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8)<2> 마가복음
2) 십자가의 영광의 신학
그런데 1990년대에 건드리(H. R. Gundry)라는 학자가 이 이론에 대해 조정을 시도했습니다. 마가복음을 자세히 보니까 ‘십자가 신학’일변도가 아니고 거기에 ‘영광의 신학’적인 자료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를 단순히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분으로만 그린 게 아니고, 막강한 능력과 지혜의 승리자로,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분으로 그린 면도 있습니다.
심지어 8:27-31 이후에도 예수의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계시(9장)와 메시아적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11:1-11)이 그려지기도 하고, 11:27부터 12:44까지에는 논생설화들이 모여 있는데, 예수가 권세있는 가르침으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예수가 주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재판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밝힙니다.
심지어 8:27-31 이후에도 예수의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계시(9장)와 메시아적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11:1-11)이 그려지기도 하고, 11:27부터 12:44까지에는 논생설화들이 모여 있는데, 예수가 권세있는 가르침으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예수가 주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재판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밝힙니다.
십자가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직접 지고 갔다고 하지만, 마가복음에서는 구레네의 시몬이 대신 지고 갑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도 강한 자의 모습으로 마가는 그립니다. 예수의 위엄있는 부르짖음에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6시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9시에 죽은 것으로 그려 오랫동안 처절히 고난받으며 죽어갔다는 인상을 피하고 고난의 기간이 짧았던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강조하는데, 이것도 예수의 영광성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방인을 대표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자료들을 건드리는 ‘영광의 신학’적 자료로 봅니다.
왜 마가는 전체적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이와 같은 ‘영광의 신학’ 자료도 함께 담고 있는 것일까요? 건드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변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유대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음의 표징으로 여겨졌고, 헬라인들에게는 연약함과 패배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갈 3:13-14, 신 21:23).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의 제사로서 구원의 사건이었음을 강조함과 함께, 예수가 연약하고 패배한 자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연약하고 패배한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아들로서, 당당한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 사건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신학’을 강조한다고 보는데,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메시아라고만 한다면 연약하고 패배한 것이 어떻게 구원이 되겠는가?’라고 하는 문제에 당연히 봉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로마 세계의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히 죽으신 것을 강조하여, 로마 세계에서 멸시당하기 쉬운 ‘십자가에 달림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고 하는 것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4. 마가복음의 구조(1)
살제로 마가가 어떤 문학적 구조로 그의 복음서를 구성하였는가에 대해 다양한 분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한다면, 헹겔(M. Hengel) 교수는 마가복음이 당시 헬라의 고전적인 비극의 틀에 맞춰서 쓰였다고 봅니다. 물론 헬라 비극의 주제는 숙명에 얽힌 인간의 문제인 반면,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주제인 점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비극의 전형을 그 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1:1-13까지가 구원사적 서언입니다. 제1막은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제2막은 예수의 사역을 중심으로, 메시아 곧 구원자로서의 사역의 흐름이 전개됩니다(3:7-8:26).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신학’을 강조한다고 보는데,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메시아라고만 한다면 연약하고 패배한 것이 어떻게 구원이 되겠는가?’라고 하는 문제에 당연히 봉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로마 세계의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히 죽으신 것을 강조하여, 로마 세계에서 멸시당하기 쉬운 ‘십자가에 달림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고 하는 것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4. 마가복음의 구조(1)
살제로 마가가 어떤 문학적 구조로 그의 복음서를 구성하였는가에 대해 다양한 분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한다면, 헹겔(M. Hengel) 교수는 마가복음이 당시 헬라의 고전적인 비극의 틀에 맞춰서 쓰였다고 봅니다. 물론 헬라 비극의 주제는 숙명에 얽힌 인간의 문제인 반면,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주제인 점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비극의 전형을 그 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1:1-13까지가 구원사적 서언입니다. 제1막은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제2막은 예수의 사역을 중심으로, 메시아 곧 구원자로서의 사역의 흐름이 전개됩니다(3:7-8:26).
제3막은 전환으로서,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한 인식을 가져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가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알아보는 것을 10장의 바디매오 이야기를 통해 극화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소경을 예수가 눈을 뜨게 해서 바디매오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소경을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사건을 통해 베드로가 영적으로 눈을 떠 예수가 이사야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을 극화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환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메시아됨을 알아보는 이것이 마가복음의 전환점으로서, 반전을 줍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인식이 온전한 인식이 아니라 반쪽 인식입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문자적으로 다윗 왕조를 재건할 다윗의 아들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알려고 하는 자들에게 비밀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예수는 자신을 죽음을 통해 종말의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로 제자들이 올바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죽음을 예고합니다. 예수의 메시아적 가르침, 특히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10:45에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계시하십니다.
제4막은 파국 또는 해체의 준비로서, 긴장의 고조입니다(11:1-13:37). 11:1-11에 예수께서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긴장의 매듭이 풀릴 때 파국이 일어나는데, 이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왕으로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 시위,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한 성전 시위 의미의 해석이 이어집니다.
제4막은 파국 또는 해체의 준비로서, 긴장의 고조입니다(11:1-13:37). 11:1-11에 예수께서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긴장의 매듭이 풀릴 때 파국이 일어나는데, 이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왕으로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 시위,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한 성전 시위 의미의 해석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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