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9일 토요일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8)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8)<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4) 기도의 강조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통치를 우리는 기도로 덕을 입게 됩니다. 성령이 기도할 때에 임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가 기도의 모범으로서, 그분은 스스로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으로 연장되어, 초대교회가 기도의 공동체로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5) 가난하고 고난받는 자들의 해방에 대한 강조
소외된 자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죄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관심이 누가복음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는 이들에게 복만 선포되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에서는 그것이 부자들에 대한 저주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6:24-26). 이 정신이 1:46-55의 “마리아의 노래”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매우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누가는 예수의 메시아 취임 설교(눅 4:18-21)에서 예수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자로서의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또 눅 2:1-14과 행 28:30-31의 수미쌍관을 통하여 메시아(그리스도) 예수를 가이사 아우구스도와 대조시킵니다.
온 세상을 무력으로 평정한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주요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되는 데 대항하여, 에수가 사랑과 섬김으로 온 세상에 참 평화를 가져온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가이사의 로마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대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가 정치적 해방자라기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해방(죄와 불의의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메시아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가 로마제국을 대치하는 다윗왕조를 시온에 세우는 메시아, 즉 로마의 가이사를 대치하는 이스라엘의 ‘가이사’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평화를 가져오는 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나라(통치)의 대행자임을 보여 줍니다.


3. 신학의 효용성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구원 사건의 모멘트입니다. 이중에 바울, 마가, 마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2:2을 보십시오. 거기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가령 빌립보서 2:6-11이나 고린도전서 15:23-28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사탄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꺾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만유의 주가 되시어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며,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사탄의 잔여 세력을 소탕해간다(그렇게 현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다만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더 강조한다는 것 뿐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속죄와 새 언약을 위한 제사를 드렸음을 중시하되, 하나님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현재적 구원 사역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합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아예 통합해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올려짐이 바로 그의 영광받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그리스도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들어 올려짐”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들어 올려지는 순간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의 계시자(하나님의 아들, 하나님)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요 8:28, 13:31-32 등).

요한계시록은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5장) 자신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구속해 낸 그의 교회를 일꾼(메시아적 군대) 삼아 사탄의 세력을 무찌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누가도 계시록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현재 실현해 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합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점을 위해서 누가는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에 그리스도의 승천을 그립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있어 십자가에서의 속죄 신학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8:18-20의 사도적 위임에 해당하는 누가복음의 24:47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명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6-43에 누가는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한 설교를 보고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요약한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복음의 요체를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행 10:43). 사도행전 13:38-39에 있는 바울의 설교의 요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누가도 예수의 최후의 만찬 말씀(눅 22:17-22)을 담고 있으려니와, “(하나님)의 아들의 피”(행 20:28)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 사실들은 누가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사를 치른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속죄제사로 드려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음을 전제하고, 부활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현재 행사하시어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제사에 근거한 칭의론의 범주를 선포하는 그의 복음을 재발견한 종교개혁의 후예들로서 우리는 바울식 십자가 신학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에 더 초점을 맞춘 누가나 계시록식으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바울식 십자가 신학, 칭의론의 복음은 구원의 은혜성을 잘 드러내고,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과 절실한 관계를 갖게 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복음 선포 방식과 함께, 누가나 계시록식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여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대행자로서 그의 영으로 지상의 교회 안에 계시며, 교회를 인도하시며, 교회에 힘을 주셔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통리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도 강조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현재 인권의 확대로, 사회 정의와 평화의 확대로 구현되어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또는 군사로서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7)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7)<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3)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병행(2)
쿰란 공동체에서도 보듯이, 고대의 공동체에서 재산을 모아서 유무상통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상이었습니다. 여러 유대 공동체에서는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진 공동체들이 이를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누가도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두 번이나 연속해서 말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 모범인 바나바의 예를 듭니다. 그러나 누가가 경고하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것을 문자적으로 추종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령의 열광주의에서 유무상통을 시도했으나 그래도 문자적으로 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이상에 접근하려고 애를 쓰기는 해야 합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으로 인해 안디옥 교회가 헌금한 것을 예로 들고, 또 나중에 갈라디아, 아가야 등의 이방 교회에서 헌금을 걷어다가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에게 보내준 것으로 나타납니다. 누가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여유있는 성도가 가난한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첫 번째는 특히 바나바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구원이 완성되지 않고 육신이 살아 있는 한, 거짓으로 헌신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될 수 있으므로 이것을 너무 무리하게 문자적으로 추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정신을 이어가려고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세 번이나 나오는데(9:1-30, 22:3-21, 26:2-23), 이것이 중요하기 떄문입니다. 누가는 중요한 것을 세번씩 반복하는 기법을 씁니다. 베드로의 고넬료 선교를 두 번이나 길게 썼습니다(10:1-48, 11:1-18). 이는 이방 선교의 합법성을 부여하는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비로소 바울의 이방 선교가 가능하게 됩니다. 누가의 관점에서는 이방 선교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준비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 결의를 세 번이나 기록했습니다(15:19-21, 29, 21:25).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율법의 멍에를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음행, 피와 목매인 것 등 세 가지는 삼가라고 합니다. 누가는 이런 병행기법과 이중 삼중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선교의 발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신학적 강조점
        1) 구원사의 신학
누가는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에 이르러 성취되었습니다. 신적 필연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도록 되어 있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하는데, 신약에 101회 나오는 이 단어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만 40회 나옵니다. 또한 구약에 약속된 구원이 현재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늘’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2:11, 4:21, 5:26, 13:32-33, 19:5-9, 19:42, 23:42-43).
누가는 이 구원을 삼단계로 표현하였습니다. 첫째는 율법의 시대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세례 요한으로 끝났습니다(7:34-35). 둘째는 새 시대입니다. 종말의 시대가 예수를 통해서 이미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그 구원을 덕 입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 승천한 예수가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 내재하시며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베풀어 줍니다. 이 시대를 교회의 시대, 곧 성령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구원사의 중심으로 제시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구원사의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앞서 말했듯 이방인 선교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헬라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에서 핍박받아 흩어져 교회를 세우지만 결국 그들의 선교를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이 정당화합니다.
이방인 선교를 바울이 담당하지만 그 문은 베드로가 엽니다. 구원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계로 확대되는 것으로 기술합니다. 심지어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에 종속되어 선교여행 후 항상 그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기술합니다.
         2) 기독론과 구원론
특별히 누가 신학에서 중요한 것이 기독론과 구원론입니다.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의 초점을 바울, 마가, 마가를 이어받은 마태,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에 맞춥니다. 대속의 제사로서의 십자가의 죽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의 속죄를 강조하는 마가와 다릅니다.
가령 마가복음 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를 마태는 20:28에서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2:25-27을 보면 “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자가 섬기는 자라는 사상, 곧 마가복음의 10:45의 전반부만을 이어가고, 그 구절의 후반부의 속죄 제사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요약된 사도들의 설교들, 특히 전반부에 요약된 베드로의 설교들은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을 ‘낮아짐-고난 받음-높아짐’의 구도로 제시합니다. 이 ‘낮아짐과 높아짐’, ‘낮아져 섬김과 하나님의 우편에 주권자로 들어 높여짐’의 구도로 설명하지, 속죄 제사의 카테고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atonement가 약화되어 나타납니다(cf. 눅 22:15-22, 행 20:28). 베드로의 설교에서 제시된 바가 사도행전의 복음 선포의 요약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마가나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높여짐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나라)의 대행자로서 현재 죄용서, 축사, 치병,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높임 등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현재 실현하신 분으로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누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여져 만유의 주로서 현재 군림하며,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그의 교회를 인도하고 힘주시어 오늘 우리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그리고 죄용서, 축사, 치병, 사회정의 회복, 화해,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건설 등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현재 실현해 가시는 분으로 선포합니다.
    3) 성령과 기도에 대한 강조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성령에 대한 강조가 강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특별히 더욱 강조됩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인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 스스로가 성령을 힘입은 자로 제시되며, 그의 사도들과 성령에 힘입어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성령은 예수의 다른 자아 alter ego로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힘주시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꾼 agent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6)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6)<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1. 구조와 특징
         1) 누가복음의 구조

누가는 3:1-6:19, 8:4-9:50, 18:15-24:11 등에 마가의 자료를 담고, 6:30-8:3(작은 삽입)과 9:51-18:14(큰 삽입)에 비(非)마가 자료(마태와의 비마가적 공통자료인 Q와 누가의 특수자료 L)을 삽입하여 쓰여졌습니다.
먼저 누가복음의 서론에서(1:1-2:51)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이 언급됩니다. 특히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길게 다룸으로써, 구약의 구원사와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는 새 구원사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그 다음은 예수의 사역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3:1-4:13). 세례와 광야의 시험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 메시아로 세움 받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입니다. 그의 가르침과 이적들을 4:14부터 9:50까지 전개합니다.

그리고 9:51부터 19:44까지는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기의 형식을 취해 예수의 사역을 기술합니다. 이 내용의 44퍼센트 이상이 누가의 특수 자료입니다.

이야기의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신학적 순서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20장에서 24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가 어떻게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누가의 구조상의 특징

누가의 특징은 구원사 신학에 있습니다. 2:1에 아우구스투스가 칙령을 내린 것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음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이 구원의 중심지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열두 사도들이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방 사도인 바울도 예루살렘을 그의 사역의 중심지로 삼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바울은 이방 선교 여행을 마칠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누가복음의 여러 곳에서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구원사의 중심이 예루살렘인 것을 암시합니다. 제자들 역시 예루살렘을 사역의 중심으로 삼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로써 누가는 예수의 역사와 제자들의 역사를 병행시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함께 2부작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은 부활 기사로 복음서를 마치지만, 누가복음은 24장에 부활 후의 승천 모티브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장에 예수의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승천 신학을 강조합니다.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만유의 주로 등극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고(시 110:1), 그의 영인 성령으로 그의 교회에 임재하시며 교회에 힘을 주고 교회를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 가게 하십니다. 또한 “데오빌로 각하에게 바친다”고 하는 서문(눅 1:1-4, 행 1:1-2)이 눈에 띕니다. 누가복음에도, 사도행전에도 이러한 서문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고급 문학의 형식을 따르는 것으로 특히 과학서(의학 등)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누가가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려고 노력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다음으로 훌륭한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저자는 당시 헬라의 전기, 역사, 과학서, 항해 일지, 드라마 등의 다양한 문학적 장르에 익숙한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한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중반부의 긴 내용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역시 후반부가 완전히 바울의 여행기로서 특별히 로마를 향해서 가는 긴 여행기입니다.


3)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병행(1)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는 ‘병행(Parallelism)’이라는 문학적 기법이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은 누가복음에서의 예수의 사역과 병행을 이룹니다. 또한 사도행전 내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도 병행합니다.

사도행전 1-7장까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소개됩니다.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대표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순간에 바울을 소개합니다(7:57-8:1).

사마리아에서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져서 사역을 합니다(8장). 이 사역을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인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정당화합니다(8:14-25). 그리고 바울의 회심과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본격적으로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앞서 베드로의 선교를 삽입합니다(10장).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서 이방인 고넬리우스에게 선교함으로써 이방선교를 엽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서 이방 선교를 정당화합니다(11:1-18). 그리고 이방선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먼저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는 선교를 이야기하고(11:19-30) 비로소 바울을 본격적으로 배치합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안디옥에 데려오는 것으로(11:25-26) 바울의 선교를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습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가 떠나고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12장).

이것이 42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합니다(13장). 이 때문에 바울의 이방 선교가 시작됩니다. 사도회의에서 이방선교에 대한 공식적인 합법화가 이루어집니다(15장). 그리고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선교가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인 스데반을 이야기하면서 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를 실질적으로 시작한 바울을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정당화로 인한 유대 선교와 이방 선교의 병행과 연속, 교회의 하나됨이 제시됩니다.

베드로가 흩어진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가서 설득을 합니다. 바울이 이방 선교를 담당하기 전에 베드로가 먼저 이방 선교의 문을 엽니다. 이 과정에서 이중 혹은 삼중의 반복이 일어납니다.

초대 교회의 코이노니아를 두 번이나 이야기합니다(2:42-47, 4:32-35). 2:42-47에서 바나바가 자신의 것을 다 팔아다가 사도들 앞에 놓고 그것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4:32-35에 또 한 번 나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것을 팔아다가 교회로 가져와서 상통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5)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5)<3> 마태 복음

3. 상급의 문제(2)
지금 많은 한국 목사들이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하늘 나라에서 그 위에 공로에 따라 다른 상급을 받는다”는 공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임을 드러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은혜로만 sola gratia,” 그리고 “믿음으로만 sola fide”의 종교개혁 신학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어느새 중세 가톨릭 교회의 공로신학으로 퇴행해 버린 것입니다.
교회 봉사, 헌금,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많은 목사들이 이 공로/상급 신학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교회의 영성은 과격히 왜곡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태나 바울의 “상급”의 언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강조하며,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눅 19:12-27)를 누가복음 판의 문자적인 해석에 따라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리는 등 하늘 나라에서 차등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상급”의 언어를 가장 많이 쓰는 마태는 이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를 받아 장사를 신실히 한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받아 장사를 신실히 한 사람에게 똑같은 “상급”을 내리는 것으로 쓰고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23). 이 “상급”(주인되신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함)은 같은 구원이지 거기에 차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상급”이라는 언어를 쓸 때는 마태복음에 의존하다가, 그것이 차등의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누가의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린다는 언어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상급”이라는 언어를 많이 쓰는 마태가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린다는 언어를 쓰지 않는 이유를 헤아리지 않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마태의 “상급” 언어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존중하는 태도입니까? 성경을 균형있게, 그리고 문자를 넘어 그 영(정신, 의도)을 드러내는 깊은 해석을 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9:16-22 pars에는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관원은 예수께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영생(구원)을 선행의 공로에 대한 상급으로 얻는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대교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법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의도한 답은 계명들을 지킨 “공로”를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영생(곧 하나님 나라의 생명, 신적 생명)을 주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하나님/하늘 나라”라는 개념과 더불어 “오다,” “(하나님께서) 주신다,” “들어가다,” 그리고 “(우리는) 받다” 등의 동사들을 쓰고 “(인간들이 지혜와 선행을 모아, 또는 당시 열심당식으로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이루다” 등의 동사를 완전히 배격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것임을 강조한 예수께서 이 부자 관원에게 스스로의 계명들 지킴의 “공로”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영생)을 상급으로 얻으라고 가르쳤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자관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로 네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너는 영생, 곧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의지하고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지금까지의 그릇된 생각에서 형식적인 계명지킴(계명을 지켜 영생을 “상급”으로 받겠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즉 실제로 맘몬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표시로 네 재산을 다 처분하라. 그리고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을 권면하기 위해 율법을(바리새인들보다 더 완벽히) 지킴과 그에 대한 “상급”을 강조하는데, 그는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나 20:1-16의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 등을 통해서 이런 언어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원의 은혜성을 훼손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살도록 권면하기 위하여 쓰는 언어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4. 마태복음의 실용성
마태복음은 유대 그리스도인의 교육용으로, 전도 또는 변증용으로 사용될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예수가 구약 예언의 성취요, 모세 율법의 완성이시며, 교회가 구약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종말론적 이스라엘이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교회 내의 잘못된 미신적이고 열광주의적인 영성과 관행에 대한 교정, 의의 열매에 대한 강조, 바리새적인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대한 경고 등, 실제적인 의의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유용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로 진입하여 구원을 받음이 전적으로 그리스도 사건의 은혜에 의함임을 강조하는 바울 신학과 균형을 이루어 하나님의 통치를 구체적인 삶에서 받음으로 종말에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마태복음의 가르침을 가르치면,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4)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4)<3> 마태복음 

6) 신학적 긴장

    (1) 특수주의와 보편주의(3)

마태복음이 보여 주는 예수의 사역이 이 설명과 일치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의 뜻을 좇아 유대인들만 섬겼는데, 이는 그렇게 하여 생성되는 하나님의 새 백성(새 이스라엘, 교회)을 통해서 모든 열방을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결국 예수의 “그러므로 너희들은 나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대위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결론하는 것입니다(28:16-20).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마태복음에 강하게 나타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이해하게 합니다. 예수 자신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하지 않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주된 적대자들로 나타나고 유대인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회당’, ‘너희들의 회는당’, ‘오늘날의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교회가 이미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의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수 유대 공동체와 분리하여 인식하고,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에 의해 표상된 랍비 유대교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의로운 ‘남은 자들’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가 그들에게서 이 ‘남은 자들’인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이전되어 후자들이 ‘참 이스라엘’을 이루게 되어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들의 진정한 상속자가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2) 율법과 은혜

마태복음의 또 다른 신학적 긴장은 율법과 은혜입니다. 마태는 율법 준수를 강조합니다. 예수는 율법의 완전한 해석가로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참 뜻에 대한 완전한 해석입니다(5:17-18).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합니다(5:20).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것을 요구합니다(7:21, 21:31). 사랑의 이중계명을 문자를 넘어서 그 정신에서부터, 진정한 동기에서부터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반대어법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핑계로 함부로 행동하는 카리스마틱 열광주의자들(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비유를 듭니다(7:15-35).
그러면서도 마태는 은혜를 강조합니다(9:12-13, 10:7-8, 11:28-30, 18:23-35). 팔복 선언에서부터 은혜에 대해 강조합니다(5:3-12). 하늘 나라의 은혜와 메시아가 새롭게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는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서의 삶이 상호 긴장 가운데 천명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에 대한 강조와 은혜에 대한 강조가  긴장을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상급의 문제(1)

마태복음에는 “상급”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은혜와 율법의 긴장의 한 단면입니다. “상급”이라는 말은 6:4, 6, 18, 10:41, 20:8 등에 나타나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는 표현은 6:20-21에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마태 다음으로 “상급”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쉽게 해석해 버립니다. 이런 요소들을 마태나 바울에게서 발견되는 유대교적 잔재라고 취급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마태나 바울도 끝까지 유대교에서 아주 중요시했던 공로에 대한 상급사상을 버리지 못하였고, 그것이 도덕적 권면을 위해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나 바울이 이런 언어를 쓸 때는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믿는 은혜에 의한 구원과의 연결을 생각해 보지 않고 과거 유대교의 잔재로서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상급” 사상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급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배격하는 가르침도 강조합니다. 20:1-16의 유명한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가 그 예입니다. 포도원 농부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준다는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복음서들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3시에 일하러 온 농부나 6시에 온 농부나, 9시, 심지어 11시에 온 농부나(당시 12시간 동안 일한다면 11시에 온 농부는 마지막 1시간만 일하는 것이다) 품삯은 모두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온 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나의 주권적 결정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약속한 바를 준 것인데 무슨 불평이냐”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을 맺는 존재들이 아니므로 자신의 율법 지킴의 선행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 데나리온은 구원으로서 하나님께서 주권자적 은혜로 주시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어서 그에 더한 어떤 것을 바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가 유독 그의 복음서에 이 이야기를 포함한 까닭은 앞에 나오는 많은 “상급”의 언어들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가 유대교의 상급신앙에 정면으로 대항해서 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신적 생명, 영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적 무한에의 참여는 곧 온전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신적 무한에 참여함으로 온전해져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에 등급이 있어서 상등 구원이 있고 하등 구원이 있다면, 하등 구원에는 부족함과 결핍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하등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 하나님의 신성/충만에 참여함)인데 그 구원에 무슨 등급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구원’이라는 말과 ‘상등, 하등’이라는 말은 함께 쓸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은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3)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3)<3> 마태복음

(1) 특수주의와 보편주의(2)
그것은 이사야 66장 같은 데서 나타나는 사상으로서 바울의 선교 사상의 신학적 기조를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원의 행위로 시온에 메시아의 영광이 나타났으며, 다메섹 도상에서 이 영광의 광체를 본 바울이 이 구원의 복음, 이 영광의 광채를 열방에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2-49장에서 예언된 주의 종으로서 “열방의 빛”이요 “구원의 전달자”로 세움받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갈라디아 사람들, 데살로니가 사람들, 고린도 사람들, 로마 사람들 등 열방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데살로니가인들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려 돌아선 것입니다”(살전 1:9-10). 이런 바울의 신학이 마태복음에도 나타납니다.
예수가 여기 지금 시온의 “임마누엘”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모습으로, 초월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모습으로, 여기 시온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즉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난 것입니다. 찬란한 별이 그 광채를 동방에 비춥니다. 그래서 동방의 현인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예물을 가지고 예배하려고 시온에 옵니다.
마태복음 28장까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져 시온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을 보여 준 마태는 이제 20:16-18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만방에 파송하여 이 시온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어 열방이 참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라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결말합니다. 2:1-12의 동방박사 이야기가 28:16-20의 사도적 대위임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2:1-12과 28:16-20은 ‘inclusio’를 이룹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공생애 동안은 유대인들에게만 설교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오는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의 복을 끼치십니다(8:5-13, 15:21-28 등). 그리고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은 심판을 받고, 도리어 하나님 백성의 특권을 그들로부터 빼앗아 열방에게 주겠다고 경고하십니다(8:12-13).
혼인잔치의 비유(22:1-14)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해서 유대인(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라고 먼저 초대하는데, 그들이 다 거절하니까 혼인잔치를 베푸는 주인이 종들을 큰 길과 작은 길에 보내서 앉은뱅이, 소경, 병자들, 하나님의 성전에 오지 못한 자들을 다 강권하여 끌고 오게 합니다. 원래 초대받은 사람들은 버림을 받고, 노인들과 창기들과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24:14에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다고 예언합니다. 이런 것들이 보편주의입니다.
예수가 공생애 동안은 이스라엘에게만 보냄을 받았고 제자들도 이스라엘에만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냈는데, 마태는 결국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열방에 선포되어서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도리어 처음 초대받았던 이스라엘이 버림받는다고 묘사합니다. 그래서 특수주의와 보편주의가 대조를 이루는데 이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 마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5:8-9까지 바울이 특수주의와 보편주의의 긴장을 잘 설명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4-15장에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대립을 묘사합니다. “약한 자들”은 유대인들로 고기를 안 먹습니다. 고기가 다 우상 제물이라서 그 고기를 먹으면 우상숭배라는 죄를 짓는다고 생각해서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의 양심을 위해 형제 사랑으로 그들의 자유를 양보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의 결론에 가서 그리스도 사역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라고 당부합니다(롬 15:8-9).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 마디로 할례당, 곧 유대인들의 종노릇하셨음이라고 정의합니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가 유대인들만 섬긴 사실을 여기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이 특수주의입니다.
예수께서 이방에 들어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할례당인 유대인들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치유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께서 유대인들만 섬김의 목적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을 특별히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는 그 약속의 성취자로 오셨고, 이스라엘/유다의 메시아로 오셨으니, 그의 사역의 주 목적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에게 종노릇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가 이스라엘/유다만 섬긴 두 번째 목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롬 15:9). “모든 열방이 그의 자비를 인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만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것은 분명 특수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선택에는 궁극적으로 그들을 통해서 열방을 축복하겠다는 보편적인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창 12:2, 18:18, 22:18 등).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열방을 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편주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경적 특수주의는 ‘대표성의 보편주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하나를 특별히 뽑되 전체를 위해서 그들의 대표를 뽑는 것입니다. 하나를 통해서 모두를 축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유대인들의 종노릇하심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셨기 때문인데, 그(특수주의적인) 선택과 언약은 그들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시려는(보편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도 유대인들만을 섬겼으나, 그것은 그들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새 백성의 핵을 만드셨습니다.
구약신학으로 말하면 “남은 자들”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12제자로 대표되는 새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신의 메시야적 구원(그의 자비)이 온 세상의 열방에게 미쳐,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런 설명들이 다 바울의 설명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2)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2)<3> 마태복음

4) 제자도와 의(義) (3)
자신에게 죄지은 자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있으면 이것이 죄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내 오른뺨을 친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죄만 빼고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무효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해도 용서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그 용서가 이웃에게 표현이 되어야 그 죄가 용서되고 죄가 힘을 잃은 것이 확인되는 것이지, 입으로는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마음 속에 복수심을 갖고 있으면 그 용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겠나이다”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를 5장에서 강조합니다. “과거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에 입각한 복수의 원칙이었는데, 이제 내가 가르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도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벗어주라”(5:38) 하시며 철저하게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되 그 이웃의 원수까지 포함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산상수훈 5장에서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6장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이 나타납니다. 산상수훈에 있는 주기도문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을 말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율법의 정신입니다. 이것을 지키는 것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5장에 반대어법이 있습니다. 21절부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등 옛사람에게 선포된 계명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당시 가장 의를 이루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만족하는데, 예수는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환기시키며 강조하십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모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남의 목을 치지 않는 한 살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형제를 증오하고, 무시하고, 얕잡아 보고 하는 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살인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와 ‘정신’부터 이야기하십니다.
문자적 해석에 의하면 자기 배우자 아닌 사람과 동침하지 않으면 간음이 아니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의 상태부터 간음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며 “어떻게 하면 실수가 없을까?” 노력합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율법을 실수 없이 지킬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관습 율법에 보면 “~까지는 되고 ~까지는 안 된다”는 식의 규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잡다한 인간의 유전과 전통을 이렇게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특성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은 다른 말로 하면 이웃 사랑입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온 것입니다. ‘완성한다’는 의미는 두 가지로, 하나는 율법의 예언과 약속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율법의 문자가 가리키는 정신을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예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새 백성의 공동체

마태복음이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 교회론입니다. 유독 사복음서들 중 마태만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씁니다. 베드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예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건설한다고 약속하십니다(16:13-20).
예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을 새 이스라엘로 보고 그들을 대표하는 ‘기둥’들로서 옛 이스라엘의 기둥들인 12지파의 족장들에 상응하여 12명의 제자들을 세웠음은 사복음서들이 공히 증거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유독 마태복음만 18장에 이 새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 내에서의 생활규범을 서로 사랑과 섬김의 대원칙을 넘어 더 구체적으로 명문화하여 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로서 제자도의 의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 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표방해야 합니다(마 5:20). 뿐만 아니라 23장에 바리새인들에 대해 아주 심한 경고를 하는데, 이는 유대 공동체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리새인들에 대항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도 주면서 한편으로 교회도 점점 바리새적, 유다주의적 형태를 띠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내린 것입니다.
산상수훈 제일 끝에 가서 7:15-23에 ‘charismatics’(은사적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의의 열매 없이 성령의 열광주의에 빠져서 주의 이름만 헛되이 부르며 선지자 노릇하고 이적이나 좇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나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한편으로 바리새주의적인 형식적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순종하지 못하는 영적 열광주의를 교정하는 것입니다(한편 바리새주의적인 형식적 율법주의에, 다른 한편 미신적 영적 열광주의에 빠져 있는 현재의 한국교회에 절실한 경고들입니다.

            6) 신학적 긴장
    (1) 특수주의와 보편주의(1)
또 하나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신학적 긴장입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특수주의와 보편주의간의 긴장입니다. 10장과 15장이 대표적인 특수주의로, 예수가 이스라엘에게만 보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반면 마태복음의 보편주의는 28:16-20에 강하게 나타나는데,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제자로 삼아 예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28장에 앞서 보편주의가 2장부터 나타납니다. 2장의 동방박사 이야기부터 그렇습니다.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세계의 열방이 그 영광의 빛을 보고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예물을 가지고 시온에 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선지자들의 중요한 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1)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1)<3> 마태복음

4) 제자도와 의(義) (2)

‘의’란 말을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 다음이 마태입니다. 바울과 마태는 복음을 전혀 다르게 선포하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들도 여럿 있습니다. ‘의’라는 개념도 그렇고, 하나님 아들의 기독론도 그렇습니다. 열방에 대한 선교적 보편주의가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8:16-20에서 열방에 대한 선교가 강조됩니다. 1-2장의 탄생기사에서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좇아 예수에게 예배하러 옴은 종말에 모든 열방이 시온에 순례와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리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시키며, 28:16-20의 선교 위임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사도들이 만방에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고 열방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구원을 얻게될 것을 표적하는 사건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열방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가 바울로 하여금 이방 선교를 하게 합니다. 이처럼, 놀랍게도 마태가 바울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마태의 ‘의’에 대한 초점이 다릅니다. 바울은 이방에 대한 선교적 관점에서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는 데에 초점을 둡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설 때에,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할례를 받아 이스라엘이 되고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느냐, 아니면 이 과정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얻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느냐?”, 이것이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하면서 유대주의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요점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는 것,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느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태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 공동체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느냐가 초점이었습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바울과도 일치합니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사람은 그 의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2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의인이 됐으니까 그 의에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들의 후반부는 대개 어떻게 ‘의에 서 있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게 됩니다.
예수는 시편 110:1의 예언대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대권을 대행하는 분, 곧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분입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구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도 항상 우리가 의의 관계에 서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님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멈추게 합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장은 사랑의 이중계명의 삶의 다양한 정황들에 대한 바울의 적용입니다.
마태도 같습니다. 주 예수와 순종의 관계에 서 있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2:35-40에서 모든 계명을 예수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5-7장을 자세히 보면 다름 아닌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강해입니다.
산상수훈의 중심인 주기도문(마 6:9-13)은 세 개의 “당신”청원들과 세 개의 “우리”청원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세 개의 “당신”청원들은 “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를 부연한 것들이며, 마지막 “우리”청원, “우리를 마귀의 통치 아래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는 이 “당신”청원과 수미쌍관을 이루어 매듭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가장 간략하게 간추리면 “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루를 위한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겠나이다)”의 세 청원들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빠”노릇해 주심(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심)에 덕입어 살고, 죄 용서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즉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그리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 이웃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고 사는 것을 염원하는 기도입니다.
6:19-34은 마태가 출애굽 당시의 만나, 즉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야기(출 16장)를 배경으로 삼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의 청원을 강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빠”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강해하는 것입니다.
강해의 핵심은 가장 위험한 우상숭배의 형식을 경고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함입니다: “누구도 두 주인들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6:24).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가 다가오는 하루의 양식을 위해서 비는 삶의 자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순종하는 자세여야 한다. 맘몬(재물)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겠다는 우상숭배의 정신으로 보물을 쌓아두려고 하면, 출애굽 시대의 옛 이스라엘이 매일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이 삼일치의 만나를 쌓아 놓았던 것이 썩어 버린 것처럼 된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도적이 들어서 다 없어진다.”
이런 식으로 6장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함은 맘몬 우상숭배를 피하고 우리에게 “아빠”노릇하시며 매일 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임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자는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용서받음의 열매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겠나이다”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0)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0)<3> 마태복음

2.    마태복음의 신학적인 강조점들

1) 구약 예언의 성취
마태복음에서는 구약 성취의 주제가 눈에 띕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가 구약을 성취하여 능가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으로 가면 이것이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는 독특하게 성취의 형식을 통해서 구약을 60회 이상 인용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 하나를 기술하고는 매번 “이것은 구약의 어느 책 어느 구절에서 비롯된 어떤 예언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해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구절들을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면서 구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예수의 행적들은 구약 예언들의 완벽한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마태의 이런 구약 사용법을 보면 마태가 상당한 랍비적 해석 훈련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쿰란 공동체의 ‘pesher’방법과 유사합니다. 쿰란 공동체의 문서를 보면 예를 들어 하박국을 강해하면서 하박국의 어느 한 부분을 인용하고는 “이것은 자신들 당대(주전 150년-주후 70년)의 어떤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자기 시대의 사건과 하박국에서의 예언을 1:1로 성립시키는 것이 pesher 방법입니다.
마태가 이와 유사한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술하고는 “이것은 어느 선지자의 예언된 것을 성취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에 구약의 예언을 1:1로 성립시키는 그런 해석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스웨덴 학자로서 하버드 신학대학장이었던 스텐달(K. Stendahl)은 이것이 마태학파의 오랜 성경 묵상과 해석의 결과물인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전도용으로 혹은 변증용으로 쓰기 위해서 이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 하늘 나라
둘째, 하늘 나라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쓰는데 마태는 ‘하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로써 예수가 선포하고 실현한 하늘 나라는 구약에 약속된 종말의 구원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3) 삼위일체론적 기독론
셋째, 높은 기독론입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비해 월등히 높은 기독론을 나타냅니다. 심지어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의 차원에서의 기독론까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데, 마가도 1:1과 15:39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마가복음 11:27-12:12의 논쟁에서와 14:62에서 하나님의 아들됨이 선포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자료들을 더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서도 마가복음 8:28에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주는 메시아”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이라는 말을 비하하는 것이라 할까봐 “주는”이라고 고쳐 쓴 결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당신은 메시아,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됨을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25-27을 보통 ‘환희의 외침’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들과 아버지가 독특하게 상호 앎의 관계에 있음, 아들에게 전권이 위임되어, 아버지의 대행자가 되고 계시자가 됨을 기쁘게 외치십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한 기쁨 가운데 이 진리를 서기관들에겐 감추고 어린 아이같은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을 기뻐하면서 외치신 11:25-27은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앎을 통한 일치, 아들이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아 대행함,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계시자임’이런 것이 아주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1:23과 28:20이 inclusio를 이룹니다. 1:23에서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임,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의 모습임이 명시되고, 28:20에서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한다”는 약속을 합니다. 아들이 함께하는 것이 아버지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시고, 주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합니다.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의 차원에서 기독론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마태는 예수가 단순히 제2의 모세나 제2의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타난 모습임을 제시합니다. 모형론을 통해서 예수가 모세와 같은 구원자이되 출애굽과 시내산 계시를 능가하는-출애굽의 이야기처럼 그의 제자들을 안전하게 강을 건너게 하는-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아가 모세 정도가 아니고 모세가 모형론적으로 이루었던 구원을 종말에 완성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제시합니다. 제2의 모세 이야기로, 예수의 탄생에서 애굽으로의 대피와 해방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예수가 제2의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월적인 왕국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이런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형론을 쓰면서 하나님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됨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마태가 마가보다 이를 더 강조합니다.

4) 제자도와 의(義) (1)
마태복음에서 굉장히 강조되는 것 중 한 가지가 제자도와 의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예수가 모은 사람들,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은 의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나타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 공동체에서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나타내야 합니다(5:20).
‘의’는 근본적으로는 관계론적인 개념으로서,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다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같은 모든 관계는 관계 속에 있는 파트너들에게 의무를 지우는데, 그 의무를 다함이 ‘의’입니다. 예컨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부모에게는 자식을 잘 양육할 의무가 나오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가 나옵니다. 이때 부모가 자기들 쪽의 의무를 다함이 ‘의’이고,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는 자식이 ‘의로운’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 인간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의무를 스스로 지신고로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의’입니다. “이웃 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차원에서 서로 사랑하는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의’입니다. 관계 속에 있는 파트너에 대해 의무를 다하면 그 관계는 원만한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반대로, 파트너 중 어느 한쪽이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의’인데 그것은 갈등을 가져오게 됩니다. 고로 의인들의 공동체는 사랑과 화평의 공동체이고, 불의한 자들(죄인들)의 공동체는 증오와 갈등의 공동체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9)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9)<2> 마가복음, <3> 마태복음

4. 마가복음의 구조(2)

11:1-11 예루살렘 입성
11:12-14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
11:15-17 성전 시위
11:20-24 고사된 무화과나무를 통한 교훈
11:27-12:10 예수의 성전 시위에 따른 권위 논쟁
이런 것이 마가의 전형적인 ‘샌드위치 기법’입니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를 성전 시위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기 위해 두 부분으로 찢어서 성전 사건 사이사이에 배치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은 무화과 나무 이야기와 성전 사건 이야기, 이 두 가지 이야기들을 이렇게 찢어 놓지 않고 한꺼번에 위치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두 이야기들을 샌드위치식으로 서로의 사이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예수가 성전 사건으로 시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열매 없는 유대교/백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이 열매 맺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그들(악한 농부들)에게서 빼앗아서 예수가 새롭게 창조할 하나님의 새 백성(예수가 모퉁잇돌이 되어 새롭게 건설할 성전)에게 준다.” 성전 시위 사건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해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샌드위치 기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의 메시아 왕 됨은 로마의 가이사를 제거하고 스스로 가이사 같은 온 세상의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윗의 “집”(왕조)을 재건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성전-문자적인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짓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성전 시위 사건으로 표적적으로 예고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13장에 가서 명백히 선포합니다.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그 “사람의 아들”의 오심에 대해 예고합니다.
제5막에서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14:1-15:39). 고조되던 긴장은 재앙으로 끝이 납니다. 지금까지 얽히고 설킨 매듭이 한꺼번에 풀립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베다니에서는 예수가 머리에 기름부음 받음으로써 메시아 왕으로서의 등극이 표적적으로 이루어지고, 드디어 십자가에서 등극하는데, 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하나님의 의로운 새 백성을 창조하는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이므로 그것이 그의 메시야적 과업을 완성하는 사건이기에 그의 십자가에 달려 죽음이 곧 그의 메시아적 등극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가 메시아 왕으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 약속,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결의, 체포, 재판, 베드로의 부인, 사형선고와 십자가 처형 등등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한 로마 백부장의 고백, 이것이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로 예수의 장례가 있고, 빈 무덤의 묘사와 “예수가 부활했다”는 천사의 성포로써 종결됩니다.
마가복음의 구조 분석의 한 예를 들었는데, 이와 같이 마가복음 전체를 하나의 정교히 구성된 한 문학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양식 비평이나 편집 비평과 함께 이러한 문학 비평도 함께 해 볼 때 우리는 마가의 복음 선포를 더욱 깊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태 복음

1. 구조: 5개의 강론과 7개의 이야기

마태복음의 구조는 좀 더 쉽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5개의 강론들과 7개의 이야기들을 교직시켜 놓은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론은 머리말과 세례 요한의 내용입니다(1:1-4:11). 첫 강론으로 5-7장의 산상수훈이 나타납니다. 메시아가 의(義)로 제자들을 부름, 이것이 첫 강론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야기로 8-9장은 메시아의 사역, 치유 활동, 제자들을 부름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강론으로 10장은 메시아의 사역입니다. 12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선교하라고 하고 핍박을 받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 다음 세번째 이야기의 11-12장에서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거절되나 그를 받아들이는 제자들이 생긴 것을 서술합니다. 세번째 강론인 13장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13장은 비유장입니다. 그 다음 네 번째 이야기의 14-17장에서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를 거절하고 제자들은 수용함을 다시 서술합니다. 네번째 강론인 18장은 예수가 새로 모으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생활지침을 주는 장입니다.
그 다음 19-20장은 다섯 번째 이야기로 메시아의 예루살렘 도성에서의 가르치는 모습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번째 이야기로 21-22장에서 예수의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이 나오고, 23-25장이 다섯번째 강론으로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이며, 마지막으로 26-28장에서 일곱번째 이야기로 예수의 메시야적 예루살렘 입성, 성전 사건, 체포, 재판, 처형, 부활 등이 서술됩니다.
이런 구조로 일곱 이야기들과 다섯 강론들을 섞어서 조직해 놓았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한 이유는 아마 모세 오경에 수적으로 맞추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모형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예수를 제2의 모세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시내산에서 계시된 모세 율법의 완성으로 그리는 저자가 이렇게 다섯 개의 강론들로 자신의 복음서를 구성한 것은 모세의 오경에 수적으로, 상징적으로 맞춘 것 같습니다.
5-7장의 산상수훈의 시작인 5:1에서 예수가 “산에 올라가” 앉아서 강론하다고 시작합니다. 이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았을 때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받은 모세 율법의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을 예로 들면서, 예수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식으로 강론하여, 자신이 예비/임시 계시인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여 능가하는 종말의 온전한 법을 계시함을 보여 줍니다. 산상수훈은 예수가 모세의 옛 법에 대항해서 완성된 새 법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구조는 그 복음서의 신학적인 선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마가는 헬라의 비극 장르의 틀을 사용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전개했습니다. 마태는 모세 오경에 맞추기 위해서 5개의 강론들을 중심으로 하고, 그 사이에 이야기들을 배열시켰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함에 있어 예수의 가르침들과 행위들을 꼭 그들이 일어난 역사적 순서대로 배열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공관복음서들에서도 예수의 같은 가르침이나 행위가 서로 다르게 배열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순서대로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누가복음대로도, 마태복음대로도 아닙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의 신학적인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더욱 깊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문학적으로 조직하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나 누가가 제일 먼저 쓰인 마가의 자료를 어떻게 고쳐 쓰기도 하고, 달리 조직 배열시키기도 하는지,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자료를 어떻게 편집하여 쓰는지 등을 살피는 것을 편집비평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편집 비평과 함께 각각의 복음서를 한 편의 정교한 문학작품으로 보고 문학 비평의 방법론 등을 동원하여 분석하는 것도 유익한 성경 읽기의 방법입니다(대개의 평신도들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방법들이기는 하지만).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8)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8)<2> 마가복음

2) 십자가의 영광의 신학
그런데 1990년대에 건드리(H. R. Gundry)라는 학자가 이 이론에 대해 조정을 시도했습니다. 마가복음을 자세히 보니까 ‘십자가 신학’일변도가 아니고 거기에 ‘영광의 신학’적인 자료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를 단순히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분으로만 그린 게 아니고, 막강한 능력과 지혜의 승리자로,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분으로 그린 면도 있습니다.
심지어 8:27-31 이후에도 예수의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계시(9장)와 메시아적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11:1-11)이 그려지기도 하고, 11:27부터 12:44까지에는 논생설화들이 모여 있는데, 예수가 권세있는 가르침으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예수가 주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재판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밝힙니다.
십자가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직접 지고 갔다고 하지만, 마가복음에서는 구레네의 시몬이 대신 지고 갑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도 강한 자의 모습으로 마가는 그립니다. 예수의 위엄있는 부르짖음에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6시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9시에 죽은 것으로 그려 오랫동안 처절히 고난받으며 죽어갔다는 인상을 피하고 고난의 기간이 짧았던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강조하는데, 이것도 예수의 영광성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방인을 대표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자료들을 건드리는 ‘영광의 신학’적 자료로 봅니다.
왜 마가는 전체적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이와 같은 ‘영광의 신학’ 자료도 함께 담고 있는 것일까요? 건드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변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유대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음의 표징으로 여겨졌고, 헬라인들에게는 연약함과 패배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갈 3:13-14, 신 21:23).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의 제사로서 구원의 사건이었음을 강조함과 함께, 예수가 연약하고 패배한 자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연약하고 패배한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아들로서, 당당한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 사건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신학’을 강조한다고 보는데,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메시아라고만 한다면 연약하고 패배한 것이 어떻게 구원이 되겠는가?’라고 하는 문제에 당연히 봉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로마 세계의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히 죽으신 것을 강조하여, 로마 세계에서 멸시당하기 쉬운 ‘십자가에 달림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고 하는 것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4. 마가복음의 구조(1)


살제로 마가가 어떤 문학적 구조로 그의 복음서를 구성하였는가에 대해 다양한 분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한다면, 헹겔(M. Hengel) 교수는 마가복음이 당시 헬라의 고전적인 비극의 틀에 맞춰서 쓰였다고 봅니다. 물론 헬라 비극의 주제는 숙명에 얽힌 인간의 문제인 반면,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주제인 점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비극의 전형을 그 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1:1-13까지가 구원사적 서언입니다. 제1막은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제2막은 예수의 사역을 중심으로, 메시아 곧 구원자로서의 사역의 흐름이 전개됩니다(3:7-8:26).
제3막은 전환으로서,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한 인식을 가져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가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알아보는 것을 10장의 바디매오 이야기를 통해 극화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소경을 예수가 눈을 뜨게 해서 바디매오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소경을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사건을 통해 베드로가 영적으로 눈을 떠 예수가 이사야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을 극화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환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메시아됨을 알아보는 이것이 마가복음의 전환점으로서, 반전을 줍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인식이 온전한 인식이 아니라 반쪽 인식입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문자적으로 다윗 왕조를 재건할 다윗의 아들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알려고 하는 자들에게 비밀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예수는 자신을 죽음을 통해 종말의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로 제자들이 올바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죽음을 예고합니다. 예수의 메시아적 가르침, 특히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10:45에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계시하십니다.
제4막은 파국 또는 해체의 준비로서, 긴장의 고조입니다(11:1-13:37). 11:1-11에 예수께서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긴장의 매듭이 풀릴 때 파국이 일어나는데, 이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왕으로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 시위,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한 성전 시위 의미의 해석이 이어집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7)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7)<2> 마가복음

2)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 비밀’ 이론(2)
그런데 요한복음은 헬라의 이원론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에 의거하여 이 사실을 좀더 근본적으로 표현합니다. “위”의 본질/진리/빛의 세계에서 이 “아래” 모조품/가짜/암흑의 세상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영원한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아래”의 모조품/가짜/암흑의 세상에서 제대로 인식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에서 오신 예수는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이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그의 계시는 이 “아래”세상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려 하니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아래”에서 하는 자신의 가르침과 행위가 어떻게 “위”의 진리를 ‘표적’해 주는지를 강해하여 줍니다(그래서 요한은 ‘오해’를 하나의 효과적인 문학적 기법을 써서 예수의 긴 해설/강해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 “표적”들을 터득하여 “위”의 진리를 깨닫고, 예수의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자/로고스/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나, 이 “아래” 세상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은 감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예수가 “위”의 본진/진리/빛의 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성육신하여 와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이 “아래” 모조품/가짜/암흑의 세상, 즉 현상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행위를 볼 때 그것들이 ‘표적’하는 “위”의 진리/본질/영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아래”물질만 보는 것입니다.
예수는 성육신한 영원한 로고스로서, 예수가 이 “아래”에서 하는 일은 현상적으로는 물리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위” 진리/영을 표현하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래”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표적’들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10장은 예수의 메시아적 신분에 대한 논쟁을 주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7-8장을 보면, 예수가 당시 유대교적, 메시아적 기대들을 사실상 다 충족시키는 메시아임이 나타납니다. 메시아는 그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서 온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의 한 요소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가 범상의 인간이 아니고 초월에서 온다는 말입니다(범상의 인간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 없고, 오로지 범상의 인간보다 더 큰 초월적 존재여야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
예수가 사실 영원한 로고스로서 “위”에서 오셨으니, 이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의 요소를 충족시키는 분입니다. 그러나 “아래”세상의 암흑에 속하는 유대인들은 “위”에서 오신 메시아 예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7:27), 즉 예수는 우리 중 하나이다. 그래서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오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역설’이 벌어집니다. 그런 ‘오해’와 ‘역설’을 되풀이합니다. 예수는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온다는 유대교적 메시아 기대도 사실은 충족시키는 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가 그 기대에 어긋나니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정합니다(8:40-44).
요한복음은 그런 역설을 통해서 예수가 유대교의 메시아적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분이심을 보여 주고, 9장에서는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로서 세상에 빛(곧 하나님의 계시)을 가져옴(8:12)을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을 통해 ‘표적’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모세의 계시)에 의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 신학자들은 눈을 뜬 소경과는 달리 예수의 메시아 됨을 보지 못합니다. 10장에서는 예수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양떼(하나님의 백성)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선한 목자로서, 즉 십자가에 죽음으로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밝힙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도 예수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그의 메시야적 과업 또는 행위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되풀이하여 “그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짐”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3:14, 8:28, 12:32-34). 그런데 예수가 바로 “위”에서 온 그런 메시아이기 때문에, 아래 세상 곧 현상 세계의 사람들, 또는 유대의 전래적인 메시아론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참 메시아 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메시아됨에는 비밀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3.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설적 변증

1) 십자가의 수난의 신학
그러면 마가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수난을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마가복음 8:27-31이 마가복음의 분수령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계속해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가 나오고, 급기야 그의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기술됩니다. 그리고 16:1-8의 짧은 부활기사가 나옵니다.
이런 내용 구조에 착안하여, 어떤 학자는 ‘마가복음은 긴 서문을 단 예수의 수난사’라고 했습니다. 또 마틴(R. P. Martin) 같은 학자는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한 바울의 복음 선포를 역사적 예수의 실제 사역과 수난과 죽음을 기술하여 뒷받침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가가 원래 바울의 선교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십자가 중심 복음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서, 마가복음은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역사적인 예수의 수난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강조(막 10:45, 14:17-25 등), 이러한 자기 희생의 예수를 따른 제자도에 대한 강조 등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권세와 영광지향적인 제자들에 맞서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 제자도의 요구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래적인 메시아 사상에 젖어 예수를 따르면서도 영광과 권세를 지향하던 제자들의 태도에 맞서, 예수가 자신의 목적은 세상의 죄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너희들 중에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들과 같이 지배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가 아니고 섬기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다”라고 가르칩니다. 10:35-45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이 가르침은 한 마디로 ‘영광의 신학’에 맞서서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로서 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달게 받으며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책이 마가복음이라는 것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6)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6)<2> 마가복음

1)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이론(2)
이 이론이 불트만에 의해서 아주 영향력있는 이론으로 신학사에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학자들이 브레데의 ‘비밀 명령 이론’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마가복음에 실제로 나오는 비밀 명령들을 더 자세히 분석해 보니까,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항상 자신의 정체성을 널리 선포하라고 하기도 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5장에 예수께서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나서 그에게 동네에 가서 자신이 어떻게 치유했나를 널리 퍼뜨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비밀 명령을 내릴 때에도, 제자들에게 비밀 명령을 내릴 때와 악령들에게 내릴 때의 의도가 다릅니다. 악령들에게 내릴 때와 관련해선, 만일 적대 세력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밝혀지면 적대세력에 의해서 압도되고 만다는 고대의 사상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악령들에게 정체성을 밝히는 순간은 영적 전쟁을 하는 순간입니다. 제자들이나 예수의 치유의 덕을 입은 사람들에게 비밀 명령을 내릴 때는 그들이 예수의 메시아됨을 밝히려고 할 때에 당시의(정치적/군사적) 메시아 사상에 의해서 자신에 대해 그릇된 해석을 할까봐 비밀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메시아 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당시의 메시아 칭호들(‘메시아’라, ‘다윗의 씨/아들’, ‘하나님의 아들’ 등)로 신앙고백을 하면 비밀 명령을 내리고, 자신을 알쏭달쏭하게 하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8:27-36에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예수에게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가 “이것은 인간으로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고백을 수용하십니다. 그러나 곧 예수는 ‘메시아’라는 호칭을 버리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그 ‘사람의 아들’”로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죽임당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할 그런 ‘메시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종말의 구원자인 ‘메시아’임에는 틀림없으나, 당시의 유대인들이 염원하던 군사적 정복자/정치적 해방자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지배민족으로 높이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고, 다니엘 7장에서 예언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이사야 42-53장의 예언대로 자신을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바쳐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는 메시아, 즉 다니엘 7:13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죽임 당함이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원래 의도한 메시아적 고백에 반대되는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에 반발합니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정치적 왕 메시아가 되기를 열망하는 베드로의 요구에서 그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후(막 1:9-11) 정치적 왕노릇하는 메시아/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시험했던 사탄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십니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애쓰신 것입니다.

2)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 비밀’ 이론(1)
그러므로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비밀 명령에 대한 이론이 마가가 지어낸 소설적 기법이 아니고 신학적 정당성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브레데의 뜻대로가 아니고 진정한 의미로서의 메시아 비밀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뿐 아니라 사복음서들 전체에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 예수의 한 진면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스스로가 자신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당시 유행하던 메시아 칭호들(‘메시아’라, ‘다윗의 씨/아들’, ‘하나님의 아들’ 등)을 피하면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종말의 구원자임을 나타내십니다. 이런 간접적 자기 계시에 비밀스러운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는 하나님을 독특하게 “아빠”라고 부른다든지,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대권을 주장한다든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임을 간접적으로 은근하게 주장한다든지 하여 자신이 ‘메시아,’ 종말의 구원자임을 나타냅니다. 이 속에 비밀스런 요소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메시아 칭호들로 자신이 불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인 방법들로 자신이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오직 들을 귀 있는 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자신을 불렀는데, 이런 것들이 다 비밀스러움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에 있어서 메시아 비밀이 성립됩니다.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가 기대한 다윗 왕조의 재건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이 진정한 ‘메시아(종말의 구원자)’적 과업이 아니라고 보고, 도리어 죄문제를 해결하여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에 회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메시아(종말의 구원자)’적 과업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당시 유대교에서 통용되던 메시아 칭호들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을 피하고, 도리어 자신의 진정한 메시아 사상을 나타내는 다니엘 7장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쓸 수밖에 없었고, 이사야 42-53장의 주의 종의 노래들에 의거하여 자신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바쳐짐을 자신의 메시아적 과업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유대교의 메시아적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예수의 자기 계시는 비밀스러운 것, 곧 알쏭달쏭한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5)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5)<1> 하나의 복음, 네 개의 복음서들, <2> 마가복음

2. 삶의 정황에 적합한 양식의 복음 선포(2)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그것이 항상 어떤 삶의 정황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설교인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양식 비평의 통찰입니다. 공관복음서들의 하나하나의 단락의 이야기만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한 편의 책으로 만든 마가, 마태, 누가 복음서 전체를 또 그렇게 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것이 편집 비평의 통찰입니다. 마가복음 전체가 어떤 특정한 삶의 정황에 있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필요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특별히 복음의 어떤 요소를 더 강조합니다.
마태는 특별히 율법을 완성해서 의를 이루는 것을 강조하고,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지금 현재의 주로서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키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병든 자를 고쳐나가면서 교회를 성령으로 힘주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해 나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세 복음서들 중에서 왜 누가가 유독 성령과 기도를 강조하였을까?’ 이런 문제는 누가의 독자의 삶의 정황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헬라의 지성인들을 독자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와 삶과 사상의 카테고리, 범주를 활용해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비단 사복음서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바울 서신들과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 등도 마찬가지로, 저자들이 각기 자신들의 독자들의 삶의 정황에 가장 적절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의 삶의 정황과 문제들이 무엇이기에, 히브리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속죄 제사로 단번에 영원히 효과있게 드렸다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가 지금 하늘 성전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대제사장 사역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양식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는가? 그게 독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90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계시록의 중심장인 4장과 5장에서는 하나님이 어좌에 등극해 계시고 네 생물들과 이십 사 장로들이 예배하고, 이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계시고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과 모든 천사들과 온 세상으로부터 예배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사자로서 새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12,000명씩 모은 144,000명의 군대/순교자들과 함께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즉 사탄의 군대와 싸워 결국 승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복음 선포의 양식을 사용합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의 복음을 다양한 독자들의 삶의 정황들에 적합하고도 효율적으로 선포한 책입니다.
<2> 마가 복음 

       1. 마가복음의 수미쌍관

마가복음은 사복음서들 중 제일 먼저 쓰여진 복음서로서, 주후 2세기 초 Papias의 증언에 의하면 로마에서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그의 통역자인 마가가 좀 거친 헬라어로 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마태와 누가가 마가와 또 하나의 공통자료(예수의 말씀 모음집으로서 Q라고 부호함)를 기본 자료로 삼고 각기의 특수 자료(각각 M, L이라 부호함)를 섞어 자기들의 복음서들을 썼다고 봅니다.
마가복음은 1:1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끝부분인 15:39에서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진정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수미쌍관을 통해 마가는 우리에게 자신이 기술한 복음서 전체의 주제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해서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버림받아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이방인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종말에 구원을 가져올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종말의 메시아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분으로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 이것이 마가복음입니다.

 2. 메시아 비밀 이론

 1)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이론(1)
마가복음이 쓰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세기 말 독일 신학자 브레데(William Wrede)가 아주 영향력 있는 메시아 비밀 이론을 발표하였습니다. 브레데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메시아가 아니었던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라는 것입니다.
브레데에 의하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바랐던 메시아적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정치적 자유와 사회정의와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분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유월절 구원을 이룬 것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스스로도 자신을 메시아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비판적인 학자들과 함께 브레데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부활했다는 어떤 이상한 생각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아니었던 역사적 예수와 그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후대교회의 신앙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가가 ‘메시아 비밀 이론’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도입해서 한편의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마가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마가에게는 예수가 원래 메시아였다. 초자연적인 인지 능력을 가진 자들과 함께 예수를 가까이 따랐던 사람들은 다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의 메시아임을 아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해 비밀명령(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하여 메시아이심이 하나님에 의해 밝혀졌으므로, 이제는 함구령이 풀려서 교회가 그것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마가가 ‘소설’을 하나 쓴 것이 마가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마가복음이 ‘복음서’라는 문학 장르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를 뒤따라서 마태, 누가, 요한 등이 그것을 모방하여 복음서들을 저술했다는 것입니다.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4)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4)<1> 하나의 복음, 네 개의 복음서들

1. 하나의 복음의 네 가지 변주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며 그것을 ‘복음’이라 이름합니다(고전 15:3-5, 롬 1:3-4). 사복음서들은 모두 하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하나인데 복음서들은 왜 네 개일까요? 하나의 복음을 네가지로 변주했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의 복음을 네 가지 다양한 관점들로 새롭게 해석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치 음악에서 하나의 멜로디를 네 가지 음으로 변주해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하나의 복음을 네 가지 형태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변주가 왜 필요한가 하면, 복음서들의 저자들인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들의 삶의 정황들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삶의 정황에 따라 다른 필요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 명의 설교자들에게 로마서 12:1-2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를 하라고 하였을 때, 그들이 각각 자신의 청중의 삶의 정황의 필요들과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그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네 개의 서로 다른 설교들을 만들어 내는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마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독자들의 삶의 정황에 합당하게 선포합니다. 마태도, 누가도, 요한도 그렇게 해서, 하나의 복음을 네 개의 변주로 선포한 것입니다.

2. 삶의 정황에 적합한 양식의 복음 선포(1)
이를 좀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중요한 성경비판 방법론인 역사비평적 방법론들을 알고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료(또는 문서)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 문학 비평 등의 방법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중 양식 비평과 편집 비평의 통찰들을 조금 활용할 줄 알면 복음서들을 읽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얻습니다.
복음서들에 나오는 여러 비유들, 이적 설화들, 논쟁설화들 등은 각각 복음을 선포하는 한 편의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설교가 주어진 ‘삶의 정황’을 헤아리는 것이 긴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정황에 있는 어떤 독자들의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어진 복음 설교인가?”라는 관점에서 복음서들의 단락들을 보는 것입니다(한국의 보수 근본주의 목사들과 그들의 신학교들은 이런 비평 방법들을 쓰면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고 기독교 신앙이 손상된다고 극구 반대합니다. 물론 이 방법들을 부정적으로 쓰면 이들의 주장대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들을 긍정적으로 쓰면 성경을 바르고 깊이 이해할 수 있어 꼭 필요한 방법들입니다. 이런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 방법들을 통째로 거부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어서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처럼 성경을 자신들의 교리에 종속시키고 겨우 그 교리들을 뒷받침하는 ‘증거본문’의 원천 정도로나, 아니면 경건이나 도덕적 예화들의 원천 정도로 사용하고,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에 고착되어, 성경이 선포하는 진정한 복음을 터득하여 선포하지 못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하루 속히 신학적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우리가 성전세를 계속 내야 됩니까, 안 내도 됩니까?”라고 예수께 묻습니다. 예수께서 “자녀된 자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베드로 네가 낚시줄을 던져 물고기에게서 나오는 두 닢으로 한 닢은 너를 위해, 나머지 한 닢은 나를 위해 성전세를 내거라”하십니다(17:26-27).
이 이야기가 왜 마태복음에만 있을까요? 예수의 행적, 가르침, 말씀이 많으나 그 중에서 왜 어떤 이야기만 계속 구전되고 설교되고 가르쳐졌을까요? 각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의 독자들의 삶의 정황에 절실한 것들만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해결해  주는 것들만 구전되고 설교된 것입니다.
가령 앞의 이야기를 마가나 누가가 알고 있었는데 빼버리고 마태만 실었다면, 이는 마태가 당시 예수 믿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황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된 주후 70년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직 서 있고 매년 모든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론적인 속죄 제사를 드려서 자신들의 죄가 다 씻어졌다고 믿는 자들이니, 성전에서 짐승 제사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온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성전에서 계속 행해지는 짐승 제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유대인들도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성전세를 내서 성전 제사의 덕을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는 유대 공동체 속에서 교회와 회당이 갈라지기 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정황에 예수의 뜻을 선포한 설교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신학적으로, 원칙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 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에 힘입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학적인 원칙을 주장하면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유대 공동체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과의 평화를 위해서 성전세를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황에서 나타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유용합니다. 그래서 마태가 유대인들 속에 섞여 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