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원 (VIEW)
때로 자명해 보이는 진술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를 일요일마다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요즘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들을 그리스도인의 숫자에 포함시키는지는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예배를 꾸준히 드리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면, 주일예배를 꾸준히 드리지만 비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은 가능한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일상이 예배이고 예배가 일상이라는 말로 퉁치자는 의미가 아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표지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한번쯤 던져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성수라는 의식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연결시키다 보면, 그리스도인임을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주일예배 참석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제기를 하게 되면, 꼭 그런 말하는 ‘놈’ 치고 주일성수 잘하는 ‘놈’ 없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 ‘매우’ ‘잘’ 안다.
주일예배가 중요하다고 해서, 곧 주일성수가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지표로 작동할 수는 없다. 뭔 비뚤어진 심사냐고 하겠지만, 역사를 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여기서 질문 두 개만 던지고 가 보자.
질문 하나, 한국에서 불교 신자, 혹은 유교 신자로 고백하는 지표가 특정일에 절이나 사당에 가는 것일까?
질문 둘, 오래 기독교 전통을 유지시켜 온 중세 유럽인들은 매주일 미사를 드리러 교회에 갔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불교나 유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정기적으로 법회나 제사에 참여하는 것과 그 종교를 신봉하는 것을 등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좀 더 고약하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세계 속에 살던 중세 유럽인들은 매주 예배에 갔을까?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매주 수용할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년에 몇 차례 특정한 절기에만 교회에 갔다. 마치 오늘날 불교신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개념은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에서 등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잉글랜드 국교회를 확립하면서 주일예배 참여를 의무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일예배는 ‘국교회’ 예배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국교회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들이나 가톨릭 신봉자들을 파악해서 차별을 부과하기 위한 조치였다. 작년 이맘 때 잉글랜드 성공회 400년 만에 주일예배 의무 폐지 (Church of England makes Sunday services non-compulsory)라는 소식이 떴다.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 여러가지 해석들이 오갔지만, 이 주일예배 의무 조항은 단순한 종교적 조치가 아닌 국교회 확립을 위한 국가의 조치였다. 그러면서 주일성수가 국교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이 성격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예배 참석 말고도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요소는 많다. 아니 많아야 한다. 그것이 많지 않으니 주일예배만 목숨 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한다. 주일성수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아니다. 신학적 코멘트는 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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