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0일 토요일

마르다와 마리아 _ 최주훈

<마리아와 마르다>
 
이전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10:38-42)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했던 대목인데, 참고가 될까 해서 몇 글자 다시 남겨본다. 이 본문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단순히 말씀과 노동의 우위를 따지는 본문이 아닌 건 확실하다. 특이한 해석 중 하나는 여성인권문제로 접근하는 방법인데, 케네스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보는 예수, 239-301)가 대표적이다. 상당히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난 좀 다른 방식으로 이 본문을 들여다본다. 미쉬나 전통을 배경에 깔고 이 구절을 해석해 보면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미쉬나에서 명령하는 손님 접대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이제껏 읽어왔던 독법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본문을 읽어낼 수 있다.
 
못된 언니 마르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미쉬나에 기록된 대로, 주인의 권리를 손님으로 오신 지혜자에게 넘겨주며 율법에 순종하는 마르다, 게다가 자기 동생의 역할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연장자의 권리를 사용하라며 손님 예수께 겸손히 말을 올리는 착한 여인의 뉘앙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 예수님의 반응 역시 주목할 만하다. '마르다를 두 번 부르는 것을 두고 화가 나거나 짜증 섞인 예수님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게 통념적이지만, 나에겐 전혀 다른 색깔의 목소리로 들린다. 마르다를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예수의 온유한 목소리로 말이다.
 
마리아도 미쉬나 율법에 충실하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증거다. 미쉬나의 율법, 손님 접대법'에 보면, ‘지혜자가 집에 왔을 때 그에게 눈과 귀를 가까이 청종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리아는 그 율법을 그대로 준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케네스 베일리는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을 중동의 일반적인 화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바울이 가말리엘의 발 밑에서 자랐다는 인용구를 들어 제자가 된다라는 해석을 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마리아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율법에 순종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본문은 둘의 우열, 마리아와 마르다, 또는 '노동''말씀 듣는 것'의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 가지만 언급하면, 등장인물의 이름 속에 담긴 비밀이다.
 
마르다는 주인이란 뜻이다. 마르다는 이름에 걸맞게 주인의 권리를 (율법에 따라) 예수에게 넘겨준다. 칭찬받을 일이고 칭찬 받는다.
 
마리아는 어떤가? ‘좋은 것이란 뜻이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은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 보면,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들었을까?
 
마리아는 마리아를 택했다. 그러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을 택했다. 그러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예수 앞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누구도 그 생명의 고귀함과 존재의 가치를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깨닫는 순간 영원한 생명의 신비가 열려졌다는 의미도 여기 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영생의 신비가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미 눅10:25절부터 시작하는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 주제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주제? 영생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란 길로 설명하고,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꺼내놓는다. 이건 영생을 위한 이웃사랑 항목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하나님사랑에 해당하는 항목으로써, 궁극적인 영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체를 문학적 기법으로 보면, 중동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수미상관법’(댓구법)에 속하는 것 같다.(이 기법을 베일리는 아주 강조한다. 그래서 혹자는 누가 복음서 기자보다 베일리가 댓구법을 더 좋아한다고 할 정도다.)
 
어찌되었건, 누가복음서 기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청중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예수 앞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영생', 곧 하나님사랑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어디 서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목사, 장로, 기업인, 정치인, 이라는 것은 모두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 서 있는지 근본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지 알아야 산다. 개 속에 늑대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야 하듯,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파멸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존재의 신비를 깨닫는 길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누가복음서 기자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던 복음이 아니었을까?
 
설익은 내 해석이다. 설교 준비하다가 생각나는대로 주절주절 써 본다.
 
#설교 #메모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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