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6일 금요일

홈스쿨 (3)

일천개의 홈스쿨이 있다면 일천개의 홈스쿨링 방법이 있다.


“1천 개의 홈스쿨링 가정이 있다면 1천 개의 홈스쿨링 방식이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홈스쿨링을 하는 부모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홈스쿨러들은 딱딱한 공교육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공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교를 그만둔다. 그러나 부모의 교육철학이나 아이의 특성,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와 환경에 따라 아이들의 삶의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목격된다. 아이가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가정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학교 안에서건 밖에서건 엄연한 현실이다.
지난 1월15일~17일 충북 제천에 있는 간디청소년학교에서 홈스쿨링 네트워크인 ‘학교너머’가 주최하는 ‘홈스쿨링 가족 캠프’가 열렸다. 가깝게는 근처 제천 시내에 사는 가족부터 멀리 부산과 경기 북부에 이르기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캠프에 참여한 참가자들로 방학 중인 학교가 들썩거렸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부모들은 부모들끼리 모여 그동안 인터넷으로만 주고받던 이야기를 앞다퉈 풀어놓는 자리에서, 몇 가족을 만나 사연을 들어보았다.

올해 15살이 된 명지네는 충북 봉화에 산다. 2000년 아버지 장창호씨와 어머니 차정원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 단양으로 이사를 했고, 2003년 다시 봉화로 옮겼다. 초등 5학년이던 명지는 봉화로 전학을 한 뒤 몹시 힘들어 했다. “6학년 언니들이 신고식을 하라며 괴롭힌다”는 것이다.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는 곳에 사는 터라 명지가 학교까지 가는 일 자체가 부담스런 상황이었다. 6학년 진학을 앞두고 명지가 학교를 그만두던 날, 가족들은 ‘탈학교 파티’를 열었다.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어머니 차씨가 귀농하기 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엄마가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하면 집에서도 애들을 잘 가르치겠다며 부러워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농삿일이 바쁜데 아이를 하루종일 데리고 있을 수도 없고, 학교에서 하던 대로 시간표를 짜서 아이 공부를 가르치면 집이 곧 학교가 되니 명지가 더 답답해 할 게 뻔하잖아요.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보라고 시키고 점검도 했는데, 한 달 만에 둘 다 지쳐 버렸죠.”
그래서 명지는 하루종일 놀았다. 그러다 불쑥 ‘영어공부를 하겠노라’고 했다. ‘동방신기’때문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고 싶은데, 영어 가사를 도통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명지는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보면서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학교너머 캠프에 참여한 뒤 또래 홈스쿨러들과 연락을 하면서 이것저것 관심을 갖고 욕심을 내는 일도 많아졌다. 차 씨는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면 어느 부모든 조바심이 나고 불안하게 마련이지만, 아이 스스로 하고 싶어야 무언가 하게 되니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아이를 믿어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경기 고양에 사는 소영이는 고등학교 학력 인정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14살인 소영이가 중학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고교 검정고시까지 치르는 것은 ‘천재’라서가 아니다. 입시 전문가인 아버지 이재건씨의 독특한 철학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상위 1% 안에 드는 아이들 중에 부모와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는 아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학교가는 것이 즐겁고 공부가 재미있다는 ‘천재’들은 아주 드문데, 우리 소영이는 그런 천재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경쟁인지도 모르는 지옥을 6년이나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게 했지요.”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아버지와 공부하는 소영이는 가끔 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막상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 학교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또래 친구들이 학교와 학원으로 ‘뺑뺑이’를 도는 지난 열 달 동안, 소영이는 어림잡아 넉 달 가량 각종 캠프에 참여해 놀았고, 나머지는 책을 읽거나 검정 고시 준비를 했다.

아버지 이 씨는 잘라 말했다. “소영이가 대학에 갈 지, 언제 갈 지는 이번 검정고시 이후에 소영이가 결정하겠죠. 치열하게 경쟁해서 가는 대학은 안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만약 경쟁을 할거라면 자신이 누구를 위해 왜 경쟁을 하는지 스스로 알고 하길 바랍니다. 고등학교를 일찌감치 졸업한 셈이니,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남보다 많겠죠. 제가 소영이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은 그것 뿐입니다.”
경북 영천에 사는 수민이는 올해 16살이다. 동생 민정이는 집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수민도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한 학년에 한 학급씩, 한 반에 학생이 열 명쯤 되는 ‘작은 학교’다. 초등학교 졸업 뒤 규모가 큰 중학교에 진학한 수민이는 학교에 다녀온 뒤 “이상하다”고 했다. “한글로 ‘아이 엠 어 보이’라고 16장이나 ‘빽빽이’ 숙제를 하라는데 꼭 해야 돼?” “인체에 대한 공부를 한다면서 학생을 앞에 세워놓고 여기저기 만지면서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어.”
어머니 서경희씨는 담임 교사와 의논도 하고, 학교쪽에 항의도 해 보았지만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수민이가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걱정이었어요.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는데, 어느날 수민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더군요.”
수민이는 요즘 중학 학력 인정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영어는 무척 잘한다. 한글 자막이 없어도 외화를 보는 수준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수민이를 위해 초등 5학년 때부터 외화 비디오를 사준 것이 부모의 유일한 ‘뒷받침’이었다. 나머지 과목은 인터넷으로 교육방송을 보면서 공부를 한다. 애초 수학과 과학이 어렵다던 수민이는 “책을 한 번 더 보고 이야기 하겠다”고 하더니, 같은 책을 세 번씩 읽은 뒤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혼자서 해도 이해가 돼. 학원 갈 필요 없겠어.” 서 씨는 수민이가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아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목표를 세우고 해냈다는 사실이 수민이에게 값진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어요. 그 중에는 집을 ‘명문 사립학교’와 맞먹는 수준으로 만든 부모들도 있었어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르쳐주고, 해외 어학연수도 보내고. 우리는 그럴 수가 없어요. 이번에도 가족 캠프에 올 지, 아니면 수민이만 계절학교에 참여할 지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했거든요. 학교너머 캠프는 저렴한 편이지만, 두 가지 다 할 수는 있는 형편은 아니니까요. ” 서 씨는 “부모가 아이를 직접 가르칠 수 있거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만 홈스쿨링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처지에 놓인 홈스쿨러들이 서로 도울 수 있는 네트워크가 활발해졌으면 한다”고 했다. 제천=이미경 기자

홈스쿨 제2의 대안학교 ②

대안학교+홈스쿨 접목 각자 짠 시간표 북돋워

홈스쿨 제2의 대안학교 ②
 
그룹 홈스쿨 그룹홈스쿨은 쉽게 말해 서너 명 또는 대여섯 명의 홈스쿨러가 모인 배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일체의 틀과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관심과 기호에 따라 배움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교육과정을 스스로 결정하며 강사나 교재, 시간 등 공부하는 방식도 스스로 선택한다. “스스로 교육의 주체가 되어 필요한 교육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대안교육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룹홈스쿨에서 학교는 장소의 의미로만 제한된다.
 
교육의 본질과 관련해서 ‘학교’보다는 ‘교육공동체’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 역시 교육의 주체성 회복에 대한 강조에서 비롯된다. 그룹홈스쿨은 2004년초 분당에서 만들어진 ‘그루’가 시초다. 이후 남한산초등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남한산작은학교가 문을 열었고, 제천간디마을학교도 만들어졌다.
 
‘그룹홈’에서 기원한 안산 들꽃피는학교 역시 그룹홈스쿨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지난 6일 광주시 남한산공원 귀퉁이에 있는 한 카페 2층. ‘우석 엄마’ 조은숙(36)씨가 수학 강의를 하고 있다. 6명의 아이들은 바닥에 둥글게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이날은 방학 수학특강 마지막날. 오후 6시께 강의가 끝나자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진성하(15)군이 농구공으로 드리블을 하고 바로 옆에선 오민석(14)군이 벽에 대고 탁구 연습 흉내를 낸다. 채병훈(14)군은 그 와중에 드럼을 치며 어수선함을 가중시킨다. 그룹과외 장소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학교’다. 이름은 남한산작은학교. 학생은 모두 여섯이고, 교사가 한 명 있다. 시간표는 있지만 학생마다 다 다르다. 당연히 정규학교는 아니다. 그렇다고 대안학교도 아니다. 굳이 유형을 나누자면 그룹홈스쿨 학교 정도에 해당한다.
 
그룹홈스쿨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남한산작은학교의 시작은 2004년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안학교 못지 않은 알차고 열린 프로그램으로 관심을 모은 남한산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냈던 학부모들이 졸업 이후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일반중학교로, 일부는 대안중학교로 진학했지만 몇몇은 또 다른 길이 없을까 고민한 것이다.
 
조은숙씨는 “소박한 교육,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개별적으로 홈스쿨을 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대안학교의 장정과 홈스쿨의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는 그룹홈스쿨이었다”고 설명했다.
 
2개월 정도의 준비모임과 토론, 친해지기 캠프 등을 통해 지난해 2월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 방과후학교에서 경험이 많은 조은형(33)씨를 데려왔다. 지금 학교로 쓰고 있는 장소는 카페 주인인 성하 어머니 안영자씨가 공짜로 내놨다.
 
전혀 새로운 형태의 학교로 출발한 만큼 남한산작은학교엔 독특한 게 많다. 우선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자기주도적 학습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목표 수행을 위한 시간표는 개별적으로 정한다. 자신이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을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가령 채우리(15)양은 머리 미용이 전공이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근처 복지회관과 문화센터에 가서 배운다. 농구선수가 꿈인 성하는 청소년수련관에서 마련한 농구 프로그램을 듣고 있다. 수시로 남한산초등학교를 찾아 혼자서 연습도 한다. 민석이는 기타와 영어 두 개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기타는 강사로부터 배우고 영어는 외국 드라마 DVD를 반복적으로 듣고 새벽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실력을 쌓고 있다. 병훈이는 드럼 매니아다. 학원에서 잠깐 수강한 뒤 지금은 독학으로 맹렬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책벌레 권우석(14)군은 왕성한 독서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찾고, 이예진(14)양은 수학을 좋아해서 인터넷 강의와 독학 교재를 통해 수학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는 목표치가 높고 상대평가를 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데, 여기서는 자기가 스스로 목표치를 정해놓고 공부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없고 신나고 효율도 높다”고 했다.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겹치는 부분도 생겼다. 이런 부분은 시간을 조정해서 같은 시간에 같이 공부하기로 했다.
 
현재 공통과목은 밴드, 미술, 철학, 수학 등 4개 분야. 외부 강사(밴드, 철학)와 학부모(미술, 수학) 등이 강사를 맡고 있다. 문제는 알아서 공부하도록 하면 자칫 나태해질 우려가 크다는 것. 학생들과 학부모는 이를 감안해 시간표는 맘껏 짜되, 일단 짜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기로 약속했다. 말하자면 스스로 자기 시간관리의 감독자가 된 것이다.
 
그룹홈스쿨은 한편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민석이는 “가끔 일반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교사와 눈 맞추고 즉석에서 문답이 이뤄지는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에 비해 장점은 아주 많다고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시험 안보는 스트레스가 어디냐”(성하) “1년에 3번씩 축제하고 수시로 즐거운 파티를 열 수 있어 너무 즐겁다”(민석) 세상을 넓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우리) “항상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길렀다”(예진) 등등.
 
6명의 아이들은 1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가족보다 더 깊은 정이 쌓였다. 특히 지난 여름 학교에서 강원도 평창까지의 166km 도보여행 도중 서로 부추겨주고, 대화하고, 같이 노숙한 경험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붕어빵 장사를 같이 한 것도 좋은 추억거리. 현재 100만원을 모았는데 몇백만원이 모이면 ‘찐한’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벼르고 있다.
 
1994년 김현수 목사가 꾸려가던 안산노동교회를, 여덟 명의 청소년들이 ‘기습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학교이자 생활공동체다. 김현수 목사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위해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세상을 배움터 삼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경기 안산시 와동 인근에는 김 목사처럼 대문을 활짝 열고 아이들에게 안방을 내어준 ‘대안가정’(그룹홈)이 열 한곳에 이른다.
 
잔디네, 야긴새벽이슬, 코스코스, 새밭토끼풀 등 저마다 독특한 이름을 가진 대안가정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60여명. 돌봐줄 부모나 친척이 마땅치 않은 15~19살 청소년들이다. 아이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공부를 한다. 절반가량 아이들은 안산 지역 일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들꽃피는학교를 ‘방과후 학교’나 ‘계절학교’로 활용한다. “학교가 지겹다”거나 “부모가 없다고 놀림을 당할까봐 두렵다”는 등의 이유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절반 가량 아이들은 아예 들꽃피는학교로 등교를 한다.
 
들꽃피는학교로 등교하는 30여명 아이들 중에는 대안가정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비슷한 이유로 학교를 떠난 안산 지역 아이들 4~5명도 포함돼 있다. 오전에는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일반 과목을, 스스로 짠 계획표대로 자신의 수준에 맞춰 공부한다. 이 학교 김금훈 교사는 “7~8명이 한 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사가 과목별로 ‘진도를 나간다’는 개념 없이, 아이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공부할 수 있도록 살피고 돕는다”고 말했다. 오후가 되면, 들꽃피는학교는 일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대안가정 밖 청소년들까지 60~70명이 몰려들어 북적거린다. 텃밭 가꾸기(노작), 요리, 옷 만들기, 미술, 음악, 연극, 컴퓨터 실기 같은 좀 더 ‘재미있는’ 수업이 시작된다. 근처에 있는 전자제품 애프터서비스 센터나 카센터, 음식점 같은 곳으로 직업 체험(인턴십)을 하러 가는 학생들도 있다. 이들을 돕는 것은 ‘지역 주민’들이다.
 
근처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원장과 강사들이 영어회화를 가르쳐주고, 손글씨 프리랜서 일을 하는 ‘동네 누나’도 강사로 나선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컴퓨터 교사는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저녁이면 학교로 출근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역주민 구의선씨다. 김금훈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대안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15명의 생활교사를 포함해 학교 일을 하는 교사들이 30명, 지역이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교사가 10명, 총 40명의 교사가 들꽃피는학교를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안산시 와동에 4층짜리 학교 건물을 완성하면서, 들꽃피는학교는 대안가정 아이들뿐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지역 청소년들까지 껴안을 수 있는 든든한 ‘진지’가 됐다.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홀대받는 청소년들을 위해 가정과 학교의 경계를 허문 것이 들꽃피는학교의 시작이라면, ‘대안가정과 대안학교, 배려가 넘치는 지역사회’라는 열린 공동체를 일구려는 것이 이 학교의 최종 목표다.

한국교회내 성폭력 2

한국교회내 성폭력 2

CBS칼럼 이진성의 세상읽기에서
 
 
이제 짚어봐야 할 건요, 이런 문제에 대해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제도와 의지가 교계에 있는가 하는 부분일텐데요. 이 문제에 대해 교회법이 어떻게 규정하고 있고, 또 교단 재판위원회에서는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 처리해오고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교회법에는 성폭력에 대한 범죄 자체가 명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징계 방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법으로 노회, 지방회, 총회에서 가해자를 처벌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감리교단에만 '첩을 두거나 감음하였을 때'라는 정도의 항목이 있고, 나머지 교단에서는 대단히 추상적인 항목, 예를 들면 기독교인으로서 심히 부도덕한 행위, 타인으로 범죄케 한 행위 등에 대한 조항들만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법으로 성폭력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할 수 없다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지요. 그리고 교회는 돈 문제는 이단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성 문제는 회피하거나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신도들이 사회법으로 나가는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겁니다. 신도들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사회법으로 가지고 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언론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사회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건,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은 비용과 희생을 치르면서 사회법으로 나가게 되는 거죠. 결국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법정에 나가는 걸 비성서적이라고 비난하는 교회의 발언 자체가 모순이 있는 면이 있는 겁니다.
총회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권한은 노회 혹은 지방회에 있다고 이야기하구요, 노회나 지방회에서는 문제가 접수돼도 사실상 무시하고 무기한 계류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가 어쩔 수 없이 사회법으로 고소가 되면 이를 비난합니다. 그리곤 사회법으로 해결이 아직 나지 않았으니, 이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또다시 발뺌을 하구요. 이것 역시 이해하기 힘든게요. 사회법으로 나아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입장이라면, 막상 이 문제가 세상에 나갔을 때는, 그럴수록 교계 안에서 어서 해결해서 밖에서 문제가 진전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더 우스운 건요, 그래서 막상 사회법으로 형 확정판결이 이뤄지고 나서도 노회 혹은 지방회에서는 이에 눈을 감고 묵묵부답한다는 사실입니다. Y교단 S노회의 C교회의 경우를 보면, 사회법으로 고소가 이뤄져서, 1심에 유죄판결이 내려졌구요, 2심, 3심까지 유죄로 올해 초 형 확정이 끝났는데도, 이걸 노회에서 여전히 처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런 의지도 없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또 있는데요. 그건 바로 교회내 성폭력이 폭력의 흔적 같은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 사회법으로 처벌이 사실상 힘들다는 점 때문입니다.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은 가해자의 교묘한 수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분명히 성추행이자 성폭력인데, 대부분 겉으로 보기엔 강제적 폭행보다는, 서로가 원해서 일어나는 화간의 형태를 띤다는 거죠. 게다가 사회법은 고소기간 1년을 지나면 적용이 안 되는데, 대부분 교회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다보면 시간은 이미 1년이 지나게 됩니다. 사회법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거죠. 따라서 교회가 나서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반대가 되도 한참 반대가 된 상황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기 위해서, 또 한 영혼의 상처에 교회가 책임을 지기 위해서, 특히 무엇보다, 강간이든 화간이든, 영적 리더인 목회자에겐 똑같은 범죄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회법 이전에 교회법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 인권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서, 성폭력특별법과 성희롱 규제입법을 1994년과 1999년에 제정한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도 21세기가 지난 우리 교회는 아직도 이에 관한 법규정조차 없이 문제를 은폐하는 일에만 급급하다면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교계 차원의 법제도와 의지가 일단 중요하지만요, 또 이와 함께 개선돼야 할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성폭행을 일삼는 사이비 목사가 발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문화적 종교적 풍토가 개선돼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는 여성이 70%를 차지하고 있는데, 성직 또는 교회의 중심적 위치에서 여성은 사실상 배제되고 있구요. 또 지금까지 여성은, 권위를 독점하고 있는 남성 성직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의존하도록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이러한 불평등구조가 교회 안에 남아있는 한, 여신도에 대한 성적인 폭행과 이를 문제삼지 않는 교회 풍토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대해서 '교회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선교를 막는 일이라는 비난도 극복돼야 할 대상입니다. 이런 문제에 교회가 눈을 감고 있다면, 그 교회는 이미 '공동체'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몇십년 같이 지내온 한 교회안의 형제자매에게 탐심을 품는 근친상간에 대해 교회가 가만히 있다면, 이게 참된 가족이자 공동체의 모습일 수는 없는 거죠. 또 교회 내에 곪아가는 문제를 계속 품고 가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될 리도 없는 건 분명합니다.

정말 교회 내에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했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가해자인 셈아니겠습니까? 정말 다함께 책임감을 갖고 이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이건 피해자 한 영혼뿐만 아니라, 가해자와 한국교회 전체를 살리는 일이라는 걸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혹시 지금 이 내용을 보시고, 이런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절대 혼자 품고 계시지 말구요, 주변의 도움도 구하고, 기독여성상담소 등에 연락을 해서 상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의 교인들께서도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교회내 집단간의 세력다툼에 이용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내 성폭력 1

한국교회내 성폭력 1

 
CBS칼럼 이진성의 세상읽기에서
 
 
오늘은요, 아주 민감하면서 가슴아픈 이야길 하려 합니다. 그동안 쉽게 공론화되지 못한 이야기,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곪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깁니다. 바로 교회내 성폭력, 구체적으로는 신도에 대한 목회자의 성폭력 문제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그동안 음지에서 소문으로만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오곤 했는데요. 실태가 어느 정돈지 알 수 있는 조사내용이 궁금하지요?
먼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99년도 통계를 보면요, 총 성폭력 상삼건수 2564건 가운데서 성직자 성폭행 건수가 32건이었습니다. 강간이 23건, 성추행이 8건, 성희롱은 1건이었구요. 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사회지도층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2000년 상반기에 접수를 받았는데요, 여기 접수된 106건 가운데 성직자에 의한 것이 15건으로 14%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2000년 한해에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들어온 상담건수를 보면, 총 95건의 상담 중에서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이 53건으로, 5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성폭력 범죄사건 중 단지 6%만이 신고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교회 성폭력 사건 신고비율이 이것보다 훨씬 낮은 걸 감안한다면, 교회내 성폭력의 실태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 이런 문제가 소위 "이단"이라고 불려지는 교파나 교회에서 주로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기독교여성상담소측의 얘기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로, "은혜 중심, 은사 중심"의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교회에서 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목회자가 여신도들을 성추행하는 과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자신의 더러운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름아닌 '성경말씀'으로 여신도를 설득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에덴동산에서는 옷을 다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니 죄씻음을 받은 우리도 지금 옷을 다 벗어도 부끄러워선 안되고 그걸 여기서 확인해야 한다"라는 식입니다. 또 다른 건요,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요구받았고, 이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 너는 지금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칠 마음가짐이 돼 있느냐?"라며 마치 믿음을 시험이라도 하듯 달겨든다는 겁니다. 또 많이 사용하는 예가 바로 레아와 라헬의 옙니다. "야곱에게는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지금 내 아내가 레아지만, 지금 내가 정말 사랑하는 라헬은 바로 너다, 너는 라헬이며, 목사를 섬기는 사명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상대에게 접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교회에 라헬이 한 스무명에 이르구요. 또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도 아주 그들에겐 아주 효과적인 구절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입도 맞추고 사랑도 나눈다면서 여신도를 미혹하고 은밀히 성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거죠. 이런 일들이 교회 내에 은폐된 채로 곪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고 가르쳐야 할 목회자가, 그걸 왜곡하고 악용한다니 통탄할 노릇이지요.

성경을 갖다붙이는 건,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범죄가 드러난 이후에도 성경말씀을 끌어다가 책임을 모면하려 하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해서 끝까지 왕으로 잘 살았다"면서, "회개했기 때문에 모든 걸 용서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는 거죠. 또 실제 많은 교인들이 이렇게 믿고 있구요. 또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세를 비난한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렸다"..., 혹은 심한 경우엔 "솔로몬이 2천명의 궁녀를 거느렸던 걸 모르느냐"는 데까지, 하여튼 그 성경적용능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경입니다.
피해자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많은 경우에, 피해자들은 목회자를 "영적 아버지"로 믿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목회자와의 절대적인 위계관계 속에서, 이 일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죠. 그러다 나중에서야 자기만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문제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와 같은 예들 외에도, 목사의 성추행에 저항하고 문제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순수한 성도들은 목사를 어떻게 고발하느냐 하는 신앙정서적 혼란을 겪기 마련이구요. 또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문제를 제기한다해도, 교회나 교단 차원에서 이 일을 깨끗하게 처리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교회내 성폭력 문제가 좀처럼 수면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믿기 힘든, 하지만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는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요, 이런 문제들 뿌리에 있는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좀 짚어봤으면 합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하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는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는, 여자들이 배우자 외에 남자들과 관계를 갖는 건 죄악시하면서도, 남자들이 여자를 범한 행위에 대해서는 "남자는 그럴 수 있다"라고 여기는 태돕니다. 성적 불쾌감을 주는 왠만한 성추행에 대해서는 "뭐 그런 걸 가지고"라는 통념으로 묵인해버리는 남성중심적인 의식이 문제라는 겁니다. 왠만한 성추행 정도는 문제로도 보지 않는 목회자들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요, 기독교여성상담소 홍부연 부장에게서 직접 이야기한 걸 2002년 1월 17일 AOD를 통해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황인데도요, 목사는 "인간이니까"하며 용서할 수 있고, 희생당한 여자들은 마치 목사를 유혹한 마녀나 "꼬리달린 여우"내, "목사 쫓아내는 여자"내 이렇게 취급해버리는 몰지각한 발상이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것도 좀 말이 안되는 게, 만의 하나, 혹이라도 여자쪽에서 먼저 소위 꼬리를 친 게 있다 치죠. 그러면 목사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겁니까? 강간이 아니라 서로가 원했다 치죠. 그러면 목사의 죄가 덜해지는 겁니까? 성관계까지 간 것만 아니면, 문제도 아닙니까? 도대체 이런 발상이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목회자로서의 권위는 누리면서, 자신이 가져야 할 도덕적 기준은 일반 신도들보다 높아야 한다는 상식은 왜 외면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지금과 같은 교회내 성폭력이 가능한 한국교회의 두 번째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드리면요, 바로 목사의 어긋난 권위의식과 신도들의 무비판적이고 맹종적인 신앙자셉니다. 목사의 잘못이 드러나면, 목사도 사람이며, 용서받아야 한다면서도, 목사의 말이라면 어떤 말이든 오류 없이 곧 하나님의 말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모순된 권위의식에 목회자와 신도들이 함께 사로잡혀 있다는 거죠.

세 번째는, 여신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존재로 보는 기독교적 사고 이전에, 자신이 성폭행 피해를 당하면 "버려진 여자"라고 여기고 쉬쉬 덮는 유교적 사고에 더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목회자도 진실한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제2, 제3의 피해자가 양산되는 실정인 거죠.
이런 한국교회 전반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내 성폭력이 갖는 독특한 성격도 이해하기 힘들구요, 또 이 문제들을 고치지 못하면, 이런 성폭력 문제를 개선해 나갈 수도 없습니다.

홈스쿨

홈 스쿨


나는 올해 열일곱살이다. 집은 경기도 가평 용문산 자락. 교사인 엄마와 작은 사업을 하는 아빠, 초등학교 5학년 동생 종보, 그리고 누렁이 개 세 마리랑 같이 산다. 취미는 놀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등산, 자전거 타기, 걷기, 거문고 연주, 책읽기, 만화 보기가 취미다.
학교엔 안 간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지냈다. 4년째다. 멀대같이 큰(176센티미터) 녀석이 학교에도 안가고 집에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 매일같이 즐겁고 신날 뿐이다. 난 학교를 뺀 모든 곳에서 배운다. 만화와 비디오를 보며, 백두대간 종주를 하며, 평화 캠프에 참가하며 배운다. 친구들과 공을 차며 동생과 눈썰매를 타며, 자원봉사를 하며 배운다.
홈스쿨러들끼리 모여 같이 공부도 한다. 영등포 하자센터에서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연구수업, 철학 토론, 창조적 스토리텔링, 건축 등 4개 주제로 공동학습을 한다. 10명이 모여 3학기째 진행했고, 지금은 방학중이다.
요즘은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중국 쓰촨성 답사 준비에 바쁘다. 쓰촨성이 새 관광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초청했는데 발빠르게 정보를 입수해 나도 한 자리 얻었다. <삼국지>를 읽는 한편, 중국 현대사를 다시 살피고 있다. 몇년전 홈스테이로 우리 집에 머물렀던 베이징대 형이 한국에 유학와 있어, 그 형으로부터도 중국 정보를 얻을 생각이다. 중국에 다녀온 뒤에는 본격적으로 2006년 ‘홈스쿨 계획표’를 짤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어린 시절 부모님 덕을 많이 봤다. 부모님은 잘 노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공부이고, 평생의 자산이 된다는 믿음을 가졌고 나는 줄창 놀았다. 여덟살이 되자 서울의 거대 학교로 들어가 놀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학교는 놀지 못하게 했다. 하고 싶은 건 모조리 금지였고, 하기 싫은 것만 억지로 시켰다. 의미도 없는 숙제를 잔뜩 내주는가 하면 시시콜콜 매일같이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한번은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라고 해서 한참 그리고 있는데 금이 넘어갔다며 그러지 말라고 했다. 넘어가면 뭐 어떤데? 그러다 종이 쳤다. 선생님은 스케치북을 덮으라고 했다. 다 그리지도 않았는데 시간 끝났다고 무조건 못하게 했다. 지우개 밥 안치운다고 뭐라 그런 적도 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죽겠는데, 쉬는 시간에만 갈 수 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 자유와 감성은 학교에서 철저히 갇혔다. 내 쌓이는 불만을 본 엄마는 아니다 싶은지 2학년 때 서울 외곽의 작은 학교로 전학시켰다. 어린이신문 강제구독, 전교생을 운동장에 세워놓은 채 이어지는 1시간짜리 조회 등 억압적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고민 끝에 엄마와 아빠는 내게 ‘주1일 학교 안가기’를 권장했다. 산에 오르거나 연극, 영화를 보고 시장에도 가고 박물관, 유적지, 서점 등을 돌아다녔다. 즐거웠다. 내 얼굴에 어느새 생기가 돌았다. 새로운 학습의 경험이었다.
3학년 때 우리는 “정말 서울은 놀 데가 못돼”하며 시골로 이사했다. 작은 학교, 자연속 학교에서 난 사계절 자연을 느끼며 ‘사람답게’ 살기 시작했다. 봄철 화전 놀이, 여름철 물놀이, 가을철 감 따먹기, 겨울철 눈싸움, 썰매타기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6학년을 마치고 난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학교 안가고 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아빠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온전한 나만의 시간으로 누리고, 나만의 정신을 키워나가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학교에서 가정으로 옮겨진 배움터=처음 홈스쿨을 생각하면서 뭔가를 꼭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책 읽고, 산에 오르고, 여행하면 좋겠거니 했다. 비디오와 만화책도 실컷 보고 가끔 봉사활동도 해보곤 싶었다. 계획을 수도 없이 세워보고 또 허물었다.
몇날 며칠 고민하고 부모와 상의한 뒤, 우선 역사와 한문을 공부해보기로 했다. 역사는 현대 사회의 시민으로서 세계 공민으로서의 기초 소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고, 한문은 한문 교사인 엄마의 권유가 강하게 작용했다. 나중에 들은 엄마의 생각. “한국사를 통사적으로 가볍게 한번 보고, 근현대사를 좀 집중적으로 보고 이어서 인류사, 세계사를 보다 보면 아이의 관심사에 따라 폭이 넓어지리라 기대했단다.”
초등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서점에 들러 일반교양 수준의 책을 둘러보고 목록을 작성한 뒤 도매상을 통해 택배로 100권의 책을 사들였다. 곧장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2>를 본 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1,2,3>으로 한 단락씩 천천히 읽었다. <만화 한국사>와 <이야기 한국사 1~16>는 이야기책 읽듯 읽어 내려가면서 줄거리를 간추렸다. 한문 공부는 사서 등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 <중국고전>을 다시 읽어본 뒤, 몇 문장씩 쓰고 읽고 해석해봤다.
2~3시간 정도의 역사와 1시간 정도의 한문 공부가 끝나면 혼자서 점심을 준비해 먹었다. 오후는 자율학습. 놀기도 하고 청소도 하고 책도 봤다. 만화나 비디오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음악도 하니 볼 것도 할 것도 많기만 했다. 며칠에 한번씩 스크랩한 신문으로 ‘세상 읽기’를 시도했다. 주말은 휴일. 등산도 하고 한 주동안의 일을 기록했다. 물론 실컷 노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세상으로 뛰쳐나가다=학교에서 뛰쳐나온 이유는 공부는 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책에만 빠져살 수는 없었다. 현장학습 거리가 필요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던 중 환경운동단체인 녹색연합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새만금으로 첫 야외학습을 나갔다. 간척 현장을 둘러보고 밤새 소모임 토론을 하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꼈다. 다녀온 뒤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지구가 만약 100명의 마을이라면> <떡갈나무 바라보기> <나무를 심은 사람>를 읽으니, 환경에 대한 내 나름의 시각이 세워지는 것 같았다.
비록 1박2일이었지만 집을 떠나 본 경험은 자신감을 키웠다. 좀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현장을 찾아나섰다. 집 근처의 화서 이항로 유적지, 양수리 고인돌을 둘러봤고 이어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 방이동 백제 고분로,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했다. 고창 고인돌, 선운사, 읍성, 경주 남산 등으로 거리도 시간도 점점 확대됐다. ‘땅을 디디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 모두가 더없이 좋은 공부’라고 느껴졌다. 월 1회 정도 계획됐던 현장학습은 2~3회로 늘더니 일주일에 한번꼴로 정착됐다. 물론 좋은 기회가 생기면 계획에 없어도 곧바로 가방을 꾸려 떠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여운형 추모회 참가, 5월 광주 순례, 나눔의집 방문, 강화도 유적답사, 종묘대제 참관, 꽃동네 봉사 활동…. 환경활동가 중심의 ‘녹색순례’에 참석해 열흘동안 백두대간을 걷기도 하고, 한북 정맥 탐사팀에 합류해 색다른 산행을 경험하기도 했다. 따져보니 무박산행만 20차례가 넘는다. 여기에 ‘수유+너머’의 한문 경전 세미나, 하자센터에서 진행된 새로운 생태주의 음악 허법 프로젝트, 십대들을 위한 평화 캠프, 대안교육 연합 캠프, ‘새로 펴냄’ 독서 소모임, 여러 형태의 여행,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 위안부할머니 수요집회 참석 등 숱한 배움의 장이 내 앞에 펼쳐졌다. 애초 계획대로 세상 모든 곳이 학교가 돼가기 시작했다. 매번 잘 아주 아주 잘 놀았고, 모든 현장학습은 신나고 특별하고 즐거웠다.
내 배움터는 나라 밖으로도 뻗어나갔다. 우리와 교육 현실이 비슷하고 우리보다 앞선 대안교육의 현장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일본의 대표적 대안교육기관인 ‘도쿄 슈레’를 방문했고, 일본의 대안교육모임인 ‘프리다스’와도 정기적인 교류를 했다. 일본인 친구들이랑 같이 먹고 자며 노래부르고 역사에 대해 토론하며 난 너무도 큰 경험을 했다. 한독 청소년 교류 프로젝트 ‘동서남북’에 참가해서 분단과 통일에 전면적인 고민을 해봤고, 지난해 7월에는 중국과 스웨덴 사람을 홈스테이로 집에 초청하기도 했다.
너무도 재미있는 공부=학교 공부의 목적은 1차적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장장 12년간 책과의 긴긴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학교를 벗어나고 나서 내가 한 모든 공부는 재미있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음에는 부모님이 추천한 책들을 주로 읽었다. 1년 정도 지나면서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부모님 서가에 꽂혀 있던 <백범일지> <아리랑> <돌베개> <여운형 평전> <구술 한국사> <의열단> <상록수> <네가 하늘이다 1,2> <압록강은 흐른다> 등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근·현대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어 <토지> <우리 역사 아웃사이더-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 <우리 역사 속에 왜?> <거꾸로 읽는 한국 현대사> <한국사 산책 60~80년대> <대한민국사 1,2,3> 등을 독파했다.
역사에 관심이 커지자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 <송환> <레드헌터> 등으로 볼거리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다큐멘터리 자료 화면 <격동의 80년대>도 구해서 봤다. 만화 <오! 한강>은 내가 본 최고의 역사책이었다.
역사 공부는 세계사로 이어졌다. <인류이야기 1,2,3> <교실 밖 세계사 여행>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교실 밖 지리여행> <세계화 시대의 지리 읽기>등을 읽었고, 더불어 <그리스 로마 신화>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이슬람 바로 알기> <굿바이 바그다드> 같은 책도 봤다, 만화 <북해의 별>이나 <글래디에이터> <아미스타트> <잔다르크> <기사 윌리엄> <모던 타임즈> <알리> <애나 킹> 등의 많은 역사 비디오들을 그냥 재미있게 봤다.
중국사 관련 장정 부분에서는 <주덕 평전-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와 <중국의 붉은 별>을 놀라움으로 읽었다. 가족 여행으로 중국에 가서는 나름대로 자료집을 만들고 사전에 <하루 밤에 읽는 중국사> 등의 책을 보고, 방문했던 하룡공원, 천안문 등과의 관련 역사를 떠올렸다. 관련 영화 <인생>을 보면서 나름대로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 현상과 이면, 다양한 시각이 있음을 알게 됐다.
철학책도 읽었다. <생각은 힘이 세다> <아주 철학적인 하루> <마음을 여는 철학 이야기> <삶의 철학 산책> <철학의 기초>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등을 탐독했다. 특히 <아주 철학적인 하루>라는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내가 알아야 할 학문이 철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들을 내가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철학하는 자세를 배우고 공부는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노는 것도 프로젝트로=사는 게 공부다. 여행이나 공모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사전에 준비하고 자료집을 만들거나 기획서를 써보는 것도 공부다. 캠프에 참가하고 스스로 열어보기도 하는 것 역시 좋은 공부다. 일을 마무리하면 보고서나 후기를 쓰는 것도 알찬 학습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처음부터 기획하고 준비하기 위한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친구와 노는 것도 공부다. 물론 이 모든 공부는 재미있고 보람있다.
한번은 홈스쿨러 캠프에서 만난 가까워진 부산의 한 친구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일단 양쪽 집의 부모님께 허락을 얻은 뒤 뭘 할지 계획을 세웠다. 난 며칠에 걸쳐 ‘거친 파도 소리 들으러’라는 제목을 붙이고 부산 개관, 일정 잡기, 가보고 싶은 명소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했다. 기차시간과 삯을 알아보고 선물도 구입했다. 그리고 3박4일 정말 잘 놀다 왔다. 돌아온 뒤 사진을 곁들인 소감문을 기록하니 전 과정이 괜찮은 프로젝트였다.

2019년 12월 3일 화요일

레너드 스윗의 「미래 크리스천」

 
레너드 스윗의 미래 크리스천
 
미래 크리스천이란 단순히 시간적 의미로 다음 세대의 크리스천을 뜻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과거나 현재의 크리스천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미래 교회 학자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 박사는 미래 크리스천이란 단지 세대적 구분으로 한 개인이나 집단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단자라고 정의한다.
 
내일을 잡아라
미래 크리스천의 원명 Carpe Manana(카르페 마냐나)는 스윗 박사가 만들어낸 라틴어 ‘Carpe’(잡다)와 스페인어 ‘Manana’(내일)의 합성어다.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가 지속되는 변화의 현장에서 내일을 잡는하나님의 뜻을 붙잡고과감한 삶의 항해를 이어가는 사람이 바로 미래 크리스천이다. 이 항해는 믿음과 비전을 뜻한다. 한 개인이 지금 어떤 단계에 있을지라도 마이클 J. 폭스가 주연한 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미래를 향해 성령님의 타임머신에 올라타야 한다는 것이다.
 
스윗 박사는 미국 뉴저지 주 드류신학대학교 전도학 석좌 교수이며, 조지폭스대학교 명예 교수로 있으면서자신이 설립한 세계적인 미래 교회 연구 센터인 스피릿 벤처 미니스트리(Spirit Venture Ministries, www. leonardsweet.com)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학계와 교계를 망라해 미래 교회의 청사진들을 쏟아내는 독보적인 미래 교회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또 그는 제3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새로운 신학 교육의 유형을 창조하는 ‘NexSem Project’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는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 교회(The Postmodern Pilgrims),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Jesus Drives Me Crazy), 모던 시대의 교회는 가라(AquaChurch), 귀 없는 리더? 귀 있는 리더(Summoned to Lead) 등이 있다. 그의 홈페이지에 스윗 박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도발적인 사상가들 중에 한 명이다.” “어떤 교회 지도자도 21세기의 바다를 어떻게 항해해야 하는지 그보다 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엄청난 상상력과 균형 감각 그리고 매력을 지닌 작가다.” “미국에서 레너드 스윗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교회 지도자를 상상할 수 없다라는 말이 올라와 있어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알 수 있다.
 
새 천년이 시작되면서 찾아온 미래의 첫 인사는 소위 ‘Y2K’라는 경고 문구였다.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하는 구형 컴퓨터에 의해 작동되던 수많은 기술 문명의 이기들이 돌연히 위험의 요소로 변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윈도즈(Windows)라는 개인용 컴퓨터 작동 시스템이 출현하기 전에 사용되던 컴퓨터 언어를 조작할 줄 아는 기술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먼지투성이가 돼 버린 옛 기술이 환영 인파의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스윗 박사가 말하듯이, 새 천년의 위협은 밀레니엄 버그(Y2K)가 아니라 러브 버그라는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컴퓨터 작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는 파괴 프로그램이 인터넷이라는 통신망을 통해 마치 역병처럼 전파된 것이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분장한 채 말이다.
 
미래 사회의 이민자에서 주권자로
미래는 더 이상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될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향수를 달래주는 복고풍에 대한 관심은 옛것이 미래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스윗 박사가 말하는 고대 미래 교회’(AncientFuture Church)란 미래 교회와 미래 크리스천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신앙은 복고적이자 혁신적이며 과거를 상기시키는 새로운 것이다. 고대 미래 신앙(이 부분은 미래 크리스천의 편집 과정에서 실수로 고대의 미래 신앙이라고 오역돼 있음)은 박물관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영향력을 지닌 히포의 어거스틴, 본 회퍼, 시에나의 카타리나, 자비에를, 예브스 그리고 츠빙글리 등의 인물을 탄생시켰다”(26).
 
따라서 스윗 박사는 미래 크리스천을 토착민 즉 미래 환경에 적응한 사람들과 미래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할 이민자들로 이미지화해서 제시한다. 역자가 언급하듯이, “본서에서 스윗 박사는 귀화 강좌라는 은유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 이민자가 돼 버린 교회에게 미래 문화의 시민권자로 되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민자에서 시민권자로의 이동은 문화적 적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신앙적 결단이며 각성을 뜻한다”(10).
귀화 강좌는 다음과 같이 9가지 주제로 제시된다. 수동에서 디지털로, 직선에서 곡선으로, 말에서 이미지로, 규모에서 속도로, ‘일리 있는 말에서 감동을 주는 말, ‘나는 누구인가?’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명함에서 모호함으로, 외부 세계에서 내면 세계로, 시계 태엽 오렌지에서 웹 그린으로이다. 이는 모던 사회에서 포스트모던 사회로, 산업 사회에서 후기 산업 사회로 그 전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변화(change)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변형(morph)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여기서 변형이란 한 가지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이동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 즉 때로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창조적 혼돈 속(비단선적 우주)으로 회귀하는 것을 말한다.
기술 문명의 경이적인 발전은 생활 양식뿐 아니라 사고 방식까지도 뒤바꾸어 놓고 있다. 과연 기술화되는 세계가 인간적인가 아니면 비인간적인가에 관한 질문은 과거와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 외에는 그다지 절실한 것이 되지 못한다. 마치 한 개인이 특정 국가에서 태어나 생득한 시민권이 그에게 철학적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를 묻는 것과 같이, 이것은 비판과 재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세대 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세대도 다른 세대를 향해 일방적 가치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른 세대를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스윗 박사의 대답은 명확하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죄는 커미션(commission, 죄를 범함), 오미션(omission, 태만)도 아니다. 그것은 노 미션(no mission) 즉 선교하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이 수동의 시대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단순 명료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미래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새로운 문화와의 소통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전제로 스윗 박사는 모던 사회가 문자 해독 능력(literacy)을 소통(communication)의 기본 요건으로 보았다면, 미래 사회는 영상 해독 능력(graphicacy)이 소통의 필수 요건이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지능은 은유적이기 때문에 영상 해독 능력은 문자 해독 능력보다 더욱 강력하다고 한다. 더욱이 은유는 언어보다 더 영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성경의 문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전 문화에 보다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스윗 박사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토착민(미래 크리스천)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면,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고자 한다면, 성경이 지닌 은유적인 힘을 호시탐탐 노리는 문화가 기독교 고유의 이미지와 형상을 강탈하기 전에 그것들을 사용하는 게 좋다”(122).
 
미래 크리스천을 향한 영적 교회
계속되는 귀화 강좌에서 스윗 박사는 변화의 성패가 규모보다 속도에 좌우되고, 이해보다 감동에 초점을 맞춰야 하며, 지위보다 역할이 강조됨을 지적한다. 이는 외형을 중요시하는 모던 사회의 성향을 거부하고 미래 세대는 내면 곧 참된 것’(real thing)을 찾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마치 먼 길을 돌아 본향으로 가는 방랑객처럼 미래는 원초라는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닐까?
 
스윗 박사가 말하는 내면 세계는 영적 세계를 뜻한다. 그는 토착민을 신중독자들’(godaholics)이라고 지칭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적 추구의 시대를 일궈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토착민들에게 있어서 영적 추구가 교회로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영성은 환영, 종교는 반대다!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영성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변화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 발전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 속에서 교회가 설 자리가 없다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스윗 박사는 교회는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다. 정작 필요한 한 가지(영적 교회가 되는 것)만 빼놓고 말이다. 포용력을 가지려고 교회는 노력했다.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다. 프로그램 지향적인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다. 구도자들에게 민감한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다”(229)면서 미래 크리스천을 위한 영적 교회가 될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
그렇다면 과연 영적 교회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영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을 신비적이고 정신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가진 교회이다. 본서에서 비만이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영적으로 비효율적이다라고 선포하는 한 복음주의자의 설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대한 관심 곧 환경 문제에까지 옮겨져야 한다.
 
세상의 변화와 창조의 중심에서
스윗 박사가 진단하는 미래 크리스천의 신앙은 무엇보다 관계와 경험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소위 포스트모던인들은 원초적 경험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망하며, 교회가 자신들의 경험의 터전을 제공하길 바란다. 오순절 운동과 같은 원초적 영성의 등장은 20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신앙 운동이 되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오순절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교회가 갖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적(experiential), 참여적(participatory), 이미지 추구적(image-driven), 연결적(connected) 교회를 뜻한다. 스윗 박사는 이 네 가지 요소의 앞 글자를 모아 EPIC 교회의 역할을 역설한다.
교회는 세상의 변화에 창조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원칙이 된다. 따라서 교회는 변화를 준비하고 변화에 참여하며 변화의 주역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어느 때보다 창조적이어야 한다. 스윗 박사는 창조주를 예배하는 공동체가 창조성의 빈곤을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미래를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스윗 박사가 즐겨 사용하는 흥미로운 예가 있다. 얼마 전에 유행하던 매직 아이(Magic Eye)라는 책을 기억할 것이다. 각양각색의 점들로 채워져 있는 책의 표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 그 안에서 3차원의 형태가 나타난다. 그런데 누구나 3차원의 형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요령이 있다. 스윗 박사는 숨은 그림을 보는 방법이 미래를 준비하는 창조적 크리스천의 태도를 일러준다고 말한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초점을 포기하라(lose focus), 통제를 포기하라(lose control)는 것이다. 즉 교회와 세상 전체를 바라보면서 전통이나 기존의 제도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감격적인 미래의 교회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라는 것이다. 미래는 시간 저 편에 있는 게 아니다. 미래는 매일 순간마다 다가오는 현실이다. 미래 크리스천으로서 교회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돼야 한다.
 
스윗 박사는 새 천년이 시작된 지금은 여명인가, 석양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분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포스트모던의 문화는 위기의 문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자로 위기가 무엇을 뜻하는가?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를 말한다. 히브리어에서 위기를 뜻하는 ‘mash-ber’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고대에서 산모가 출산할 때 앉았던 의자를 말한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세 번째 천년의 첫 10년 동안 교회는 문 밖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환희는 선택이다. 열정도 선택이다. 교회는 두 손을 펼쳐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와 악수하기를 거부할 것인가?”(246). 그리고 그는 내 교회는 강한 성이요가 아니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임을 확신한다.

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지상강좌 기독교윤리 5
 
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문 시 영 교수
숭실대학교(B.A., M.A., Ph.D.)와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현재 남서울대학교 기독교윤리 교수로 있으며,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NICE) 소장이다.
 
 
사람은 좋은데? 사람이 좋아야!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사람은 좋은데하며 말끝을 흐리는 경우가 있다. 무능하다거나 문제가 있다는 뜻의 반어법이기 쉽다. 그런가 하면 조사助詞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뜻이 확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하는 경우가 그렇다. 사람 됨됨이가 마음에 든다고 좋은 평가를 내린 셈이다. 두 경우 모두 사람에 대한 평가라는 점에서는 공통이나 하나는 부정적인 평가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평가다. 무능하거나 실수가 많더라도 사람이 좋아야 한다. 무능하고 실수도 많은 데다 사람까지 좋지 못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물론, 사람도 좋고 능력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윤리적으로 사람 됨됨이에 대한 평가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한 번의 도덕적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 자체가 도매금으로 좋지 않게 평가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한 마리 제비가 날아왔다고 해서 봄이 된 것은 아니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 전체를 문제투성이로 몰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역시 비슷한 경우 아닐까. 반사회적인 범죄 행위를 눈감아주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더구나 하나의 행위를 근거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은 도덕적 성숙 혹은 갱신을 기대할 수 없게 한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1라고 하신 말씀에도 이런 뜻이 담겨 있을 듯싶다. 지금의 행위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나 배경을 생각한다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변화될 모습까지 생각하면 하나의 행위만으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한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법률시스템이나 사회정책에 의해 결정되는 요소가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자라난 배경, 가정의 분위기, 특히 그가 신앙인인가 혹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탁월하게 풀이한 윤리학자가 있다. 타임지가 2001년 미국 최고의 신학자America’s Best Theologian라고 격찬했고,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에 초청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듀크대학교의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왕성한 저술 활동이 현재진행형이기에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우어와스가 윤리의 관점을 ‘doing’의 문제에서 ‘being’의 문제로 전환시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그의 윤리관을 대변한다. 하우어와스에게 윤리란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율법시스템이 아니다. 행위자의 배경과 그의 이야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상황윤리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행위자의 성품character을 중요하게 보자는 뜻이다. 우리가 하우어와스에 주목하는 것은 그의 관점에 교회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제인 시민사회의 도전에 직면한 한국 교회를 위해 공공신학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대안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사람 됨됨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이 교회 밖으로의 윤리를 제안한 것과 달리 하우어와스는 교회 안으로의 윤리를 말한다. 시민사회에 들어가 사회정책과 윤리를 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교회 스스로 사회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우어와스의 생각을 요점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윤리를 교회론적 윤리’ecclecial ethics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교회의 교회됨을 구현하자는 취지다. 교회로 교회되게 하면 시민사회가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론적 윤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우어와스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계기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요더John. H. Yoder와의 만남을 통해 얻은 평화에 대한 신념이요, 다른 하나는 맥킨타이어A. MacIntyre의 영향을 받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앞서 말한 설명에 빗대어 보면 좋은 사람의 성품은 교회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고 훈련된다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도덕적 자아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이며, 교회 공동체를 통해 그의 성품이 형성되고 훈련되어 평화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우어와스가 공동체를 통해 형성되는 성품 혹은 사람 됨됨이에 주목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자면 요더의 평화주의를 접한 것이 먼저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맥킨타이어와의 만남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자아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하우어와스의 교회론적 윤리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강좌를 사람 됨됨이로 출발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윤리가 행위의 문제에서 인격 또는 성품의 문제로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우어와스가 보기에 윤리학자의 임무는 개별적 윤리문제에 답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인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인격이란 자아가 존재하는 형식으로서 당연히 자아는 어떤 정체성을 지니는가? 성품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공동체주의라는 개념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현대영미철학의 논쟁에서 자유주의는 이성에 입각한 윤리적 자유를 주장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이성에 대한 추종이 오늘의 윤리적 위기를 낳았다고 본다.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덕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특히 자아에 관한 설명에서 칸트적 설명을 거부하고 자아의 배경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은 추상적인 유령적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우어와스는 계몽주의적 기획과 포스트모던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덕의 윤리를 활용했던 도덕철학자 맥킨타이어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여기는 맥킨타이어에 동의하면서, 하우어와스는 공동체주의를 수용한다. 인간은 공동체에 속한 존재요, 공동체가 지닌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윤리적으로 성숙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사람 됨됨이에 관한 기독교적 설명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훈련받고 성숙한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교회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교회의 이야기, 즉 예수 이야기를 통해 자아와 인격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교회는 기독교적 덕성의 훈련장이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성숙시키며 윤리적 독창성과 탁월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가는 곳이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강조, 교회를 통한 윤리적 훈련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우어와스의 윤리를 교회론적 윤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 됨됨이, 예수 이야기로 형성되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덕성을 훈련시키는 교회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덕성을 함양하고 성숙시켜야 하는가?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신앙인의 윤리는 자연법 윤리와 다르다. 신앙공동체에 속한 존재들은 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정체성과 역할을 발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예수 이야기’Jesus narrative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가 지닌 이야기는 다름 아닌 예수 이야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십자가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대목에서 하우어와스는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낸다. 특히 평화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하우어와스의 윤리 형성에 있었던 또 하나의 계기, 즉 요더와의 만남을 통해 설명된다. 특히 전쟁에 대한 반대와 비폭력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적 평화의 가치는 하우어와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평화주의자로서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요더에게 예수 내러티브의 핵심은 십자가. 요더가 속했던 메노나이트의 전통은 그의 관점을 무저항, 비폭력의 평화주의에 이르게 한다. 요더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상징되는 새로운 윤리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위협했으며 십자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1 그리고 예수와 같이 되는제자도와 본받음의 핵심에 평화가 있다는 것이 요더의 관점이다.
이러한 요더의 흔적들은 하우어와스의 관점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하우어와스가 듀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곳 철학과 교수인 맥킨타이어를 만난 것이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는 계기였다면, 요더와의 만남은 핵심가치들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평화의 덕성과 교회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요더의 암시가 하우어와스 윤리의 토대인 셈이다. 더구나 요더가 교회를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로 보았던 점 또한 하우어와스에게 중요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요더가 교회를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 간주하고 국가의 대안이라고 보아 영적 정치 행위를 강조했던 것도 그 중 하나다.
하우어와스에게서 요더의 영향은 윤리적 관심과 방법론 자체를 전환시킬 정도였다. 본래 하우어와스는 예일대학교에서 리처드 니버의 제자인 거스탑슨의 지도를 받아 계시의 의미와 책임적 자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노트르담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이후, 이미 노트르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요더의 책은 하우어와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우어와스는 전쟁에 대한 반대와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큰 틀을 마련했다. 평화를 위한 덕성이 예수 이야기의 핵심이요 교회가 가르쳐야 할 윤리적 독창성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운다. 그 배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평화의 백성으로 성숙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점령군 로마인들에 대한 적개심보다 용서와 자유의 비전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신앙인들은 예수 이야기를 따라 우리 시대를 향한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 그 핵심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리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십자가 지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하우어와스의 윤리가 평화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가 그의 윤리에서 중요한 이슈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전반적으로 그의 윤리가 시민사회와 다른길을 강조한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다. 그의 윤리에서 시민사회와 다른길을 강조는 대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평화에 대한 강조 역시 애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찌든 시민사회와는 다른 길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 그가 교회를 향하여 미국의 시민사회와 경제시스템, 그리고 의료문제에 이르기까지 다른길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르게 살기, 그 불편한 동거
이제 남은 문제는, 실상 우리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민사회와 교회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이다. 필자 나름대로 소화해서 말한다면 하우어와스는 시민사회 속에서 다르게 살기를 제안한다. 근거와 모델은 교회가 지닌 예수 이야기다. 십자가를 통해 평화를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 다르게 사는삶의 핵심이다. 단순하게 다른 방식이 아니라 탁월함으로서의 다름이다.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따라 평화를 위해 살아가면 결국 시민사회가 따라오게 될 것이며 이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보자. 기독교의 사회윤리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우어와스의 답은 그렇게 살아내기 자체가 쉽지 않지만 간단명료하다. 교회가 지닌 예수 이야기가 곧 사회윤리다.2 여기에 사용된 ‘narrative’내러티브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표현을 쓰든 간에 예수 이야기가 교회공동체를 통한 성품 형성에 배경이 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모든 공동체에 필수요소다. 특히 예수 이야기는 시민사회와 구분되는 목소리를 내는 교회만의 독특한 이야기다.3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신앙인에 대한 그의 관점, 곧 신앙인이란 교회에서 예수 이야기대로 살도록 훈련받고 성숙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시민사회 속에서 교회공동체는 불편한 동거 관계에 있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신앙인은 시류에 영합하는 존재라기보다 나그네 된 거류민resident aliens이다.4 일찍이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듯싶다.
하우어와스는 윌리몬과 공저한 책 첫머리에 상징적으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3:20~21.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세상과 다르게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혹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정책으로 정리된 사회윤리를 제시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준 셈이다.
그래서 하우어와스는 교회가 사회문제들에 어설프게 개입하지 말라고 한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현실주의에 입각한 사회윤리를 강조했던 라인홀드 니버를 자주 비판한다. 저술에 대한 학문적 비판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관한 니버식 접근 전반에 대해 비판적이다. 니버가 현실 정치에 관하여 사회구조와 정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책을 제시하는 형태로 개입했던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하우어와스가 보기에 교회는 사회정책을 입안하는 기구가 아니다. 예수 이야기대로 살아내면 시민사회가 따라올 것이라는 신념의 반증이다. 교회가 곧 사회윤리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실제로 그는 미국의 정치 및 경제시스템과는 다른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데 거침이 없다. 하우어와스는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콘스탄틴주의적 성향이 기독교를 세속적 권력과 결탁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미국의 기독교가 사회문제들에 가담하여 애국주의나 국수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반대한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도덕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 바탕에는 폭력에 대한 거부, 특히 의로운 전쟁론에 대한 반대가 깔려있다. 오히려 교회는 폭력에 의한 갈등처리가 일상화된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5 하우어와스는 미국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고삐 풀린 욕망의 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의 문화는 끊임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거대한 욕망의 슈퍼마켓일 뿐이다.6 나아가 안락사와 임신중절과 같은 의료문제까지도 시장 자본주의적 접근과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세상적 가치와 전혀 다른, 독특한 삶의 원리를 따라 살자는 것이 하우어와스의 요점이다. 세상과 전적으로 다른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어설프게 동화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뜻이다. 정책을 제시하고 개입하는 것 자체가 타협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의 방식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셈이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 문화에 만연된 쾌락주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국가숭배 등에 맞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야비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예배라는 잔치를 베풀 수 있는 소망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나라를 지배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셨던 예수의 길을 따르자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어쩌면 교회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불편한 동거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교회 스스로 세상에서 퇴거하자는 뜻으로 들리기 쉽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하우어와스는 자신의 생각이 세상에서 은둔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대로 살아내기에 힘쓰자는 뜻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그것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어야 한다.”7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에 속한 자로서, 세상과는 다르게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인 언어들로 번역하여 설명될 것도 아니요 시민사회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면 된다. 우리가 지난 호에 살펴 본 스택하우스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하는 셈이다. 실제로 현대기독교윤리학에서 공공신학과 라이벌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우어와스가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와 평화를 실천할 성품과 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독특한 다름에 대한 주장이 지나쳐 윤리적 게토에 갇힐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소종파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퇴거주의라는 비판도 받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우어와스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에 창의적인 제안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성품, , 그리고 평화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더욱 풍요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시민사회에서 교회다운 교회되기
솔직히 필자가 교회특강 혹은 설교에서 공공신학과 교회론적 윤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노라면 상당수의 청중들이 공공신학보다 하우어와스에게 관심을 가진다. 공공신학이라는 이름부터가 왠지 복음적인 신앙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가 보다. 한국 교회의 복음적 신앙전통에서는 말씀대로 살아서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공공신학보다 호소력이 큰 셈이다. 왜 그럴까?
분명 하우어와스의 제안은 안팎으로 안티와 변화의 요구에 직면한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내용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교회됨에 관하여 혹은 교회다운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다르게사는 방식에 관하여 고민해야 할 때다. 특히 교회부터 새로워져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한 한국 교회에 좋은 길잡이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가 교회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필자가 보기에 하우어와스를 한국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아시아적 가치관이 작용할 수 있다. 공공신학에 멸사봉공의 아시아적 관점이 적용될 수 있다면, 교회론적 윤리에는 사회에 본이 되고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적용될 수 있겠다. 더구나 사람됨을 우선시하는 것은 덕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아시아적 가치관에 가깝다. ‘덕스러움혹은 후덕厚德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교회에 대해 사회가 본받을 만한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것도 아마 이런 영향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하우어와스는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귀감, 이를테면 공공신학처럼 공공성이나 투명성을 말하지 않고 다른이야기를 한다. 예수 이야기대로 다르게살자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기독교윤리학자가 예수의 윤리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중용의 윤리가 아닌 극단의 윤리라고 설명했던 것과 가까워 보인다. 하우어와스가 평화를 강조하면서 미국 시민들에게 자녀들의 군복무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암시한 부분에서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바라기는 다름에 관한 강조가 세상 속에서 극단의 길을 걷자는 말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한 가지 더 짚어보자. 예수 이야기대로 사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단절이어서는 곤란하다. 다름으로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것은 좋으나 신앙의 사사화로 흘러서는 안 된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우리들끼리의 집단적 사사로움으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하우어와스의 윤리는 공공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다른방식의 소통이다. 그가 이라크 파병 반대를 말한 것도 공공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민사회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되 다른 길을 제시하는 노력인 셈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한국 교회에는 말씀이 부족한 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내는 게 부족하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12:2 사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일,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도 시민사회가 문제를 삼는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신앙인의 사람 됨됨이 역시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예수 이야기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복음적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교회 밖으로 시민적 공공성을 압도할 성숙한 시민으로 나서야 할 때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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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H. Yoder, 예수의 정치학, 신원하·권경연 옮김 (서울: IVP, 2007), 101~102.
2.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Toward a Constructive Christian Social Ethic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1), 40.
3. 앞의 책, 69.
4.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Resident Aliens: Life in the Christian Colony (Abingdon Press, 1989) 11~13.
5.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십계명, 강봉재 옮김 (복있는 사람, 2007), 125.
6.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이종태 옮김 (복있는 사람, 2006), 108.
7. 앞의 책, 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