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7일 토요일

7월 찬양콘티 두번째

찬양 예배 / 금요철야기도회 콘티 
 
1.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2. 찬양하세
 
3.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4.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5.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 기 도 --
 
6.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7. 형제의 모습속에 보이는
 
8. 먼저 그 나라와
 
9. 내 주의 나라와 주계신 성전과
 
10. 하늘 가는 밝은 길이
 
11.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금요철야 기도회
 
1.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2. 약할때 강함되시네
 
3. 이 몸의 소망 무엔가
 
4. 오직 믿음으로 (세상 흔들리고)
 
5. 우릴 사용하소서
 
 
 
 
 
주일오후예배 찬양
 
1. 살아계신 주 (주하나님 독생자 예수)
 
2.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3. 나의 안에 거하라
 
4. 괴로울때 주님의 얼굴보라
 
 

 
주일예배 찬양
 
1. 슬픈 마음있는 사람 91
 
2. 먹보다도 더 검은 423
 
3. 하나님의 진리등대 510
 
4. 내 주를 가까이 338
 
 
 
 
주일오후예배 찬양콘티
 
1.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272 A
 
2.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528 A
 
3.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도 545 A
 
4. 너 성결키위해 420 F
 
 
 
 
금요기도회 콘티
 
1. 내 평생 사는 동안
 
2.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찬송가)
 
3.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4. 겸손히 주를 섬길때 (찬송가)
 
5.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송가)
 
  
 
 
 

7월 찬양콘티

주일예배 찬양
 
1. 죄짐맡은 우리 구주
  
2. 이 몸의 소망 무엔가
  
3.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4.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주일오후예배 찬양
 
 1.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2.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3. 마음이 상한 자를
  
4.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5.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찬송가)
 
 
 
 
 
수요기도회 찬양 
 
1. 우리 모일 때
 
 2.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257 
 
3. 목마른 자들아 526
  
4.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251
 
 
 
 
 
주일예배 찬양
  
1. 영광을 받으실 만유의 주여 
 
2. 갈릴리 마을 그 숲속에서
  
3. 때로는 너의 앞에
  
4. 세상 부귀 안일함과
 
 
 
 
 
주일오후예배 찬양
 
 1.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284
 
2. 구원으로 인도하는 521
  
3.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531
  
4. 주께로 한 걸음씩 532
 
 
 
 
 
금요기도회 찬양
  
1. 선하신 목자
  
2. 주의 자비가 내려와 (자비, 사랑, 은혜, 성령)
  
3.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4. 우리를 사용하소서 (새찬양)
 
 
 
  
 
주일오후예배 찬양
 
 1. 세상때문에
 
 2.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3. 내일일은 난 몰라요
 
 4.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2019년 7월 26일 금요일

6월 찬양콘티 두번쨰

금요철야 기도회 
 
1.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
  
2. 다와서 찬양해
  
3. 내게 강같은 평화 
 
4. 나 위하여 십자가에 (찬송가 303)
  
-- 기도
  
5.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6. 마지막 날에
  
7. 갈릴리 마을 그 숲속에서 
 
8. 나의 영원하신 기업 (찬송가 435)
 
 
  
  
 
주일 예배 찬양
  
1. 난 예수가 좋다오 
 
2. 주의 음성을 540 
 
3. 목마른 자들아 526 
 
4.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288
 
 
 
 
 
금요철야기도회 
 
1. 내 평생 사는 동안
  
2. 나 무엇과도 주님을 
 
3.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찬송가 363) 
 
4. 이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5.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
 
 
 
 
 
수요기도회 
 
1. 찬송으로 보답할수 없는 큰 사랑 
 
2.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3. 그날이 도적같이 
 
4.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주일오후예배 찬양
  
1. 찬양을 드리며
  
2. 하나님의 음성을
 
3. 오 신실하신 주
  
4.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옛날곡인데 모르는 분들은 악보 참조하시구요. 검색해서 곡 들으세요)
  
5. 아무것도 두려워말라
 
 
  
 
 
수요기도회 
 
1. 외롭지 않아 (세상때문에) 
 
2.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3. 찬양을 드리며 
 
4. 왜 나만겪는 고난이냐고
 
  
 
 
 
주일예배 찬양
  
1. 찬양을 드리며 C 
 
2. 목마른 내영혼 F 409 
 
3. 내 주의 보혈은 E186
  
4. 성령이여 우리 175 G

6월 찬양콘티

금요 기도회 찬양
   
1. 다와서 찬양해
  
2. 기뻐하며 왕께
  
3. 생명 주께 있네
  
4.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5.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주일오후예배 찬양
  
1.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250)
 
2. 구주 예수 의지함이 (542)
  
3. 일어나 걸어나 (나의 등뒤에서 )
   
4. 십자가를 내가 지고 (341)
  
  
 
 
 
주일예배 찬양
 
 1.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2.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3. 하나님의 진리등대
 
4. 예수 사랑하심은
  
 
 
 
 
금요철야기도회 찬양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 하나님이시여 
 
3. 내일 일은 난 몰라요 
 
4.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5. 세상의 유혹시험이 내게
 
 
 
 
 수요기도회 찬양
   
1. 곤한 내영혼 406 
 
2.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404 
 
3.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289 
 
4.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복음송)

 
 
 
금요기도회 찬양 
 
1. 찬양을 드리며 
 
2. 우리 모일때 주 성령 임하리 
 
3. 주님 이곳에 
 
4. 나 무엇과도 주님을 
 
5.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찬송가 147) 
 
6.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찬송가 519)

2019년 7월 20일 토요일

<교회의 방향을 고민하는 당회원들에게 드립니다> 최주훈

<교회의 방향을 고민하는 당회원들에게 드립니다>1
 
존경하는 당회원들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한 지 벌써 반 바퀴를 돌았습니다. 올해 우리는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라는 기치 아래 결의를 다졌습니다. 공동의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장로님들과 더불어 한 단계 기어를 올리는 맘으로 역주를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 역시 그런 열정과 소망이 자라나는 시간일 겁니다.
 
여기 모인 당회원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알고 매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지난 반년을 돌아보니 때론 서로 의견 차이 때문에 톱니바퀴 어긋나듯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기에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숙제를 내 주신대로 제가 품고 있던 목회 철학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어쩌면 교회 발전성장을 꿈꾸는 여러분의 생각과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매주일 공동예배 때마다 키리에(KYRIE) 찬트를 이렇게 부릅니다. “온 세상의 평화, 주님 교회의 번영, 온 인류가 하나 되도록, 우리 함께 기도드리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찬트를 통해 우리 모두 엄숙히 고백하듯, 교회는 반드시 발전해야 하고, 교회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이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번영, 발전, 성장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발전이 무엇인지 온전한 의미를 함께 숙고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교회의 번영을 위해 우리가 선행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성장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적용하며 사람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번영을 위해 세움 받은 교회의 중직자들은 교회 발전을 위한 방향을 설정하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무력해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 강조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권력에서 무력할수록, 중직자가 힘을 뺄수록 그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직분자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중직자로 세워진 분들이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분개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발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니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교회가 무엇인지우리 스스로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교회인지말입니다. 교회의 고유한 역할과 존재의 이유에 대한 이 질문은 교회가 발전해야할 이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중직자인 여러분들의 깊은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더 직접적으로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다니는 근본적인 이유, 교회에서 원하는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통해 얻어가려는 최종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인격적 성숙? 수준 높은 신학? 청소년과 아동을 위한 건전한 교육? 깊은 묵상기도와 신비적 체험? 영웅적 선행? 속을 털어놓는 교제?
 
사실 이런 것들은 교회가 아니라 다른 종교, 심지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신론자도 신학적 정확성을 가질 수 있고, 불교도나 신비주의자나 심지어 이단이라고 낙인 붙은 이들도 영웅적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교회 성장과 발전의 목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일들입니다. 교회 밖의 전문 기관들이 교회보다 더 충분히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킨슨 법칙’(Parkins’s law)이란 말이 있습니다. 영국 정치사학자인 C.N. 파킨슨이 업무량 증가와 관료조직의 비대화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관료수는 일의 분량과 관계없이 증가함을 통계적으로 보여준 법칙입니다. , 일이 많아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이 늘어난다는 법칙이 파킨슨 법칙입니다.
 
관료조직 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교회는 사회의 모든 기능을 아우르는 전파사같은 곳이었습니다. 동네의 온갖 고장 난 것들은 모두 고칠 수 있고, 집에서 수도꼭지나 전구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그런 곳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양적으로 성장했던 그 시절 그 교회를 추억거리 모델삼아 교회들은 온갖 기능들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성장의 척도를 등록교인 인원과 헌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앞뒤 가리지 않고 뭐든지 했습니다.
 
한 때 교회 부속 유치원이 붐처럼 일어났고, 사회복지기관의 기능을 담당하고, 또는 동네 사랑방 노릇하기 위해 커피숍을 운영해보는 붐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교회의 역할을 온전히 유지한 곳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목사가 성경과 씨름하며 말씀을 준비하는 대신 노란 봉고차 운전사가 되어버리거나 계산대 앞에서 입출금을 계산하며 돈 세는 일이 주업무가 되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모두 선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이지요.
 
일하는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바쁘게 돌아간다고 발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시대가 변하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면서 매번 호들갑 떨 일도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고,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교회의 고유한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유행과 주류에 따라 방향을 정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역할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2천년 역사를 통해 변하지 않고 꾸준히 우리를 지탱해준 역할, 끔찍한 자연재해와 전쟁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교회의 고유한 역할, 그것이 바로 키리에서 엄숙하게 찬송했던 교회 번영에 대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거룩한 직무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언자적 감수성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교회 전통에선 교회적 감수성’, ‘교회적 감각이란 의미의 라틴어 센수스 에클레시아’(Sensus ecclesiae)라고 부르곤 합니다. 간단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감수성인데, 말씀에 침잠하며, 공동체가 성찬을 함께 나누고, 그 안에서 선한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시설이나 주차장, 교육 공간 같은 것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너무 뻔한 것 같지만, 말씀과 성찬 기도가 결국 답입니다.
 
이 일에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실현하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나라를 키워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가 해야 할 가장 고유한 기능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성찬의 나눔을 통해 거룩한 사귐을 이 땅에서 이뤄나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을 통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의 일상이 녹아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런 교회의 고유한 역할은 변화하는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축복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선 현재 교회가 가진 선행을 베풀 권력과 주도권을 조금씩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중직자들은 힘과 주도권을 쥐는 곳이 아니라 주도권을 넘겨주는 허브가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만들어 달달 볶기보다 자발적인 모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며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 만든 모임에 교인들이 참여하길 독촉하는 대신, 교인들이 만들어내는 비정형적인 모임에 찾아가고 녹아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논쟁을 벌이고, 거기서 자유를 얻어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중직자들은 이런 자유롭고 자발적인 모임과 행동들이 더욱 창조적으로 생겨나며, 모임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규율과 규제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당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반대로, 그런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모임이 더 많아지고 반복되며, 그 모임이 승화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번영을 이루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창조적이고, 비정형적인 모임들은 항상 우리의 기대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당황케 만들고 위협과 도전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 개인과 집단엔 다양한 반응들, 애매하고 복잡한 반응들이 연출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고유한 역할을 붙잡고 있는 한, 그런 일들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예기치 못했던 통찰들을 배우게 될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시야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또 다른 도전적인 선택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부활과 구원을 위해 신앙의 도전이 얼마나 유익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발전과 번영 아닐까요?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효율이니 안락함이니 풍요니 등록교인 수니 하는 것들이 교회 발전과 변화의 질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변화와 성장의 객관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변화와 성장을 측량하는 모든 시도는 순진하거나 아니면 사악한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자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경험으로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변화에 대한 대응법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믿음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보편적 가치를 심어가는 곳입니다.....
 
* 20190714당회원워크샵을 준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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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_ 최주훈

<마리아와 마르다>
 
이전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10:38-42)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했던 대목인데, 참고가 될까 해서 몇 글자 다시 남겨본다. 이 본문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단순히 말씀과 노동의 우위를 따지는 본문이 아닌 건 확실하다. 특이한 해석 중 하나는 여성인권문제로 접근하는 방법인데, 케네스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보는 예수, 239-301)가 대표적이다. 상당히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난 좀 다른 방식으로 이 본문을 들여다본다. 미쉬나 전통을 배경에 깔고 이 구절을 해석해 보면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미쉬나에서 명령하는 손님 접대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이제껏 읽어왔던 독법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본문을 읽어낼 수 있다.
 
못된 언니 마르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미쉬나에 기록된 대로, 주인의 권리를 손님으로 오신 지혜자에게 넘겨주며 율법에 순종하는 마르다, 게다가 자기 동생의 역할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연장자의 권리를 사용하라며 손님 예수께 겸손히 말을 올리는 착한 여인의 뉘앙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 예수님의 반응 역시 주목할 만하다. '마르다를 두 번 부르는 것을 두고 화가 나거나 짜증 섞인 예수님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게 통념적이지만, 나에겐 전혀 다른 색깔의 목소리로 들린다. 마르다를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예수의 온유한 목소리로 말이다.
 
마리아도 미쉬나 율법에 충실하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증거다. 미쉬나의 율법, 손님 접대법'에 보면, ‘지혜자가 집에 왔을 때 그에게 눈과 귀를 가까이 청종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리아는 그 율법을 그대로 준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케네스 베일리는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을 중동의 일반적인 화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바울이 가말리엘의 발 밑에서 자랐다는 인용구를 들어 제자가 된다라는 해석을 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마리아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율법에 순종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본문은 둘의 우열, 마리아와 마르다, 또는 '노동''말씀 듣는 것'의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 가지만 언급하면, 등장인물의 이름 속에 담긴 비밀이다.
 
마르다는 주인이란 뜻이다. 마르다는 이름에 걸맞게 주인의 권리를 (율법에 따라) 예수에게 넘겨준다. 칭찬받을 일이고 칭찬 받는다.
 
마리아는 어떤가? ‘좋은 것이란 뜻이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은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 보면,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들었을까?
 
마리아는 마리아를 택했다. 그러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을 택했다. 그러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예수 앞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누구도 그 생명의 고귀함과 존재의 가치를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깨닫는 순간 영원한 생명의 신비가 열려졌다는 의미도 여기 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영생의 신비가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미 눅10:25절부터 시작하는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 주제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주제? 영생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란 길로 설명하고,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꺼내놓는다. 이건 영생을 위한 이웃사랑 항목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하나님사랑에 해당하는 항목으로써, 궁극적인 영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체를 문학적 기법으로 보면, 중동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수미상관법’(댓구법)에 속하는 것 같다.(이 기법을 베일리는 아주 강조한다. 그래서 혹자는 누가 복음서 기자보다 베일리가 댓구법을 더 좋아한다고 할 정도다.)
 
어찌되었건, 누가복음서 기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청중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예수 앞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영생', 곧 하나님사랑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어디 서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목사, 장로, 기업인, 정치인, 이라는 것은 모두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 서 있는지 근본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지 알아야 산다. 개 속에 늑대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야 하듯,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파멸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존재의 신비를 깨닫는 길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누가복음서 기자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던 복음이 아니었을까?
 
설익은 내 해석이다. 설교 준비하다가 생각나는대로 주절주절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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