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서 본 사도신경 The Apostles' Creed in the light of the New Testament
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들어가면서
‘신경’(creed, symbol)이란 고백을 가진 자에게 어떤 표지가 되는 것(symbolum, 표)이다. 삼위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삼위 하나님에 의하여 구별되는 표를 고백을 통하여 가지게 된다(유해무, 1997:89).) 즉 신앙고백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신앙고백은 성경에 기초한다(참고. 신 6:4-5절). 우리가 무엇을 믿는 가를 성경에 기초하여 요약해서 밝힌 것이 신조다. 모든 교인이 함께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신앙 공동체로서 필요하다. 교회를 반대하고 성경을 왜곡하는 이단들에게 답하기 위해서도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고전 12:3절이 말씀하듯이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예수님, 성령님, 죄 사함, 보편적인 교회, 영생 등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체가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거듭난 증거라는 사실이다. 세상 학식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이상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
사도 신경(symbolum apostolorum)은 교회에서 가장 보편적(에큐메니칼)으로 사용된 신앙고백이다. 사도신경은 니케아신경과 아다나시우스 신경과 더불어 개혁교회가 고백하는 신경이다. 전설이 전하는 것처럼 사도신경은 주님의 승천 후 10일째 되던 날 즉 오순절 성령 강림 날에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한 구절씩 말한 것이 모아진 것은 아니다. 그런 전설은 사도신경을 존경하고 마치 영감된 것처럼 꾸미기 위한 과장이다.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도 자신들이 이것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사도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인 로마서에 기초하여 세례문답 교육을 위해 170-180년 사이에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로마신경’ (The Old Roman Creed)의 증보판이다.
‘사도신경’라는 이름은 AD 390년에 이탈리아 밀란의 노회가 시리키우스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붙였다. 사도신경의 현재의 형태는 빨라야 5세기 말엽에 확립되었고, 8-9세기경에야 비로소 서방 교회 전역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유해무, 1997:91). 사도신경 은 니케아 신경 다음으로 기독교와 천주교 안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신조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어떤 신앙고백보다 예배 시에 가장 널리 사용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이 사도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더라도 사도가 전한 복음에서 유래했으며, 사도 시대의 세례 문답 교육을 위한 신앙고백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신앙고백문으로 확정되어 전수되었기에, 모든 신경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도신경에는 세 번 ‘Credo’(I believe)가 나타나는데, 성부의 고백에서, 그리고 성자의 고백의 첫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성령의 고백의 첫 부분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성부, 성자, 성령에 관한 고백으로 3구분 할 수 있다(참고. 마 28:19).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마 6:25-33)
(이 글의 전반적인 논지는 이승구의 ‘사도신경’을 많이 참조했음을 밝힌다.)
창 1:1절의 무에서(ex nihilo) 유를 창조하신 사건을 믿는 사람은 성경전체의 사건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이신론주의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하신 후에 피조물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섭리의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성도의 삶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의 순간순간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시는 손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창조하신 과거의 사건뿐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의 손길도 믿는 것이 바른 창조신앙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믿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 6:32절 이하-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가 밝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공중의 새보다, 들의 백합화보다 더 귀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극진히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대상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로 인해 걱정하는 자는 참된 창조주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마 6:25, 31).
의식주 문제를 나의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우리의 걱정으로 키와 목숨을 한자라도 더 늘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4:6절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라도 창조의 하나님이 교회를 끝까지 그리고 변함없이 돌보심을 믿어야 한다(롬 8:35-39).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전능하신 손길로 지금도 나를 돌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일과 문제를 처리해 감에 있어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오용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루는 것과 관련해서만 작용한다.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는 무엇을 믿겠는가?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을 고백한 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한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사도신경 중에서 실제로 성자 예수님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이 가장 길다. 아마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서 그럴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와 성령과 동등한 신성과 능력과 영광을 가지신다(요 17:5).
2.1. ‘예수’
먼저 마 1:18-21절을 본문으로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스라엘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나 조부모는 이름을 지어준다.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성육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지어서 예고하신 것이다. 물론 구약이나 예수님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이 종종 발견된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등장하는 예수아(느 7:7), 행 13:6절의 바예수(예수의 아들이라는 뜻) 그리고 골 4:11절에는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등장한다. 이렇게 예수라는 이름이 흔하게 등장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는 믿음을 자녀들에게 전수해 주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눅 1:31절에 보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씀하시고, 마 1:21절에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천사가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기독교인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너무 귀한 것이어서 감히 자녀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지 않는다. 가끔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볼 수 있지만. 그래서 2세기부터는 예수라는 이름이 아주 희귀하게 되었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 1:21절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고 말씀한다. 딤전 1:15절에는 ‘미쁜 말씀’이 등장한다. 오직 목회 서신에서만 5회 사용되는 특수한 용어인 미쁜 말씀 중 제일 먼저 등장하는 구절이 딤전 1:15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미쁜 말씀이라고 소개한다. 즉 복음이 미쁜 말씀이기에 모든 사람이 전인적으로 믿어야 한다. 이 복음의 미쁜 말씀을 믿는 사람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포기하고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고백할 수 있다(참고. 눅 5:8).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어디서부터의 구원인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영적인 구원이다. 하지만 부수적으로 죄는 영적인 문제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육체적이며 물질적이며 심지어 생태계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악한 결과를 초래했기에 예수님은 아주 포괄적인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만 유일한 죄 문제 해결자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 외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예수님의 자기 백성은 누구인가? 행 18:9-10절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불신 유대인들이 방해했다. 그때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따로 모임을 가졌는데 주님이 밤에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은 이 말씀을 듣고 1년 6개월 고린도에 더 머무르면서 말씀을 가르쳤고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을 것이다(행 18:11). 아직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었지만 고린도에는 나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주님의 백성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때에 가시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볼 때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교회 안에도 알곡 이외에 가라지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특징을 삶으로 보여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시다. 유일한 구원자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구별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라는 존귀한 이름을 말하고 들을 때마다 전도의 삶을 강조하자.
2.2. 그리스도(마 16:13-20)
그리스도는 그리스 말이고 메시아는 이스라엘 말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 선지자, 제사장이었다. 이들은 장차 오실 기름부음 받은 분이신 예수님을 내다보는 사람들이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직임에 세우고 성령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우시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는 특정 사람에게 그것도 일시적으로 그 직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이 주어졌다.
눅 3:15절과 요 1:19-22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참된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눅 2:11절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소식을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알릴 때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선언했다. 눅 2:26절에서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기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마 16:16절에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막 14:61-62절에 보니 예수님은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스스로 그리스도임을 밝히셨다. 눅 23:35절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을 비웃으면서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메시아는 강력한 정치적인 힘과 군사적인 통솔권을 가지고 오는 분이기에 잡혀서 죽는 연약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정치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 지명된 자로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3가지 직책을 감당하셨다.
첫째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참된 선지자로서 사역하실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경륜을 다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구약에는 성령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성육하신 후에는 예수님이 친히 행하셨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참 선지자로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성경 이외의 다른 것을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것,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포함한다.
둘째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이시다. 유일한 희생 제물이시다(히 9:26).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 제물 되심은 단번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무엇을 더 첨가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불완전케 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주님이 대제사장인 것은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기도하심을 의미한다. 히 7:24-25은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계속 효력 있게 만드시는 천상의 주님의 기도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대왕으로서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로서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심이다. 그러므로 기꺼이 성령의 감동과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면서 살 수 있다.
이 모든 직책은 이제 교회가 감당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선지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과 불신자를 화목케 하려는 직책을 중보기도로 감당하고, 주님의 왕권을 실현하도록 순종해야 한다. 우리 삶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2.3. 하나님의 외아들(마 11:25-27)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지금까지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호칭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1)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언약의 백성을 가리킨다. 호 11:1절에서 하나님은 출애굽을 가리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고 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의 전교회적 인격(Jesus' person as the whole church)을 본다. (2) 삼하 7:14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왕이 될 사람을 가리켜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대표적인 언약적 형식(covenantal formula)이다. (3) 지상의 존재가 아니라 천상의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 욥 1:6절은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느니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의미는 다르다. 두 구절을 살펴보자. 요 10: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마 11: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면서 말씀하시는데, 세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 참람되다, 즉 신성모독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 아니라 갈릴리 목수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요 1:14절에서 ‘아버지의 독생자’, 요 1:18절은 ‘독생하신 하나님’, 요 3:16, 18절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라고 말씀한다. 주의할 것은 예수님은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나신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 전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예수님은 영원 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낳아진 아들이지만,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장면과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시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 설명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말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됨과 다르다. 우리는 언약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우리는 원래 마귀의 자녀였다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아들 되심은 본래부터 존재론적으로 아들 됨이었다.
예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의 아들-딸 됨은 존재에 있어서 차이가 나지 똑 같지 않다. 롬 8:29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부르심으로 우리는 둘째 셋째 아들 즉 예수님의 동생처럼 말씀한다. 존재론적인 동생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명령이 담긴 말씀으로 보인다.
2.4. 주(마 7:15-29)
성경에서 ‘주’(kyrios)라는 말은 특별히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정중히 부를 때 사용된다. 마 27:63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총독 빌라도를 ‘주여’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다(벧전 3:6). 주라는 호칭이 가정에서도 사용된 것이다. 심지어 로마 황제 가운데 네로는 ‘세상의 주’(Lord of the World)로, 도미티안은 ‘우리 주와 신’(our lord and god)으로 불렸다. 그러나 황제들의 이런 호칭은 그리스도의 모방(parody)에 불과하다.
군중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 13:13-14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주와 선생을 동의어로 사용하신다.
하지만 이런 의미 외에도 주라는 호칭은 가장 높이는 의미로 사용된다. 행 2:36절에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은 ‘주와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도마는 요 20:28절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바울도 롬 14:9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주라는 호칭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해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라고 부르던 것과 관련된다. 사실 LXX에서는 6,000번 이상이나 야웨(YHWH)가 주(Kyrios)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주라는 호칭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예수님은 세상의 주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일찍 자리 잡았다(행 8:16; 고전 12:3).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만 이러한 주님이라는 호칭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고등 기독론(high Christology)은 부활 전 심지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등 기독론(low Christology)에서 고등기독론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시간이 경과했고, 초대 교회가 고등기독론을 발전시켰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복음서의 연대설정과도 관련되겠다. 지상 사역 중에서 예를 들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해주었다. 눅 5:8절에서 갈릴리 어부 베드로를 부르실 때 예수님을 향해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베드로는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전에 나귀를 구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고 말씀하신 적 있다(마 21:3; 막 11:3; 눅 19:31, 34). 예수님은 세상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하실 수 있는 분이시면 주님이시다. 그리고 마 7:21절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철저히 종-일군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바르게 고백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순종하는 종으로 살 때에만 가능하지 말로만 ‘주여, 주여’라고 해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마 7:23)이란 책망을 받고 말 것이다. 이런 고백이 빛을 발하도록 실천적인 믿음으로 살자.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눅 1:26-38)
영원 전부터 계셨던 성자 예수님이 이 세상 역사 속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오신 사건이 성육신 사건이다. 사실 구약에는 메시아께서 구주로 오실 것을 많이 예언되어 있다. 그런데 메시야가 오실 것을 대망했던 사람조차도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을 보고는 믿지 않으려고 했고 놀라고 말았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볼 때 사람은 놀라면서 찬송으로 반응해야 한다.
눅 1:35절에 보니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출생이 처녀 마리아의 몸을 잠시 빌려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의미하기에 요셉과 마리아의 정상적인 부부관계 속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처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가? 기적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기적과 같은 역사라며,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더욱 더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마 1:24-25절에 보니, 요셉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까지 마리아와 동침치 아니했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아기 예수님은 마리아의 젖을 먹고 자라셨고 지혜와 키가 점점 자라나셨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기에 예수님은 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고 육체 속에 여전히 신성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의 몸은 죄악이 없고 거룩하고 더러움이 없는 상태이셨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마리아론에 의하면 마리아는 전생애를 통해서 무죄한 가운데 동정녀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독신제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854년에 교황 Pius 9세(1792-1878)는 마리아 무흠 수태설(Immaculate Conception)을 교리화했는데, 이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공로를 미리 맛봄으로써 원죄와 무관하다는 주장과 관련된다. 그리고 지상 사역에서도 자범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죄가 없기에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주장을 교황 Pius 12세(1939-1958)가 1950년에 선포한 것은 자연스럽다(보라. 유해무, 1997:292).
갈 4: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BC 6-7년경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구원을 위해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때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왕이었던 헤롯대왕은 BC 4년에 죽었다고 역사가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2006년은 실제로 AD 2000년 정도로 보면 된다. 그러므로 999년 혹은 1999년 9월 9일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추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실제로 서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AD 999년에 세상 역사의 종말이 온다는 사상이 유행한 적 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1260일 혹은 42개월에 기초하여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주후 1260년에 종말이 온다는 주장도 있었다.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세상 역사 중에서 천지 창조와 더불어서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4. 본디오 빌라도에게 (치하에) 고난을 당하사(마 27:1-10)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고난이 마지막 1주일에 한정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주님의 전 생애가 고난이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신 후 잡히시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군병들과 유대인들에게 모욕을 당하시고 결국 죽으셨다. 소위 고난주간에 일어난 일만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 전체가 고난이었기 때문이다. 하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고난이었다. 무죄하신 분이 죄인들 가운데 사는 것도 고난이시다. 목수의 아들로서 가난한 유대인의 삶을 사신 것도 고난이 아닐 수 없다. 눅 2:22-24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태어나신지 40일 만에 정결의식을 행하실 때 비둘기 2마리로 속죄제를 드렸다(레 12:6-7).
예수님의 초림부터 AD 70년까지는 신구약의 중첩기간(the overlapping period of the OT and the NT)이다. 이 기간 동안 성도가 성전과 회당에서 기도하고 활동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양을 드릴만큼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생애 기간에도 짐승들은 보금자리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고 죽으심은 최고의 고난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적인 고난뿐 아니라 영적인 고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생애 초기부터 어떻게 죽으실지 알고 계셨다. 이것은 정신적인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적었던 것도 예수님에게는 고난이셨다. 병자를 불쌍히 여기면서 고쳐준 사건을 두고 오히려 예수님이 귀신들렸다는 말을 듣는 것은 고난이 아닐 수 없다(마 12:24). 더구나 동고동락하면서 합숙훈련 시켰던 제자들조차 주님의 말씀을 제 때 즉각 알지 못하고 부활 후에 알게 된 것은 주님에게 있어서 힘든 고통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할 수 만 있으면 거두어 주시길 기도했을 뿐 아니라 막 14:34절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은 가장 극심한 영적인 고난이었다.
왜 이렇게 주님은 생애 전체에 걸쳐서 그리고 육과 영혼 전체에 걸쳐서 총체적인 고난을 당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을 인하여 고난을 감내하셨다. 구속하신 사랑이 예수님을 고난의 현장으로 몰아 내셨다. 고후 8: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니라.”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것을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씀한다. 우리를 은혜로 풍성케 하시려고 주님은 즐겨 가난한 상태로 되셨다.
예수님의 이런 고난은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큰 위로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이기신 것은 우리가 고난 중에 어떻게 참아야 할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히 4:15절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예수님도 당하셨기에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체휼하신다는 말씀은 동정하실 뿐 아니라 적극적인 도움을 주실 분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히 2:18절에서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이러 고난의 삶과 효력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벧전 2:21절은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을 닮는 길이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 우리의 정성과 사랑을 희생하면서 섬기며 살아야 한다. 이런 ‘고난의 복음’이야말로 축복과 안락함을 너무 좋아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멍든 현대 크리스천에게 꼭 필요한 말씀일 것이다.
5.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마 27:45-50)
서방 교회에서는 십자가와 속죄에 대한 강조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성찬에서 부활의 기쁨보다는 십자가의 슬픔이 지배적인 습관에서도 나타난다(유해무, 1997:298).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신 이유를 그 당시 정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이유에서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군중들이 소요를 일으켜 사회적인 불안을 초래한다면,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한 속주이기에, 이 불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예수님을 처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총독 빌라도에게 요구했다. 바라바는 로마 제국에 항거한 무장 투사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무 힘없이 그냥 죽어 가신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처럼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라면 힘이라도 제대로 한번 써본 사람이 더 필요했다. 예수님 당시의 강도는 반 로마적 투쟁에 가담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눅 23:23-25절에 보니,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하기를 언도하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사실이 없다고 판결했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비록 총독이라 할지라도, 효과적인 직무 수행을 위해서 라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원만한 관계 유지가 필요했기에 그들의 청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메고 가시는 길(via dolorosa)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기도 했다. 예수님이 먼저 앞서 가시고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것은(눅 23:26) 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 즉 참된 제자도(discipleship)를 미리 보여준 사건일 것이다.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오후 3시에 죽으셨다.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 이 어둠은 출애굽 시에 임한 흑암의 재앙과 같이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인 악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패에는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졌다. 라틴어는 정치와 군사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헬라어는 문화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히브리어는 종교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말은 원래 조롱하기 위한 말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이 왕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는 거의 모든 제자들이 얼씬거리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으신 죽음이었다.
왜 주님은 죽으셔야 했는가? 인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 했기에 그 어떤 사람이나 피조물도 이 일을 감당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에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자원하여 감당하신 것이다. 이것을 ‘안셀름의 만족설’(the satisfaction theory of Anselm)이라고 부른다. 물론 주님의 죽음은 사망과 사단에 대한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고 우리에게는 새롭고 산 길 즉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에서 볼 수 있다 (마 27:51; 눅 23:45).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죄와 구원에 대해 성부와 의논하신 것이다(눅 23:34).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돌에 맞아서 죽은 스데반의 예도 있고 목 베임을 당한 세례 요한의 예도 있지 않는가? 신 21:23절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란 말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이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에 합당하다는 의미이다. 갈 3: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고 고백한다.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하신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는 우리의 옛 사람이 죽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신비로운 연합(mystical union, unio mistica)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던 모든 죄악 된 성품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씀한다. 엡 4:22절에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의인이 되어서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쳐야 한다.
6.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6.1. 장사 지낸바 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서(마 27:57-61)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큰 역할을 했다. 눅 23:50절에 보니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며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고 한다. 마 27:57절 이하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힌다(요 19:38). 유대인의 국회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그의 지위가 박탈될 위험을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눅 23:51절에 보니,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가결했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막 14:64절을 통해 볼 때 마가가 결의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 19:38절에 아리마대 요셉은 한 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겼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에는 성령의 역사로 담대히 장사지내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12제자들과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막 15:43절에 보니,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총독에게 당돌히-용감히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한다. 일반적으로 로마 사람들은 시체가 썩을 때까지 십자가에 메달아 놓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가족이나 친구에게 시체를 건네주기도 했다.
요 19:39절에 보니,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한 역할을 한다.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근쯤 가지고 왔다. 왕의 장례에서나 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향품과 세마포로 쌓여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세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셨다. 이 사실은 사 53:9절의 성취이다: 그의 묘실이 부자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심과 많은 향품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사용된 것은 왕의 장례임을 강조한다. 실제로 헤롯대왕이 죽었을 때 장례를 위해 엄청난 양(약 200kg)의 향품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눅 23:55절에 보니,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도 그 무덤에 함께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장사 지낸바 되심을 세밀하게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이 확실히 죽으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된 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에게 더 이상 두려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천국에 이르는 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주님 안에서 잠시 자는 것일 뿐이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 안에서 잔다고 할 때 우리 영혼이 잠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을 때 즉 몸과 영혼이 분리될 때, 우리 영혼은 즉시 천국의 주님께로 인도되고, 우리 몸만 무덤에 묻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어서 자는 것은 몸이지 영혼은 아니다.
6.2.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벧전 3:18-22)
AD 39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퀼레이안(Aquileian) 형태의 라틴어 사도신경과 이것을 따르는 다른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사’(He descended into Hades, descendit in inferna)라는 말을 장사 지낸바 되시고 다음에 덧붙인다. 이 구절을 천주교에서는 지옥 주위에 구약의 성도가 죽어서 가 있는 선조 림보(Limbus Patrum)에 예수님께서 가셔서 복음을 전해서 해방시킨 것으로 본다. 벧전 3:19절도 이렇게 해석한다. 개신교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해석이 있는데 제 2의 기회설이라 불리는데,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지옥에 내려 가셔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고 보는 것이다. 루터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 가셔서(음부하강설)지옥에 있는 영들과 사단에게 죽음과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여 유죄 선언하신 것으로 본다. 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낙원에 가서 구속의 진리를 더욱 분명히 그곳에 있는 구원받은 영들에게 증거하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세부적인 것까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개혁주의에서는 교부 Lufinus 이래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하신 극심한 고난을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예수님이 겪으신 영의 고뇌는 지옥에 들어간 것과 같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따라서 주님이 당하신 고통으로 우리는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참고. 유해무, 1997:302).
7. 하늘에 오르사(눅 24:50-53; 히 10:11-14)
부활의 주님은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활은 당위(dei)로 받아들여진다(마 16:21; 막 8:31; 눅 9:22). 여기서 왜 40일간 계셨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성경에서 40일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기간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40일을 보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 밖의 감람산 자락 베다니라는 마을 근처에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나 후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 결국 구름이 예수님을 가려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구름은 실제 구름이다. 그리고 이 구름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현존과 영광 속으로 들어 가셨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행 1:10-11절에 보니 승천의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말한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주님은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 그 어디에 실제로 계신다.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은 실재하는 장소이다. 실재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계 1:17절에는 밧모섬에 요한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요한이 마치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고 말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기에 언제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임마누엘 하실 수 있다. 하지만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인성, 육체적인 몸의 본질은 재림하기까지 하늘에만 계신다.
여기서 하나 살펴볼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눅 24장과 행 1장에 보니,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시니’라고 신적수동태(divine passive, theological passive)를 사용하여 말씀한다. 이 말씀은 성부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늘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3위 1체 하나님의 합력 사역이시다.
참고로, 계 12:5절의 경우처럼(아오리스트 수동 직설 3단. 끌어올리다. 빼앗다), 눅 24:51절과(미완료 수직 3단. 올려가다. 가져가다) 행 1:9절(아오리스트 수직 3단 들어 올리다.)에서 둘 다 수동형으로 예수님의 승천을 묘사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어떤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는가? 특별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구약의 희생 제사의 빛 속에서 이해한다. 먼저 구약 희생 제물이 죽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과 동일하게 본다. 히 9:26-28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드린 것이라고 밝힌다.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후 승천하신 것은 그 희생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속죄의 사역이 완성되어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다는 의미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다. 하늘을 성소로 비유한 것은 실제로 하늘이 성소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하늘에서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일을 행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아버지 하나님께 보이시면서 피값을 사신 우리를 변호하시고 모든 정죄와 저주로부터 보호하신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을 지킨다(행 20:7; 고전 16:2). 이제부터는 일하고 난 뒤에 쉬는 것이 아니라 쉬고 나서 일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예표가 되어 우리는 일이 곧 안식이 될 날 곧 종말론적인 안식일을 바라고 이 날을 지킨다(히 4:1-11).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계시사적 중요성을 가진다(유해무, 1997:307).
쉼과 하나님의 창조는 관련있다. 제 4계명이 이것을 증면한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쉬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주일-첫 날을 쉬고 6일을 일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일함에 잔치와 기쁨의 의미를 회복시킨 것이다. 원래 사람은 낙원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는 멋진 사명을 일로 부여받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심지어 6년 일하고 1년은 쉬라고 말씀하셨고, 49년과 50년은 2년 연속 일하지 말고 쉬어라고 희년을 주셨다. 이렇게 안식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 안식에 걸맞는 모든 물질과 여건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안식은 믿음의 문제이다. 안식은 신앙의 행위이다. 안식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행위이다. 주일은 안식일이다.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아름다운 피조물을 감상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이 월요일부터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묵상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에게 쉼을 예배 가운데 그리고 주일에 누리도록 해야 한다.
물론 안식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불신자들에게는 참된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장은 종업원이 주일에 쉬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네 문안에 유하는 객에게 안식일에는 일시키지 말라고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육체와 영혼의 안식을 주님의 주권을 믿고 쉬자. 그러나 일하지 않고는 안식이 부담스럽게 된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는 자만 진정한 안식을 누린다. 그리고 진정한 안식을 누린 자만이 열심히 일할 수 있다.” 꿩 먹고 알 먹고, 이것이 신앙의 재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상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예수님께서 보혈을 들고 하늘 성소로 들어 가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실 때 늘 주님의 보혈을 통해서 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두려움 없이 시온의 대로를 통과하여 하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더 담대히 의를 확신하면서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달려가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엡 2:6절은 이미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힌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권을 확인하고 살아야 하고, 위에 것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
8.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빌 2:9-11)
승천하신 예수님은 현재적으로 하늘에서 무엇을 하실까? 우리는 중보 기도하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쉽게 떠 올린다. 그렇다. 주님은 천상의 중보자이시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가만히 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사역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성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앉아 계실 수도 서 계실 수도 누워 계실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께서 앉아 계시다거나, 눈, 얼굴, 발, 다리, 팔, 손을 가지고 계시는 것처럼 성경에서 표현되는 것은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치 사람처럼 묘사한 것일 뿐이다(신인동형론적 표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말도 저 공중에 나무나, 철이나, 금으로 만든 의자가 붕붕 떠 있다고 볼 이유는 없겠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심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런 몸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실제 보좌 위에 앉으실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조차도, 성부께서 영이시기에 보좌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성자의 보좌도 상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서 같이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말씀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성부께서 시행하시던 권능과 영광의 통치에 동참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바로 이 고백을 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성부와 성자께서 우주를 다스리시기에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성격, 우리의 의지, 우리의 육체조차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 가족, 학업, 직장, 사업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어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드러내어야 한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에,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더욱 나타나고, 닮아가야 한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실 때 교회를 통해서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주님의 통치는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주님의 세상의 통치가 완성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의 역사를 마감하시고 통치를 완성하기까지는 쉬지 않고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예수님의 통치의 대리자와 통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공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교회 즉 우리 때문이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다스리다가 다시 오시는 때는 언제인가? 즉 주님의 소위 재림의 때는 언제인가? 고전 15:25에 보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라”(시 110:1)고 말씀하시므로, 원수를 물리치시는 사역을 완수할 때까지이다. 그러므로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주님의 통치와 승리의 기간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비관적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은 주님의 승천의 의미를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처사이다.
주님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 구원의대상인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주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로, 주님의 승천도 우리의 승천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다스리심 역시 우리의 다스림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면 우리가 먼저 준비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날마다 기려야 한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부활-승천하여 승귀하셨으므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계 5:13).
9.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행 1:11)
사도신경 중에서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장차 미래에 하실 일을 고백하는 것이다. 지금 천상에서 온 땅의 통치 사역을 감당하시는 예수님은 언젠가 다시 오셔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스런 나라(regnum gloriae)를 돌려 드릴 것이다.
‘저리로서’는 어디로부터 인가? 구체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부터라는 말이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좌가 상징적인 말이기에 ‘저리로서’라 말은 하늘로부터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위로부터 이 땅으로 오시는 것이기에 ‘강림’(降臨) 혹은 ‘내림’(來臨)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 말을 그리스말로는 '파루시아'라고 부른다. 어떤 황제나 황제가 보낸 고관이 어떤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온 땅의 주로서 이 땅에 심판하시러 오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승천하실 때 약속하신 모습 그 대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실 것이다. 남반부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다면 북반부에 사는 사람은 동시에 볼 수 없을 것이 아닌가? 한국 사람이 주님 재림을 본다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동시에 볼 수 없지 않을까? 이런 의문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영광의 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비로운 것임을 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시간은 우리가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고 있을 때이다. 마 24:40-41절에 보니, 밭에서 일하고, 여자들은 메를 갈고 일상생활을 할 때 오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37절에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간다고 말씀한다. 살전 5:4절에 보니,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어두움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 가운데에서 살아서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 깨어서 준비한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상적인 생활에 충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서 특별한 일을 할 것을 말씀하신 적 없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산 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살아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동시에 영적으로 산 자 즉 구원받은 백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죽은 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은 사람들과 영적으로 죽은 모든 불신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마 25:31-32절의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심판과 같다. 모든 사람이 이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무덤에 있는 모든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해야 한다(계 20:12).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을, 신자는 구원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이 받는 심판은 지옥이냐 천국이냐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된 심판이고, 불신자들에게는 지옥 형벌에 관한 심판이다. 결론적으로, 히 9:27절이 말씀하듯이, 한 번(hapax)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krisis)이 있다.
여기서 참고로 살펴볼 구절은 휴거를 암시하는 살전 4:16-17절이다(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일반적으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이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는 것을 휴거(rapture)라고 한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휴거의 목적이다. 주님을 영접했다면 그분을 이 땅으로 모시고 와야 한다(그러므로 주님이 이루실 영원한 천국은 이 땅이지 저 하늘의 어떤 공간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말로 휴거로 번역된 말은(apantēsis, 동사 원형은 apantaō, 막 13:14 [물을 나르는 사람이 제자들을 만날 것], 눅 17:12, 마 25:6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외침]; 행 28:15), 어떤 황제나 그의 사신을 모시고 오는 것 즉 만남(meeting, come toward)을 1세기 당시에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포로 신분으로 호송되던)사도 바울을 기다리던 로마 교회의 형제들이 바울 일행을 맞이하려고 압비오 저자(시장, forum)와 삼관(the three taverns)까지 맞으러 와서, 바울 일행을 모시고 로마로 들어간 것과 같다(행 28:15, 16 참고. Lattke, M. 1990. Apantēsis. In Balz, H. & Schneider, G., eds.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Grand Rapids : Eerdmans. p. 14-15.).
10. 성령을 믿사오며(갈 5:16-26)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동일한 권능과 능력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 성령님은 단순한 힘이나 기운 혹은 불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니케아 신경에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아오시고” 라고 밝힌다. 성부에게서만 성령이 나온다고 믿었던 동방교회는 자연스럽게 성부 우선적인 종속설적인 개념을 견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표현은 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시지 않으셨을 때가 없었고, 늘 계셨다. 구약의 성령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시며, 구약에 일어난 모든 회심 사건도 성령님의 사역이다.
행 5:1-11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을 적게 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땅을 판 돈을 즐거이 반이나 10분의 1만 내어도 하나님은 즐거이 받으셨을 것이다. 문제는 이부부가 거짓말을 함으로 성령을 속인 것이다(3절). 9절에 보니, “주의 영(성령)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 성령님은 각인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성령님은 신구약 성경을 사람이 기록할 때 영감을 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구원의 효력을 지금도 나누어주신다. 오늘도 성령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도록 역사하신다. 우리 속에 살아계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양자의 성령(the Spirit of sonship)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롬 8:15).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의 성화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그리고 장성한 분량까지 닮아가도록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살아계신다.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를 성전 삼아 내주하신다. 우리가 성령의 권능 안에 있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영광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복음전파와 설교에 성령의 역사는 절대적이다. 살전 1:5절에,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이 전파되기에 복음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성령님은 복음 전파의 원동력이 되신다. 성령의 권능 하에 있는 전도자와 설교자가 정상이다.
성령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이다. 이 9개의 성령의 열매는 단수로 표현되는데,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보이신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곧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런 9개의 열매를 종합적으로 동시에 맺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했을 때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지금은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생각이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전도하고 싶고, 찬송하고 싶고, 예배드리고 싶고 죄를 범할 때는 회개하려고 하는 마음은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다.
11.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엡 2:11-22)
이 구절을 우리는 니케아 신경에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하나의 거룩한 교회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의 불러 모으시는 중생케 하심과 보호하심으로 불러 모아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지금도 성령은 교회를 불러 모으시고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3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설립되고 유지되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영원 전부터 있었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과 그 수는 하나님의 눈에만 보인다. 우리 눈에는 알곡이 누구인지 가라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땅 위의 가시적인 교회는 몇 가지 특성(attributes)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단을 제외한 모든 교회는 하나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바로 서 있는 교회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통일적인 교회이다. 그래서 엡 2:20절에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서 있다”고 말씀한다. 올바른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 그리고 치리가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중대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문제없이 교권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가 분열된 것은 교회의 통일성을 깨뜨린 명백한 죄다. 이렇게 교회의 통일성이 중요하기에, 구체적으로 하나의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끼리 서로 잘 알아가야 한다.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의 이름과 형편을 알도록 노력을 해야만 교회의 통일성이 있게 된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은 필연적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뒤따르는 고백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 의식을 분명히 가지지 못하고 주일 오전 예배에만 참석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돌보고 지체의식을 가지도록 권면해 한다.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거룩한 무리이다. 그래서 교회는 의로운 성도라 불린다. 교회가 거룩성을 잃으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교회의 거룩은 성도의 성화와 관련된다. 개인적으로 성화 즉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겠지만 교회 전체적으로 함께 거룩해져 가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만 성화될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거룩을 파괴하는 행위를 사랑의 동기로 징계해야 한다. 치리는 지체를 미워하거나 단지 벌을 주는 차원에 머무를 수 없고, 교회의 순결과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사랑의 행위이다.
교회는 보편적(catholic)이다. 이 말은 교회 안에는 신체적인 건강의 정도, 피부색, 소유의 정도, 성별, 교육 수준의 정도, 사회의 지위의 정도에 의한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차별 없는 교회의 특성을 가지려면 개개인이 형제자매를 바라볼 때 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아야만 그 존재의 귀중함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교회의 보편적인 성격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교회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 위에서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이다. 이 전투는 우리가 완전히 승리한 교회(Church triumphant)가 될 때까지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전투하는 교회는 사단과 우리의 육의 소욕 그리고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대해 싸워야 한다(엡 6:13).
1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을 믿사오며)(요 17:20-22)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고 고백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성도가 교제하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사도신경 중 이 고백 바로 앞의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고백의 다른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백이 중요한 함의를 가지기에 고백해야 한다.
성도가 교통하는 것은 거룩한 무리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제는 코이노니아이다. 요 17:21절에 근거해서 보면, 성도 사이의 교제는 3위 1체 하나님 사이의 완벽하고 조화로운 교제에서 파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원 전부터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시고 완전한 조화 가운데 이루신 3위 하나님의 교제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본받아야 할 교제이다. 성도의 교제는 거듭난 사람들의 교제이기에 하나님 중심적인 교제이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농담하고 즐기는 교제는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도의 교제는 무언가 구별된 점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unio mistica)을 이루고 교제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전으로서 성령님과 교제하고 있다. 이 교제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생사의 문제가 달린 생명의 교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신 주님을 떠나서는 가지된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요 15:1, 5).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교제이며, 생명의 교제이며, 공동체의 교제이며, 영적인 교제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섬기며 나누어야 한다. 지체들의 필요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은사를 사용하고 나누어야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런 나눔과 교제를 위해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한다.
교제-코이노니아 라는 말은 신약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된다. 고후 9:13절에서 가난한 성도를 위해 드리는 연보를 ‘교제-코이노니아’라고 부른다. 즉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은,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하심과 교통하심이 충만한 사람은 성도의 교제도 잘한다. 왜냐하면 교제와 관련된 사랑과 자비와 양선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교제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교회 안의 지체들의 상황과 형편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일이나 시간이 날 때 서로 초대하여 차를 나누고 그 교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인 공교회를 믿기 때문에 다른 교회의 성도와의 교제도 역시 중요하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55문을 들어보자:
문. 성도들의 교통이라는 말이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 첫째로, 모든 신자들은 이 공동체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며, 그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한다는 뜻이고, 둘째로, 각각의 지체들이 자신의 은사들을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복지를 위해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사용하는 것 을 의무로 여겨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13.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을 믿사오며)
우리는 죄용서 즉 사죄를 하나님의 은총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죄 용서란 무엇인가? 죄 용서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근거를 마련해 두시고, 더 이상 우리의 죄와 죄성(罪性)도 기억하지 않으시고 죄의 형벌을 내리시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죄가 너무 심각하고 치명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죄용서의 은혜는 이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죄 용서를 받은 자는 죄가 무엇이며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을 재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언행심사로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죄는 죽음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 그리고 질병과 관계의 단절과 온갖 종류의 고통을 초래했다. 이런 심각하고 파괴적인 죄에 대한 용서는 참으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치도 않고 우리에게서 옮겨 버리신다. 단지 조건은 참된 회개와 그에 따르는 변화된 생활이 있어야 한다. 회개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망하면 어떻게 될까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순종이다. 두 구절이 눈에 띈다. 롬 3:25절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롬 4:25절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이런 구절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임을 말씀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 대신해서 형벌을 받은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소유하고 있다. 이 ‘의’ 조차도 믿음으로 얻었다고 롬 5:1절이 밝힌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예배 중에 우리는 죄의 고백과 용서 선포의 순서를 가진다. 그러나 화란의 Middelburg회의(Synod)에서 1581년에 결의한 바대로 죄의 용서를 비는 간구는 예배 중의 기도에, 죄의 용서의 순서는 설교 중에 포함되어 있기에 따로 행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설교가 죄 용서를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마치 목사가 천주교의 사제처럼 죄를 용서해 주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죄 용서를 위한 순서를 예배 가운데 따로 가진다면, 하나님께 감사를 따로 하는 순서도 필요할지 모른다. 물론 죄를 품은 채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 순서가 특별히 계속해서 지켜질 수도 있다.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용서에 대한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죄를 용서받았기에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마 18장에 나오는 비유처럼 우리는 10,000달란트 빚진 자로서 100데나리온 빚진 형제를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용서를 베푸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불필요한 정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 죄를 보면 더럽다고 생각하고 멀리해야 정상이다. 그리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을 성령께서 통제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14.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고전 15:42-44).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부활이다. 부활신앙이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것은 우리의 몸이 부활생명체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영생은 사후에 경험될 뿐 아니라 이생에서도 경험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 20:31절에서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이미 임한 영생(=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밝힌다. 그리고 요 5:24절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한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영생에 참여한다. 반대로, 불신자들은 현재적인 영생 없음 즉 현재적인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몸은 무덤 속에, 우리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 비록 우리 몸과 결합하기 전이라 할지라도 우리 영혼만은 이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상태이다. 즉 이 상태는 우리 영혼의 성화가 완성된 상태이다. 성도의 죽음은 사망의 권세에 대한 승리의 선포이다. 왜냐하면 일평생 하나님만 섬기다가 우리의 낮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성령의 견인 없이는 불가능한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사망의 두려움과 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포기하도록 만들지 못한 것이 바로 성도의 죽음이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만 천상에 있는 것으로는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도 다시 두 번째 부활을 통해서 영혼과 결합해야만 우리의 영화가 온전해 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만 천상에 있는 것은 우리의 온전히 영화 전의 ‘아직 아니’의 상태이다.
고전 15:51-52절은 “…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이 온전히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다. 이렇게 우리가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우리의 영화로운 몸이 영원히 살게 될 장소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계 21:1-8; 참고. 사 66:22). 그곳에는 눈물도 고통도 없고 지극한 복락만 있다. 비록 이 땅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는 성도가 있다 해도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그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 저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찬란한 곳이기에 해와 달과 같은 광명체가 필요 없다(계 21:23). 주님이 온전히 우리를 장막-지성소로 삼아서 거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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