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내 성폭력 1
CBS칼럼 이진성의 세상읽기에서
오늘은요, 아주 민감하면서 가슴아픈 이야길 하려 합니다. 그동안 쉽게 공론화되지 못한 이야기,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곪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깁니다. 바로 교회내 성폭력, 구체적으로는 신도에 대한 목회자의 성폭력 문제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그동안 음지에서 소문으로만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오곤 했는데요. 실태가 어느 정돈지 알 수 있는 조사내용이 궁금하지요?
먼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99년도 통계를 보면요, 총 성폭력 상삼건수 2564건 가운데서 성직자 성폭행 건수가 32건이었습니다. 강간이 23건, 성추행이 8건, 성희롱은 1건이었구요. 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사회지도층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2000년 상반기에 접수를 받았는데요, 여기 접수된 106건 가운데 성직자에 의한 것이 15건으로 14%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2000년 한해에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들어온 상담건수를 보면, 총 95건의 상담 중에서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이 53건으로, 5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성폭력 범죄사건 중 단지 6%만이 신고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교회 성폭력 사건 신고비율이 이것보다 훨씬 낮은 걸 감안한다면, 교회내 성폭력의 실태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그동안 음지에서 소문으로만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오곤 했는데요. 실태가 어느 정돈지 알 수 있는 조사내용이 궁금하지요?
먼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99년도 통계를 보면요, 총 성폭력 상삼건수 2564건 가운데서 성직자 성폭행 건수가 32건이었습니다. 강간이 23건, 성추행이 8건, 성희롱은 1건이었구요. 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사회지도층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2000년 상반기에 접수를 받았는데요, 여기 접수된 106건 가운데 성직자에 의한 것이 15건으로 14%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2000년 한해에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들어온 상담건수를 보면, 총 95건의 상담 중에서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이 53건으로, 5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성폭력 범죄사건 중 단지 6%만이 신고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교회 성폭력 사건 신고비율이 이것보다 훨씬 낮은 걸 감안한다면, 교회내 성폭력의 실태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 이런 문제가 소위 "이단"이라고 불려지는 교파나 교회에서 주로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기독교여성상담소측의 얘기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로, "은혜 중심, 은사 중심"의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교회에서 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목회자가 여신도들을 성추행하는 과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자신의 더러운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름아닌 '성경말씀'으로 여신도를 설득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에덴동산에서는 옷을 다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니 죄씻음을 받은 우리도 지금 옷을 다 벗어도 부끄러워선 안되고 그걸 여기서 확인해야 한다"라는 식입니다. 또 다른 건요,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요구받았고, 이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 너는 지금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칠 마음가짐이 돼 있느냐?"라며 마치 믿음을 시험이라도 하듯 달겨든다는 겁니다. 또 많이 사용하는 예가 바로 레아와 라헬의 옙니다. "야곱에게는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지금 내 아내가 레아지만, 지금 내가 정말 사랑하는 라헬은 바로 너다, 너는 라헬이며, 목사를 섬기는 사명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상대에게 접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교회에 라헬이 한 스무명에 이르구요. 또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도 아주 그들에겐 아주 효과적인 구절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입도 맞추고 사랑도 나눈다면서 여신도를 미혹하고 은밀히 성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거죠. 이런 일들이 교회 내에 은폐된 채로 곪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고 가르쳐야 할 목회자가, 그걸 왜곡하고 악용한다니 통탄할 노릇이지요.
성경을 갖다붙이는 건,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범죄가 드러난 이후에도 성경말씀을 끌어다가 책임을 모면하려 하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해서 끝까지 왕으로 잘 살았다"면서, "회개했기 때문에 모든 걸 용서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는 거죠. 또 실제 많은 교인들이 이렇게 믿고 있구요. 또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세를 비난한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렸다"..., 혹은 심한 경우엔 "솔로몬이 2천명의 궁녀를 거느렸던 걸 모르느냐"는 데까지, 하여튼 그 성경적용능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경입니다.
피해자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많은 경우에, 피해자들은 목회자를 "영적 아버지"로 믿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목회자와의 절대적인 위계관계 속에서, 이 일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죠. 그러다 나중에서야 자기만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문제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와 같은 예들 외에도, 목사의 성추행에 저항하고 문제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순수한 성도들은 목사를 어떻게 고발하느냐 하는 신앙정서적 혼란을 겪기 마련이구요. 또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문제를 제기한다해도, 교회나 교단 차원에서 이 일을 깨끗하게 처리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교회내 성폭력 문제가 좀처럼 수면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믿기 힘든, 하지만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는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요, 이런 문제들 뿌리에 있는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좀 짚어봤으면 합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하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는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는, 여자들이 배우자 외에 남자들과 관계를 갖는 건 죄악시하면서도, 남자들이 여자를 범한 행위에 대해서는 "남자는 그럴 수 있다"라고 여기는 태돕니다. 성적 불쾌감을 주는 왠만한 성추행에 대해서는 "뭐 그런 걸 가지고"라는 통념으로 묵인해버리는 남성중심적인 의식이 문제라는 겁니다. 왠만한 성추행 정도는 문제로도 보지 않는 목회자들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요, 기독교여성상담소 홍부연 부장에게서 직접 이야기한 걸 2002년 1월 17일 AOD를 통해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황인데도요, 목사는 "인간이니까"하며 용서할 수 있고, 희생당한 여자들은 마치 목사를 유혹한 마녀나 "꼬리달린 여우"내, "목사 쫓아내는 여자"내 이렇게 취급해버리는 몰지각한 발상이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것도 좀 말이 안되는 게, 만의 하나, 혹이라도 여자쪽에서 먼저 소위 꼬리를 친 게 있다 치죠. 그러면 목사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겁니까? 강간이 아니라 서로가 원했다 치죠. 그러면 목사의 죄가 덜해지는 겁니까? 성관계까지 간 것만 아니면, 문제도 아닙니까? 도대체 이런 발상이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목회자로서의 권위는 누리면서, 자신이 가져야 할 도덕적 기준은 일반 신도들보다 높아야 한다는 상식은 왜 외면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지금과 같은 교회내 성폭력이 가능한 한국교회의 두 번째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드리면요, 바로 목사의 어긋난 권위의식과 신도들의 무비판적이고 맹종적인 신앙자셉니다. 목사의 잘못이 드러나면, 목사도 사람이며, 용서받아야 한다면서도, 목사의 말이라면 어떤 말이든 오류 없이 곧 하나님의 말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모순된 권위의식에 목회자와 신도들이 함께 사로잡혀 있다는 거죠.
세 번째는, 여신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존재로 보는 기독교적 사고 이전에, 자신이 성폭행 피해를 당하면 "버려진 여자"라고 여기고 쉬쉬 덮는 유교적 사고에 더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목회자도 진실한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제2, 제3의 피해자가 양산되는 실정인 거죠.
이런 한국교회 전반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내 성폭력이 갖는 독특한 성격도 이해하기 힘들구요, 또 이 문제들을 고치지 못하면, 이런 성폭력 문제를 개선해 나갈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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