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5)<3> 마태 복음
3. 상급의 문제(2)
지금 많은 한국 목사들이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하늘 나라에서 그 위에 공로에 따라 다른 상급을 받는다”는 공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임을 드러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은혜로만 sola gratia,” 그리고 “믿음으로만 sola fide”의 종교개혁 신학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어느새 중세 가톨릭 교회의 공로신학으로 퇴행해 버린 것입니다.
교회 봉사, 헌금,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많은 목사들이 이 공로/상급 신학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교회의 영성은 과격히 왜곡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태나 바울의 “상급”의 언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강조하며,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눅 19:12-27)를 누가복음 판의 문자적인 해석에 따라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리는 등 하늘 나라에서 차등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상급”의 언어를 가장 많이 쓰는 마태는 이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를 받아 장사를 신실히 한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받아 장사를 신실히 한 사람에게 똑같은 “상급”을 내리는 것으로 쓰고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23). 이 “상급”(주인되신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함)은 같은 구원이지 거기에 차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상급”이라는 언어를 쓸 때는 마태복음에 의존하다가, 그것이 차등의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누가의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린다는 언어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상급”이라는 언어를 많이 쓰는 마태가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린다는 언어를 쓰지 않는 이유를 헤아리지 않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마태의 “상급” 언어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존중하는 태도입니까? 성경을 균형있게, 그리고 문자를 넘어 그 영(정신, 의도)을 드러내는 깊은 해석을 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9:16-22 pars에는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관원은 예수께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영생(구원)을 선행의 공로에 대한 상급으로 얻는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대교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법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의도한 답은 계명들을 지킨 “공로”를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영생(곧 하나님 나라의 생명, 신적 생명)을 주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하나님/하늘 나라”라는 개념과 더불어 “오다,” “(하나님께서) 주신다,” “들어가다,” 그리고 “(우리는) 받다” 등의 동사들을 쓰고 “(인간들이 지혜와 선행을 모아, 또는 당시 열심당식으로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이루다” 등의 동사를 완전히 배격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것임을 강조한 예수께서 이 부자 관원에게 스스로의 계명들 지킴의 “공로”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영생)을 상급으로 얻으라고 가르쳤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자관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로 네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너는 영생, 곧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의지하고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지금까지의 그릇된 생각에서 형식적인 계명지킴(계명을 지켜 영생을 “상급”으로 받겠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즉 실제로 맘몬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표시로 네 재산을 다 처분하라. 그리고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을 권면하기 위해 율법을(바리새인들보다 더 완벽히) 지킴과 그에 대한 “상급”을 강조하는데, 그는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나 20:1-16의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 등을 통해서 이런 언어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원의 은혜성을 훼손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살도록 권면하기 위하여 쓰는 언어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 헌금,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많은 목사들이 이 공로/상급 신학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교회의 영성은 과격히 왜곡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태나 바울의 “상급”의 언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강조하며,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눅 19:12-27)를 누가복음 판의 문자적인 해석에 따라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리는 등 하늘 나라에서 차등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상급”의 언어를 가장 많이 쓰는 마태는 이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를 받아 장사를 신실히 한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받아 장사를 신실히 한 사람에게 똑같은 “상급”을 내리는 것으로 쓰고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23). 이 “상급”(주인되신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함)은 같은 구원이지 거기에 차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상급”이라는 언어를 쓸 때는 마태복음에 의존하다가, 그것이 차등의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누가의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린다는 언어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상급”이라는 언어를 많이 쓰는 마태가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린다는 언어를 쓰지 않는 이유를 헤아리지 않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마태의 “상급” 언어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존중하는 태도입니까? 성경을 균형있게, 그리고 문자를 넘어 그 영(정신, 의도)을 드러내는 깊은 해석을 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9:16-22 pars에는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관원은 예수께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영생(구원)을 선행의 공로에 대한 상급으로 얻는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대교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법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의도한 답은 계명들을 지킨 “공로”를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영생(곧 하나님 나라의 생명, 신적 생명)을 주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하나님/하늘 나라”라는 개념과 더불어 “오다,” “(하나님께서) 주신다,” “들어가다,” 그리고 “(우리는) 받다” 등의 동사들을 쓰고 “(인간들이 지혜와 선행을 모아, 또는 당시 열심당식으로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이루다” 등의 동사를 완전히 배격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것임을 강조한 예수께서 이 부자 관원에게 스스로의 계명들 지킴의 “공로”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영생)을 상급으로 얻으라고 가르쳤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자관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로 네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너는 영생, 곧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의지하고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지금까지의 그릇된 생각에서 형식적인 계명지킴(계명을 지켜 영생을 “상급”으로 받겠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즉 실제로 맘몬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표시로 네 재산을 다 처분하라. 그리고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을 권면하기 위해 율법을(바리새인들보다 더 완벽히) 지킴과 그에 대한 “상급”을 강조하는데, 그는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나 20:1-16의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 등을 통해서 이런 언어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원의 은혜성을 훼손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살도록 권면하기 위하여 쓰는 언어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4. 마태복음의 실용성
마태복음은 유대 그리스도인의 교육용으로, 전도 또는 변증용으로 사용될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예수가 구약 예언의 성취요, 모세 율법의 완성이시며, 교회가 구약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종말론적 이스라엘이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교회 내의 잘못된 미신적이고 열광주의적인 영성과 관행에 대한 교정, 의의 열매에 대한 강조, 바리새적인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대한 경고 등, 실제적인 의의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유용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로 진입하여 구원을 받음이 전적으로 그리스도 사건의 은혜에 의함임을 강조하는 바울 신학과 균형을 이루어 하나님의 통치를 구체적인 삶에서 받음으로 종말에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마태복음의 가르침을 가르치면,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로 진입하여 구원을 받음이 전적으로 그리스도 사건의 은혜에 의함임을 강조하는 바울 신학과 균형을 이루어 하나님의 통치를 구체적인 삶에서 받음으로 종말에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마태복음의 가르침을 가르치면,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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