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9일 목요일

길을 걷는 사람_ 최주훈

<길을 걷는 사람>
얼마 전 루터교회 목회자 연장 교육에서 박윤만 교수의 강의를 매우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첫 번째 주제가 “초기 기독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라는 문제였습니다. ‘기독교’, ‘교회’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서 이 질문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첫 질문이 저에겐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정말 1세기엔 예수 따름이 스스로 뭐라고 불렀을까, 그리고 밖에선 또 어떻게 이름했을까.
그 답이야 예수님 만나봐야 알겠지만, 강의를 맡았던 박윤만 교수는 성서의 다양한 구절(행 9:2; 19:9, 23; 22:4; 24:14)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는 “그 길”, 또는 “나사렛 이단” 같은 말로 불렸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다”라고 선언한 구절,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길”(도)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름을 지을 땐 아무렇게나 짓지 않지요. 그 이름에 소망을 담는 건 상식입니다. 1세기 교인들이 스스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건, 자신들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의식이 담겨 있다고 봐야합니다.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중심으로, 이 길이 도대체 무엇인지 설명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단, 막 1:1절은 마가복음이 교회 공동체 예배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운율을 통해 감지 할 수 있습니다. 한글 번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인데, 헬라어는 “아르케 투 에방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후이우 데우”라고 읽습니다. 여기, ‘우~’라는 음이 반복되는데, 고대인들에게 이 운율의 반복은 경건한 분위기를 깊게하는 예전적 음운이예요.
그다음 2절에 저 유명한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지요. 여기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과거에서 현재로’라는 시간의 길을 닦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길을 준비하리라..., 길을 곧게하라”라는 인용구를 살포시 넣어둡니다. 이로써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밝히는 의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특별한 것은 그 길의 출발지가 ‘광야’라는 점입니다.
5절을 봅시다.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이 다” 광야로 나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요? 잘 정비된 지역, 사람들의 밀도가 높은 대도시이지요.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살짝 숨겨 놓은 것 같아요. ‘유대,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로 정작 말고 싶은 단어는 ‘성전’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지요. 그곳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야말로 유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고,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의 통념으로 봐서는 성전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시온의 대로’라는 탄탄한 대로를 거쳐 갑니다. 그런 대로를 걸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기존의 통념이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를 뒤집어 버립니다. 대도시, 성전, 탄탄대로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와 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대 땅의 사람들, 예루살렘에 모여 살던 도시인들,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예측할 수 없는 황량한 땅, 광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이동 경로가 완전히 바뀌어버렸지요. 길 없는 곳으로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족장과 예언자들의 땅이기는 하지만, 이 광야에 그 어떤 나라가 세워진 적도 없고, 안전이 보장된 체계가 세워진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과거의 역사는 있지만, 제도와 틀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복음은 도시 사람들을 불러 이곳으로 인도한 다음, 진리의 길을 걷게 만듭니다. 물론 모두가 이 길 걷기에 동의하고 그 길을 걸어간 건 아닙니다. 고향 가족들과 가진 자들은 이 길을 거부했고, 제자들은 이 길에 올라섰다 탈선하기를 반복합니다.
중심지 예루살렘을 비우고, 광야에서, 그리고 외곽 갈릴리에서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광야 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 눈을 뜨기 시작하지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맹인이 시력 회복하고 “모든 것을 밝히 보는” 구절일 겁니다(8:22-26). 새롭게 눈을 뜬 사람에게 이 길이 어떤 길인지, 그 방향이 어디인지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그 길의 종착지는 무덤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길이 끊어진 어두운 무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며 복음서를 마무리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길인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부활’, ‘십자가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교회력의 새해는 마가의 해입니다. 그래서 이번 해 교회 주제를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분명히 오늘 우리의 상황도 코로나 때문에 암흑 같은 상황입니다. 무언가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니 대비할 수 없는 무덤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선하더라도 일단 일어나 걸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골머리 쓸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강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고유의 것, 우리 교회 말고는 다른 곳에선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눌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예수의 길 위에 있기 기도하며, 서로를 돌아보는 것, 즉 복음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가장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이들의 지혜로운 나눔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 중앙루터교회 2021 정책 당회 설교 막 1:1-5 ‘길을 걷는 사람들’
최주훈 목사 (2020.11.20.토)

2020년 11월 13일 금요일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_이정순(목원대 신학)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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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연일 확산되고 있다. 누구도 예측 못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애를 쓰고 있다. 감염을 막기 위해 실시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종교계 역시 건물 중심의 의례 행위를 자제하고 온라인이나 가정에서의 의례로 대체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계 역시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면서 또 일부에서는 여전히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고집하면서 이것을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신앙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전쟁 때도 중단하지 않았던 예배를 왜 중단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면서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물론 생명을 우선시하는 이 위중한 시기에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얼마 전 대구의 신천지로 바이러스 감염자가 폭증하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는 이제 신천지든 정통 교회든 하나로 보이는 듯하다. 정말 바이러스에 의해 다수의 고귀한 생명이 원치 않는 죽음을 맛보고 있는 시대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생명이 먼저인가 아니면 종교가 우선인가 하는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며칠 전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주일 예배를 강행하던 한 목사가 구속된 일이 일어났다. 이 사람은 주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행정명령을 무시한 채 3월 29일 주일 두 차례에 걸쳐 수백명이 모이는 예배를 개최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물론 보석금을 내고 바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도 교회 예배를 제한할 정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얼마나 위중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목사를 기소한 검사는 기자회견에서, "주 정부의 행정명령은 헌법적으로 유효하다"라고 언급하면서 마가복음 12장 31절을 근거로 해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으며, 이웃을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노출시켜 건강을 해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만일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다.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은 물론 현재 많은 서구의 나라들이 종교 집회를 금지하고 있다. 그 대신 각자가 있는 곳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온라인을 통해서든 아니면 개인이나 가족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든 종교 의식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다. 종교인이라면 당연히 거룩한 예배당이나 종교 시설에서 종교의식을 갖는 게 당연할 텐데,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 특별한 시기인 만큼 한 발자국 물러나 달라는 특별 요청인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특별 예배에 머무르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안에서 함께 동영상을 시청하는 형태의 예배도 시행되고 있다. 미국의 한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를 ‘드라이브 쓰루’ 형태로 받고 있다고 한다. 신자는 차에 탄 채 창문만 열고 신부는 2미터 쯤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신자의 고해성사를 듣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시대에 신앙을 쌓아가는 다양한 방식이 매우 흥미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 시설에서의 종교 예식, 즉 예배당에서의 예배만이 유일한 신앙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많은 것 같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생각하고 사모하는 그들의 신앙을 존경하면서도, 이 역시 기독교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배란 무엇인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성행하는 시대에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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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약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 예배의 강화였다. 그때까지 법궤를 모시고 광야 이곳 저곳을 이동하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거대한 왕국이 되면서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를 강조하게 된다.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야훼 하나님, 200여년 동안 왕 없이 사사 체체를 유지 시켜주었던 엘로힘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갇히게 되었다. 세상 한 복판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일원은 누구든지 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하고, 최소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직접 와서 동물을 희생제로 드려야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너무 크고 화려하게 짓다가 무리를 일으키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된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북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했다. 이것이 성서적으로 사마리아인의 기원이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전이 두 개가 생겼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하여 이방인들과 섞이기 시작했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해 포로로 끌려갔다. 신앙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 방문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이국땅에서 절망하던 이스라엘 인들은 이제 성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을 회관과 같은데서 모이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율법을 공부하면서 자녀들의 신앙을 교육했다. 이것이 회당의 시초이다. 여기서 등장한 율법전문가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고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잠시 복구했지만, 희랍과 로마의 침략을 당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 역시 서쪽 벽만 남긴 채 완전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기독교의 성전 개념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유대교식으로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것을 잘 살펴보면 이런 성전 중심, 장소 중심의 예배는 이제 중단되었음을 알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 말미에 예배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21-24절).

예수님 당시까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인들은 “이 산”이라 지칭한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21절)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 어떠한 화려한 성전도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보다 예배 장소나 예배의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디서든 개인이나 집단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4절의 “영과 진리로”(「새번역 성서」)를 「개역 성경」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했는데, 본래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표현은 헬라어 “엔 퓨누마티 카이 알레세이아(έν πνεύματί και άληθεία)”를 번역한 것인데, “영과 진리”(in spirit and in truth)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말을 ”영적으로 참되게“ 라고 번역했는데,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

3

기독교에서 예배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나서 오늘날과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지금과 같은 정형화된 형식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후에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예배가 정착된 것이다. 에베소서 5:19-20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면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예배의 주요 요소들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 성경에서는 일요일 오전 11시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라고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다음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 날 모임을 가졌는데, 이후 이것이 주일예배로 정착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 한 모퉁이에서 예배를 드리다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쫓겨났고, 이후 곳곳에 흩어진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의 극심한 박해 시기에는 그마저 힘들어서 비밀리에 모였고, 지하 동굴에서도 모였다. 이렇게 신자들이 모인 모임 그 자체가 ‘에클레시아’(세상으로부터 불러내다), 즉 교회이다. 그래서 그 어느 곳에서든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마18:20)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이 두 세 사람도 모이지 못하면 예배는 불가능한 것인가? 바울서신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6:19, 3:16)라고 선포한다. 이미 성도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각자 처해진 상황 하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리면 그것 역시 훌륭한 예배라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실천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전통을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예배당에서 드리는 주일 11시 예배를 잠시 중단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은 중단되거나 교회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다. 온라인이라는 과학 기술을 도구로 하는 예배든, 가정 단위로 드리는 가정 예배든, 또 혼자 드리는 예배든, 시간과 장소 및 방법에 제한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참된 예배, 진정한 예배는 장소나 시간 또는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신 기술을 도구로 하여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예배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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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익투스타임즈(http://www.x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