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4일 화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19) <남원의 기독교회사>

남원의 기독교회사




















호남 여행을 계획한다면 꼭 찾아가야할 곳이 바로 남원입니다. 남원은 그야말로 수려한 산천과 후덕한 인심을 자랑할 만한 곳이며,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곳곳에 온갖 전설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볼거리가 가득한 남원은 미인들의 도시요, 국악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또한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요천이 도심지를 관통하여 섬진강으로 유입되는 대 분지의 생태도시가 바로 남원시입니다

남원을 방문하고자 할 사람이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춘향이와 이몽룡의 로맨스가 꽃피어 있는 광한루원(廣寒樓園)을 제일 먼저 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한루원 입구에 있는 청허부(淸虛府)란 멋진 현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청허부에 들어가는 문이라 하여 이곳을 청허부라 하였다고 합니다. 현판이 걸린 그 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450살이 넘은 팽나무가 그 수령을 자랑하듯 널따랗게 가지들을 뻗어 방문한 귀객들을 맞이합니다.
광한루원은 1469년 유배되어 온 황희가 처음으로 광한루를 지었으며 그 뒤 충청·경상·전라 순찰사였던 정인지가 광한 청허부라 이름 지었습니다. 또 선조 임금 때에 관찰사 허균이 광한루 앞 요천의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반월경 교각으로 된 오작교를 놓으니 춘향전의 로맨스 이야기가 싹트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선교 초기에 이곳에서 전도하던 한 한국인 전도자에게 누군가가 예수쟁이들은 항상 할렐루야를 말하던데 그 할렐루야가 무슨 뜻이요?”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직 그 뜻을 알지 못했던 전도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군요. “성경에서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신랑 같고 우리 교인들은 신부 같다고 하였지요. 남원의 광한루에서 춘향이와 이몽룡이 만나듯, 우리 교인들이 죽어 천국에 올라가면 천국에 할렐루라는 정자가 있는데 거기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되는 우리들이 만나게 될 거래요. 거기서 예수님과 우리가 영원히 사랑을 속삭일 거랍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천국 할렐루에서 신랑 예수를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좋아 할렐루야()’라고 외친다 이거지요.”

그런데 남원 사람들은 1904년 이 신랑 예수를 광한루에서가 아니라 남원 장터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고창 흥덕에서 온 조원집이란 사람이 두 딸과 아내와 함께 남원 장날이면 장터 한복판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에 굶주렸던 남원 사람들이 조원집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 시작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자들이 1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놈인 조원집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에 남원의 양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조원집의 전도를 훼방하고 남원에서 쫓아내어 버렸습니다. 쫓겨난 조원집은 남원을 떠나 금지면 창산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그러나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언 땅을 뚫고 자라났습니다

남원제일교회 연역을 보면, 1905년 최극제라는 청년을 중심으로 남원읍교회가 다시 형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10일 최극제는 여러 교인과 함께 힘을 모아 동충리(144)에 초가 4칸을 250원에 매입하여 교회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교회에서 우두예방 주사를 처음 놔주게 되었는데, 주사를 겁낸 사람들이 산으로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해 8월엔 니스벳 선교사가 원입 문답하여 40명을 원입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52년 남원읍교회에서 분립된 동북교회의 남원읍교회 역사를 보면 이에 대해 좀 다르게 소개합니다. 1908년 테이트 선교사와 윤식명, 박창욱 전도자가 남원에 처음으로 전도하였으나 그때는 교인이 없었고 조원집이 광한루에서 전도하니 10여 명의 신도가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19093월 추재원 집에서 첫 예배 처소를 마련하였고 동년 5월 동충리 144번지 예배당을 창설하였는데 이는 테이트 선교사와 조원집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남원제일교회 역사에서는 19059월 박윤근, 오덕홍 두 강사를 초빙하여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다고 되어있지만(호남기독교 100년사361), 동북교회 연표에 의하며 19099월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어떤 연대가 맞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장로교 사기(史記)에 의하면(259)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8南原郡邑敎會成立하다 先是臨陂居 信者 趙元集同地移駐後 熱心傳道하야 信者稍進함으로 禮拜堂新築하니라.
 
남원제일교회 연표에 의하면 1906년 니스벳 선교사에 의해 30여 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1908년엔 윤성만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윤성만은 188815일 곡성에서 출생하여 1907년부터 남원읍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90710월 이자익 목사에게 학습을 받고 1908년 니스벳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35년에 장로로 장립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단단한 신임을 받아 20년간 지리산 선교사 수련원의 관리 책임자로 근무를 하다가 1975103087세로 소천하였습니다.

여기서 윤성만 장로가 관리책임자로 있던 지리산 선교사 수련원에 대해 잠깐 소개해 봅니다.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되어 온 선교사들은 밤낮없이 선교활동에 매진하다 보니 몸이 허약해지고 각종 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온다습한 호남의 기후와 이질과 장티푸스 등 풍토병을 앓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사망하는 이들이 늘어 갔습니다
이에 1921년 순천선교부의 유진 벨 선교사가 제안을 하고 크레인(Crane Janet 한국명 구자례 1916년부터 1954년까지 활동. 동생 크레인(Crane John Curtis 한국명 구례인)1913년에 내한하여 1956년까지 활동하였는데 특히 총회신학교 교수로 수많은 신학서적과 논문들을 발표하여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선교사와 프레스톤(J F Preston 한국명 변요한 1903년부터 1940년까지 활동, 크레인 선교사와 순천 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동경제국대학에 요청하여 매년 임대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지리산 노고단 정상 바로 밑 대피소 인근에 휴양소를 건립하였습니다. 건물 50여 채와 50여 명의 직원들이 있는 이 수양관에는 호남 선교사들 뿐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선교사들이 찾아와 선교활동으로 시달렸던 몸을 쉬게 하면서 치료도 받고 영적으로 재충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이곳은 한글성경번역과 성경공부 교재를 집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와서 한글 교육도 받고 서로 한국 선교에 대한 정보를 나누곤 했으니 지리산 선교사 수련원은 그야말로 한국 선교의 정책을 위한 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신사참배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은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수양관을 폐쇄시켜 버렸습니다
194810월에 일어난 14연대사건(일명 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하던 것을 국군토벌대가 점령하였고 6·25 전쟁 시에는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 노고단 밑의 수양관들을 모두 태워 버려 지금은 무너진 건물의 벽 일부와 굴뚝만이 우거진 숲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후 1961년 휴 린튼 선교사가 왕시루봉 아래 12채의 선교사 수양관을 지었습니다. 수양관이라 하지만 오두막집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휴 린튼 선교사가 1984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방치되었고, 지금은 가끔 등산객들이 들여다보는 정도입니다. 현재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이사장: 안금남 목사)이 결성되어 선교사 수양관 보존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지리산환경을 훼손하다는 이유로 여러 사회 환경단체가 반대하고 있어 보존운동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있습니다.
 
다시 남원읍교회 얘기로 돌아가서, 이 교회에 새로운 지도자가 오게 되었으니 황인원이란 사람입니다. 황인원은 상업차 청주에 갔다가 복음을 듣고 청주교회에서 밀러 선교사(Miller Frederik Scheiblin, 한국명 민로아 1866-1937. 18921115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많은 성경주석과 신앙서적을 번역 출간하였다. 특히 1925년 처음으로 만국쥬일공과창년부를 발간하였다)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을 떠난 지 8년 만인 19096월 남원에 돌아왔습니다. 황인원은 1910년 남원읍교회의 영수가 되고 박관보 집사 김숙국 매서인과 함께 열심히 섬기니 교회는 더욱 부흥하였습니다.

1919년에 황인원 영수가 소천하게 되자 최극재가 영수가 되고 최극재 영수는 19211126일에 장로가 됩니다. 최극재 장로에 대해 더 살펴볼 것은 그가 참다운 애국자였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발간하는 황성신문의 애독자인 최극재는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전주로 내려와 서문교회 김인건 목사를 찾아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소식들을 듣게 됩니다
43일 남원의 덕과면 신양리 뒷산 복숭아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날, 그는 191944일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사람들을 북시장에 집합시켰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2,000여 명쯤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길이 넘는 푸른 대나무에 게양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온 시가지를 행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날 참석한 이범기는 이날이 식목기념일이라 사방공사를 한다고 면민 800여 명을 모아 괭이와 삽을 든 채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남원 땅 곳곳이 만세 소리와 시민들의 환호성으로 진동하였습니다. 이날 일경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8명이 죽었는데 그 중 소금장수 일가의 죽음에 대한 사연은 참으로 애달픕니다

소금장수 방진형(方鎭炯 당시 57)이 이날 총격에 죽게 되자, 그의 아내는 빨래 방망이를 들고 달려 나와 왜경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왜경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다가 붙잡히게 되자, 그 아내는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들어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칠순 노모가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 동포여, 어서 독립을 회복하여 내 아들, 며느리의 원수를 갚아주오하면서 통곡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 뒤 일경은 이 만세운동의 진원지인 북시장을 폐쇄시켜 버렸습니다.(동아일보, 1969. 3.1. 11, 현재 북시장터는 도립병원의 뒤뜰이다.)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된 최극재는 감옥에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간수에게 수없이 많은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최극재는 남원읍교회 내에 야학을 설립하여 100여 명의 청년들이 모아 공부도 시키고 시국에 대한 토론도 하며 신앙애국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하였는데, 하루 두 끼만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잔치 집에 초대를 받아도 점심은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가족과 떨어져 여수에서 어렵게 노동을 하면서도 자식들이 끼니를 굶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먹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굶으며 일을 하시는데 자식이 어찌 점심을 먹겠느냐 하면서 최극재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가난한 동족들을 생각하며 평생 하루 두 끼만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인격을 존경해 온 남원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105세가 되었을 때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장수를 누리게 되셨습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일평생 두 가지 약만 먹었습니다. 하나는 구약이고 또 하나는 신약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1915105일 남원읍교회를 다니던 윤종현이 운봉읍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윤종현은 남원읍교회 조사로 있으면서 윤봉길 의사에게 후원금을 보냈는데, 그 기록을 김구 선생의 서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운봉은 신라시대에는 모산성이라 부르다가 757년 경덕왕 16년 운봉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에 구름이 드리워진 모습이 장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이곳은 동쪽에는 덕두산(1,150m) 비대봉(1,165m) 세걸산(1,207m) 서쪽에는 고남산(846m) 여원치(410m)가 둘러 있어 많은 백두대간 등반객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는 마을입니다
운봉은 곡성을 지나 광주로 가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려 우왕 6(1380)에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성계 장군이 운봉 고남산에 석탑제단을 쌓고 필승 산신재를 지내 지금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운정현 이곳에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기도의 제단으로 운봉교회와 매요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1916년 윈(Winn Samuel Dwight 한국명 위인사 1911년부터 51년까지 선교활동)선교사의 집례로 운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대리회에서는 1910년 전후하여 고부, 서북, 흥덕, 부안남편, 태인, 북편, 금구남편, 임실, 남원, 운봉 등 교회가 서게 되었고 이를 니스벳 선교사에게 맡겼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윤종현 장로에 대해 좀 더 소개하겠습니다. 윤종현 장로는 1890315일 아버지 윤상은 어머니 김성녀의 22녀 중 장남으로 운봉읍 학수리 421-2번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가 6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부친도 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중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동생 윤지현과 함께 고무총을 만들어 매일 같이 까마귀를 잡으러 산으로 들로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세걸산 자락에 기거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선교사가 예수를 믿으면 까마귀를 잡아주겠다고 하니 그는 너무 기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5세 때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제사 때는 문중의 장손인데도 불구하고 추도식으로 거행했는데, 그러자 문중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문중 어른들은 멍석말이로 징계해야 한다며 분노를 토해냈습니다. 그러나 윤종현은 개의치 않고 술 대신 식혜로 집안의 대소사를 거행하는 등 독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1915년 운봉교회 영수로 그리고 1942년엔 운봉교회 초대 장로로 교회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앞에서도 잠시 소개한 것처럼 정기적으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하고 일본 형사들에게 쫓겨 다니는 독립군들을 은밀히 숨겨 주고 의복과 음식 그리고 여비를 제공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191931일 서울 3·1 만세 운동에 참가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16개월 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사참배도 거부하여 그때마다 2, 3일씩 구치소에 구금되거나, 가을 수확의 공출을 거부하여 일본 경찰의 극심한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윤종현 장로는 일본경찰을 피하여 지리산 중턱 운봉읍 화수리 외딴 곳으로 들어가 마치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였던 펠라 같이 숨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독립군 군자금을 비밀히 조달하곤 했습니다. 6·25전쟁으로 남원 지역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윤종현 장로는 반동분자로 찍혀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가게 됩니다. 당시 윤종현 장로는 부산에 가 있었는데 3남인 윤세정이 오수 지서에 근무하던 중 순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운봉읍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것을 본 마을 사람이 고발하였고, 윤종현 장로는 곧 공산군에 잡혀 817일 남원 농고 뒷산 공동묘지에서 총살을 당하여 순교하게 됩니다. 순교 전날 면회 온 5남 윤정우에게 그는 나를 해친 이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용서해 주고 그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보살펴 줘라. 그리고 원수를 갚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전북 남원시 운봉읍 서림정과 광한루원의 애국지사 충혼탑에는 윤종현 장로와 윤지현, 윤세정 세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임실 지방의 첫 교회는 신덕면에 세워진 삼길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수교회 100년사(2013년 발행, 발행인 권종호 목사)의 기록을 보면, 임실군 신덕면에 거주하던 외량리 마을 백운기와 방길리 마을 신성언은 사금이 많이 나오는 구사발(아홉뜸)에 살다가 사금이 많이 나온다는 금산으로 가게 됐는데, 거기서 조덕삼 장로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금이 아니라 정금보다 더 귀한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들로 인해 삼기리 554번지 외량리에는 임실군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데, 이 교회가 당시 13칸짜리 자 교회로 세워진 삼길리교회입니다. 그 후 삼길교회 역사는 알 길이 없는데, 1974년 삼길교회 집사였던 최지식, 임복순, 경정숙, 이강순, 김경순, 천하옥, 정정숙 제씨가 서울신학대학 대학생인 김인구 전도사와 더불어 삼길리 566번지에 교회를 건축하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명광교회로 새 출발하였습니다.
 
남원시에서 북서쪽으로 15km 지점에 덕과면이 있습니다. 덕과는 국도 17호선(여수-청주)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국도 14호선이 오수와 이어져 있는 남원시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지역에서 나는 맛좋고 질 좋은 황금배가 남원시장의 70%를 점하고 있습니다.
덕과면 수천마을에 가끔 선교사들이 말을 타고와 복음을 전하곤 하였습니다. 이때 7인이 복음을 받아 들여 첫 세례교인이 되고 그 뒤 고정마을 뒷동네에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190645일입니다. 임실군 신평면에 살던 김석조가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덕과 고정교회의 전도사역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193412월에는 고정교회를 다니던 덕과 옆 동리인 보절면 황벌리 교인들과 함께 도룡리 용동에 황벌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영수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석조는 고정교회의 영수로 활동하다가 초대 장로가 됩니다. 현재는 김석조 장로의 막내아들 김명수(77)
가 덕과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오수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덕과교회에 고개를 넘어 참여하던 신자들 10여 명이 주일 밤과 삼일 밤에는 금암리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1913521일 금암리 367번지 김경추 성도의 사랑방에서 주일 낮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날의 오수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인은 김경추 내외, 김홍식 내외, 김종인 부모, 박응원, 김대현 등입니다. 교회의 교인들은 당시 금암리와 하신촌(남산동)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전주 선교부에서는 윈 선교사를 보내어 교회를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909년 임실군 응암리교회, 남원군 신풍리교회, 임실군 고하리교회가 설립되었고, 1910년에 임실군 선거리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지금 그 자취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주선교 기록에 의하면 선거리교회의 이춘교(31)라는 분이 기독신보를 읽고 감동하여 지금까지 땀 흘려 일해서 마련한 논 2마지기와 밭 1마지기 그리고 가재도구를 팔아 46원을 마련하여 20원은 중국선교를 위하여 쓰고, 남은 20원은 제주 선교 헌금으로 그리고 6원은 선교 진흥회로 송금하고 자기 자신은 아무 재산 없이 셋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의 헌신이 오늘 우리들에게 엄청난 믿음의 유산으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충성스런 개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는 오수에 처음으로 교회가 문을 연 것은 1917년 금암리 김경추의 사랑방에서 오수 소재지인 동후리 432번지(구 오수의원 뒷터)에 위치한 잠실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주로 김성도 조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남원읍교회 영수인 최극재와 덕과교회 영수인 윤성만이 협조하여 교회는 점점 부흥하였습니다. 특히 1925년 오수교회 첫 장로로 장립된 왕순칠 장로와 동생 왕창순이 금산교회를 다니다 오수로 이사와 처음에는 신덕면 삼길교회를 섬기다가 오수교회를 나오게 되면서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193212월 오수리 390번지 90평 대지 위에 38평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왕순칠 장로의 헌신적인 기도와 상당한 헌금으로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33112일 왕순칠 장로가 44세의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에 교인들은 그를 기리어 교회당 앞에 <고 왕순칠장로 기념비>를 세우고 그분의 신앙과 섬김의 믿음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오수교회의 초기 역사를 살펴볼 때 꼭 오수교회의 신자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윤의(1890-1949) 장로입니다. 이윤의는 남원군 둔덕방 대정리에서 이형우의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이곳 둔덕은 전주 이씨 집성촌입니다.둔덕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윤의는 전래의 왕가의 후손으로서 일찍이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남다르게 컸던 분입니다. 1919310일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이 이광수 선생의 지도로 만세시위를 벌이자 이에 자극 받은 오수 주민들과 임실, 장수, 순창의 일부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323일 오수 장날에 원동산에 모여 만세를 부른 것이 오수면 만세 운동입니다. 이때 이윤의는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과 같이 만세운동에 앞장을 섰습니다
이 날 이기송이 단상에 올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조선 독립에 대한 연설을 한 뒤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돌면서 만세를 하니 수천 명의 만세소리가 오수 읍내에 가득하였습니다. 일본 헌병이 이기송을 압송하자 성난 군중들이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기송과 구속된 사람들을 구출한 뒤 주재소 순사들을 무장해제시켰고, 일본의 상점들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남원과 임실의 헌병들이 달려와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허 박 외 여러 명이 죽고 부상자들이 발생하였으며 이기송, 이윤의, 오병용 등은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아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감옥소에 대구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온 이만집 목사와 여러 교인들이 수감되었습니다
이때 이윤의는 아직 예수를 모르던 때였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이만집 목사가 들려주는 설교 말씀에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애국애족 동지들이여, 지금 우리에게 놓인 이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 지금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기 성경책이 있으니 같이 읽어봅시다.” 이만집 목사가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위로하고 기도로 용기를 주며 때때로 찬송하니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이윤의도 감동을 받고 성경을 빌려보며 믿음을 키우게 되었으니 고통의 수감생활 3년이 끝날 때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고향 둔덕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이윤의가 밥상 앞에 앉아 입으로 중얼중얼하는 모습을 보자 가족들은 이상히 여기면서 혹시 오랜 감옥 생활에 정신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윤의는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고, 지금은 하나님 앞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 말하니 가족들은 이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윤의는 오수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을 듣고 교회로 달려 나가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려 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 입에 흐르게 하니 잠시 숨을 쉬는듯하다가 다시 멈추어 다른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아버지 입속에 흘러 넣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는데, 이러한 소문이 동리에 퍼지자 이윤의가 예수를 믿더니 효자가 되었다는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이 일로 그동안 예수 믿는 일을 못 마땅히 여겼던 마을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고, 마침내 오수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둔덕 마을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씨 종가에 종가집 종부인인 김학정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앓는 동안 유명하다는 의원들은 다 찾아다니고 용하다는 무당을 데려다가 굿도 하였지만, 여전히 병색이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입원치료도 받았지만 낫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학정은 하나님을 믿어야 병이 고쳐진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오수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김학정은 그때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이때 병든 김학정을 부축해 간 둘째 동서 최삼순과 셋째 동서 허나열도 함께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이를 본 이윤의는 이 때다 싶어 이씨 문중에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Winn Roger Earl) 선교사는 이윤의 가족들에게 학습문답을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처럼 열심으로 전도했던 이윤의는 1928년 오수교회 장로가 됩니다.

193867일 정기 전북노회록을 보면 1937년도 각 교회 상회비 내역이 있는데 남원읍교회가 25, 전주 서문밖교회가 60, 진안읍교회가 13원인데 반해 오수교회가 45원을 상납하였으며, 1938년도에는 남원읍교회가 40, 전주서문밖교회가 60원인데 오수교회가 60원을 상납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오수교회가 시골 교회로는 상당한 부흥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종교행위가 아니라며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이윤의 장로는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기는 죄악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일제는 오수 신포산에 신사 사당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그때 신사참배를 거절한 이윤의는 그 일로 임실경찰서에 여러 번 구금당해야 했습니다. 이윤의 장로의 처가 쪽에도 믿음에 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처가 쪽 친족인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처가의 숙부 되는 주남선 목사가 평양의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등 신사참배로 인해 결코 굴하지 않는 믿음의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행 끝에 마침내 1945815일 일본 천황이 떨리는 음성으로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을 라디오를 통해 들은 이윤의 장로는 원동산으로 맨발로 뛰어나가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큰 환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이윤의 장로는 감옥 생활을 통하여 생겨난 신경 골수염으로 고생을 하다가 1949526일 소천하니 평소 신·불신을 떠나 그를 존경하던 오수 주민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1963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정부에서는 그를 애국지사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습니다, 1990년 그의 묘역에 김동길, 김찬국 교수가 현대어로 번역한 독립선언비를 건립하여 생전의 그의 애국 충정심을 후세에 알리고 있습니다.


이윤의 장로의 삶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1908년 소병례 씨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믿음이 돈독하였던 소병례 씨도 교회를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1937년에는 교회 종각을 세워 오수지역에 복음의 종을 울리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쉽게도 그해 62644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해야 했습니다. 주경선 권사는 이윤의 장로의 두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주남선 권사의 친척 가운데 주기철 목사와 삼촌인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가 있습니다김수진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수진, 호남기독교 100년사, 349) 주경선은 190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4세 때에 거창에서 스코트(Scott Stella May 한국명 서오성 호주 선교사로 1916년부터 1939년까지 주로 마산 거창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선교사가 나는 지금 50세가 되었지만 섬김을 받으려고 오지 않고 남을 섬기기 위해서 왔습니다.”는 말씀을 듣고 남을 위해 사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생각하다가 혼자 몸으로 동대문 부인과병원 부속 간호양성소에 입학하게 됩니다

거창지역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있던 아버지는 딸이 홀로 서울에 가서 간호사 공부를 한다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3년간 간호양성소의 공부를 마친 그는 간호사로 일하고자 하였지만 뜻밖에 왼쪽 눈이 아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안과수술로 완치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수술을 받았지만 오히려 의사의 실수로 실명을 하게 됩니다. 주병선은 딸의 상태에 분노하여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면서 의사를 용서해 주시라고 합니다

주경선은 간호사 자격을 받자 함흥에 있는 지혜기독병원엣 4년간 간호사 활동을 하다가 호주 선교사로 거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딕슨(Dixon Ethel V 1913년에서 1941년까지 활동)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거창에 내려와 그와 함께 탁아소를 운영하였습니다. 이미 혼기를 노친 주경선은 오직 이웃을 위한 봉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중 이자익 목사가 중매를 서서 19371016일 오수의 이윤의 장로와 혼인을 하게 되니 둔덕으로 출가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주경선이 오수교회를 나가니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윤의 장로는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오수교회 박성준 목사와 갈등을 빚게 되자 둔덕교회로 옮겨 교회를 인도하였습니다. 해방 후 남편인 이윤의 장로가 소천하자 주경선은 1954년 남원동북교회 전도사로 일했고, 1957년에는 남원시 향교동에 김창호 집사가 설립한 양로원에서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59년에는 남원 성일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76년에는 남원 향교 동쪽에 남원영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특히 이윤의 장로가 추서 받은 애국지사 표창으로 받게 된 연금으로 가난한 신학생을 돕는 장학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여러 사람의 뜻이 모아졌고, 그로 인해 많은 신학생이 그 도움으로 무사히 신학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앞서 소개한 이윤의와 김학정이 살고 있는 둔덕마을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수에서 남서방향을 향해 해삼모양을 한 낮은 산이 십여 리 정도 독립된 산맥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마치 지네처럼 길게 성을 만든 것같다하여 장성산(長城山)이라 부르는 산이 있는데, 이 산과 나란히 큰 시냇물이(섬진강 상류) 흐르고 냇물 양편으로는 비옥한 들녘이 있는 둔덕마을은 농경사회에서 자급자족하기에 적합한 마을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때부터 진주 하씨, 남원 양씨, 흥성 장씨, 순천 김씨, 삭령 최씨 등이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다가 조선 초기에는 효령대군의 증손인 이담손(춘성정 1490-?)이 이곳에 자리를 잠아 전주 이씨의 후손들이 번창하는 마을이 되었으니 이를 소위 둔덕 이씨라고 말합니다. 이담손은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 어머니의 폐비사건으로 사림파인 문신과 나라의 공훈이 많은 훈신 간의 다툼으로 종친인 척신들이 많은 화를 입게 되자 사화를 피하여 순창으로 피신하였다가 당시 권문세가의 한사람인 김만보의 사위가 되어 처가인 이곳 둔덕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현재 종가집인 춘성정 저택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지난 1977년 지방민속자료 1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만일 둔덕리를 찾아간다면 반드시 다녀 갈 곳이 있습니다. 인근 서도역 부근 풍악산의 노적봉아래 소설 혼불최명희(1947-1998) 작가의 종가이며 이 작품의 무대인 노봉마을과 혼불문학관이 그곳입니다. 혼불은 작가가 17년 동안 집필한 이 지역을 배경으로 몰락해 가는 양반가의 며느리 3대 이야기를 다룬 대하소설입니다. 그런데 둔덕리 양반가의 종부인 김학정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온 이야기를 둔덕교회를 통해 들을 수 있으니 이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양반 중의 양반인 이씨 문중의 한 사람인 이윤의가 예수를 믿고, 종가집 종부인 김학정이 예수를 믿는 일도 놀라운 일인데 그들로 말미암아 이 둔덕리에 많은 일가친족들이 오수교회를 다니게 되었으니 이 지역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학정은 둔덕마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믿음으로 1933년 기도처를 마련하고 기도하던 중에 전주 서문교회의 재정 지원과 교인 20여 명으로 교회를 설립하였고, 193958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있었던 노회에서 정식 허락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윤의 장로의 가족도 1939년 둔덕교회로 정식 이명하여 섬김으로 둔덕교회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둔덕교회당 앞에는 <김학정집사복음선교기념비>가 세워져 김학정의 생전의 믿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임실읍은 주변 지역보다 복음이 다소 늦게 전해진 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임실읍에 워낙 유학을 숭상하는 양반들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남원 사후 임실이란 말이 있듯이 임실 주변에 많은 명당자리가 있어 풍수지리설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일장신대학교 배경식 교수의 임실읍과 기독교 접촉이란 글에 의하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자태를 가진 봉황산이 임실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 것이 임실 고장의 상류층의 의식이었다. 이 봉황을 지키기 이하여 예부터 양반들이 두 개의 정자를 세웠는데 조양정과 운양정이다. 조양정은 봉황의 등을 눌러주고 운양정은 날개를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동양에서 상상의 동물인 영물로 여기는 봉황을 믿는 임실 사람들은 봉황산을 바라보며 봉황산의 정기를 받는다는 신앙 속에 살아 온 것이다.”고 하여 기독교를 믿는 것을 꺼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난과 핍박과 훼방이 있다하여도 복음의 물길을 막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임실읍 교회 사략에 의하면 19208월 윈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였지만 정작 복음의 물길은 장현팔이란 외지인에 의해 열릴 수 있었습니다.
1920105일 임실군 재무과에 근무하던 장현팔이 자신의 집을 기도처로 삼고 1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임실읍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장현팔(1898-1987)은 충북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에서 출생하고 배재중학교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급 기술원 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북도청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임실과 정읍 등지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949년에는 충북적십자사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192135일 전주 선교부는 임실읍교회의 당회장을 윈 선교사가 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남자 10명 여자 13명으로 모두 23명에 달하였습니다. 방승준 조사가 부임하여 임실읍 이도리 717번지에 초가 6칸을 예배당으로 건립하였고 192464일에는 이태우 조사가 부임하면서 교회는 점차 발전해 나갔습니다.

호남기독교 100년사(김수진, 353)에 의하면 임실읍교회는 추은명(1878124-194342)의 가족이 임실로 이사를 오면서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추은명의 사위인 임춘성이 임실군 군수로 오게 되자 강원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계몽운동을 하며 전도자 생활을 하던 추은명도 임실로 이사 오게 된 것입니다. 사위가 군수라면 상당한 친일인사일텐데 추은명은 독립정신이 철두철미한 애국자로서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습니다

추은명은 임실읍교회를 섬기며 오수의 이윤의 장로와 더불어 임실지역 기독교계를 지도해 나갔습니다. 그는 1940324일 임실읍교회 초대장로가 됩니다, 현재의 임실 교회당 건물이 있는 대지도 추은명 장로가 과자공장을 운영하여 마련했던 곳입니다. 그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일경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하곤 하였는데 정작 그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342일 소천하였습니다.
 

남원과 임실 오수지역의 초기 선교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강진면 갈담리를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강진면 갈담리는 신라시대 왕족 박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왕박골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강진면 갈담리는 광주와 전주 간의 중간 역촌 마을로 조선조에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윈 선교사도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머물면서 오고 가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마침내 19241215일 강선진의 집에서 윈 선교사는 강선진, 남궁선, 이봉의와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갈담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324월에 갈담리 300번지 대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교회는 부흥 일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99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하여 일제는 윈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를 폐쇄시켜 버렸습니다. 1949년 가을, 일부 교인들이 산업조합을 빌려 교회를 복구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1950년 봄 옛 교회 터에 새로이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특히 갈담교회를 지나치지 않고 꼭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고()고영근(1933-200996, 평북 의주출생) 목사의 기도가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담교회는 고영근 목사의 첫 사역지로 고 목사의 젊은 시절의 뜨거운 신앙심이 심겨진 곳입니다. 고영근 전도사는 19584월부터 195910월까지 갈담교회 전도사로 있었고, 이곳에서 결혼도 하였습니다
고영근 전도사의 첫 사역지인 갈담교회는 절집을 개조하여 만든 교회당으로 사방에 뱀이 우글거리던 곳이었는데, 당시 교인 수는 20명도 채 안된 상황이었습니다. 고영근 전도사는 이 갈담교회에 부임하면서 갈담리 지역사회를 바꾸는 데 혼신의 힘을 다 하였습니다
젊은 고영근은 여기 저기 벌어진 화투 도박판으로 찾아가 그 도박판을 뒤집어엎고 술에 흥청대는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마을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일을 목회의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생활 윤리를 강조하면서 교회와 지역사회의 일치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기를 6개월이 지나자 교인 수는 80명을 넘어섰고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도 80명이 넘어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열렬하게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던 고영근 목사가 전도사 시절에 쓴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구사일생 살아난 몸, 주 앞에 바치려 하였더니 이제 주님이 허락하사 이 교회와 지방으로 이끌어 주시니 진실로 감사하옵니다. 주님이 내 영혼 건지시기 위하여 도성인신하사 강생하시고 수고하신 것을 기억하며, 마지막 부탁이 말씀을 전하고 내 양을 먹이라 부탁하셨으니 내 어찌 주님의 부탁을 잊어버릴 수 있사오리이까? 이제 천한 이 몸 바쳐 주의 교회를 먹이려 하옵난데 너무나 힘이 없나이다. 미약하고 추악하고 가증된 놈이 어찌 이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오리이까. 그러나 주님이시여, 내 힘을 의지하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사옵고 내 주님께서 힘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온 것 뿐 이옵니다. 힘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성신을 주시옵소서. 아멘.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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