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9일 토요일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0)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0)<3> 마태복음

2.    마태복음의 신학적인 강조점들

1) 구약 예언의 성취
마태복음에서는 구약 성취의 주제가 눈에 띕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가 구약을 성취하여 능가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으로 가면 이것이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는 독특하게 성취의 형식을 통해서 구약을 60회 이상 인용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 하나를 기술하고는 매번 “이것은 구약의 어느 책 어느 구절에서 비롯된 어떤 예언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해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구절들을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면서 구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예수의 행적들은 구약 예언들의 완벽한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마태의 이런 구약 사용법을 보면 마태가 상당한 랍비적 해석 훈련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쿰란 공동체의 ‘pesher’방법과 유사합니다. 쿰란 공동체의 문서를 보면 예를 들어 하박국을 강해하면서 하박국의 어느 한 부분을 인용하고는 “이것은 자신들 당대(주전 150년-주후 70년)의 어떤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자기 시대의 사건과 하박국에서의 예언을 1:1로 성립시키는 것이 pesher 방법입니다.
마태가 이와 유사한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술하고는 “이것은 어느 선지자의 예언된 것을 성취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에 구약의 예언을 1:1로 성립시키는 그런 해석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스웨덴 학자로서 하버드 신학대학장이었던 스텐달(K. Stendahl)은 이것이 마태학파의 오랜 성경 묵상과 해석의 결과물인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전도용으로 혹은 변증용으로 쓰기 위해서 이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 하늘 나라
둘째, 하늘 나라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쓰는데 마태는 ‘하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로써 예수가 선포하고 실현한 하늘 나라는 구약에 약속된 종말의 구원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3) 삼위일체론적 기독론
셋째, 높은 기독론입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비해 월등히 높은 기독론을 나타냅니다. 심지어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의 차원에서의 기독론까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데, 마가도 1:1과 15:39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마가복음 11:27-12:12의 논쟁에서와 14:62에서 하나님의 아들됨이 선포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자료들을 더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서도 마가복음 8:28에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주는 메시아”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이라는 말을 비하하는 것이라 할까봐 “주는”이라고 고쳐 쓴 결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당신은 메시아,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됨을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25-27을 보통 ‘환희의 외침’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들과 아버지가 독특하게 상호 앎의 관계에 있음, 아들에게 전권이 위임되어, 아버지의 대행자가 되고 계시자가 됨을 기쁘게 외치십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한 기쁨 가운데 이 진리를 서기관들에겐 감추고 어린 아이같은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을 기뻐하면서 외치신 11:25-27은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앎을 통한 일치, 아들이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아 대행함,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계시자임’이런 것이 아주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1:23과 28:20이 inclusio를 이룹니다. 1:23에서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임,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의 모습임이 명시되고, 28:20에서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한다”는 약속을 합니다. 아들이 함께하는 것이 아버지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시고, 주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합니다.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의 차원에서 기독론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마태는 예수가 단순히 제2의 모세나 제2의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타난 모습임을 제시합니다. 모형론을 통해서 예수가 모세와 같은 구원자이되 출애굽과 시내산 계시를 능가하는-출애굽의 이야기처럼 그의 제자들을 안전하게 강을 건너게 하는-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아가 모세 정도가 아니고 모세가 모형론적으로 이루었던 구원을 종말에 완성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제시합니다. 제2의 모세 이야기로, 예수의 탄생에서 애굽으로의 대피와 해방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예수가 제2의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월적인 왕국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이런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형론을 쓰면서 하나님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됨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마태가 마가보다 이를 더 강조합니다.

4) 제자도와 의(義) (1)
마태복음에서 굉장히 강조되는 것 중 한 가지가 제자도와 의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예수가 모은 사람들,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은 의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나타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 공동체에서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나타내야 합니다(5:20).
‘의’는 근본적으로는 관계론적인 개념으로서,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다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같은 모든 관계는 관계 속에 있는 파트너들에게 의무를 지우는데, 그 의무를 다함이 ‘의’입니다. 예컨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부모에게는 자식을 잘 양육할 의무가 나오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가 나옵니다. 이때 부모가 자기들 쪽의 의무를 다함이 ‘의’이고,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는 자식이 ‘의로운’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 인간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의무를 스스로 지신고로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의’입니다. “이웃 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차원에서 서로 사랑하는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의’입니다. 관계 속에 있는 파트너에 대해 의무를 다하면 그 관계는 원만한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반대로, 파트너 중 어느 한쪽이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의’인데 그것은 갈등을 가져오게 됩니다. 고로 의인들의 공동체는 사랑과 화평의 공동체이고, 불의한 자들(죄인들)의 공동체는 증오와 갈등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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