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9일 금요일

삽질하는 목사 _ 최주훈

<삽질하는 목사>
 
신학이란 분명 말로 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출판되는 엄청난 양의 신학서적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긴 모두 이 담겨 있다. 그런데 비밀 아닌 비밀은, 재발행 부수가 지극히 적다는 점이다. 이건 신학서적을 읽는 독자의 수와 부류가 지극히 소수로 한정되어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많은 신학 출판물들을 필요로 하고, 누가 신학서적을 읽는가? 정답은, 신학서적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학서적을 출간하는 신학자들 자신교회의 말을 이해하는 내부인들뿐이다. 그 외 독자들은 사실 극소수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화학서적은 화학자들이 구입해서 읽고, 천문학 관련서적도 대부분 천문학자들이 구입해서 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재출판부수를 자랑(?)하는 신학서적들이 보여주는 진실이 한 가지 있다. 신학적 들이 세상에서 거의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몇몇 신학자들만이 상대적으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신학이 세상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또는 나눌 가능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 항상 질문해야 한다.
 
한 가지 문득 드는 생각은, 세계적으로 재판행 판매 부수가 높은 신학자 중 한 사람은 한스 큉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스 큉의 경우를 가만 생각해보니, 그처럼 폭넓은 공감을 얻게 된 이유가 '혹시 기존 교회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아니면, 그를 향한 관심과 인기는 그저 '흘러가는 유행이나 스캔들처럼 한 번 흘러가는 그런 것을 아닐까?'하고 삐딱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최근 가톨릭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았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전세계적으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그런 관심을 얻게 된 이유는 기존 교회와 불편한 관계,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모습 때문임이 분명하다. 아직 살아있는 권력이라서 역사적 평가가 온전히 내려지길 바라는 건 시기상조일 수 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앞서 제기한 이유로 인해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대중적 인기가 세상과 생산적 대화를 잘 이끌어가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인간으로서 대중의 공감을 받고 있지만, 로마-가톨릭 신학은 여전히 대중의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건 사실이다. 독일만 하더라도, 학교교육을 통해 가톨릭 교인은 의무적으로 일요일이나 토요일 저녁,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무(?) 또는 권고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성당을 찾는 가톨릭 교인은 전체의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많은 가톨릭 재단 학교의 보고서에서 잘 드러난다.(Prof. Hans Schwarz 교수가 2015년 여름, 내 사무실에서 해 주신 이야기)
 
교황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환호와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교황의 요구는 묵살한다. 교황청 교서에 나오는 요구들은 이제 더 이상 가톨릭 교인들에게조차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교황청 교서를 실제로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집권적인 로마교회가 이런 실정이니, 한 교회에 한 명씩 교황이 존재한다고 하는 개신교회는 어떨지 그 결과도 예상할 만하다. 목사가 인기 있으면, 갈채를 보낸다. 고개도 숙인다. 그런 목사 책은 서점 베스트셀러 가판대에 쫙 깔리고, 인기 있는 만큼 책도 잘 팔린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설교에 담긴 요구, 신학서적에 담긴 요구는 묵살된다. 이런 현상은 책이나 설교에 담긴 ''의 가치와 상관없다. '당신의 인기에는 공감하지만, 당신 말을 따르지는 않겠습니다.'라는 일종의 의사표현으로 보인다.
 
단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렇듯 신학적 진술과 신학은 점점 그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심화되어가는 세계의 세속화와 본회퍼가 예언했던 성인된 세계의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일명 가나안 성도가 늘어간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교회를 찾아가는 현상은 비단 가나안 성도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요즘 교회를 유심히 잘 보라. 이전엔 조부모부터 손주까지 한 세대가 함께 다니던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교인 가족을 찾기 힘들어졌다. 대신, 한 가족 전체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부모와 자녀가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더 심한 경우엔 예배는 강남 모 교회, 성경공부는 강북 모 교회, 소그룹과 교제는 용산 어딘가에서, 상담은 모 목사에게 하는 식으로 신자 한 개인이 주체적으로 종교생활의 모든 프로그래밍을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아마 조금 지나면, 설교는 A 교회, 침묵기도는 B 교회, 통성기도는 C교회, 찬양은 ... 식으로 신자들에게 종교정보를 연결해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종교 프로그램 중개업자가 나올 수도 있겠다. 여행사에서 특가 프로그램이라면서 홍보하듯 말이다. 이런 전망은 단순한 기우일까? 그리고 이런 현상을 무조건 나쁘게만 봐야 할까?
 
요즘 내 고민은 이것이다.
 
성인된 세계’, 각 개인이 독립적 주체가 되어가는 것과 '교회공동체'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교회공동체에 희망적인 미래가 있을까?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희망의 씨앗이 있다고 확신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도대체 어느 방향, 어느 땅 구석을 파야 될 것인가?
 
난 요즘 삽질하고 다닌다. 내 방식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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