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어질 정도라면 그것은 매우 해로운 것이다.
 
50.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의 갈취(喝取) 행위들을 안다면, 그는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 베드로 성당을 올려 세우기보다 차라리 불태워 잿더미가 되는 것을 바랄 것이다.
 
51.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갈취한 돈에 대해서 안다면, 당연히 베드로 성전을 팔든지 아니면 교황이 자신의 재산을 청산해서라도 면죄부를 구입한 사람들의 돈을 반환해 줄 것이다.
 
52. 교황이 발행한 사면증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은 한낱 부질없는 짓이다. 판매 위탁자나, 아니, 교황이 그 증서에 대해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53. 하나님의 말씀 대신 면죄부 선전을 하도록 교회마다 명령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교황의 원수다.
 
54. 사면증에 대한 말을 하나님 말씀의 분량과 같거나 더 할애하는 것은 설교시간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55. 교황의 견해는 틀림없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교황이 발행한 사면증(indulgentia)은 매우 작은 일이어서 행진하는데 종 하나만 필요하고 한 번의 예배로 충분한 반면, 복음은 백 개의 종을 울리며 백 번 행진하고 백 번 예배해야 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
 
56. 교황이 발행하는 사면증은 교회의 보화라는 교설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충분히 논의된 적도, 알려진 적도 없다.
 
57. 실제로 그것을 교회의 보화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설교자들이 거저 내어주기보다 그저 거둬 들이기만하기 때문이다.
 
58. 그 보화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진실로 교회의 보화란 교황의 도움 없이도 속사람에겐 은혜를, 겉사람에겐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59. 성 라우렌티우스는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보화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그때 그 자리의 의미를 살려 그렇게 말한 것이다.
 
60.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교회가 얻게 된 열쇠의 권능은 이런 종류의 보화라고 할 수 있다.
 
61. 왜냐하면, 죄벌에 대한 사면과 소송의 해결은 교황의 권세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62.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다루는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러나 이 보화는 가장 멸시 받는다. 복음은 먼저 된 자를 나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64. 반면에 사면의 보화는 지극히 환영받는다. 이는 나중 된 자를 먼저 된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65. 그러므로 복음의 보화는 그물과 같아서, 예로부터 그 그물로 사람들을 풍성히 건져 올렸다.
 
66. 이에 비해 사면의 보화는 그물과 같아서, 지금 그 그물로 돈을 풍성히 낚아 올린다.
 
67. 설교자들이 큰 은총이라고 외쳐대는 사면증이 재물 축적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한 실제로 그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68.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자비에 견주어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티끌보다 못한 것이다.
 
69. 주교와 교구 사제들은 사도계승의 권위를 부여받은 대사(大赦, indulgentia) 대리인들을 온갖 경의를 다해 영접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
 
70.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의무는 저들이 위임받은 사항 대신 자기들의 희망사항을 선전하지 않는지 눈과 귀를 열어 감시하는 것이다.
 
71. 사도적 진리인 사면권을 반대하며 말하는 자는 파문 받고 저주 받을지어다!
 
72. 그러나 면죄부 설교자의 뻔뻔함과 오만한 말을 경계하고 반대하는 자에겐 복 있을지어다!
 
73. 사면증 판매를 방해하며 손쓰는 자에게 교황의 파문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옳다.
 
74. 그러나 그보다 더 옳은 일은, 사면증을 구실 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가리며 방해하는 자를 교황이 파문하고 출교시키는 일이다.
 
75. 불가능한 말이지만, 교황의 사면증엔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하더라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다.
 
76.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정반대다. 교황의 사면증은 제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를 지울 수 없다.
 
77. ‘지금 베드로가 교황으로 온다하더라도 면죄부보다 더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선전하는데, 그것이야말로 베드로와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우리는 그런 말에 경멸한다. 현재 교황과 모든 교황들은 그보다 더 큰 은총, 즉 고린도전서 12장에 선포된 것처럼, 복음과 여러 능력 그리고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79. 교황의 팔에 장식으로 새겨진 십자가 무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효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80. 이 같은 교설이 군중들에게 버젓이 설교되는 것을 묵인하는 주교와 교구 사제, 그리고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져야한다.
 
81. 이런 뻔뻔스런 면죄부 설교 때문에 일반 신자들조차 교황을 모독하고 신랄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상황에 제 아무리 박식한 사람이라 해도 교황의 명예를 지켜주기란 쉽지 않다.
 
82.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가장 거룩한 사랑을 베푼다는 교황이 왜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이는 영혼의 가장 궁극적인 요청이고 신자들의 가장 정당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황은 지금 대성당 건축이라는 매우 하찮은 이유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을 돈으로 팔아넘기고 있다.
 
83. 또 이렇게 묻는다. 연옥에서 죗값을 치른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인데, 무슨 이유로 죽은 자를 위해 매번 돈을 받고 위령미사와 기도를 대신 드려주는 것인가? 그것이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런 목적의 헌금을 되돌려주거나 그 관습을 없애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84. 또 이렇게 묻는다. 돈만 지불하면 불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 된 영혼도 하나님의 친구요 경건한 영혼이 되도록 구해내면서, 참으로 경건하고 사랑스런 영혼들은 구해내지 않는다. 이들의 절실한 간청을 알고도 동일한 사랑으로 구해내지 않는다면, 이 어찌 해괴한 하나님과 교황의 자비란 말인가?
 
85. 또 이렇게 묻는다.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고 없어졌는데, 어찌하여 그 효력이 살아 있는 것처럼 사면증을 판매하는가?
 
86. 또 이렇게 묻는다. 오늘날 교황은 부자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부자인데, 왜 베드로 성당을 자기 돈이 아닌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건축하는가?
 
87. 또 이렇게 묻는다. 완전한 통회로 완전한 사면을 받고 영적 보화에 참여할 권리를 얻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교황은 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도대체 무엇을 사면하고, 또 어떤 보화를 주겠다는 것인가?
 
88. 또 이렇게 묻는다. 지금 교황은 하루에 딱 한 번만 죄를 용서하고 보화를 나누어주는데, 하루에 백번 용서하고 백번 나누어준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복을 얻겠는가?
 
89. 또 이렇게 묻는다. 교황의 사면증은 돈이 아니라 사죄를 통한 영혼 구원에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왜 예로부터 발행된 사면증서들과 사면 선언들의 효력을 모조리 정지시키는가? 예전 사면과 지금 사면은 효력이 다르단 말인가?
 
90. 일반 신자들이 던지는 예리하고 불편한 질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권력으로 누르고 입막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황의 반대자들에겐 비웃음거리를, 그리스도인들에겐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91. 그러므로 교황의 바른 정신과 뜻에 따라 사면이 선포되었다면, 이 같은 질문들은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사면증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평안이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외치는 모든 선지자들이여, 물러갈지어다!
 
93. 십자가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십자가, 십자가외치는 모든 선지자들이여, 복 있을지어다!
 
94.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과 죽음과 지옥까지 통과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9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안전하게 보장된 평화보다는 수많은 시련을 통해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을 더욱 굳건히 신뢰해야한다.

2019년 11월 2일 토요일

'한국교회는 과연 만인사제주의를 아는가?'_황병구

[어제 종교개혁기념 포럼에서 '한국교회는 과연 만인사제주의를 아는가?'라는 제목으로 비신학자/비목회자(?) 관점에서 발제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마련한 발제원고입니다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쓰려고 애썼는데 늘 머릿속 생각을 글로 풀어내기란 맘처럼 쉽지 않습니다.]
 
12년 전쯤이다. 우리에 익히 잘 알려진 한 잡지의 편집위원회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종교개혁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한 분이 다소 뼈아픈 이야기를 건네셨다. 유럽지역에 많은 종교개혁의 흐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개혁은 그나마 당시의 사제(지금이라면 목회자)그룹이 자체개혁을 한 경우였다는 것이다. 루터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고 이른바 평신도들의 개혁운동은 협력의 전선과 동력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해석이었다. 약간 씁쓸했던 기억은 그래서 한국교회의 개혁도 아직까지는 목회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셨던 것이다. 물론 그분도 목사님이셨다.
 
물론 전략적인 선택으로서 각성된 목회자들의 자발적 교회개혁이 현실적으로 또 상대적으로 더욱 유효하고 절실하다는 메시지로 여길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점진적인 자체개혁론이 빠질 수 있는 한계는, 정치적으로 비유하자면 정권교체가 아닌 정권재창출이 가지는 한계와 유사한 것일 수 있겠다. 사실 개신교 안의 사제주의, 즉 성직주의의 오해와 편견에 대한 신학적 종교사회학적 논의를 반복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정돈된 주장들을 넘어서기 힘들고, 이미 탁월한 관점의 저술과 논의들이 선행되었기에 이 짧은 발제의 초점은 되도록 직업목회자들이 아닌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성도들이 이 과제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 지에 대해 맞추어보려고 한다.
 
* 서로 의존하는 우정 관계의 회복
 
소위 평신도로 일컬어왔던 일반적인 성도들(성직자와 평신도라는 표현 대신에 이 글에서는 직업목회자와 성도들이라는 표현으로 대치해보려고 한다.)은 직업목회자들로부터 전도의 대상, 훈련의 대상, 목양의 대상으로 취급(?)받아왔다. 이 현상은 마치 전도사님께 훈육과 돌봄을 받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성도들 안에서 직업목회자들을 영적스승, 영적부모로 인식시키는 주요한 풍경이다. 한 때 이 풍경을 반전시키기 위해 세자로서의 성도와 이를 가르치는 집현전 학자로서의 직업목회자로 비유한 설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는 또다른 극단일 수도 있다. 가장 건강한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피차 가르치며 피차 복종하는 우정 관계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일단은 성도들에게 직업목회자들을 친구로 사귀는 연습을 하자는 쉽지 않은 제안을 드린다.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외로운 존재들도 드물다. 성도들의 질문에 무언가 늘 답을 마련해야 하고, 적어도 겉으로는 윤리적으로 흠없이 살려고 애쓰며, 경제적인 결핍에도 늠름해야 하는 사람들, 긴장을 풀고 살지 못하는 운명을 자처한 분들에게 과연 속깊은 친구들이 얼마나 될지 질문하게 된다. 유사목회자의 삶을 살아본 한 사람으로 고백하건대 두루 피곤한 삶이다. 직업목회자들에게도 삶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
 
성도들에게는 피차 한 인간으로 직업목회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과감하게 이름부터 부르자. 형님 아우, 언니 동생으로 다가가자. 물론 대부분 당황스러운 반응으로 거부 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곳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서로에게 의존적인 우정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목숨까지 내어주는 형제우애가 가능한가 물어보아야 한다. 존스토트가 그의 마지막 저서 급진적 제자도에서 이야기한 '의존'의 제자도를 잠시 요약해본다. 이 덕성은 직업목회자와 성도들 모두에게 우선적으로 직면할 과제이다.
 
"굴욕은 겸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전적인 무력함의 심연을 파헤쳐 보았다면 자신감의 언덕을 오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시이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의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보살핌과 보호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다른 사람이 우리를 의존하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6:2)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갓난아이로 태어나 살다가 죽으심으로 전적으로 피조물의 짐이 되신 적이 있다. 하나님을 의존하고 서로를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 입체적인 시장 영성의 발견
 
기독교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 대개 우리는 카톨릭 시절에 발달되었던 수도원 영성이 상실되었다고 자책하고, 그 진중한 영적여정을 회복하기 위해 관상기도라든지 떼제공동체의 찬양을 떠올린다. 초대교부들의 침묵기도와 사막의 영성을 수련한다. 바쁜 도시의 삶이 주는 비인격적 일상을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자아성찰을 위한 이러한 고요와 묵상이 절실하다고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에 한가지 우려를 전한다면, 이러한 영성추구의 과정을 지도하는 것 역시 몇몇 앞서가는 직업목회자들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참된 영성은 청명한 자연환경 속에서 배어나오는 그윽한 미소와 평온한 어투에 있지 않고, 온갖 유혹과 갈등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를 극복하는 씨름과 땀방울에 있다고 믿는다.
 
성도들의 삶이 참된 영성의 주된 현장이라는 구체적인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곳에 거한다는 것이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자부심이 전해져야 한다. 도리어 어쩌면 직업목회자의 일상은 영적 성장의 본류와는 거리가 있다는 자각이 일어나야 한다. 물론 내면세계의 질서에서부터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인생들이 다수인 현실에서 이 무슨 어려운 목표설정인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왜 내면을 성찰해야 하고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하고 관계의 회복에 애써야 하는 지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깨어진 세상에서 처연히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을 그 실상에서 도망쳐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무언가 메시지를 던지는 삶을 살아내게 하기 위함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성도들이 엄두를 내어야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일상이 직업목회자의 일상보다 거룩할 수 있다는 해석을 해내도록 말이다. 심지어는 직업목회자는 모종의 경험이 결핍된 존재여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어 간접적으로 세상을 경험토록 해야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자는 말이다. 마치 수학자 앞에서 공학자처럼, 경제학자에게 반례를 제공하는 경영인의 입장처럼, 신학과 목회가 직업인 이들 앞에서 삶의 임상을 제공하는 이들로서 자부심을 가지자는 말이다. 그것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에 있어서 현장의 일상영성의 가치를 얼마나 부여하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미술로 비유컨대 직업목회자들이 영적 도야를 통해 정밀하게 묘사된 회화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면, 성도들이야 말로 일상의 씨름을 통해 거칠지만 3차원 입체조각의 실상을 보여주는 이들이다.
 
이어서 이야기하겠지만 그래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시장영성의 제자훈련은 직업목회자들에게는 넘사벽의 한계가 존재한다. 어쩌면 손을 떼야 하는 영역일지 모른다고 자인하며 겸손히 내려놓아야 한다. 다만 우정의 연대만이 유효하다.
 
*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이끌기
 
성도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는 성도들에게 교회란 피난처도 수도원도 아니다. 한 인격이 변화되고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생활 공동체로 인식된다. 인격의 변화와 공동체의 성숙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어색함이 없다.
 
교회에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샤만으로서 사제가 아니라 한 인격의 거듭남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공동체에 속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전과정에 함께하는 자들로서 성도들이 존재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은 성도들마저 자신의 마땅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가지를 급진적으로 떠올려보자.
 
먼저 과연 성도들은 자신을 구체적인 복음을 전하여 한 인격을 거듭나게 돕는 자로 인식하고 살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직업목회자들도 스스로를 목양전문가 훈련전문가 상담전문가로 한정해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사양하는 일이 많다. 전도의 은사가 있는 이들은 따로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참된 사제는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의 복음을 전하고 인생을 건져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직업목회자와 성도의 구별이 없으며 이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사제이다. 양쪽의 삶을 두루 경험해본 이로서 보건대, 비그리스도인들을 만날 기회조차 없는 직업목회자들보다 성도들이 더 사제에 다가선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과연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을 도와 그들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혹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소그룹 조장이나 일대일 훈련의 리더를 일컫는다면 너무도 협소한 관점이다. 인생을 나누는 친구로서 가끔은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 영적 여정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서로에게 역할하는가의 문제이다. 일대다의 관계를 맺고 이른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직업목회자에겐 물리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이다. 앞서 이야기한 시장의 영성을 가꾸는 성도들간에서 그나마 형성될 수 있는 관계이며,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관계의 전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 사제의 역할을 도제의 의미로 해석해본다면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이 사실상의 사제인 셈이다.
 
또한 과연 성도들은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 자신도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꿈꾸고 세워가는 당사자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은 늘 직업목회자들의 몫으로 치부되었었다. 심지어 직업목회자들도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브랜드교회의 조직원으로 일하다가 향후 일종의 분양을 받아 개척하는 소원을 가진 분들이 많다. 성도들도 언젠가부터 이미 번듯하게 세워진 교회에 찾아가서 고귀한 목양의 대상으로 대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이 되었다. 선교지가 되었든 속한 지역사회가 되었든 온전한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꿈은 도대체 누가 꾸고 또 그 꿈을 누가 실현하는지가 관건이다. 과연 성도들이 이를 구체적으로 꿈꾸고 이루어 간다면 그들이 진정한 사제이다.
 
결론적으로 굳이 사제라는 개념과 정의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직분이나 신분이 아니라 역할이다.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누구의 몫이며 자격있는 자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 긴급한 역할과 본질적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싶다. 조만간 이름도 빛도 없이 진정한 사제의 역할을 감당한 그들의 수고를 겸손히 인정해줄 수 있는 날이 속히 도래하길 바란다. 아마도 확신컨대 직업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