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일 금요일

공동체와 기독교 세계관 (개인주의? 노노!)

공동체와 기독교 세계관 (개인주의? 노노!)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VIEW 학장)
 
윌킨스와 샌포드는 그들의 책 은밀한 세계관에서 우리 문화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어 참된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심지어 왜곡시키는 감추어진 세계관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의 은밀한, 그러나 그만큼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한다. 그런 잘못된 세계관들은 교회 뒷문으로 스며들어 기독교 사상과 뒤섞이고 때로는 기독교적인 견해로 행세하기도 한다” (윌킨스&샌포드, 13). 이렇게 우리를 [은밀히] 조종하는 8가지 이야기중에 그들이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는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어 더욱 위험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각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매우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더 이상 기독교 진리가 되지 못하게 한다” (윌킨스&샌포드, 33).
 
이렇게 은밀하게 스며든 개인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고민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영성을 충만케 하려고해도 성경이 얼마나 공동체적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주기도에서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간구가 끝난 후 이어지는 일상의 은혜를 구하는 세 가지 간구를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를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표현은 우리. 그러나 개인주의에 물든 우리는 이 표현의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부분을 생각해 보자.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개인에게 정말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개개인에게 정말 필요한가? 여기서 우리는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달라고 간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기도가 절실해 지는 것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부터다. 나는 먹을 밥이 있지만, “우리중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 기도는 정말 중요하다.
 

공동체는 신앙의 본질이다
 
성경이 개인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의 몇몇 진술에 근거한 정도가 아니다. 공동체 영성 그리고 그것의 확장인 사회 영성은 복음의 이차적 관심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핵심이다. 복음은 개인 영혼이 멸망된 세상에서 탈출하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개인주의 사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복음은 온 피조세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공동체적, 사회적 영성으로 충만한 소식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이해가 그 토대와 내용이 된다. 이 세 가지 주제 모두에 담긴 공통 주제 중 하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 이해에 있어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다. 삼위일체는 양태론이나 삼신론으로 흐르게 만드는 어떻게 셋이 하나와 같을 수 있냐는 수리적인 수수께끼가 아니라 독립된 세 인격이 한 신성 안에서 상호 침투”(perichoresis)의 교제를 나누며 존재한다는 매우 실존적인 고백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면서 형성된 기독교 유일신론의 새로운 측면이다(라이트, 152-194). 기독교와 유대교가 경전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분명 다른 것은 하나님의 관계성 또는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다. 이슬람의 강력한 유일신 이해는 다양성 속에 일치를 함의하는 신학을 구성할 수 없다. 삼위일체 신론이 함의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성은 기독교 신론의 정수다 (Grenz, 71-76).
 
인간은 어떠한가? 창세기 1-2장이 보여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 또한 공동체성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본질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는 진술에서 확인 된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족족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했던 반면 (둘째 날은 흥미로운 예외다), 2장에는 하나님이 만드셨음에도 좋지 않았던 것이 언급된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에 두시면 주셨던 동산을 경작하고 보살피는 사명은 혼자 이룰 수 없었던 공동체적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좋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면 돕는 짝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사람의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공동체성은 인간의 매우 중요한 본질이다(Provan, 4장 참고).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삶으로 드러나는 장이다. 그런데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는 그의 책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가치들을 지키고 펼치는 데 교회가 소위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실패했다고 진단하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윌슨하트그로브, 22)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 사람 이해 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윌슨하트그로브는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좀 더 포괄적으로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인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전쟁과 낙태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윌슨하트그로브, 59-79, 205-214). 요컨대, 공동체와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강조야말로 참된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본질이다.
 

참고문헌

Grenz, Stanley. Theology for the People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2000.
Provan, Iain. Seriously Dangerous Religion.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14.
이재영. 오두막. 서울: IVP, 2016.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 서울: 비아, 2015.
톰 라이트. 톰 라이트의 바울.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2012.
스티브 윌킨스, 마크 샌드포드. 은밀한 세계관. 서울: IVP, 2013.
 
* 묵상과설교 201611-12월호에 실린 글을 확대 수정한 것입니다.
 
* 사진은 캐나다 퀘벡시티 한 건물의 벽화입니다.

역사로 본 성시화운동 1.성시(聖市)와 성시화운동이란 무엇인가?

<역사로 본 성시화운동 성시(聖市)와 성시화운동이란 무엇인가?> 김중락

 
영어의 ‘city’란 단어보다 더 번역하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도시’, ‘국가’, ‘’, ‘도성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5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저서 De civitate Dei(The City of God)를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국()으로 번역하는 것도 이 같은 혼란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은 우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서양의 고대도시 개념 때문이다.
 
고대 서양에서 도시와 국가의 구분은 모호하였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권국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테네나 코린토스 그리고 스파르타 같은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그 자체로 폴리스’(Polis)라 불리는 도시국가였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로마도 조그만 도시국가 로마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서양인들은 ‘city’라는 용어에 도시와 국가라는 이중적 개념을 부여하고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중세 도시들은 방어를 위해 도시를 두르는 성곽(Wall)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양에서는 주로 도시 그 자체를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물론 동양에서도 고대에는 이 국가를 의미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시는 거룩한 도시인 동시에 거룩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역대의 미국 정치인들이 선거때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들은 동네(도시)를 미국이라는 국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와 국가는 역사적으로 치환 가능한 용어였다.
 
오늘날은 도시가 하나의 국가인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에 한국의 각도시마다 기독교인들이 성시화운동 조직을 만들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성시는 국가보다는 도시를 가리키는 개념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운동도 전국적이고 결국은 성스러운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시화운동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말 그대로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와 국가를 성스럽게 만들자는 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협력해야 될 일이 아니던가? 아니면 이 운동이 방향을 바꾸어야 할까? 그 답을 역사에서 먼저 찾아보자.
 
역사는 기독교회가 탄생한 이후로 수많은 성시화운동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중세의 십자군이 세웠던 예루살렘왕국도 성시를 이루고잔 한 노력이다. 그리고 중세의 수많은 도시들도 나름대로의 성시를 지향하였다. 종교개혁시 칼뱅도 제네바를 성시로 만들고자 하였고,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지도자들과 잉글랜드 청교도 지도자였던 크롬웰도 각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성스러운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종교적 분파들의 성시화 시도가 있었다.
 
이들 성시화 운동은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면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역사적 성시화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보여진다. 먼저, 성시화운동이 기독교권익옹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장은 기독교를 세력화하고 이 세력으로 세속정부에 압력을 넣어 기독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손해보아야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 운동에서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진리로 나타나고, 이익집단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복음의 문은 저절로 닫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운동에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는 말씀이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까지의 많은 성시화 운동이 타종교인들의 개종을 강제화 하거나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이나 신앙고백이 다른 이들을 살해하고 박해한 적이 적지 않다.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이나 에스파냐의 종교재판등이 대표적이다. 양심을 강제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수백년 동안 기독교 지역이었던 북 아프리카에 7세기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기독교가 뿌리조차 사라진 것은 강제화된 신앙이 얼마나 헛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성시화 운동이 성공하려면 역사적 성시화운동의 한계를 먼저 살피고 이들로부터 참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현 성시화운동은 이전의 전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성시는 피켓으로 무장하고 무리지어 시가행진하거나, 수만명 모여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앞으로 연재를 통해 역사적 성시화 운동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 한계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이 연재가 현 한국 성시화운동의 방향전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2011년 대구 성시화운동 특강을 수정보완 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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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락 페이스북에서 퍼온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