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7)<2> 마가복음
2)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 비밀’ 이론(2)
그런데 요한복음은 헬라의 이원론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에 의거하여 이 사실을 좀더 근본적으로 표현합니다. “위”의 본질/진리/빛의 세계에서 이 “아래” 모조품/가짜/암흑의 세상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영원한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아래”의 모조품/가짜/암흑의 세상에서 제대로 인식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에서 오신 예수는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이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그의 계시는 이 “아래”세상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려 하니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아래”에서 하는 자신의 가르침과 행위가 어떻게 “위”의 진리를 ‘표적’해 주는지를 강해하여 줍니다(그래서 요한은 ‘오해’를 하나의 효과적인 문학적 기법을 써서 예수의 긴 해설/강해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 “표적”들을 터득하여 “위”의 진리를 깨닫고, 예수의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자/로고스/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나, 이 “아래” 세상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은 감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아래”에서 하는 자신의 가르침과 행위가 어떻게 “위”의 진리를 ‘표적’해 주는지를 강해하여 줍니다(그래서 요한은 ‘오해’를 하나의 효과적인 문학적 기법을 써서 예수의 긴 해설/강해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 “표적”들을 터득하여 “위”의 진리를 깨닫고, 예수의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자/로고스/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나, 이 “아래” 세상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은 감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예수가 “위”의 본진/진리/빛의 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성육신하여 와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이 “아래” 모조품/가짜/암흑의 세상, 즉 현상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행위를 볼 때 그것들이 ‘표적’하는 “위”의 진리/본질/영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아래”물질만 보는 것입니다.
예수는 성육신한 영원한 로고스로서, 예수가 이 “아래”에서 하는 일은 현상적으로는 물리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위” 진리/영을 표현하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래”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표적’들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10장은 예수의 메시아적 신분에 대한 논쟁을 주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7-8장을 보면, 예수가 당시 유대교적, 메시아적 기대들을 사실상 다 충족시키는 메시아임이 나타납니다. 메시아는 그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서 온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의 한 요소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가 범상의 인간이 아니고 초월에서 온다는 말입니다(범상의 인간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 없고, 오로지 범상의 인간보다 더 큰 초월적 존재여야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
예수는 성육신한 영원한 로고스로서, 예수가 이 “아래”에서 하는 일은 현상적으로는 물리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위” 진리/영을 표현하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래”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표적’들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10장은 예수의 메시아적 신분에 대한 논쟁을 주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7-8장을 보면, 예수가 당시 유대교적, 메시아적 기대들을 사실상 다 충족시키는 메시아임이 나타납니다. 메시아는 그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서 온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의 한 요소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가 범상의 인간이 아니고 초월에서 온다는 말입니다(범상의 인간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 없고, 오로지 범상의 인간보다 더 큰 초월적 존재여야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
예수가 사실 영원한 로고스로서 “위”에서 오셨으니, 이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의 요소를 충족시키는 분입니다. 그러나 “아래”세상의 암흑에 속하는 유대인들은 “위”에서 오신 메시아 예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7:27), 즉 예수는 우리 중 하나이다. 그래서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오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역설’이 벌어집니다. 그런 ‘오해’와 ‘역설’을 되풀이합니다. 예수는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온다는 유대교적 메시아 기대도 사실은 충족시키는 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가 그 기대에 어긋나니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정합니다(8:40-44).
요한복음은 그런 역설을 통해서 예수가 유대교의 메시아적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분이심을 보여 주고, 9장에서는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로서 세상에 빛(곧 하나님의 계시)을 가져옴(8:12)을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을 통해 ‘표적’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모세의 계시)에 의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 신학자들은 눈을 뜬 소경과는 달리 예수의 메시아 됨을 보지 못합니다. 10장에서는 예수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양떼(하나님의 백성)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선한 목자로서, 즉 십자가에 죽음으로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밝힙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역설을 통해서 예수가 유대교의 메시아적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분이심을 보여 주고, 9장에서는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로서 세상에 빛(곧 하나님의 계시)을 가져옴(8:12)을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을 통해 ‘표적’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모세의 계시)에 의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 신학자들은 눈을 뜬 소경과는 달리 예수의 메시아 됨을 보지 못합니다. 10장에서는 예수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양떼(하나님의 백성)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선한 목자로서, 즉 십자가에 죽음으로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밝힙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도 예수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그의 메시야적 과업 또는 행위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되풀이하여 “그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짐”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3:14, 8:28, 12:32-34). 그런데 예수가 바로 “위”에서 온 그런 메시아이기 때문에, 아래 세상 곧 현상 세계의 사람들, 또는 유대의 전래적인 메시아론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참 메시아 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메시아됨에는 비밀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3.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설적 변증
1) 십자가의 수난의 신학
3.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설적 변증
1) 십자가의 수난의 신학
그러면 마가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수난을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마가복음 8:27-31이 마가복음의 분수령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계속해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가 나오고, 급기야 그의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기술됩니다. 그리고 16:1-8의 짧은 부활기사가 나옵니다.
이런 내용 구조에 착안하여, 어떤 학자는 ‘마가복음은 긴 서문을 단 예수의 수난사’라고 했습니다. 또 마틴(R. P. Martin) 같은 학자는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한 바울의 복음 선포를 역사적 예수의 실제 사역과 수난과 죽음을 기술하여 뒷받침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가가 원래 바울의 선교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십자가 중심 복음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구조에 착안하여, 어떤 학자는 ‘마가복음은 긴 서문을 단 예수의 수난사’라고 했습니다. 또 마틴(R. P. Martin) 같은 학자는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한 바울의 복음 선포를 역사적 예수의 실제 사역과 수난과 죽음을 기술하여 뒷받침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가가 원래 바울의 선교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십자가 중심 복음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서, 마가복음은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역사적인 예수의 수난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강조(막 10:45, 14:17-25 등), 이러한 자기 희생의 예수를 따른 제자도에 대한 강조 등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권세와 영광지향적인 제자들에 맞서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 제자도의 요구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래적인 메시아 사상에 젖어 예수를 따르면서도 영광과 권세를 지향하던 제자들의 태도에 맞서, 예수가 자신의 목적은 세상의 죄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너희들 중에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들과 같이 지배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가 아니고 섬기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다”라고 가르칩니다. 10:35-45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이 가르침은 한 마디로 ‘영광의 신학’에 맞서서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로서 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달게 받으며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책이 마가복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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