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9일 토요일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7)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7)<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3)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병행(2)
쿰란 공동체에서도 보듯이, 고대의 공동체에서 재산을 모아서 유무상통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상이었습니다. 여러 유대 공동체에서는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진 공동체들이 이를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누가도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두 번이나 연속해서 말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 모범인 바나바의 예를 듭니다. 그러나 누가가 경고하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것을 문자적으로 추종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령의 열광주의에서 유무상통을 시도했으나 그래도 문자적으로 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이상에 접근하려고 애를 쓰기는 해야 합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으로 인해 안디옥 교회가 헌금한 것을 예로 들고, 또 나중에 갈라디아, 아가야 등의 이방 교회에서 헌금을 걷어다가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에게 보내준 것으로 나타납니다. 누가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여유있는 성도가 가난한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첫 번째는 특히 바나바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구원이 완성되지 않고 육신이 살아 있는 한, 거짓으로 헌신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될 수 있으므로 이것을 너무 무리하게 문자적으로 추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정신을 이어가려고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세 번이나 나오는데(9:1-30, 22:3-21, 26:2-23), 이것이 중요하기 떄문입니다. 누가는 중요한 것을 세번씩 반복하는 기법을 씁니다. 베드로의 고넬료 선교를 두 번이나 길게 썼습니다(10:1-48, 11:1-18). 이는 이방 선교의 합법성을 부여하는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비로소 바울의 이방 선교가 가능하게 됩니다. 누가의 관점에서는 이방 선교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준비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 결의를 세 번이나 기록했습니다(15:19-21, 29, 21:25).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율법의 멍에를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음행, 피와 목매인 것 등 세 가지는 삼가라고 합니다. 누가는 이런 병행기법과 이중 삼중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선교의 발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신학적 강조점
        1) 구원사의 신학
누가는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에 이르러 성취되었습니다. 신적 필연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도록 되어 있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하는데, 신약에 101회 나오는 이 단어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만 40회 나옵니다. 또한 구약에 약속된 구원이 현재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늘’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2:11, 4:21, 5:26, 13:32-33, 19:5-9, 19:42, 23:42-43).
누가는 이 구원을 삼단계로 표현하였습니다. 첫째는 율법의 시대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세례 요한으로 끝났습니다(7:34-35). 둘째는 새 시대입니다. 종말의 시대가 예수를 통해서 이미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그 구원을 덕 입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 승천한 예수가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 내재하시며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베풀어 줍니다. 이 시대를 교회의 시대, 곧 성령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구원사의 중심으로 제시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구원사의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앞서 말했듯 이방인 선교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헬라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에서 핍박받아 흩어져 교회를 세우지만 결국 그들의 선교를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이 정당화합니다.
이방인 선교를 바울이 담당하지만 그 문은 베드로가 엽니다. 구원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계로 확대되는 것으로 기술합니다. 심지어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에 종속되어 선교여행 후 항상 그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기술합니다.
         2) 기독론과 구원론
특별히 누가 신학에서 중요한 것이 기독론과 구원론입니다.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의 초점을 바울, 마가, 마가를 이어받은 마태,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에 맞춥니다. 대속의 제사로서의 십자가의 죽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의 속죄를 강조하는 마가와 다릅니다.
가령 마가복음 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를 마태는 20:28에서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2:25-27을 보면 “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자가 섬기는 자라는 사상, 곧 마가복음의 10:45의 전반부만을 이어가고, 그 구절의 후반부의 속죄 제사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요약된 사도들의 설교들, 특히 전반부에 요약된 베드로의 설교들은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을 ‘낮아짐-고난 받음-높아짐’의 구도로 제시합니다. 이 ‘낮아짐과 높아짐’, ‘낮아져 섬김과 하나님의 우편에 주권자로 들어 높여짐’의 구도로 설명하지, 속죄 제사의 카테고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atonement가 약화되어 나타납니다(cf. 눅 22:15-22, 행 20:28). 베드로의 설교에서 제시된 바가 사도행전의 복음 선포의 요약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마가나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높여짐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나라)의 대행자로서 현재 죄용서, 축사, 치병,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높임 등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현재 실현하신 분으로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누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여져 만유의 주로서 현재 군림하며,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그의 교회를 인도하고 힘주시어 오늘 우리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그리고 죄용서, 축사, 치병, 사회정의 회복, 화해,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건설 등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현재 실현해 가시는 분으로 선포합니다.
    3) 성령과 기도에 대한 강조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성령에 대한 강조가 강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특별히 더욱 강조됩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인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 스스로가 성령을 힘입은 자로 제시되며, 그의 사도들과 성령에 힘입어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성령은 예수의 다른 자아 alter ego로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힘주시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꾼 agent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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