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6일 목요일

그리스도인의 지표가 주일예배인가?

그리스도인의 지표가 주일예배인가?


최종원 (VIEW)


때로 자명해 보이는 진술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를 일요일마다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요즘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들을 그리스도인의 숫자에 포함시키는지는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예배를 꾸준히 드리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면, 주일예배를 꾸준히 드리지만 비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은 가능한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일상이 예배이고 예배가 일상이라는 말로 퉁치자는 의미가 아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표지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한번쯤 던져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성수라는 의식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연결시키다 보면, 그리스도인임을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주일예배 참석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제기를 하게 되면, 꼭 그런 말하는 ‘놈’ 치고 주일성수 잘하는 ‘놈’ 없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 ‘매우’ ‘잘’ 안다.

주일예배가 중요하다고 해서, 곧 주일성수가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지표로 작동할 수는 없다. 뭔 비뚤어진 심사냐고 하겠지만, 역사를 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여기서 질문 두 개만 던지고 가 보자.

질문 하나, 한국에서 불교 신자, 혹은 유교 신자로 고백하는 지표가 특정일에 절이나 사당에 가는 것일까?

질문 둘, 오래 기독교 전통을 유지시켜 온 중세 유럽인들은 매주일 미사를 드리러 교회에 갔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불교나 유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정기적으로 법회나 제사에 참여하는 것과 그 종교를 신봉하는 것을 등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좀 더 고약하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세계 속에 살던 중세 유럽인들은 매주 예배에 갔을까?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매주 수용할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년에 몇 차례 특정한 절기에만 교회에 갔다. 마치 오늘날 불교신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개념은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에서 등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잉글랜드 국교회를 확립하면서 주일예배 참여를 의무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일예배는 ‘국교회’ 예배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국교회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들이나 가톨릭 신봉자들을 파악해서 차별을 부과하기 위한 조치였다. 작년 이맘 때 잉글랜드 성공회 400년 만에 주일예배 의무 폐지 (Church of England makes Sunday services non-compulsory)라는 소식이 떴다.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 여러가지 해석들이 오갔지만, 이 주일예배 의무 조항은 단순한 종교적 조치가 아닌 국교회 확립을 위한 국가의 조치였다. 그러면서 주일성수가 국교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이 성격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예배 참석 말고도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요소는 많다. 아니 많아야 한다. 그것이 많지 않으니 주일예배만 목숨 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한다. 주일성수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아니다. 신학적 코멘트는 사양한다.

동성혼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

동성혼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
김기호교수(한동대)

서 론
정치철학자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의 말과 같이 동성결혼(同性結婚, Same-sex marriage)의 문제는 오늘 날 유대교-기독교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 최대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1) 지난 2015년 6월 미국 대법원이 Obergefell v. Hodges 판결에서 동성혼(同性婚)을 합헌(合憲)으로 결정을 하면서 성(性) 혁명은 역사상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동성애를 죄로 간 주해왔으며 복음주의 기독교는 동성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이미 20개국이상이 동성혼을 헌법적 수준에서 지지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동성혼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동성애(同性愛)에 대한 혐오감정(嫌惡感情) ‘호모포비아’(homophobia)는 정말로 비합리적인 공포심, 적개심, 혐오 감이 혼합되어 있는가?
크리스천들이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 없이 동성애와 동성혼을 정죄 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성적 지향성(指向性)’과 ‘성별 정체성(正體性)’ 그리고 동성혼의 권리가 차별적 대우를 받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동성애 결혼과 이성애(異性愛) 결혼이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인가? 혹은 동성 혼을 최고의 헌법적 가치로 설정하는 것인가?
유럽과 미국 등 서구사회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동성애자들의 요구대로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인 지향성이 추가되어 있지 않다. 아직은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사법계와 국가인권위는 선도적인 역할을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2)
필자는 한국의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 지향성과 행위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결혼관과 동성애에 대한 판단을 토대로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복음주의적 신학의 성경해석에 의하면 동성애는 명백한 죄이며 동성혼도 아담과 하와를 위해 창조주가 만든 결혼제도가 아니다. 성경의 결혼관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이성애에 입각한 일부일처제이다. 이외에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동거, 불륜, 성매매, 수간 등은 모두 혐오스러운 죄에 해당된다고 본다.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에 대한 보호와 동성결혼의 권리는 정의로운 요구는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지 않은 것을 권리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3)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결혼관이기도 하고 성경적인 결혼관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와 동성혼으로 양분된 미국 교계와 각각의 찬반 이유들을 살펴보고 마지막 결론에서 동성혼에 대한 한국교계의 대응원리와 대책을 복음주의적 신학과 목회자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다.


Ⅰ. 결혼과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견해
(1) 성경적인 결혼제도
동성혼의 문제는 성경의 결혼관을 통해 조명해야 한다. 에밀 브루너가 지적한 대로 결혼과 국가는 창조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결혼에 관한 창세기 1장과 2장의 본문은 남성과 여성의 창조와 이성애에 근거한 결혼제도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부부로 일부일처의 원형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창세에 만드신 최초의 제도로써 인류의 타락이전부터 존속해온 유일한 제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2-24, )
신약성경에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창세기 기록과 동일한 관점으로 결혼제도를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마19:4-6)
예수님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아담과 이브의 창조기사를 사실로 확인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타락하기 전부터 있던 결혼제도를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보존해야하는 제도로 풀이해주셨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각자의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가정을 형성해야 한다.
최초의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아담은 흙에서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본래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결혼제도를 통하여 재(再) 연합하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단순한 친구관계도 단순한 동거인도 아니며 그들은 오직 ‘한 몸’이라는 표현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신비로운 관계를 이룬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는 것은 부부의 친밀함을 함축한다.
사도 바울은 남녀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남녀 부부의 하나 됨과 같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2) 결혼제도의 목적
예수님은 언약으로서의 결혼의 우선적인 목적은 결혼한 부부의 상호간의 사랑과 협조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니라.”(창 2:18)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배필이요 친구요 협조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장 1항은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남자이든지 동시에 한 아내 이상을 가지거나 어떤 여자든지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혼제도에서 또 다른 목적은 출산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출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출산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의 언약이 취소될 수 없기 때문에 출산은 결혼제도에서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차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의 성별로 창조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성별에 입각한 이성애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제도이고 부부의 정절은 하나님의 뜻이다. 동성혼은 성경의 이성애에 입각한 결혼관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동성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적 성향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 한다. 이제 다음 장에서 필자는 성경의 동성애 본문을 찾아서 동성애에 대한 원래의 의미를 간략하게 탐구하고자 한다.

(3)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평가
1) 구약성경과 동성애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동성애를 직접 언급하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19:1-11, 사사기 19:22-30, 레위기 18:22, 20:13이다. 그 외에는 열왕기 본문과 에스겔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소돔에 대한 평가적 교훈에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 소돔과 고모라
남색(男色)과 항문성교를 의미하는 ‘sodomy’는 구약성경 소돔성의 멸망에서 유래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소돔성은 아브라함의 간청으로 정한 최소한의 기준 ‘의인 열 명’이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한 성읍이다. 소돔성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 본문은 일관되게 소돔성 사람들의 타락을 기록한다. 창세기 13장에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고 기록했다.
주님은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 18:20,21)고 하신다. 소돔성의 남자들은 롯의 집에 있는 방문자들과 성관계를 갖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그러나 반세기 전 베일리(Derrick Sherwin Bailey)의 주장과4) 이 베일리의 주장을 토대로 보스웰(Boswell)은 소돔은 동성애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고 동성애가 소돔 멸망의 핵심요인도 아니라고 주장한다.5) 소돔성의 남자들은 단순히 그 여행자들과의 교제를 원했을 뿐이지 동성애의 성관계를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일리는 히브리어인 ‘야다’(yadah)가 성경에 943번 사용된 것 중에 불과 10회 만이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부 성경의 역본에 “we can have sex with them!”으로 표현 하는 것은 근거 없는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다.
서우(Soew)는 구약의 다른 본문들(렘 23:14의 끔찍한 일, 간음, 악행, 거짓말, 겔 16:50의 역겨운 일, detestable things)이 동성애에 대한 심판의 직접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하며 심판의 원인은 끔직하고 역겨운 일들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베일리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학자들은 ‘야다’(yadah)가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고 보며,6) 스카조니(Scanzoni)와 모렌코트(Molenkott)는 고대 근동에서 지배의 수단으로 성립된 남성 강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서우(Soew)가 동성애를 심판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본다. 또한 에스겔서의 ‘역겨운 일’은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도 맞고,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 안에서 폭넓은 문화적 관행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 성의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한 악행의 핵심 요소라는 점은 분명하다.
– 레위기 18장과 20장
레위기 18:22, 20:13은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것으로 동성 간의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명문화 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친(親) 동성애 신학자들은 레위기 본문을 동성애 금지조항으로 해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보스웰은 히브리어 ‘토바’(toevah)를 ‘본래 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례적(祭禮的)으로 부정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아 레위기 본문은 이방종교의 우상숭배를 금지한 법이라고 주장한다.7) 그러나 보스웰의 주장의 약점은 ‘토바’(toevah)가 우상숭배에 관련된 행위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악한 것을 명백하게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8) 실제로 잠언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용례는 이방종교의 우상숭배와 무관하다.(잠언 3:32, 15:9) 설사 가나안 종교의 우상숭배와 연관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레위기 본문은 동성애의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라는 점을 너무나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들
여호수아 이후의 사사시대에도 동성애와 연관된 참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삿 19장) 소돔 남자들처럼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한 노인의 집에 유숙하려고 온 레위인을 요구한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하니”(삿 19:22) 마지 막 부분을 HCBS 번역본은 그들이 동성애 성관계를 요구하였다고 보아 “Bring out the man who came to your house so we can have sex with him!”로 옮기고 있다.
이 밖에도 신명기 23:17을 새 번역에선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남창이 될 수 없습니다.”로 개역성경은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美童, 카데쉬, 동성애자)이 있지 못할지니”로, KJV에서는 “There shall be no whore of the daughters of Israel, nor a sodomite of the sons of Israel.”(신23:17)로 옮기고 있다. 열왕기에서도 남색(男色)은 정죄 받는 큰 죄악이었다. “그 땅에 또 남색 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 상 14:24) 그리고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왕상 15:11-13)

2) 신약성경의 동성애 관련 본문
– 사도 바울의 견해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큰 죄로 간주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보낸 서신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라고 말한다.
그리고 디모데전서도 역시 이렇게 말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9,10)
– 기타 신약성경 유다서, 베드로서
바울의 서신 이외에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함이 심판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그리고 사도 베드로 역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덕적 타락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이라고 밝혀 말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벧후 2:6-10)

3) 동성애자들의 성경의 동성애에 대한 내용 반박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자들은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죄로 간주하는 사도 바울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첫째, 그들은 사도 바울이 ‘동성애 성향’과 ‘동성애 탐닉 자’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완전한 동성애자는 여자와의 ‘올바른 성관계’ 를 처음부터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성 애자들이 동성 배우자와 서로 사랑과 진정한 헌신의 관계에 있다면 바울의 정죄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동성애자에 대한 바울의 정죄는 인격적 본성에 반대되는 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보스웰은 이방인들이 자연스러운 유신론적 성향과 성적인 성향을 포기했다는 것에서 바울의 비판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보스웰은 로마서 1:26,27에 서 자연스런 관계는 부도덕함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셋째, 동성애 금지는 시대와 문화에 제한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서우(Seow)는 바울의 비판이 모든 세대에 적용되지 않는 다고 주 장하며, 퍼니쉬(Furnish)는 바울의 전제는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태도에 근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9) 그들은 동성애가 우상숭배와 관련되었을 경우에 한해서만 죄가 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동성애와 성적인 음란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원인이라고 공통되게 지적한다. 존 스토트는 디모데전서 1:10의 (불법한 죄의 예들) ‘간음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for the sexually immoral and homosexuals)에서 ‘남색 하는 자’로 해당하는 헬라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말라코스’(μαλακός)는 남색의 상대자로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남성을 가리키고 ‘아르세노코이테스’는 동성애 관계에서 적극적인 남자 역할을 하는 동성애자를 가리킨다.10)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의 목록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일반적으로 남성 매춘부와 동성애 제공자로 여겨지는 ‘말라코이’(malakoi)를 포함시킨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arsenkoita’와 ‘pornia’를 그 목록에 포함시킨다. 상술한 대로 성경에서 동성애를 언급하는 구절은 동성애를 금지하며 분명하게 죄로 규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베일리는 바울을 포함하여 성경의 저자들이 ‘성적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며 성경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제한 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보스웰은 ‘말라코스’가 동성애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동성애를 죄로 지칭하는 성경의 본문이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그것이 친 동성애적 신학자들의 논거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죄의 지향성과 죄의 행동과 결과를 명료하게 구분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desire)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9)고 말씀하였다. 죄의 소원은 죄를 짓는 성향으로 보아도 된다. 동성애를 포함한 죄를 향한 성향(소원)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갖는 특성이다. 사람은 말씀과 성령으로 그 죄의 성향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동성애적 지향성’을 알지 못했다는 비난은 ‘성경이 동성애를 허용할 수 있다’는 근거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존 스토트는 친 동성애적인 성경본문 해석을 단호하게 오류라고 비판한다. 스토트는 “이런 주장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성경자료를 이런식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 관행을 거부하는 것은 고립되어 있고 분명치 않아서 얼마든지 논리를 뒤집을 수 있는 몇몇 증거본문 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11) 그는 동성애 관행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 인식은 창세기의 성욕과 결혼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동성애가 소돔과 고모라의 유일한 죄는 아니지만 그것을 포함한 심각한 죄들의 고착화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교훈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금지는 창세기의 최초의 결혼제도에 연결되어 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과 이성애의 결혼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Ⅱ. 동성혼에 관한 미국교회와 사회적 상황
(1) 미국 교계의 상황
1) 양분된 미국교계
동성애 성향과 동성혼 인정과 투쟁은 현대 사회의 중대한 이슈이다. 한동안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숨겨왔지만 이제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벽장에서 나와서 공공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동성애적 지향성을 차별금지법으로 보호하고, 헌법적 수준에서 동성혼의 합법성을 얻게 되어 더욱 거세게 사회전반에 확대되어가고 있다. 서구사회의 대부분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자들이 있으며 동성애의 축제는 도시들의 정규행사가 되어버렸다. 동성애가 과거역사의 교회사에 엄격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 황제 저스티니안(Justinian)은 동성애자들에 대해 교회의 감독 하에 참회를 요구한 온건한 입장이었던 반면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동성애자들을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12) 아직까지는 로마 가톨릭은 동성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까지인지는 불확실하다.
미국의 개신교는 교단에 따라 동성혼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동성혼을 지지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내홍을 겪고 있으며 일부는 교회 재산을 포기하고 탈퇴를 하고 있다. 특별히 미국에서 주요교단과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와 동성혼의 문제에 대해선 정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가령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미국 연합그리스도교회(UCC)13), 미 연합장로교회(PCUSA)14), 미 성공회15), 미 복음주의 루터교회(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16), 미 침례교회(American Baptist)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교회(Disciples of Christ)는 동성애와 동성혼을 지지하는 주요교단들이다.
이에 비해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 성직 임명을 거부하거나 반대하고 있으며 동성혼을 성경과 배치되는 세상의 가치로 보고 허용하지 않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동성혼을 반대하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미국의 개신교단들은 가장 큰 교단인 미국의 남침례 교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침례교단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와 같은 오순절교단, 하나님의 교회, 나자렛교단을 포함한 성결계통 교단들 및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독립교단들이 동성혼을 반대하는 진영에 속한다.

2) 동성혼을 지지하는 근거 : 이성과 문화 중심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교단들은 일반적으로 현대사상, 현대과학, 문학, 예술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17) 그들은 각기 다른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동성혼을 위한 기도, 신학, 예전에서 강력한 유대감을 국내 수준과 국제 수준에서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정하는 권위의 근거로는 성경, 전통, 이성(理性), 인권이다. 개신교의 주요한 교단들은 이 네 가지 권위적 근원을 통해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고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권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치 있는 선물이며 성경과도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게이(Gay) 신학자들은 이성을 동성애 문제에 대한 권위로 사용한다. 이성(理性)에의 개방성은 두 가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문화(文化)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인간의 이성(理性)은 인간의 행동의 패턴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우주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탐구와 인류의 문화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 운 통찰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동성애 문제도 심리학자, 사 회학자,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존한다는 특징이 있다.
둘째,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성경과 전통의 요소에 대한 비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은 성경의 저자들은 어느 정도 그 들의 상황 속에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현대의 과 학과는 양립되지 않고 수용되지 않는 고대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 으며 현대의 서구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노예제도, 절대군주제도, 여성비하와 같은 문화를 지지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동성애에 대한 진술도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의 일부를 비판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 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율법과 명령이 현대의 문화에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일차적으로 성경의 저자들이 문화적 제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법과 사회제도로 부터 존중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성애자의 인권과 동성혼의 권리도 법과 사회로부터의 존중 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한 요구라는 것이다.18)
3) 동성혼을 반대하는 근거 :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반(反) 동성혼의 입장을 가진 복음주의 교단들은 인간의 이성(理性)과 전통을 권위의 근거로 삼는 주류 교단의 의견에 반대한다.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자들에게는 성경이 유일한 권위의 근거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모든 세대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와 문화(文化)를 초월하여 적용되어야 하며 크리스천들은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남침례교의 신조는 “거룩한 성경은 하나님이 영감을 주신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이고, 성경의 목적은 구원이며, 성경은 오류 없는 진리이다.”라고 진술한다.19) 이처럼 성경에 완전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성(理性)과 문화(文化)를 근거로 삼아 성경을 비판하고 성경의 저자들을 문화에 예속 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2) 교육계와 성적 지향성
미국 버지니아 주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회는 2014년 11월에 학교에서 보호되어야 할 권리 항목에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을 추가했고 2015년 5월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교육위원들이 투표한 결과 10대 1로 가결했다. 학부모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위원회가 압도적으로 가결한 이유는 ‘성 정체성’을 보호 하지 않을 우 연방정부가 카운티 교육국에 4,200만 달러의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는 LGBT 활동조직으로서 인권캠페인(Human Right Campaign)을 통해서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 법안(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SOGI 법안)을 신용, 교육. 고용, 연방예산, 주택, 법정의 모든 영역에서 ‘성 정체성’을 보호되어야 할 항목으로 추가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회의 결정은 성 소수자의 보호라는 측면보다는 새로운 문제들을 생산하고 있다. 가령 성별 정체성에 따르면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의 성별 정체성을 가졌을 경우에 여성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면 학교의 수학여행 중에 여성 정체성을 가진 생물학적 남성이 여학생들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것도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LGBT활동 단체들은 ‘차별금지 법안’이 보호할 항목에 ‘동성애적 지향성’을 삽입하기를 추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동성혼’을 법제화하는 것이 성소수자의 차별을 없애고 성소수자에게도 보편적 인권을 실현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동성혼 지지자들은 과거의 인종차별이 도덕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하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활발하게 그들의 의견을 대중화 및 법제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은 동성애가 차별금지 조항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나아가 동성혼이 법제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는 예산을 통해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대해 성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왜 그 것이 정당한 조치인가? 인류의 역사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자연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자연법을 어기는 정책을 강요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러므로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적 특성에 의존하는 ‘성 정체성 차별금지’는 앞으로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아동복지에 관련된 많은 문제를 수반할 것이 자명하다.

(3) 동성혼 지지자들의 논리 : 동성혼 차별은 인종차별과 같다.
동성혼 지지자들이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종차별과의 비유’이다. 동성혼 옹호자들은 올해의 대법원의 판결(Obergefell v. Hodges)은 낙태와 관련된 Roe v. Wade처럼 국민적 논쟁을 수반하지 않고 인종 간 결혼 금지를 철폐시킨 판례 Loving v. Virginia처럼 보편적인 도덕성으로 수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동성혼을 반대하는 것은 인 종 차별 주장처럼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차별금지법 조항에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권리’를 추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LGBT는 동성혼의 문제를 인종의 문제와 같은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전통결혼의 신념에 따라 혹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종간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동성혼 반대자들은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은 편협한 사고를 가진 비도덕적인 사람들이기에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동성혼 합헌판결(Obergefell v. Hodges) 이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서의 전통적인 결혼을 결혼제도의 본질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편협하고 완고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가령 성적 지향성에 따라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에 비판하는 일반 시민들을 관용이 없는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왜곡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결혼 지지자는 근거 없이 동성혼을 반대하고 성적지향성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하고 편협한 사람들인가? 그들은 동성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인가? 전통적인 결혼을 지지자들은 인종차별주의 자처럼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미국에선 Roe v. Wade 판결이후 미국 법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여성 혐오주의자(anti-woman)로 매도당하거나 구금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공공 정책에 대한 토론에서 합당한 지위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관용의 정신이 동성결혼 반대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가? 정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종교와 양심에 따라 사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즈에 의하면 미국 민주주의의 힘을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에서 찾는다.20) 그는 유럽 교회의 쇠퇴는 정교분리가 실현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유럽의 기독교는 국가의 권력을 사용해서 종교재판을 했고 억압적인 국가기관으로 전락했다. 국가와 교회 는 분리를 통해 각각 최상의 기능을 발휘한다.

(4) 동성혼에 대한 반대 논거
1) 동성혼 반대와 인종차별은 동일한 도덕적문제가 아니다.
동성혼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동성혼의 문제는 인종 간 혼인금지의 문제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심리적인 성정체성은 생물학적인 인종과 동일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생물학적인 차이에 의한 차별을 정당화한 인종 간 혼인금지 조항은 철폐되는 것이 정당하고 필연적이지만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과 성 정체성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동성혼의 반대를 인종주의나 인종 간 결혼금지에 비유하는 것은 논리적 역사적 오류에 해당된다. 세계역사에서 인종 간 결혼금지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 법안은 일종의 인종계급 카스트제도가 구현된 사회 안에서만 존재했었다. 그러나 남녀 간의 결합으로서의 결혼제도는 인류역사상 처음부터 있었던 규범이며, 위대한 사상가들과 동서양 종교들은 이성애에 입각한 결혼제도를 모두 인정해왔다.
대부분 유신론적 종교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결혼을 자연적인 것으로 가르쳐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라철학, 어거스틴, 아퀴나스에 이르는 기독교 철학,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사상, 로크와 칸트의 근대철학,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같은 사상가들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연합을 결혼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결혼에 있어서 인종을 고려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등장한 정치 공동체일 뿐이다. 근대 영국의 식민지들에서만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고 처벌한 것은 분명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한 것이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는 정치적인 동기였을 뿐이다.
결혼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구별은 결혼의 핵심이다. 인종이 무엇이든지 남자와 여자는 결혼으로 연합할 수 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프랜시스 벡위드(Francis Beckwith)에 의하면 인종 간 혼인금지 법안은 보통법(common law)에서는 선례가 없는 것으로 백인의 문화적 주도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지배 계급에 가까운 백인의 인종적 순수 혈통을 보존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법에서는 합당한 결혼의 필수조건은 인종과는 전혀 관계없이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에 의존한다.21)

2) 전통적인 결혼의 보호가 필요하다.
동성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것과 성관계는 결혼을 위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결혼을 약화시킨다. 동성혼은 인류의 오랜 역사동안 가져왔던 전통적인 결혼관을 파괴하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서의 결혼 이해는 자연법에 근거한 것으로 합당하며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그러나 인종 간 결혼금지는 타당하지 않으며 어떤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인종 간 결혼금지는 대개 사회의 억압을 위한 동기로 작용한 것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서의 전통적인 결혼관은 억압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가 아니다.
따라서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인종문제처럼 다루는 것은 어떤 역사적, 철학적 근거가 없다. 성적 지향은 결코 인종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 보호를 위한 법안(SOGI)를 반대하는 것은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다.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이 보호받는 항목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성적 지향성은 도덕적 평가와 연결되어 있다.
성적 지향성은 인종처럼 생물학적으로 분명한 것이 아니라 지나 치 게 애매하다.
성적 지향성은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약화시킨다.
특히 옥스퍼드 대학교의 존 피니스(John Finnis) 교수는 현대의 법체계의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 지향성’이라는 항목을 추가하는 것은 시민들이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의 서구사회에서 동성혼이 헌법적 수준에서 합법성을 갖게 된 것은 동성애자들의 주도면밀한 투쟁과 로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에 의하면 사회의 주요제도는 “정치의 기본법이나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체제를 말한다. 그래서 사상의 자유 , 양심의 자유 , 경쟁적 시장, 생산수단의 사유 등에 대한 법적인 보호와 일부일처제 등은 주요한 사회제도의 예들이 된다.”22)
롤즈가 가족을 사회의 주요 제도로 설정하는 이유는 가족의 중요한 역할 때문이다. 가족의 역할은 자녀들에게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론 롤즈는 가족의 역할에 대해 아주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롤즈의 전기 저서들은 이성으로 구성된 일부일처제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사회의 주요제도로 설명한다. “가족제도가 정의롭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며 그의 선을 귀하게 여김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명백히 표현할 경우 어린이는 그에 대한 그들의 명백한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23)
그렇지만 롤즈는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에 대해 또는 이성애적 가족이라는 전통적 견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견지한다. 롤즈는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출생과 사망은 매우 중요하며, 출생을 통해서만 그 사회에 진입되며, 사망을 통해서만 그 사회에서 탈퇴한다.”고 말한다.24) 그는 일부일처제를 사회의 주요제도로 설정하였고 출생을 통해서만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주장을 통해서 전통적인 결혼관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롤즈는 그의 사상체계 안에서 일부일처제를 일관성 있게 주장하지 못하고 “동성애자들의 권리와 의무가 질서 있는 가족생활과 자녀교육에 일관된다면 동성애자들의 가족형태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25)
지난 2015년 6월 미국 대법원의 판례를 통해서 가족에 대한 재정의(再定義, 단순히 두 사람간의 결합)는 이미 성(性) 혁명을 통해 무너진 전통적인 가족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우 성(性) 혁명을 통해서 이미 출생하는 아이들의 40%는 미혼의 여성에게서 태어나고 있으며 금번 동성혼 판결을 통해서 부친과 모친에게 생물학적 구분이 없다는 것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지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전통적인 결혼을 완전하게 붕괴시킬 것이다.

3) 종교의 자유는 천부적 기본권이다.
필자가 동성혼을 반대하고 차별금지 법안에 ‘동성애적 정체성’ 항목이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동성혼 지지법안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인 ‘종교의 자유’와 ‘연설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성혼지지’ 법안과 그에 따른 ‘혐오금지’ 법안의 제정은 결국 전통적인 결혼 문화를 편협한 것으로 보게 할 뿐만이 아니라, 종교행사의 자유, 종교적 신념의 보호,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경제활동의 자유 그리고 아동복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동성혼의 권리보다 종교의 자유가 더 상위의 가치이다.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동성애와 동성혼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적 영역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정부의 역할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과 모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위임을 받았다.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예배할 자유와 신(神)에 대한 진리를 추구할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롤즈의 유명한 ‘정의의 두 원칙’에 의해서 보장되는 기본 권리에는 정치적 자유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사유재산권과 신체의 자유, 법의 지배라는 명목으로 부당한 체포 및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포함되며,26) 국가의 중요한 책무는 당연히 양심과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우선적인 것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그는 “국가는 특정한 종교를 선호할 수 없으며 어떤 종교에 가입하거나 탈퇴한다고 해서 벌금이나 근신을 부과할 수 없는 것이다. 법은 한 종교에 대한 배교뿐만 아니라, 전혀 종교를 갖지 않는 것까지도 법률상의 죄로 인정하거나 형벌을 부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국가는 도덕적 종교적 자유를 지지하게 된다.”고 말한다.27)
롤즈는 ‘절차의 중립성’과 ‘목적의 중립성’ 중에서 그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중립성’을 지지한다.28) 중립성이 의미는 “국가는 어떤 특정한 포괄적 교리를 다른 교리보다 선호하거나 장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신관을 수용하도록 하는 어떤 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29) 그래서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녀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양심의 자유를 배우고, 배교가 법률상의 죄가 아님을 알게 된다고 한다.30)
그렇다면 부모의 종교에 대한 배교마저도 법률상의 죄가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 정치적 시민의 교육이라고 한다면 왜 자녀들이 부모의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 결별하고 이성애 결혼을 택할 수 있는 ‘동성혼에 대한 배교’는 생각도 못하게 하는가? 동성혼 지지자들은 차별금지 법안을 통하여 동성혼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상적 독재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역시 동성혼의 합헌 결정보다는 오히려 ‘혼인제 폐지’를 통해서 아예 국가가 혼인제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31) 정부는 혼인문제를 사적인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샌델은 동성혼이 개인의 자유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성혼이라는 결혼의 형식이 공동체의 인정과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인가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동성애의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되지 않아야 할 권리로 일단 규정하고 나면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22
미국의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국의 논리를 좀 더 확대해 적용해본다면 성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논리는 성정체성에 따라 학교의 수학여행 기간 중에 생물학적 특징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방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성정체성이 차별 금지조항에 들어가면 그 가치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제한하는 ‘독재 적 지위’를 갖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을 비방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가령 영국, 캐나다, 미국 등에서 동성결혼 주례를 거부한 목회자들에게 구금 형벌과 벌금형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지위가 독재적이라는 것을 말 해준다.

Ⅲ. 동성혼에 대한 교회의 자세
(1) 기독교적 인간관은 타락한 본성을 전제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선한 본성과 타락한 본성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펠라기우스(Pelagius)와 계몽주의 철학은 선한 인성론과 자유의지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성경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원죄에 의해 타락되고 부패되었다. 따라서 타락한 이후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은 도덕적 자연스러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모든 종류의 죄악이 일어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must master it.)말씀하셨다. ‘it’s desire‘는 다스림의 대상이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살인, 시기, 질투, 분당 등 죄악 된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낀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욕구를 사람들이 갖게 된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가 되게 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다. 이성간 결혼에 대한 대안은 동성혼이 아니라 독신(獨身)과 성적 절제(節制)이다.
그렇다면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 하 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말한 직후에 바로 이어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고 했다. 그렇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복음의 능력은 사람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2) 동성애치료에 대한 공중보건 정책과 사회적 담론을 형성 해야 한다.
미국 정신의학사전에서 동성애가 정신병 목록에서 제외된 후 이제는 동성애를 자연스러움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어떤 치료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곡되고 잘못 된 이성애도 처벌과 치유가 필요한 것처럼 동성애적 성향이 아니라 동성애적 행동을 통해서 잘못이 발생한다면 그에 따른 치유와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성(性) 범죄자들에게 주는 전자발찌를 동성애 범죄자들에게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죄의 성향은 이성애(異性愛)와 동성애(同性愛)를 막론하고 모두 적용되는 것이 바로 법의 지배이다.
또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소아(小兒) 성애와 강간은 처벌의 대상이다. 동성애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는 시도는 사라져야 한다. 모든 동성애자가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 환자는 아니고 모든 에이즈 환자가 반드시 동성애자도 아니다. 그러나 동성애와 에이즈는 분명히 밀접한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2004년부터 한국의 청소년들에게서 에이즈 환자의 비율이 높게 증가하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3)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천부적 인권이다.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동성혼을 거부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정부가 만든 권리가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천부적(天賦的) 인권에 해당된다. 동성애 지향성 보호법안과 동성혼을 반대할 수 있는 종교적인 자유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판단의 오류 가능성과 인식론적인 불일치로 인하여 관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이고 근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런데 차별금지 조항은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게 한다. 동성혼이 한국에서도 허용되고 동성애 지향성을 보호하는 법안이 등장한다면 천부적(天賦的)인 자연권인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침해되고 종교의 자유는 주일에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자유’로만 극히 제한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예배시간에 목회자의 설교도 심지어 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4) 동성혼을 반대하는 교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교회 안에선 돌이키지 않는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자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을 표명해야 한다. 현대 서구교회가 동성애를 용납하는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이성과 문화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로 말한다. 죄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철저히 회개만이 필요하다. 존 스토트 목사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박사의 견해를 인용하며 이를 동조한다. “동성애 결합과 성경적 결혼을 대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교회가 아니다.”32)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복음주의 교회라면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안수하여 세울 수 없다. 만일 누구든지 성적인 죄로부터 회개하지 않는 다면 비록 성직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리더십의 지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성경은 교회 안에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은 더 엄격하게 말씀의 기준이 적용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능력으로 회심한 사람이 리더십이 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선포한다. 사람은 새롭게 될 수 있다.

결론
복음주의적 크리스천들은 성경적인 결혼관에 따라서 살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온건한 방식을 통하여 동성혼의 문제를 지적하고 성경적인 결혼은 자연법에 의거한 것이기에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진 유교를 비롯한 동조 그룹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도덕(道德)은 정치(政治)보다 앞선다. 한 남성(男性)과 한 여성(女性)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결혼관은 국가의 정책과 법으로 변경할 수 없는 자연법적 도덕성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담론화(談論化) 해야 한다.
(*) 글쓴 이 / 김기호 교수(한동대)

< 참고 문헌 >
1) Kevin Deyoung, What does the Bible really teach about Homosexuality? Wheaton, Crossway, 2015.
2) Duane Olson, issues in Contemporary Christian Thought,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1
3)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Phillipsburg: 2004
4) 캐시 루디, 섹스 앤 더 처지: 젠더, 동성애,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변혁, 서울: 한울, 2012
5)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서울: IVP, 2011
6) 플로랑스 마뉴, 동성애의 역사 서울: 이마고, 2007
7) Martha C.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8) Craig A. Williams, Roman Homosexual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9) Ryan T. Anderson, Truth Overruled: The Future of Marriage and Religious freedom, Washington D.C.: Regnery Publishing, 2015.
0) 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5
1)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1999
< 미 주 >
1) Martha C.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1999), 200
2) 국가인권위원회 관련법 30조 2항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2002년 7월에 생물학적 요인과 상관없이 심리적 정체성 장애를 인정하고 성전환자의 경우 호적상 성별을 정정하도록 하는 부산지법의 판결도 있었다. 그 후 2002년 12월 한 성전환자가 법적으로 변 경 된 성별을 갖게 된 적도 있었다.
3) John Stott, Same-Sex Partnerships?(Zondervan,1998) 제4장 참조 26
4) Derrick Sherwin Bailey, Homosexuality and the Western Christian Tradition(London:Longmans, Green, 1955)
5) Homosexuality: Not a Sin-Not a Sickness: Toward an evaluation of pro-Gay heological perspec
-tives, 80 & Russ Tate, John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Gray People in Western Europe from the Beginning of Christian Era to the Fourteenth Century, 90-97을 참고
6) 존 스토트,‘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서울: IVP, 2006) 510-512.
7) Boswell, ibid., 103.
8) R. E. Clements,‘Abomination in the Book of proverbs’in Fox, Michael et al(ed.), Texts, Temples, and Traditions: A Tribute to Menahem Haran(Winona Lake: Eisenbrauns, 1996), 211-225.
9) Victor Paul Furnish, “what does the bible say” in Geis, Caught in the Crossfire, pp. 57-66.
10)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 26-30. 가톨릭 역본인 예루살렘 성경은 이 단어를“미동과 남색자 catamites and sodomites”로 표현한다.
11)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517.
12)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133.
13)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UCC)는 1972년에 동성애자였던 윌리암 존슨(William Johnson)의 목 사안수를 허락한 이후, 1980년 남녀 동성애자들을 목사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한 최초의 대교단 이 되었다. 1991년 UCC 총회는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가 성직자가 되도록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하였다. 2005년에는 공식적으로 동성혼을 지지한다고 결의하였다. Mike Schuenemeyer,“Marriage Equality”United Church of Christ Web Site, November 4,2009,
http://www.ucc.org/lgbt/issues/marriage-equality/#Marriage_Equality_and_the_Ucc.
14) 대한민국의 선교에 크게 기여했던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1999년 레즈비언 제인 스파 (Jane Spahr)를 그 해의‘신앙의 여성’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그 교단 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 그리고 2015년 현재 미합중국장로교회는 동성혼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교회들은 교단을 떠나가고 있다.
15) 2003년 6월 7일 미국 성공회는 주교 관구를 둘로 나누어서 뉴햄프셔의 교구에 공공연한 동성애자 인 진 로 빈손(V. Gene Robinson)을 뉴햄프셔 주교로 선출하였다. 13년 전의 결혼 서약을 어기고, 그의 아내와 두 어린 딸을 버린 후에 진 로빈슨은 게이로 등장했고 그는 남자 파트너와 함께 산다. 그를 주교로 임명하기 위해서 미국 성공회 내 두 단체의 표결이 필요했다. 주교단은 62대 45로 찬 성했고 평신도 사제로 구성된 단체는 128대 63으로 찬성을 했다. B.A. Robinson“Religious conflicts: The Episcopal Church, USA and Homosexuality,” Ontario Consultants on Teligious Tolerance, last updated 2007.9.22., http://www.religioustolerance.org/hom_epis.htm.
16) 2009년 미국 루터교(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America)는 676대 338로 동성애자가 성 직자로 사역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동성결혼 역시 지지하였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교회들은 교단을 떠났다. Mark S. Hanson, “churchwide Assembly Updat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2009.8.22. http://elca.org/Who-We-Are/Our-Three-Expressions/Churchwide-Orginization.
Office-of-the-Presi ding-Bishop/Messages-an-statement/090822.aspx.
17) Duane Olson, Issues in Contemporary Christian Thought, 204.
18)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5.
19) Southern Baptist Convention,“The Baptist Faith and Message,”sbcnet, n.d.,
http://sbc.net/bfm/bfm/bfm2000.asp#i.
20) 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2005), 477.
21) Francis Beckwith,“Interracial Marriage and Same-Sex Marriage”
22) John Rawls,‘정의론’40. 이탤릭은 필자의 강조사항이다.
23) Ibid.629.
24) Rawls, Political Liberalism, 84-85. 27
25) Ibid., 467. 각주 60을 보라.
26) John Rawls,‘정의론’106.
27) Ibid., 289.
28) Rawls, Political Liberalism , 192-193.
29) Ibid., 193.
30) Ibid., 193.
31)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10) 354.
32)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133
– 성적 지향(性的 指向, Sexual orientation) / 자신이 이끌리는 이성, 동성, 혹은 복수의 성 또는 젠더를 나타낸다. ‘성적 취향’이나 ‘성적 성향’이라는 용어도 종종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때의 끌림은 감정적이거나, 낭만적인, 성적인 끌림일 수도 있고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대다수의 심리학 혹은 정신의학 단체는 성적 지향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었다.(그러나 복음주의 교회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성적 지향의 분류에는 크게 반대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이성애, 같은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동성애, 두 성 모두 또는 때에 따라 둘 중 한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양성애, 이분법적인 남성과 여성 외에도 모든 성에 이끌릴 수 있음을 뜻하는 범(汎) 성애, 성적 이끌림이 없음을 뜻하는 무(無) 성애 등이 있다. 이러한 분류는 때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이끌림이나 행동의 경향 및 강도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의 이성애는 종종 동성애로 오해받곤 한다. 젠더 퀴어나 간성에게는 동성과 이성의 판단이 모호할 수 있다. 법률 용어로서의 ‘성적 지향’은 처음에는 판례를 통해서 의미가 형성되었다. 동성애, 이성애 또는 양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에서 주로 사용한다.
– 성 정체성(性 正體性, gender identity) / 자신의 젠더에 대한 자각, 자아의식을 말한다. 성별 정체성, 성 주체성, 성 동일성이라고도 하며, 성적 정체성과는 다르다. ‘성 정체성’의 종류는 남성 정체성, 여성 정체성, 젠더퀴어적 정체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성 정체성이 신체성별과 일치하는 경우를 시스젠더, 성 정체성이 신체성별과 반대인 경우를 트랜스젠더, 그리고 시스젠더에도 트랜스젠더에도 속하지 않는 성 정체성을 가진 경우를 젠더퀴어라 한다.
– 성적 정체성(性的 正體性, sexual identity) / 스스로 어떤 사람에게 연애 감정이 생기는지 혹은 성적으로 끌리는지 자신이 판단한 것이다. ‘성적 정체성’은 더 정확히 말해 성적 지향 정체성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의 인정 또는 내재화를 뜻하기도 한다. ‘성적 정체성’과 ‘성적 행동’은 ‘성적 지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생각을 가리키는 정체성, 개인의 실제 활동을 가리키는 행동, 동일하거나 반대, 둘 다의 성별 또는 성 정체성에 대한 연애적 또는 성적 이끌림 또는 둘 다에게 이끌리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성적 지향과는 구분된다.
기존에 ‘성적 정체성’의 형성은 성 소수자만이 겪는 과정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보다 현대적인 관점은 ‘성적 정체성’의 형성이 더 보편적이라고 보면서 현대의 다른 주류 정체성 형성과 이론의 넓은 영역 내부에 성적 정체성을 넣으려고 시도한다. 출처 / 위키백과 (주) 위의 내용 중 일부는 본지의 취지와 일치 하지 않습니다.(편집자)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대한 연구보고서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대한 연구보고서

예장통합 허호익교수


I. 연구 경위

최근 사회적으로나 교계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퀴어신학의 이단성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대사회문제(동성애)대책위원회의 청원을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수임하여 퀴어신학의 이단성 여부를 조사하였다.


II. 연구 내용

1. 퀴어신학의 정의

‘퀴어신학’(Queer theology)의 ‘퀴어’(queer)라는 용어는 ‘낯설고 이상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퀴어신학은 1960년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동성애(게이/레즈비언) 옹호신학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본다. 1980년대 일단의 사람들은 본래 부정적으로 사용되던 ‘퀴어’라는 용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논리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 전통신학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터모던주의의 상대주의적 견해에 동조하면서, 기독교가 처음 전파될 당시 세상에 낯선 것이었던 것처럼 퀴어신학 역시 비록 지금은 낯설어 보이지만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는 신학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 내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이나 억압은 없어져야 함을 주장함과 동시에 성소수자 성애(특히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정립을 추구하려 한다.


2. 퀴어신학의 주요 문제점들

퀴어신학은 하나로 체계화되어있지 않고 퀴어신학자들 내부에서도 서로 이견들이 존재하는바, 이 보고서는 퀴어신학에 대한 상세한 신학적 논의를 하기보다 보편적으로 퀴어신학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① 성경의 규범적 권위를 무시하고, 자의적 해석을 피할 수 없다.

퀴어신학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편견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은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기에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해 비난하고 정죄하는 구절은 고대 근동 지방의 시대적, 지역적, 종교-문화적 편견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퀴어신학자들은 오히려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소수자들의 견해를 성경적 관점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퀴어신학의 입장에서 성경 66권을 해석한 주석서(The Queer Bible Commentary, 2008)까지 발행하였다. 그들은 성소수자들의 관점에서 발행된 이 주석서가 성적소수자들뿐 아니라 이성애자 기독교인들 역시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전거(典據)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예로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몇 가지 성경해석을 살펴보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가부장적인 해석이며, 소돔과 기브아 주민들의 죄는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불친절과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한 성폭력미수이며, 레위기의 제사법이 신약의 시대에 폐기된 것처럼 동성애를 금하는 율법 역시 더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바울의 동성애 금지는 동성애 자체의 금지가 아니라 성인남성이 소년을 대상으로 한 착취적 형태의 동성애 금지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해석은 정당한 근거를 결여하고 있으며, 성경의 문자적 해석의 틀을 넘어선 자의적 해석이다.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경해석은 원칙적으로 텍스트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문자적 해석이 우선이며, 이후에 상징적 해석을 비롯한 다른 해석이 더해져야 한다. 더 나아가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는 율법들을 시대적 산물로 환원하여 폐기하는 그들의 논리는 성경의 규범적 권위를 상대화하는 위험한 시도이다.


②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상대화한다.

성소수자 성애 옹호론자들은 성소수자적 성애를 선택한 것이 의지적이라기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유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적인 성향을 타고났기 때문에 동성애는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그들의 선택과 행위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비일상적이고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성소수자들을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퀴어신학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퀴어철학의 관점에서 ‘성정체성’(gender identity)의 구별조차 상대화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렌스젠더’(LGBT) 옹호신학자들은 남성/여성 또는 동성애자/이성애자라는 이분법적 성정체성을 대체로 수용하는 데 반하여, ‘퀴어’(Q) 신학자들은 이러한 고정된 성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성(性)은 고정적 정체성이 아니라 자유롭게 이동 가능한 유동적인 것으로 본다. 신학적으로 그들은 ‘양성/그리스도’(bi/Christ)를 주장하며 예수는 이성애자도, 게이도, 레즈비언도, 트렌스젠더도 될 수 있는 배타적이지 않은 그리스도라는 ‘퀴어 그리스도론’(queer Christology)을 주장한다. 따라서 퀴어신학은 성소수자 옹호신학 중 가장 급진적이며 전복적인 신학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포함한 성소수자들의 성애를 선천적 유전성이라 해석하는 견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동성애 성향이 선천적이라는 여러 논문이 발표되고 언론들에 의해 대서특필 되기도 했지만, 동성애의 경향이 후천적인 것이며 의지적 차원이 더욱 중요하다는 반론적 연구들도 많다. 설사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성애가 간접적으로, 미약하게나마 유전적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나 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다는 가장 단순한 창조질서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국내외 통계를 볼 때, 에이즈 확산을 남성 동성애 집단이 주도하고 있음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성소수자 성애가 의지와 교육을 통해 교정가능하다는 여러 연구결과가 보고되고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소수자 성애의 선천성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성(性)의 유동성을 주장하며 성정체성 구분 자체를 부인하며, 정통신학의 왜곡을 가져오는 퀴어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상대화할 뿐 아니라, 사회적, 논리적, 신학적으로도 불합리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③ 퀴어신학은 인본주의적 신학이다.

퀴어신학은 성소수자들을 위한 맞춤형 신학이다. 그들은 성정체성과 젠더의 전통적 체계에 반대함으로써 사회적, 종교적으로 침묵 되어온 목소리들을 재발견하며, 감춰진 관점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시도 이면에는 분명 성소수자들의 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들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열정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던 것처럼, 진정한 기독교라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하고, 그들에게 연민과 사랑과 관심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공동체는 성소수자들을 정죄하기보다 사랑과 보살핌을 통해, 그들이 치유되어 진정한 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정신이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의하여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다. 칼뱅의 이야기처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은 인간의 정의의 잣대로 판단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과 정의가 참 정의의 기준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Let the God be the God)는 개혁신학의 외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기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와 신학은 물론 세상과 소통해야 하고 시대에 따라 낡은 옷을 벗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질적 진리는 변화될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의 교회(the Church of world), 세속적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 안(in)에 있으나, 세상을 초월하는(above) 하나님의 교회 (the Church of God)이다.

따라서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성경의 기본적 진술과 기독교 정통신학의 가치관을 파괴하는 퀴어신학은 매우 위험한 신학이자, 왜곡된 신학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III. 연구결론

앞서 살펴본 것처럼, 퀴어신학은 성경의 규범적 권위를 부인하며, 자의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성소수자의 성애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보며 더 나아가 성정체성의 구분마저 부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상대화한다. 더 나아가 인본주의적 가치관과 기준에 의하여 전통적인 신학의 체계와 가치관을 파괴하는 세속화된 신학이다. 따라서 퀴어신학은 이단성이 매우 높은 신학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교단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퀴어신학의 논리에 현혹되지 않도록 경계 해야 하고, 신학교에서도 신학도들에게 이 위험성을 교육하여 퀴어신학의 확산을 막아야 하며 퀴어신학을 옹호하는 어떠한 신학적 입장도 용납될 수 없다.


IV. 참고문헌

길원평 외 5인. 『동성애 과연 타고나는 것일까?』. 서울: 라온누리, 2014.

바른 성문화를 위한 국민연합.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진실』. 서울: 밝은 생각, 2013.

Tamagne, Florence. 『동성애의 역사』. 서울: 이마고, 2007.

김명숙. “퀴어신학과 관음신학” 종교와 문화, 25집, 2013.

김영계.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비판과 대안” 칼빈논단, 35집, 2015.

김종걸.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 40집, 2007.

길원평, 민성길.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고찰” 신앙과 학문, 19호, 2014.

허호익. “동성애에 관한 핵심 쟁점” 장신논단, 38집, 2010.

그 외 다수의 기고문과 기사들

2020년 3월 24일 화요일

초기 내한선교사의 남도행전 (마지막)ㅤ<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18931월의 예양협정에 의해 호남선교를 맡은 남장로교 선교회는 호남에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는 것이 이르다고 판단하여, 다음 달인 2월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인 정해원을 전주로 보내 전주 선교지를 물색하게 했습니다. 이에 정해원은 전주에 내려와 적당한 곳을 찾다가 완산 은송리에 초가 1동을 마련합니다. 그해 9, 테이트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가 처음으로 전주에 와서 2주간 머물렀고, 1894년 테이트와 누이동생 메티(Tate Mattie Samuel 한국명 최마태)가 전주로 내려와 정해원이 마련한 은송리 초가집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지역에 동학이 주도하는 농민혁명이 일어나 이들 선교사는 다시 서울로 철수하게 되지요. 이쯤에서 동학에 대해 좀 살펴봅시다

갑오농민(1894년 갑오년에 일어났다 하여 갑오농민이라 불렀다.) 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전봉준은 전라도 53개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전주에 두고 총 지휘를 하였습니다. 농민군과 싸우게 된 정부군은 이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청나라에서 군사 3,000명이 오게 됩니다. 이에 질세라 일본군도 뒤이어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7,000명의 병력을 보내 왔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급박해지고 있을 때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이 농민혁명군과 휴전 교섭을 하고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게 됩니다. 이 협정을 계기로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전주는 전란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학혁명군을 진압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 온 청나라와 일본군은 18947,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우리나라는 그 양국의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전주가 농민군에 점령될 무렵인 530일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급히 서울로 올라가 전란을 피하였지만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그들은 기도하면서 선교를 재개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테이트 선교사는 선교를 조금이라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에 1894년 가을, 조심스럽게 전주로 들어갔습니다. 전주로 들어간 테이트 선교사는 그곳이 관군과 농민군의 싸움으로 마을들 중 3분의 1이 파괴되거나 불타버린 참담한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자 그는 한시바삐 선교활동을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선교사들에게 전주의 모습에 대해 보고를 드렸고, 그곳에 모인 선교사들은 매일 모여 전주의 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895318일 테이트 선교사와 레이놀즈는 조사 조씨와 강씨, 어학선생 이씨 그리고 소년 요리사 칠성이를 데리고 전주로 내려와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그 전에 전도했던 초신자들은 이미 흩어져 찾을 수 없었기에 새롭게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에 구입하려 했던 집 두 채와 앞으로 올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다섯 채의 작은 집들을 구입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큰 소나무들을 벌목해서 완산 지맥 중 한편인 등성이에 터를 닦고 두 채의 집을 마련했습니다
189615일 전주 은송리교회에서 새해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는 공식적으로 전주교회가 세워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테이트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동생 메티 선교사는 여자들에게 간단한 치료와 위생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89736일 토요일, 전주로 모여 든 선교사들은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 예배를 드렸습니다. 의료선교사인 해리슨은 군산에서 전주로 완전히 이사를 왔습니다. 말을 타고 전주에 도착한 그는 맨 처음 구입했던 은송리 집에 거처를 정하고 약방을 차려 환자들을 위한 간단한 의료시술을 하면서 의료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주일인 다음날 전도를 했던 사람 중 8명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선교사들은 먼저 인도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장터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314) 교회 예배에는 10명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선교사들은 전주 선교에 대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한편 해리슨 선교사는 선교의 방편으로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두고 328일 주일부터 사내아이 네 명을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 me)이라는 찬송가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유교사상과 미신에 사로잡힌 부모들이 선교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아이들을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할 때도 있어 주일에 한명도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은 모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와 평온한 모습으로 장터 전도와 거리·축호 전도를 계속하였습니다. 때마침 레이놀즈 내외와 그의 큰아들 볼링 등이 전주로 이사와 선교 운동에 가세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며 장터와 거리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620일 주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 날은 레이놀즈가 설교를 담당하였습니다. 74일 주일에는 아홉 사람이 참석했으며 믿기로 작정한 사람도 여럿 되었습니다. 곧 주일이 아닌 날에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믿음의 도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문답한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예비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717일 주일에 레이놀즈의 집례로 김내윤(테이트의 사환), 김창국과 김제원의 부인 강씨(김창국의 모친), 함성칠의 부인 임씨, 유성안의 부인 김성희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81일 주일에는 처음으로 성찬예식이 레이놀즈 집례로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이날 세례를 받은 김내윤의 딸 보영(寶榮)은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테이트 선교사의 집 인근에는 김창국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김창국은 키가 컸는데, 심성은 소심한 소년이었습니다. 김창국과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테이트 선교사의 성경 가르침을 받았고 찬송가를 배워 불렀습니다. 김창국의 아버지는 한의사였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해리슨 선교사를 찾아와 치료받기를 원해서 해리슨 선교사는 그에게 잠시 진정제를 놓아주고 약을 조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의사인 창국의 아버지가 커다란 침을 놓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렸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침놓은 것을 처음 봤기 때문에 그 행위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김창국은 세례를 받은 이후 소년들을 교회로 불러 모아 스스로 주일학교 교장 노릇을 하였는데, 해리슨 선교사는 데이비스(Linnie Davis) 선교사와 결혼한 뒤 꾸린 새 가정에 그를 사환으로 채용하였습니다. 그 후 해리슨 선교사는 그를 평양숭실중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키고 이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어 그는 1915년 평양신학교 3회 졸업생으로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창국 목사는 군산 영명학교와 금산심광학교에서 근무하였으며(임영신의 선생), 1917년 제주도 선교사로 6년간 근무하며 제주도의 독립운동가인 조봉호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독립모금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2년에는 광주 남문밖교회(광주제일교회)에서, 1924년에는 광주 양림교회를 개척하여 25년간 봉직하였습니다. 그는 슬하에 4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김현정은 목사이며, 둘째 아들 김현승은 유명한 시인(대표작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 등 다수)이고 셋째 아들 김현택은 전북대 교수(미국 거주)가 됐고, 넷째 아들 김현구는 전남여고 교장을 역임한 광주중앙교회 원로장로입니다. 은송리의 한 떠꺼머리 소년이 예수를 믿음으로 한국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로 서고, 후손들 또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급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전주 서문밖교회의 최초의 세례교인인 유성안의 부인 김성희는 집안은 부유했지만 두 딸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집안에 머리 둘 곳 없이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메티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은 김성희는 남편에게는 서양사람 집에 신기한 물건을 보러 간다고 말하고 교회에 나가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김성희에게 모진 구타를 하면서 만일 다시 교회를 나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성희는 계속 교회를 나갔고 그때마다 남편의 학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 처음 그녀가 한 일은 어린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여자들에게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개 엄마혹은 신체의 특징을 따서 이 부러진 여자’ ‘코에 사마귀 있는 여자등으로 불렸습니다. 김성희도 본래 이름이 없었지만 세례를 받을 때에 선교사가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두 딸의 이름을 짓게 된 김성희는 예수님 보시기에 귀한 보배 같은 딸이라고 하여 큰 딸에게는 큰 보배’, 작은 딸에게는 작은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어느 날 김성희는 잉골드(Ingold, Mattie B 1867-1962. 1895년 내한 1897년 전주의료선교 시작 1905년 테이트 선교사와 결혼)선교사를 급히 불렀습니다. 잉골드가 가서 보니 뒤뜰에는 커다란 돼지가 죽어 있고, 그 배 위에는 아픈 어린 아이가 올려져있었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그렇게 해서 고쳐질 것이라는 전례미신 때문이었습니다. 잉골드 선교사는 그 아이를 급히 데려다가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어도 남편 유성안은 자신의 아들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김성희는 엄청난 결단을 하였습니다. 제사 음식 장만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남편은 부엌칼로 김성희를 위협하면서 제사음식을 장만하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때 김성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원한다면 나를 죽이시오. 당신은 나의 몸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의 영혼은 죽이지 못할 것이요. 나는 결코 제사를 준비하지 않겠소.” 이러한 대답을 들은 유성안은 칼을 높이 든 채 얼마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아내의 모습에서 그 어떤 두려움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얼굴은 오히려 굳은 의지로 환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유성안은 칼을 집어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 후 유성안은 본인은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부인의 교회생활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두 딸도 기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큰딸은 기독교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는 그의 책에서 이 동양여자는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라는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지음 한인수 옮김 호남선교 초기역사도서출판 경건 1998. 28-33)


전주시 완산동에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이 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부의 서쪽 용머리 고개 동쪽에 군자정을 만들었는데 이곳을 기령당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경로당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령당 안에는 이상만, 이건호, 송성용 등이 30여개의 풍광을 적은 현판들이 있었습니다. 기령당 뒤쪽에 있는 송림 사이에는 송석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송석정은 완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전주천 맑은 물이 흐르고, 좌우에는 다가산과 곤지산이 감싸고 있습니다
송석정 바로 밑은 서천교를 넘어 정읍으로 가는 행인들이 지나가는 중요 도로였습니다. 그 주변으로는 기와집으로 된 청학루와 백학루가 있었는데, 이곳은 소나무가 많다 하여 은송리라고 불렀으니, 과히 옛 풍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송석정에 걸린 편액은 효산 이광열이 쓴 여러 작품 중에서 필획과 포치가 뛰어난 작품에 속합니다. 비록 편액 주변이 장식이 없고 단청이 되지는 않았지만 글씨만큼은 어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이 송석정은 멋진 정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도심 속에서 속세를 떠난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정자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먼 곳까지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은송리는 북두칠성의 모양을 닮은 완산칠봉에 의해 조성된 명당 가운데서도 핵심을 이루는 곳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은송리야말로 전주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이곳은 조선 왕조의 시조인 신라 사공(新羅 司空) ()의 발상지요 중시조 목조 안사(穆祖 安社)의 본향으로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은송리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최씨, 이씨, 유씨의 시조들이 일찍이 개창의 터전으로 삼아 오늘날 한국의 명문 성씨를 일구어낸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합니다. 워낙 텃세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섣불리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은송리와 남부시장은 서로 마주보는 형세라서 남북을 연결하는 전주천의 다리들을 중심으로 각종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때문에 일찌감치 주민들의 생활전선이 형성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은송리는 동학혁명 당시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전주에 입성한 농민군과 성을 탈환하려는 관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와 같이 유서 깊고 풍광도 좋으며 장터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은송리에 레이놀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의 첫 선교를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외지인에게도 텃세를 부릴 정도인데, 외국인이 은송리에 터를 잡고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그 지역 양반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양반들은 항의를 했고, 이러한 항의가 계속되자, 1900년 전주 감영까지 나서게 되었습니다
전주 감영에서는 선교사들에게 은송리 그 지대는 태조의 조부가 태어난 성역이기 때문에 거주를 허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공론이 벌여졌고, 결국 타협 끝에 그에 상당한 땅을 다른 곳에 주고 건축 비용을 일체 변상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완산동 은송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화산(현 중화산동)으로 자리를 옮겨 그 일대가 선교사 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서문밖교회(西門外敎會) 시대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기전학교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은송리 전주교회는 설립 초기에 테이트 선교사와 해리슨 선교사가 교회를 이끌면서 양적으로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1900년 가을에는 113명이나 되었고 한번은 54명의 세례지원자를 교육시킨 후 문답고시에 6명만이 합격하여 세례를 준 일도 있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전주 장날에는 장터선교에 열을 올렸고 평일에는 전주성 밖으로 나가 인근 동리에도 전도를 하였습니다. 특히 전주 성내에 사는 양반들 선교에 열의를 보였습니다. 나라의 형편이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모습에 슬퍼하고 있던 전주의 양반들은 점점 선교사들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한문으로 된 성경을 구입하여 읽으며 새로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서문밖교회에는 양반과 상민들이 함께 어울려 예배를 드리니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04년 전주에 와서 활동한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1873-1918. 한국명 보위렴. 쿠바에서 활동하다 1904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주, 목포, 광주에서 활동. 사람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림. 1912년 몸이 쇠약해져 귀국)의료 선교사가 19053월 전주의 어느 양반의 병을 치료하던 중에 이곳을 찾아온 의병들이 그를 일본 경찰이라고 여겨 칼로 여러 군데를 찔러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집의 안주인이 죽어가는 그 앞에 막아서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그들이 물러난 뒤 그는 급히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그의 귀와 머리에 난 상처는 더 이상 낫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이 일이 전주의 양반들에게 소문이 났고, 결국 이 일은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당시 선교부에 올라온 보고입니다.
 그해의 도시 선교는 앞선 해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052월까지 교회에 모인 남자들은 완전히 중상층 상인이거나 농부가 아니면 하층 짐꾼들이었다.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무관심했다. 포사이드박사가 상처를 입은 한 달 뒤 상당수의 고위층과 부유층의 이씨 문중사람들과 집안의 가장들이 큰 길에서 가마를 내려 예배드리는 외국사람 집에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그 도시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이 사건이 본이 되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체면이 깎이는 일이 아니었다.”(애너벨 M. 니스벳 호남선교 초기 역사69)
포사이드 선교사는 치료 후 다시 전주로 돌아왔으나 곧 목포로 가서 병원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온갖 어려움 중에도 환자들을 돌보아 사람들로부터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1911년 자신의 고향인 루이빌로 귀국하여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1918년 결국 그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슬픈 소식은 해리슨 선교사와 함께 전도활동을 하던 부인 데이비스 선교사가 장티푸스에 걸려 치료를 받다가 1903620일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19029월 레이놀즈 선교사가 서울 구리개(아현)교회(서울 중앙교회)로 옮겨감으로 1904년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서 전주 서문밖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군산 선교에 너무 지쳐 있던 전킨 선교사가 휴식을 취하는 목적으로 서문밖교회로 온 것이지만 전킨이 어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선교사입니까? 오히려 그는 일을 더 만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20리 밖으로 순회전도를 하지 말라는 선교회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주를 중심으로 장터선교, 노방전도, 축호전도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교인 수는 날로 늘어갔습니다. 19059월 서문밖교회는 완산에서 화산으로 이제 전주의 4대문 중의 하나인 서문과 아주 가까우며 전주천을 건너 전주 부중으로 들어가는 문턱인 서문밖 현 위치로 옮기게 됐습니다. 거기에 780평의 땅을 구입하고 건평 50평의, 벽돌과 기와지붕을 인 한양절충식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이곳이 바로 서문밖교회입니다
전킨 선교사의 진두지휘로 새로 지은 예배당 안에는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좌석을 구분하고 가운데에 휘장을 전후로 길게 쳐서 남녀반이 서로 마주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이는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낡은 유교의 관습이라 하여 젊은이들 중심으로 철거를 주장하여 1921612일 교인전체의 의견을 물어 휘장을 철거하게 된다.) 총 공사비는 3,500냥이 들었는데 2,300냥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고 완산의 선교사 사택 한 채를 헐어 자재를 보충하여 소요경비를 충당하였습니다. 은송리에 있을 때는 은송리 예배당으로 부르다가, 1905년 전주부내로 교회를 지어 옮기니 전주교회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통칭 전주 서문밖교회로 불렀는데, 그러다 이곳은 19551214일 마침내 전주서문교회로 개칭됩니다.

19077월 일본은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맺어 행정권을 빼앗고 조선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시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백성들은 나라의 성쇠존망(盛衰存亡)의 혼탁지세(渾濁之世)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존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백성들의 죗값이니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나라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예레미야의 통곡의 마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회개와 부흥의 불길은 전국교회로 번져 나갔습니다
전주 서문밖교회에서는 500명이 자진해서 나와 전도대원이 되었고 5,000권이 넘는 단편복음서를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교인들이 날연보를 바치기로 서약한 날이 총 3,349일이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부흥 전도운동에 전킨 선교사는 앞장을 서서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그러한 만큼 그의 육신은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8115<예수교신보> 교회 통신란에는 다음과 같은 소식이 실렸습니다.
 
전라도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남

본월 2일에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 목사를 아시는 형제자매는 육신의 섭섭한 정회를 금하기 어렵도다. 이 목사는 교중 사무 보는 중 제일이더니 불행히 세상을 떠났으니 장차 그 자리에 대신 사무 보실 이가 그와 같이 잘 보리라고 하기가 어렵겠도다. 이 목사가 우리나라에 오신지 16년에 전라도에서만 교중사무를 주관하셨으나 사경할 때에는 항상 다른 곳으로 다니며 많이 인도하셨고 어디가든지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으며 그 집안 식구는 부인과 아들 3형제와 딸 하나이더라. 슬프다. 이 목사가 육신의 고락을 다 버리고 세상을 떠나서 낙원으로 간 것을 생각하면 가쁘다고도 할 수 있지마는 그 외로운 부인과 어린 자매들의 정경을 생각하면 눈이 어둡고 기운이 막혀서 기도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돌아보사 잘 보호하실 줄로 믿삽나이다.(전주서문교회 100년사177)
 
전킨 선교사는 190812일 급성 장티푸스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알고 있는 선교사들과 서문밖교회 교인들 그리고 군산, 익산, 김제 등 그를 통해 전도 받고 믿음을 시작한 교회 교인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성경말씀처럼 이김의 시킨바였습니다. 에너벨 니스벳은 그의 회고록에서 전킨 선교사의 장례식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전킨 선교사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전킨의 얼굴을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에 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위렴 목사는 살아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에너벨은 슬픔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 전킨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의 뜻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전킨은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이라고 하는 데에 격렬하게 반대를 하면서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호남선교 초기역사58-59)
 
전킨 선교사가 전라도 땅에 뿌린 복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씨앗들은 크게 자라나 120년이 지난 오늘, 이 지역은 전국적으로 가장 복음화율(30%이상)이 높은 곳이 되었습니다.

7인의 선발대로 전킨과 함께 한국에 온 매리 레이번 전킨(Mary Leyburn, Junckin) 부인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교우들에게 전킨 선교사가 생전에 서문밖교회를 새로 건축하였지만 종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고 말하니, 서로 연보들을 하여 직경 90cm나 되는 큰 종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해외선교신문의 편집장 윌리엄(H F William)목사는 직접 이 종을 큰 기선에 실어 한국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제물포에 도착한 이 종은 다시 범선 편으로 만경강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전주에서 40리 거리인 김제의 회포면 쌍강포에 내렸습니다. 다시 인근에 난산교회와 쇠평리교회 신자들이 이 종을 쇠달구지에 실어 서문밖교회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종각을 세우기 위해 교인들이 헌금을 하고 인근 교회들도 협력하였는데 김제 번드리 교회에서는 5원을 보내 왔습니다
종각 건축위원으로 김필수 장로, 전영칠 집사 그리고 목수 김학수에게 맡겨 종각을 세우니 마침내 19081210일 오후 4시 헌종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 후에 윌리엄 레이놀즈, 니스벳 선교사와 전영칠 집사 그리고 앞으로 종을 관리하며 타종 책임을 맡은 안경오가 차례로 타종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감격을 김필수 장로가 1230일자 <예수교 신보>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전주서문교회100년사179)
 
한 번씩 종을 쳐 보는데 뗑 뗑 뗑 사랑하는 전 목사의 기념종소리로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오르신 후 보혜사를 우리를 외로운 자식같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심 같이 전 목사는 종을 보내게 하여 이곳 교우와 다른 친구들을 경성하게 하셨도다.
비록 전킨 선교사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셨지만 그 후 그 종소리가 울릴 때 마다 그의 신앙과 선교정신도 함께 서문밖교회와 호남 모든 교회들에게 울려 퍼졌습니다.
 

남 장로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성경 교육에 필요한 책을 직접 쓰거나 번역 출판하여 사람들에게 읽게 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 부인인 잉골드 선교사는 어린이 성경교육을 위해 예수교 초학 문답을 저술하였고, 메티 선교사는 인모귀도(Leading the mother in the right way)라는 책을 썼는데 여자 매서인 과부 이씨가 예수를 믿게 된 일과 믿은 후 친정어머니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는 내용입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마훗(Mahooe)이 쓴 Art of Soul Winning이란 책을 번역하여 개인전도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출판한지 1년도 되지 않아 2,000부가 다 팔려 매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의료선교사 윌슨(Wilson Patterson)은 의학에 관한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우리말 성경은 로스선교사에 의해 만주에서 발간된 예수셩교젼서인데, 이는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것으로 주로 의주사람들에 의해 번역이 되어 평안도 방언이 많이 섞여 있던 터라 남쪽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글 번역 성경이 필요해졌습니다. 번역위원을 선정하였는데, 북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 게일 목사 그리고 남장로교회의 레이놀즈 목사가 성경번역 일을 맡았습니다

19026월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까지 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해를 지나갈 무렵 다른 배와 충돌하여 좌초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살아난 미국 광산업자인 보올비( J.F.Bowby)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아펜젤러 목사는 충분히 살아나올 수 있었지만 배 아래층 3층 칸에 있던 조수인 조한규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다가 본인은 살아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고로 한국인 14, 일본인 4, 선원 4명 그리고 아펜젤러 목사 이렇게 23명이 실종 사망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선교사인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군산 내초도감리교회에 순교관을 건립하여 그의 아름다운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끝에 1904년 번역을 끝낸 신약성경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구약전서의 번역에도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언더우드 목사는 병환으로 그리고 게일 목사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킨 선교사 별세 후 전주 서문밖교회를 맡게 돤 레이놀즈 목사가 주도적으로 노력해야 했고, 그 결과 191042일 구약전서의 번역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글 성경은 레이놀즈 선교사의 노고의 결과요 또한 서문밖교회 교인들이 그를 도와 번역 사업에 동참하였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특히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서문밖교회의 이승두이고 또 한사람은 서울에서부터 번역 사업에 종사한 김정삼입니다. 이들은 우리말로 교정하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그 중 이승두는 191111일 장로가 되었습니다. 본래 이승두는 1909711일 피택되었으나 성경번역일로 늦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12년 서문밖교회는 레이놀즈 목사가 사임하고 최초로 한국인 목사를 청빙하게 되었습니다. 청빙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지방에서 목회하고 있던 김병룡 목사였습니다. 김병룡 목사는 1897년부터 평북 의주군 읍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평북선천읍교회 남자 중학교(신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0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 최대진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됩니다. 김 목사는 의주군 남재 낙원 농상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19129월 전주 서문밖교회 목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주 소음리 정거장에 도착하던 날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인들이 나와 열렬하게 그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1913415일자 <예수교회보>(15)에 김병룡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때는 밤이라 수 십리나 행하여는 사랑하시는 각 학교 선생 여러분이 자행거로 수십여리를 나와 인사하는 중 어린학도들이 기쁜 소리로 부르고 오리 상거에는 여중학교 선생 누님들이 수다한 학생들 인도하고 여러 직분과 여러 사랑하는 형제는 반가히 부르는 말씀과 사랑에 손으로 붙잡고 영접함을 다 말할 수 없사와 주은을 감사할 뿐이옵고 집에 들어와 보온즉 수백여환 가격으로 수리해 거처에 편케하며 가용물품은 서양 부인들과 여러분들이 부족한 것 없이 다 마련하여 준고로 풍족한 은혜를 받은 중.
 
지금까지 선교사들이 이끌어 온 서문밖교회는 오랫동안 한국인 목사가 교인들을 인도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왔는데 비로소 한국인 목사가 오니 얼마나 큰 기쁨인지 김병룡 목사가 오는 날 60리 밖까지 교인들이 나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전주서문교회 100년사216-217)
 

전주 서문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꼭 기억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익산 목천포 당뫼에 이경호(李敬鎬)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규풍의 둘째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지내었고 800석지기 농사를 지으며 윤택한 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환이 위독하자 세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병구완을 함으로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이경호는 후처로부터 아들을 낳아 이름을 보한(普漢 다른 기록에는 성한(聖漢) 1872. 1. 23.-1931. 8. 16. 출생년월일을 가족들은 1973. 5. 16.이라고도 한다)이라 하였습니다. 이보한은 어린 시절 열병을 앓아 왼쪽 눈을 실명하여 늘 검정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촉망받는 아이였으나 당시 반상의 신분 제도가 엄정하였던 때라 서자의 신분으로 눈총을 받으며 외롭게 자랐습니다.

어느 날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에서 선교 준비를 하다가, 주변사람들로부터 전주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인 이경호를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이경호를 찾아가 다짜고짜 한국식으로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면서, “아부지,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경호는 저 서양 오랑캐가 자기를 아부지라고 하면 자기도 오랑캐가 되니까 기분이 나빠 씩씩거리고 있는데, 테이트 선교사는 아부지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좋아 그런 줄 알고, 한술 더 떠서, 가까이 가서 귀를 어루만지면서, “아부지, 귀 참 잘 생겼습니다.”하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이경호는 어랍쇼! 이 오랑캐가 이제는 내 몸에 손을 대? 감히 양반의 몸을 서양 것이 만져? 오랑캐의 아부지라는 말에 분통이 터지려는 판에, 저것이 한술 더 떠서 귀를 만지면서 또 아부지라고 해? 머슴아! 이놈을 묶어놓고 매로 매우 쳐라!”하면서 머슴들에게 지시했고, 테이트 선교사는 꼼짝없이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치외법권(治外法權)에 속한 외국인을 구타한 죄를 지은 이경호는 즉시 전주 감영에 갇혔습니다. 가족이 백방으로 알아보니 목사는 원수까지 사랑한다고 들어 사정을 하니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여서 이경호는 예수를 믿겠다고 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풀려나온 후에도 교회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19053, 이보한의 집에 강도가 들어 부친인 이경호가 강도떼의 습격을 받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실은 강도가 아니라 의병들이라고 한다.) 이보한은 급히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왕진을 부탁했습니다. 당시 포사이드 선교사는 19049월 전주 서원고개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의료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포사이드의 치료를 받고 살아난 이경호는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전에 감영에서 풀려올 때 한 약속도 있고 또 보답하는 뜻에서 교회를 나가기는 해야겠는데 양반 체면에 직접 교회로 나갈 수는 없어 집안사람들을 불러 모아 지원자를 찾았습니다. “누가 나 대신 교회에 나가겠는가?” 모두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보한이 제가 나가겠습니다.”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강도들 앞에서 보여준 포사이드의 의연한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은 터였습니다. 특히 강도들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피하거나 반격하기보다는 가해자를 미소로 대하고, 도망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포사이드로부터 충격과 도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서양인의 종교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대신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총명한 이보한은 교회에 나가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성경뿐아니라 영어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 후 전주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능숙하게 하자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지 못하였고 일본인들도 그 앞에서는 잘난 체하지 못했습니다. 이보한은 예수 믿은 지 1년 만에 전주교회의 대표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보한이 신앙을 갖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있습니다, 그는 서자로서 외롭고 쓸쓸하던 때면 전주 북문 안에 있는 큰 아버지 이건호 진사 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 집의 작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가 놀러 오면 늘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기독교인으로 보한에게 교회이야기를 해주고 기도도 해주곤 했는데, 이보한은 그 부인에게서 마치 어머니와 같은 느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부인이 잘 부르는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 봅시다. 열매 차차 익어 곡식 거둘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작은 숙모로부터 이 찬송을 배운 이보한은 어디서나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는 날마다 남문 밖 장터로 나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이보한의 소리는 실로 명창 수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보한이 항상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찬송을 부르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거두리’ ‘거두리 참봉’(참봉으로 불린 것은 그가 영능과 경기참봉을 지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이라 불렀습니다
한자로는 巨杜裡라고 썼는데 자는 배나 위장을 뜻하는 말로 큰 뱃심을 부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전주 뿐 아니라 전주 주변까지 이 거두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부터 이보한을 이거두리로 부르겠습니다. 이미 지난번에 화산교회를 소개할 때 이거두리가 화산의 진사양반을 구원시킨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진사양반은 1918년 서문밖교회의 네 번째 장로가 된 이돈수 장로입니다.
이거두리의 파격적인전도행각은 유명한데, 그는 판소리가 일품이라 노래를 불러주고 그 삯을 받으면 거지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자연히 그의 주변에는 거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거지들을 끌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 어려움이 있을 때 거지들과 함께 종종 봉사대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이거두리는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의지할 만한 큰 힘이 되어 주었고, 그들의 울분을 시원스럽게 대신 풀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상관에는 나무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날의 나무를 다 못 팔고 많은 양이 남게 되면 나무꾼들은 으레 거두리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거두리는 나무꾼들을 집합시켜 마치 군대처럼 행진을 시킵니다. 구령소리에 발을 맞추어 지게꾼들을 이열 종대로 줄을 세워 전주 부중을 한 바퀴 돌면서 일종의 시위를 합니다. 그리고 나무 장사들을 삼삼오오 데리고는 당대의 부잣집들로 가서 마당에 판을 벌이고 앉아 강매를 시작합니다. 그는 때로 소금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아 거기에서 남은 수익금으로 가난한 이들의 구호금으로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제하에서 지주 계급의 이름난 부자들은 각종 사업에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두리는 그들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식량, 의복, 구호 금품을 받는 대로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과 걸인들에게 나눠 주는 일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3·1 운동 때는 거지들을 끌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거두리는 태극기 운반책을 맡아 전라도 전역에 태극기를 운송했습니다. 당시 전주 거지 대장을 앞세우고 전라도 지방 곳곳의 장날에 맞춰 거지들이 골목마다 태극기를 몰래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거지들이 앞장서서 하니 촌민들도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시간에 맞춰 이거두리가 장터 한복판에 나타나 만세를 외치자 옆에 섰던 거지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또한 이거두리는 부자들에게 돈을 거두고 기생들에게 금붙이 등을 거두어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상해 임시 정부에 몰래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지방의 명창 기생들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당대의 국창이라고 불린 이화중선은 이거두리에게 틈틈이 창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비녀, 반지를 빼어 이 일을 도왔습니다
그는 숨은 애국지사들과 천한 기생들까지 몰래 거두어 준 금, , 보화들을 책보에 싸서 어린 손자 이중환(당시 8)의 손목을 잡고 지경역(지금의 대야역)으로 자주 나갔습니다. 기차가 들어오면 화장실을 대여섯 번 들락거리며 독립자금을 전달했습니다. 대략 2만 원 정도의 거금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말이 70-80전이었고 장정 하루 품값이 1원이었습니다.

전주 서문교회에 김인전 목사(1876-1923)가 있었을 때입니다. 한학자 출신인 김 목사는 민족 운동가로서 전주권에서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는 상대의 종교가 무엇이든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언제나 찾아가 함께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김 목사는 향교를 찾아가 원로 한학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김 목사가 향교를 향해 길을 나설 때면 이거두리는 으레 앞장을 서서 교통정리를 하였습니다. 이거두리는 김 목사보다 4살이나 위였지만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였습니다. “쉬 비켜서라. 김 목사님 나가신다.”하며 앞장을 섰습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김 목사가 걸어갈 길을 비로 쓸면서 모시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이거두리가 만세 시위를 하다가 감옥에 간 적이 있는데 아무데나 대변을 봐서 벽에 바르고 얼굴에 칠갑을 하자 미친 사람이라 여겨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풀려난 그는 여전히 옷고름도 매지 않고 모자는 구멍을 뚫어 거꾸로 쓰고 다니며 미치광이 노릇을 했고 일본 헌병대 앞에서 세상이 뒤바뀌었다!”하면서 거두리로다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행진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같이 행진하곤 하였습니다.
한평생 돈을 모을 줄 몰랐고 있으면 있는 대로 몽땅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 것이 없으면 친구에게 빌려서라도 도와주어야 하는 그의 성품 때문에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늙으니 몸은 쇠약해졌고 결국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던 그는 회갑을 앞둔 1931년 음력 8168월 한가위 날에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이거두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주 부중에 퍼지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주의 거지들과 상관 골짜기 나무꾼들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당시 전주 부중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상업은행 창시자 박영철(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군기병소좌로 예편하여 1917년 익사군수 1927년 함북지사를 지낸 후 동양척식회사 감사 삼남은행장을 지냈다. 1933년부터 38년 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의 부친 박기순(朴基順, 1857년 음력 55-1935년 양력 9301908년 전북농공은행장을 역임하고 한일병탄 후 일제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24년 조선총독부중추원 참의를 지내었고, 전주 인근 986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옹보다 훨씬 성대하였다고 합니다

거리의 지게꾼들은 생업을 전폐하였고 걸인들은 상여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전주의 신작로는 조문객들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만장 행렬은 무려 10리를 뻗쳤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걸인들이 다투어 상여를 매었고 수백 장의 만사 깃대는 좁은 목에서 상관색 장리까지 장장 1Km나 뻗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걸인들은 장지에서도 삽 쓰기를 거절하고 손으로 흙을 파서 봉분을 만들고 자갈 하나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온 정성을 다해 안장하였습니다.(배윤숙이 정리한 것을 인용)
나무꾼들과 걸인들은 1전씩 모아 120cm 높이의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비명은 <李公거두리 愛人碑>라 하였고 그 비문은 平生性質 溫厚且慈 見人飢寒 解衣給食”(한평생 온후하고 자비로운 성품,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먹여주었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생전에 전주 이씨 집안에서 추방당한 처지라 유해는 색장리에 있던 종중 묘지에 들어갈 수 없어 죽림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다 1982년에야 문중 교인들의 주선으로 비로소 완산구 색장동 전주 시내를 벗어나 동남쪽으로 임실로 넘어가는 고개 길 오른쪽 옥녀봉 산자락에 위치한 종중 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이거두리의 전도자로서의 기행은 너무나 많아 짧은 시간에 다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이거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던 한국교회사의 위대한 사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기독교사상에서 그동안 연재했던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을 지면 관계상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군산에서부터 시작된 연재는 전주에서 끝을 내게 됐지만, 저는 앞으로도 서천, 부여, 강경, 금산까지 남장로교 지역을 다 둘러 볼 예정입니다. 그 내용은 다른 지면을 통해 만날 수 있겠지요. 그동안 관심 갖고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는 명제는 한국기독교에도 유효합니다. 저의 이 글이 모쪼록 오늘날 한국교회의 참다운 갱신과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밑거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