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방향을 고민하는 당회원들에게 드립니다>1
존경하는 당회원들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한 지 벌써 반 바퀴를 돌았습니다. 올해 우리는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라는 기치 아래 결의를 다졌습니다. 공동의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장로님들과 더불어 한 단계 기어를 올리는 맘으로 역주를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 역시 그런 열정과 소망이 자라나는 시간일 겁니다.
여기 모인 당회원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알고 매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지난 반년을 돌아보니 때론 서로 의견 차이 때문에 톱니바퀴 어긋나듯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기에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숙제를 내 주신대로 제가 품고 있던 목회 철학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어쩌면 교회 ‘발전’과 ‘성장’을 꿈꾸는 여러분의 생각과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매주일 공동예배 때마다 키리에(KYRIE) 찬트를 이렇게 부릅니다. “온 세상의 평화, 주님 교회의 번영, 온 인류가 하나 되도록, 우리 함께 기도드리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찬트를 통해 우리 모두 엄숙히 고백하듯, 교회는 반드시 ‘발전’해야 하고, 교회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이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번영, 발전, 성장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발전이 무엇인지 온전한 의미를 함께 숙고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교회의 번영을 위해 우리가 선행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성장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적용하며 사람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번영을 위해 세움 받은 교회의 중직자들은 교회 발전을 위한 방향을 설정하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무력해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 강조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권력’에서 무력할수록, 중직자가 힘을 뺄수록 그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직분자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중직자로 세워진 분들이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분개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발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니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교회인지’ 말입니다. 교회의 고유한 역할과 존재의 이유에 대한 이 질문은 ‘교회가 발전해야할 이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중직자인 여러분들의 깊은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더 직접적으로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다니는 근본적인 이유, 교회에서 원하는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통해 얻어가려는 최종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인격적 성숙? 수준 높은 신학? 청소년과 아동을 위한 건전한 교육? 깊은 묵상기도와 신비적 체험? 영웅적 선행? 속을 털어놓는 교제?
사실 이런 것들은 교회가 아니라 다른 종교, 심지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신론자도 신학적 정확성을 가질 수 있고, 불교도나 신비주의자나 심지어 이단이라고 낙인 붙은 이들도 영웅적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교회 성장과 발전의 목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일들입니다. 교회 밖의 전문 기관들이 교회보다 더 충분히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킨슨 법칙’(Parkins’s law)이란 말이 있습니다. 영국 정치사학자인 C.N. 파킨슨이 업무량 증가와 관료조직의 비대화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관료수는 일의 분량과 관계없이 증가함을 통계적으로 보여준 법칙입니다. 즉, 일이 많아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이 늘어난다는 법칙이 파킨슨 법칙입니다.
관료조직 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교회는 사회의 모든 기능을 아우르는 ‘전파사’ 같은 곳이었습니다. 동네의 온갖 고장 난 것들은 모두 고칠 수 있고, 집에서 수도꼭지나 전구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그런 곳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양적으로 성장했던 그 시절 그 교회를 추억거리 모델삼아 교회들은 온갖 기능들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성장의 척도를 등록교인 인원과 헌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앞뒤 가리지 않고 뭐든지 했습니다.
한 때 교회 부속 유치원이 붐처럼 일어났고, 사회복지기관의 기능을 담당하고, 또는 동네 사랑방 노릇하기 위해 커피숍을 운영해보는 붐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교회의 역할을 온전히 유지한 곳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목사가 성경과 씨름하며 말씀을 준비하는 대신 노란 봉고차 운전사가 되어버리거나 계산대 앞에서 입출금을 계산하며 돈 세는 일이 주업무가 되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모두 선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이지요.
일하는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바쁘게 돌아간다고 발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시대가 변하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면서 매번 호들갑 떨 일도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고,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교회의 고유한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유행과 주류에 따라 방향을 정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역할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2천년 역사를 통해 변하지 않고 꾸준히 우리를 지탱해준 역할, 끔찍한 자연재해와 전쟁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교회의 고유한 역할, 그것이 바로 키리에서 엄숙하게 찬송했던 “교회 번영”에 대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거룩한 직무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언자적 감수성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교회 전통에선 ‘교회적 감수성’, ‘교회적 감각’이란 의미의 라틴어 ‘센수스 에클레시아’(Sensus ecclesiae)라고 부르곤 합니다. 간단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감수성인데, 말씀에 침잠하며, 공동체가 성찬을 함께 나누고, 그 안에서 선한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시설이나 주차장, 교육 공간 같은 것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너무 뻔한 것 같지만, 말씀과 성찬 기도가 결국 답입니다.
이 일에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실현하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나라를 키워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가 해야 할 가장 고유한 기능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성찬의 나눔을 통해 거룩한 사귐을 이 땅에서 이뤄나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을 통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의 일상이 녹아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런 교회의 고유한 역할은 변화하는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축복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선 현재 교회가 가진 ‘선행을 베풀 권력’과 주도권을 조금씩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중직자들은 힘과 주도권을 쥐는 곳이 아니라 주도권을 넘겨주는 허브가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만들어 달달 볶기보다 자발적인 모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며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 만든 모임에 교인들이 참여하길 독촉하는 대신, 교인들이 만들어내는 비정형적인 모임에 찾아가고 녹아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논쟁을 벌이고, 거기서 자유를 얻어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중직자들은 이런 자유롭고 자발적인 모임과 행동들이 더욱 창조적으로 생겨나며, 모임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규율과 규제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당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반대로, 그런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모임이 더 많아지고 반복되며, 그 모임이 승화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번영을 이루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창조적이고, 비정형적인 모임들은 항상 우리의 기대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당황케 만들고 위협과 도전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 개인과 집단엔 다양한 반응들, 애매하고 복잡한 반응들이 연출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고유한 역할을 붙잡고 있는 한, 그런 일들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예기치 못했던 통찰들을 배우게 될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시야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또 다른 도전적인 선택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부활과 구원을 위해 신앙의 도전이 얼마나 유익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발전과 번영 아닐까요?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효율이니 안락함이니 풍요니 등록교인 수니 하는 것들이 교회 발전과 변화의 질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변화와 성장의 객관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변화와 성장을 측량하는 모든 시도는 순진하거나 아니면 사악한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자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경험으로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변화에 대한 대응법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믿음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보편적 가치를 심어가는 곳입니다.....
* 20190714당회원워크샵을 준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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