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2)<3> 마태복음
4) 제자도와 의(義) (3)
자신에게 죄지은 자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있으면 이것이 죄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내 오른뺨을 친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죄만 빼고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무효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해도 용서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그 용서가 이웃에게 표현이 되어야 그 죄가 용서되고 죄가 힘을 잃은 것이 확인되는 것이지, 입으로는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마음 속에 복수심을 갖고 있으면 그 용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겠나이다”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를 5장에서 강조합니다. “과거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에 입각한 복수의 원칙이었는데, 이제 내가 가르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도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벗어주라”(5:38) 하시며 철저하게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되 그 이웃의 원수까지 포함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산상수훈 5장에서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6장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이 나타납니다. 산상수훈에 있는 주기도문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을 말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겠나이다”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를 5장에서 강조합니다. “과거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에 입각한 복수의 원칙이었는데, 이제 내가 가르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도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벗어주라”(5:38) 하시며 철저하게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되 그 이웃의 원수까지 포함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산상수훈 5장에서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6장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이 나타납니다. 산상수훈에 있는 주기도문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을 말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율법의 정신입니다. 이것을 지키는 것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5장에 반대어법이 있습니다. 21절부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등 옛사람에게 선포된 계명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당시 가장 의를 이루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만족하는데, 예수는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환기시키며 강조하십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모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남의 목을 치지 않는 한 살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형제를 증오하고, 무시하고, 얕잡아 보고 하는 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살인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와 ‘정신’부터 이야기하십니다.
문자적 해석에 의하면 자기 배우자 아닌 사람과 동침하지 않으면 간음이 아니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의 상태부터 간음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며 “어떻게 하면 실수가 없을까?” 노력합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율법을 실수 없이 지킬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관습 율법에 보면 “~까지는 되고 ~까지는 안 된다”는 식의 규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잡다한 인간의 유전과 전통을 이렇게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특성입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모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남의 목을 치지 않는 한 살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형제를 증오하고, 무시하고, 얕잡아 보고 하는 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살인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와 ‘정신’부터 이야기하십니다.
문자적 해석에 의하면 자기 배우자 아닌 사람과 동침하지 않으면 간음이 아니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의 상태부터 간음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며 “어떻게 하면 실수가 없을까?” 노력합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율법을 실수 없이 지킬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관습 율법에 보면 “~까지는 되고 ~까지는 안 된다”는 식의 규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잡다한 인간의 유전과 전통을 이렇게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특성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은 다른 말로 하면 이웃 사랑입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온 것입니다. ‘완성한다’는 의미는 두 가지로, 하나는 율법의 예언과 약속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율법의 문자가 가리키는 정신을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예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새 백성의 공동체
마태복음이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 교회론입니다. 유독 사복음서들 중 마태만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씁니다. 베드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예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건설한다고 약속하십니다(16:13-20).
예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을 새 이스라엘로 보고 그들을 대표하는 ‘기둥’들로서 옛 이스라엘의 기둥들인 12지파의 족장들에 상응하여 12명의 제자들을 세웠음은 사복음서들이 공히 증거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유독 마태복음만 18장에 이 새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 내에서의 생활규범을 서로 사랑과 섬김의 대원칙을 넘어 더 구체적으로 명문화하여 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로서 제자도의 의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 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표방해야 합니다(마 5:20). 뿐만 아니라 23장에 바리새인들에 대해 아주 심한 경고를 하는데, 이는 유대 공동체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리새인들에 대항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도 주면서 한편으로 교회도 점점 바리새적, 유다주의적 형태를 띠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내린 것입니다.
산상수훈 제일 끝에 가서 7:15-23에 ‘charismatics’(은사적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의의 열매 없이 성령의 열광주의에 빠져서 주의 이름만 헛되이 부르며 선지자 노릇하고 이적이나 좇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나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한편으로 바리새주의적인 형식적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순종하지 못하는 영적 열광주의를 교정하는 것입니다(한편 바리새주의적인 형식적 율법주의에, 다른 한편 미신적 영적 열광주의에 빠져 있는 현재의 한국교회에 절실한 경고들입니다.
6) 신학적 긴장
5) 하나님의 새 백성의 공동체
마태복음이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 교회론입니다. 유독 사복음서들 중 마태만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씁니다. 베드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예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건설한다고 약속하십니다(16:13-20).
예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을 새 이스라엘로 보고 그들을 대표하는 ‘기둥’들로서 옛 이스라엘의 기둥들인 12지파의 족장들에 상응하여 12명의 제자들을 세웠음은 사복음서들이 공히 증거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유독 마태복음만 18장에 이 새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 내에서의 생활규범을 서로 사랑과 섬김의 대원칙을 넘어 더 구체적으로 명문화하여 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로서 제자도의 의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 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표방해야 합니다(마 5:20). 뿐만 아니라 23장에 바리새인들에 대해 아주 심한 경고를 하는데, 이는 유대 공동체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리새인들에 대항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도 주면서 한편으로 교회도 점점 바리새적, 유다주의적 형태를 띠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내린 것입니다.
산상수훈 제일 끝에 가서 7:15-23에 ‘charismatics’(은사적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의의 열매 없이 성령의 열광주의에 빠져서 주의 이름만 헛되이 부르며 선지자 노릇하고 이적이나 좇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나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한편으로 바리새주의적인 형식적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순종하지 못하는 영적 열광주의를 교정하는 것입니다(한편 바리새주의적인 형식적 율법주의에, 다른 한편 미신적 영적 열광주의에 빠져 있는 현재의 한국교회에 절실한 경고들입니다.
6) 신학적 긴장
(1) 특수주의와 보편주의(1)
또 하나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신학적 긴장입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특수주의와 보편주의간의 긴장입니다. 10장과 15장이 대표적인 특수주의로, 예수가 이스라엘에게만 보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반면 마태복음의 보편주의는 28:16-20에 강하게 나타나는데,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제자로 삼아 예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28장에 앞서 보편주의가 2장부터 나타납니다. 2장의 동방박사 이야기부터 그렇습니다.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세계의 열방이 그 영광의 빛을 보고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예물을 가지고 시온에 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선지자들의 중요한 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하나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신학적 긴장입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특수주의와 보편주의간의 긴장입니다. 10장과 15장이 대표적인 특수주의로, 예수가 이스라엘에게만 보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반면 마태복음의 보편주의는 28:16-20에 강하게 나타나는데,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제자로 삼아 예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28장에 앞서 보편주의가 2장부터 나타납니다. 2장의 동방박사 이야기부터 그렇습니다.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세계의 열방이 그 영광의 빛을 보고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예물을 가지고 시온에 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선지자들의 중요한 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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