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3일 토요일

주기도문의 기독론적·종말론적·성령론적·교회론적 강해 _ 송영목교수

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가르쳐주신 기도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기도이기에 완벽한 기도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얼마되지 않아서 교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1세기 사도들의 교훈집으로 알려진 디다케(Didache)는 교회 정식 회원들을 향해 하루 세 번씩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것을 권면했다. 주기도문에 관한 첫 번째 주석을 쓴 사람은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인데, 그는 주기도문을 모든 복음의 요약이라 불렀다. 다른 교부 키프리안(Cyprian)은 주기도문을 천국 교리의 체계라고 불렀다.
 
루터는 주기도문은 최고와 최선의 기도이기에 성도는 주기도와 함께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존 칼빈도 주기도문은 신자가 간구하여야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서 주기도문을 올바른 기도의 모델로 간주했다. 이렇게 주기도문이 초창기부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는 주기도만 하면 왠지 아주 빠른 속도로 주문 외우듯이 기도하지는 않는가? 끝 부분의 -원히만 길게 정상적인 속도로 암송하지 않는가? 하지만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주기도문 한 절 한 절이 심령 깊은 곳에 와 닿는 말씀임을 느낄 수 있다.
 
주기도는 마 6:9-13 그리고 눅 11:2-4 두 곳에 나타난다. 초기 교회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기도문을 표준적인 주기도문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매일 드려졌던 기도 시간에 혹은 회당에서 안식일에 드려졌던 예배 시간에 기도문을 활용했다(. 유대회당에서 설교 끝에 낭송하는 기도인 Kaddish, 그리고 18번 축복 기도로서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 -아침, 오후의 시작 그리고 석양 때- 드렸던 기도인 Shemone Esre).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와 같은 형태로 하나님을 송영하는 마무리가 18번 등장한다.
 
12번째 기도문에는 기독교인들을 저주하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 나사렛 이단들을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 교만한 자를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벌써 회당과 교회의 분리가 일어났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이 공식기도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기도와는 다른 새로운 기도문을 주심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구원의 복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주기도문은 유대인의 종파의 가르침뿐 아니라, 세례요한이 가르친 교훈과도 다른 그 무엇을 담고 있다. 그 무엇은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과 이상을 가장 잘 담고 있다는 말이다.
 
1. 6:9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를 먼저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아버지로 나타내는 경우는 15번 정도이다(32:6; 3:4 ).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강조하려는 목적과(64:8),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강조하려는 목적이다(14:1-2).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父性적 사랑을 강조하려는 목적도 있다(103:11).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개인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경우는 없다.
 
복음서에는 아버지170회 이상 등장한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교회까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용어는 아람어로 아바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격과 사명을 밝힌다. 11:27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말한다. 14:36아바 아버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밝힘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다볼 때 아바가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친근함과 의존성이 강조되어 있지만 하늘에 계신하나님이기에 우리보다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즉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제 우리에 초점을 모아 보자. 주님은 나의 아버지와 너의 아버지를 철저히 구분했다.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말은 교회와 예수님의 연합을 가리키지 않는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신약 교회 전체가 공유하는 기도이다.
 
적용을 해보면 주기도문의 시작에 이미 교회의 공동체성이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좁게는 특정 지역교회로 모여 동일한 한 분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그 아버지는 우선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2. 69절 하반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를 살펴보자. 구약에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킨다. 사람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17:5) 야곱이 이스라엘로(32:28)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17:1), 모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6:2)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3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20:7) 주의를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임재하심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님 자신의 인격, 임재하심 및 능력과 동등하게 간주한다. 예를 들어 마 18:5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바로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18:20에서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이 임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거룩하신 분이 아니신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오신 분이심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17:26에서 의로우신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예수님의 과거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신 사역이고, 미래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름을 장차 알게 하시는 사역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어느 시점이 되면 천하만민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예언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39:7에서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 알리라.” 이런 예언은 주로 메시아 예언의 문맥에서 나타나기에(2:28-32; 9:11-12; 14:1, 9),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이루어 질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차원이라는 말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서 거룩히 받으시오며는 아오리스트 수동 명령형이다.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름을 거룩히 하신다는 것이다. 주체는 위의 메시아 예언의 빛에서 볼 때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이시다. 아오리스트이기에 어떤 결정적인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단번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승천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영화롭게, 12:28) 하셨다면 신약 교회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신 의도는 무엇인가? 이 간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과거에만 묻혀져 있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선포되고 확장되어야 할 사건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거룩하게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선포되고 완성되어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행전은 계속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죄 사함과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따라서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암송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거룩하게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선포와 삶으로 더욱 온 세상에서 거룩히 되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선교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3. 6:10절 상반절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1:15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시작함. 부활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간 역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1:3). 바울 역시 로마 감옥에서 온 이태를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다(28). 예수님과 사도의 가르침의 시작은 하나님 나라였고 마침도 하나님 나라였다(4:43).
 
그러므로 주기도문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도가 등장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늘 나라 즉 천국으로(6:33; 12:28; 19:24; 21:31, 43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나타나지만 히브리어는 말쿠트 샤마임으로 동일하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한번도 글자 그대로 등장하지 않고 신구약 중간기 문헌이나 유대 문헌에서도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주기도문을 핵심적으로 요약해보라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며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익숙한 용어였다.
 
구약의 경우를 살펴보자. 15:18에서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라고 함으로 여호와의 나라(말쿠트 야웨. 神政思想)를 언급한다(33:5). 나중에 왕정시대에는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왕으로 다스리셨다(삼하 7장 대상 28:5). 10:16와 시 22:28 등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온 열방의 왕이심을 찬송한다. ()선지서에는 포로 귀환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말한다(52:7-9; 33:7-9; 34:13-15).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포로귀환의 약속을 메시야 사상과 연관시킨다는 사실이다(참고 사 9:6-7; 30:8-9; 34:24-25; 미가 5:2; 14:9-17; 3:15; 1:14; 2:44; 4:2, 34, 37; 7:13-14 ). 바벨론 포로 귀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과 왕적 통치의 구현이 유수 70년 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이루실 죄 사함을 통한 우주적인 통치를 긴밀하게 내대보게 한다. 즉 구약의 모든 출애굽 주제와 바벨론 포로 귀환의 진정한 성취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발견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적어도 69회나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중심이기에 인간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적으로 사탄과 죄를 물리친 수직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다(1:23). 예수님은 수평적인 차원의 혁명가나 사회변혁가의 차원에 머물 수 없으신 메시아시다. 수평적인 것은 수직적인 것의 필연적인 산물이지 본질은 아니다. 수직적 차원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진화론적이고 낙관론적이며 휴머니즘적인 인간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영적이고 수직적인 것이기에, 이 세상의 문제인 인간의 존엄성, 평들, 자유, 정의, 환경, 평등, 인권과 같은 문제와는 무관한 것인가? 아닙니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의 왕권은 우주적인 것이기에 어느 영역 하나라도 주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0-23; 2:9-11; 1:16-20). 1:2에서 그리스도는 만유의 후사로서 ()창조주라고 하신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은 더 이치에 맞지 않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인데 이제 온 우주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도록 소망하며 뒤틀린 것이 바로잡혀 정상적인 것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1:14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는 것이 나라가 임하옵시며의 뜻이다. 임하옵시며(eltheto: 아오리스트 능동태 명령형 3인칭 단수)는 결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승천-성령의 강림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임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간구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회복된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더욱 강력히 임하며, 주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소망하는 기도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조속히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4. 610절 중하반 절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 중에서 3번째 간구를 살펴볼 차례이다. 11장에는 이 간구가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 누가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간구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가 실제적으로 중복되어 포함되어 있거나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간구는 독립적인 기도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이루어지이다’(geneitheito)는 아오리스트, 수동태 명령법인데 이것 역시 이전 간구에서 사용된 동사처럼 신적 수동태로 보이기에 행위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으로 보인다. 사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을 교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계속해서 이루시길 원하는 종말론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기도문 전체는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종합적으로 요청한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 하나님을 그 자신의 존재 양식의 주체로 삼고 있기 때문에 오순절의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의 하나의 오심(a parousia)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오순절 성령님 사이의 일치는 본체의 일치 혹은 위격의 일치가 아니고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일치이다. 환언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교회의 설립과 성장, 복음 전파, 중생과 성화의 사역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일체가 되신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 혹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사역인 동시에 오순절에 인하신 성령님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의 많은 부분 특히 승천하신 이후의 사건은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동시에 연결되어 등장하는 해석의 원칙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며 지금의 천상의 사역 역시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성취하고 계시는 것이다.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비슷하게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참고. 10:7, 9).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은 성자를 통해 잃은 자를 찾는 일이었다(잃은 양을 찾는 비유- 18:12-13; 15:3-6). 18:14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흥미롭게도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 당시 가장 인간 대접 받지 못했던 천민들인 창기, 세리와 같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죄인들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도 받게 되었다(11:19).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이런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2:17).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런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욱 더 하나님 나라에 근접해 있는 사람들이었다(21:31). 이것은 사 61:1-2과 겔 34:15-16의 예언의 성취인데, 예수님은 실로 가난한 자, 잃어버린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구하러 오신 분이셨다 (4:21). 물론 이 구절들을 영적인 의미로 볼 수도 있겠으나 물질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를 배제하지 않음도 기억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의 성취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분리할 수 없다. 14:36에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2:42).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이었다(1:4; 10:9-10). 즉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사의 경륜을 이루시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죄와 사탄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것인데, 구속 곧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1:13-14; 53:10-11).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일차적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사역 속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위의 신적 수동태를 기억하라), 이 간구와 이 간구를 해야만 하는 신약교회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어 버린 이 간구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하늘은 사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12:9). 이제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땅은 하나님과 사탄의 격전지인데, 교회의 승리의 원천은 성령의 권능을 입는 것인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이루신 승리를 믿고 담대히 행하는 것이다.
 
마치 하늘의 승리는 지상의 승리를 비추는 것과 같이 십자가와 부활의 결정적인 과거의 승리는 지상 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승리를 이미 결정해 버린 것과 같다. 하지만 이 땅 위에는 여전히 사탄의 세력이 힘 있게 활동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6: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는 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놀이-게임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만 하는 전투이다(12:4).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구원사역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겠다. 우리 인생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향방이 달라지고 승패가 갈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찾고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데 무엇보다 말씀에 기초한 기도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을 이루도록 강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순종하고 경청하려는 자세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망과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품은 소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따라서 이 점검 부분을 위해 성령님께 간구하여 점검하도록 해야 한다.
 
그 후 우리는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략적으로 체계적으로 시간과 물질의 청지기로서 비전을 현실화 시키도록 최선의 삶을 경주해야 한다. 이 경주 속에서 평안과 보람, 그리고 기쁨을 누린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찾고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뜻을 이루는 과정도 우리의 충성을 도구로 한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는 것임을 기억하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힘들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의 삶을 순종적으로 살고자 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하늘로부터 수직적으로 입고 싸우는 이런 영적 전투와 더불어, 신약 교회는 예수님의 삶에서 본받아야 할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수평적인 사랑의 실천은 수직적인 구원을 선포하기 위한 차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본주의적인 간구와 나의 뜻을 접어주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순종의 마음이 더욱 요청되는 시대이다. 아멘!
 
5. 6:11절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의 전반부인 하나님에 대한 청원(Thou petitions)을 마치고 우리자신에 대한 청원을 다루게 된다(We petitions). 전반부의 하나님에 대한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것이다. 후반부에도 3개의 간구가 등장하는데 우리를 위한 양식’,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마치 마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순서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십계명의 1-4계명이 하나님 중심과 관련된 계명에서, 5-10은 수평적인 이웃과의 계명을 다루는 것과도 유사하다.
 
어떻든 우리와 관련된 간구가 3개나 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위한 중요한 관심을 보이고 계심을 의미한다. 2차적으로는 물론 나중에 있을 마태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3번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난 후 3번은 우리에 관한 간구를 하게 하셨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 나라, 그리고 뜻이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서 다 이루어져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의롭게 되었고, 부활과 하늘에 앉힘을 누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직 아니의 측면으로 인해 우리의 일상 양식과 범죄에 대한 용서와 시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관계는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양식(arton)은 무슨 의미인가? 좁게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빵을 의미하고 넓게 그리고 2차적으로는 삶을 영위하게 하며 생명을 보장하는 제반 양식과 음식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목수의 아들로 가난을 경험했으며, 제자들과의 공동체적 삶에서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한 것은 아니었다(12:1-8; 6:32-44; 11:5). 사실 예수님 당시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가난과 투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빵을 구하는 간구를 가르치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6: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신 주님이시기에, 과연 물질적인 빵 만을 구하게 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영적인 양식도 공급하고 계신다. 이 이유로 마 6:11절의 양식은 육신의 양식뿐 아니라 은혜의 양식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넓게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일용할’(epiousios)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오리겐이 말하듯이 존재(ousia)를 위해 필수적인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오늘을 위한이란 뜻인가?
 
주기도문에서 양식은 오늘 날 우리에게라는 말과 결부하여 보면, 필수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매일 공급해 주시는 만나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양식이 은혜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미래론적으로는 이 양식은 교회로 하여금 미래적 천국에서 영원히 먹을 만나를 내다보게 한다.
 
적용해보면 생업과 사업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순서가 지켜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
 
6. 6:12절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마 6:12과 눅 11:4 사이에 표현상 차이가 있음을 본다. 마태복음에서는 죄를 채무라는 뜻의 용어(opeilemata: 하지만 아람어에서는 죄[hoba]를 부채로 표현한다)를 사용하지만, 누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를 가리킬 때 죄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의 용어(hamartiai)를 사용한다. 하지만 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를 가리킬 때는 채무의 의미로(opeilo) 사용한다.
 
마태복음의 간구는 우리가 우리들의 채무자들을 이미 용서한 것 같이(hos= as와 과거완료형) 우리의 채무를 용서하여 주소서로 번역된다. 누가복음의 간구는 우리 자신들이 우리에게 채무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현재형)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런 용어의 차이점은 유대인 독자와 이방인 독자를 각각 염두에 둔 표현상의 차이일 뿐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기도를 해석하는 열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과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우리가 용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그 조건으로 먼저 타인을 용서해 주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타인을 자연스럽게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예수님 당시의 불신 유대인들은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타인을 용서하는 일이 조건으로 그리고 공로로 선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락(Sirach) 28:2에서 너희 이웃의 불의를 용서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네가 기도할 때에 너희 자신의 죄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Mishnah Taanit 16에서는 우주의 주재자시여,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우리 또한 우리의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니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가르치시는 기도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은 매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매일 죄를 범하기에 사죄의 은총도 항상 필요하다.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에 그 조건을 기억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의 죄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마 18:21-35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50- 이것은 도무지 노력으로는 갚거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요 죄이다)을 왕은 불러서(수동형: 왕이 주도권을 가지고 탕감 작업에 돌입했음을 의미함) 완전히 탕감해 주었지만, 그 탕감 받은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500만원)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일만 달란트 빚졌던 자를 투옥시켜 버렸다. 왕의 용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자신의 용서의 삶으로 표출되었어야 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삶은 변화되어야만 했다. 성도의 변화된 새로운 삶으로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증명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죄를 진정으로 받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는 불가분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남을 용서해 준 만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고 공로적-조건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현실적인 적용을 위해 하나 더 생각해 보자. 형제 자매의 과거의 죄를 다시 상기시켜 정죄하는 일은 마귀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사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정죄하면서 악용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죄의 은혜를 진실로 알지 못한 처사이며,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처사이다.
 
7. 6:13절 상반절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처음으로 부정적인 간구를 접한다. 이 간구와 관련하여 자연스러운 질문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는 분이신가? 1:13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렇다면 시험(peirasmon)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복음서에서 시험은 주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바리새인과 같은 예수님의 대적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행위와 관련된다(41:1; 1:13; 4:2; 고전 7:5; 16:1; 19:3; 22:28; 8:11; 10:2; 11:16 ).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아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탄의 시험과 유혹과 방해 공작은 나중에는 교회를 향해서도 계속된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은 비록 그것이 사탄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내면에 유혹을 받게 하여 죄를 범하도록 하는 차원으로는 시험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26:41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주기도문의 간구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주의를 주신다. 이 시험은 사탄에 의한 것으로서 제자들을 향한 시험이다. 따라서 이 시험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외적인 어려움과 핍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주님께 더욱 헌신하면 할수록 이런 어려움과 시험은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흔적도 더 많아진다(6:17).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무엇인가? 이 간구는 우리가 사탄의 유혹과 핍박을 전혀 만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간구는 아니다. 반대로, 사탄의 시험을 만나더라도 이기도록 해 달라는 간구이다. 예방 차원이 아니라 승리하고 극복하는 차원의 간구이다. 예수님의 사역에 사탄과 대적의 시험은 지속적이었는데, 그 때 마다 피하거나 경험하지 않도록 간구 한 적은 없다. 예수님은 그 시험과 타협하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실패하지도 않으셨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체험에서 나오는 확신 가운데 기도를 가르치시고 있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마귀와 싸울 수밖에 없다.
 
뒤따르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앞부분과 무슨 연관을 가지며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악’(tou poneirou)는 무엇인가? Tou라는 정관사를 남성으로 볼 수도 있고 중성으로도 볼 수 있다. 남성으로 본다면 사탄을 가리키며, 중성으로 본다면 그 악 혹은 그 악한 행동을 의미한다. 13:19, 4:15, 8:12, 17:15, 그리고 요일 5:18에서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킨다(그리고 엡 6:16; 살후 3:3도 보라). 이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그 악'은 사탄을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부정적인 간구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긍정형으로 다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즉 주제의 반복을 의미하기에 같은 내용의 다른 양상일 뿐이다.
 
고후 12:23이하에서 사탄에 의해 고난당한 바울의 모습을 우리는 본다.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하나님은 사탄의 손에서 바울을 건지셨고 보호하셨다. 11장은 믿음의 선진들 역시 이런 고난을 통과했다고 증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엡 6:10 이하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부활로 사탄을 이기셨고 그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나라를 확고히 해야 한다. 이것이 이 간구에 나타난 주님의 소원이다.
 
8. 6:13절 하반절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개의 간구 (청원)가 끝나고 이제 송영(doxology)으로 주기도문을 마친다. 하지만 송영의 원래의 형태에 대한 사본상의 증거는 논란의 대상이 된다. 본문비평의 외적 증거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고대의 사본 중에서 시내산, B, D, Z, f1, 대부분의 라틴 번역본들, 그리고 주기도문에 대한 주석을 쓴 많은 교부들(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 니사의 그레고리, 어거스틴, 암브로스 등)은 이 송영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송영을 가지고 있는 사본들은 5세기경의 K, W, 그리고 델타 사본 등의 비잔틴 사본계열, 다수의 소문자 사본, 그리고 일부 교부들(타티안, 크리소스톰 등)이다. 외적 증거로만 보면 이 송영부분이 없는 것이 훨씬 지지를 받는다.
 
내적 증거를 살펴보자. 송영이 없는 본문은 아마 마태의 주기도문 보다 더 오래된 누가의 주기도문에 더 일치하는 것 같다. 11:4에서 주기도문은 마치는데, 송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이 예수님의 원래의 말씀에 일치하고, 송영은 후대(아마 예루살렘의 예수님의 제자들)에 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기도문인 18복 기도문이 매 부분마다 송영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주기도문을 사용하면서 당대의 유대관습을 따라서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짙게 한다.
 
다수사본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깜뻔 심학교의 판브럭헌(Van Bruggen- 최갑종에서 인용됨)은 이 송영 부분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래의 기도문에 포함되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단지 소수의 사본들만이 송영을 생략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다수사본 옹호자들이 사본 숫자의 기계적인 계산을 맹종적으로 의존하는 오류를 볼 수 있다.
 
판 브럭헌은 계속 말한다: “이것은 동방교회 예배의식에서 사제가 송영을 말하고, 반면에 회중들은 서문과 여섯 청원들, 그리고 아멘을 암송했다는 사실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여기서 좁게는 판브럭헌, 넓게는 다수사본 옹호자들의 역사적인 객관성이 결여된 일방적인 추측을 볼 수 있다.
 
판 브럭헌의 계속되는 주장이다: “ ... 동방교회 예식과, 그리고 적어도 암브로스 때 밀란의 사람들이 사제들이 말하는 일정한 형식의 송영을 알았다는 사실은 송영의 진정성을 보증해 준다. 암브로스 역시 송영이 성경적인 기도 방식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역사적인 신빙성이 결여된 주장인 것은, 예를 들어 암브로스는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을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송영이 성경적 본문에 속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암브로스는 그의 책 성례전에 대하여” 5.4.18에서 분명히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다. 송영 부분은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기에 여전히 그 의미가 유효하며 살펴볼 가치가 있다.
 
송영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구약에서도 동일한 주제를 볼 수 있다(7:13-14, 27). 계시록에는 이 주제가 종종 등장한다(1:6; 4:11; 5:12-13; 7:10-12; 11:15). 중요한 것은 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성부하나님만 독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자 예수님도 공유하시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도 공유하게 된다(12:32; 22:28-29; 1:5-6; 5:9-10).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 3개의 하나님을 향한 간구들(Thou-petitions)로 다시 돌아간다. 주기도문의 결론 부분에 송영이 위치함으로 이 송영은 주기도문 전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으시며, 악에서 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송영을 받으셔야 한다. 우리가 각 간구를 송영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종말론적으로 다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현재적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아멘 역시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들에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적인 기도 그리고 공적인 기도 한 마디 한 마디 역시 하나님을 찬송하는 마음으로 아멘으로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 없는 아멘의 남발은 아멘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다.
 
나오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주로 기독론적, 성령론적, 종말론적, 그리고 교회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기도이다. 우리의 공적 그리고 사적인 예배와 기도에 더욱 빈번히 주기도가 찬송으로 혹은 대표기도에서 조차 때로는 애용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