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4일 화요일

초기 내한선교사의 남도행전 (마지막)ㅤ<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18931월의 예양협정에 의해 호남선교를 맡은 남장로교 선교회는 호남에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는 것이 이르다고 판단하여, 다음 달인 2월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인 정해원을 전주로 보내 전주 선교지를 물색하게 했습니다. 이에 정해원은 전주에 내려와 적당한 곳을 찾다가 완산 은송리에 초가 1동을 마련합니다. 그해 9, 테이트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가 처음으로 전주에 와서 2주간 머물렀고, 1894년 테이트와 누이동생 메티(Tate Mattie Samuel 한국명 최마태)가 전주로 내려와 정해원이 마련한 은송리 초가집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지역에 동학이 주도하는 농민혁명이 일어나 이들 선교사는 다시 서울로 철수하게 되지요. 이쯤에서 동학에 대해 좀 살펴봅시다

갑오농민(1894년 갑오년에 일어났다 하여 갑오농민이라 불렀다.) 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전봉준은 전라도 53개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전주에 두고 총 지휘를 하였습니다. 농민군과 싸우게 된 정부군은 이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청나라에서 군사 3,000명이 오게 됩니다. 이에 질세라 일본군도 뒤이어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7,000명의 병력을 보내 왔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급박해지고 있을 때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이 농민혁명군과 휴전 교섭을 하고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게 됩니다. 이 협정을 계기로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전주는 전란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학혁명군을 진압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 온 청나라와 일본군은 18947,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우리나라는 그 양국의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전주가 농민군에 점령될 무렵인 530일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급히 서울로 올라가 전란을 피하였지만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그들은 기도하면서 선교를 재개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테이트 선교사는 선교를 조금이라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에 1894년 가을, 조심스럽게 전주로 들어갔습니다. 전주로 들어간 테이트 선교사는 그곳이 관군과 농민군의 싸움으로 마을들 중 3분의 1이 파괴되거나 불타버린 참담한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자 그는 한시바삐 선교활동을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선교사들에게 전주의 모습에 대해 보고를 드렸고, 그곳에 모인 선교사들은 매일 모여 전주의 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895318일 테이트 선교사와 레이놀즈는 조사 조씨와 강씨, 어학선생 이씨 그리고 소년 요리사 칠성이를 데리고 전주로 내려와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그 전에 전도했던 초신자들은 이미 흩어져 찾을 수 없었기에 새롭게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에 구입하려 했던 집 두 채와 앞으로 올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다섯 채의 작은 집들을 구입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큰 소나무들을 벌목해서 완산 지맥 중 한편인 등성이에 터를 닦고 두 채의 집을 마련했습니다
189615일 전주 은송리교회에서 새해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는 공식적으로 전주교회가 세워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테이트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동생 메티 선교사는 여자들에게 간단한 치료와 위생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89736일 토요일, 전주로 모여 든 선교사들은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 예배를 드렸습니다. 의료선교사인 해리슨은 군산에서 전주로 완전히 이사를 왔습니다. 말을 타고 전주에 도착한 그는 맨 처음 구입했던 은송리 집에 거처를 정하고 약방을 차려 환자들을 위한 간단한 의료시술을 하면서 의료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주일인 다음날 전도를 했던 사람 중 8명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선교사들은 먼저 인도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장터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314) 교회 예배에는 10명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선교사들은 전주 선교에 대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한편 해리슨 선교사는 선교의 방편으로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두고 328일 주일부터 사내아이 네 명을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 me)이라는 찬송가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유교사상과 미신에 사로잡힌 부모들이 선교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아이들을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할 때도 있어 주일에 한명도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은 모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와 평온한 모습으로 장터 전도와 거리·축호 전도를 계속하였습니다. 때마침 레이놀즈 내외와 그의 큰아들 볼링 등이 전주로 이사와 선교 운동에 가세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며 장터와 거리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620일 주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 날은 레이놀즈가 설교를 담당하였습니다. 74일 주일에는 아홉 사람이 참석했으며 믿기로 작정한 사람도 여럿 되었습니다. 곧 주일이 아닌 날에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믿음의 도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문답한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예비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717일 주일에 레이놀즈의 집례로 김내윤(테이트의 사환), 김창국과 김제원의 부인 강씨(김창국의 모친), 함성칠의 부인 임씨, 유성안의 부인 김성희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81일 주일에는 처음으로 성찬예식이 레이놀즈 집례로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이날 세례를 받은 김내윤의 딸 보영(寶榮)은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테이트 선교사의 집 인근에는 김창국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김창국은 키가 컸는데, 심성은 소심한 소년이었습니다. 김창국과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테이트 선교사의 성경 가르침을 받았고 찬송가를 배워 불렀습니다. 김창국의 아버지는 한의사였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해리슨 선교사를 찾아와 치료받기를 원해서 해리슨 선교사는 그에게 잠시 진정제를 놓아주고 약을 조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의사인 창국의 아버지가 커다란 침을 놓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렸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침놓은 것을 처음 봤기 때문에 그 행위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김창국은 세례를 받은 이후 소년들을 교회로 불러 모아 스스로 주일학교 교장 노릇을 하였는데, 해리슨 선교사는 데이비스(Linnie Davis) 선교사와 결혼한 뒤 꾸린 새 가정에 그를 사환으로 채용하였습니다. 그 후 해리슨 선교사는 그를 평양숭실중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키고 이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어 그는 1915년 평양신학교 3회 졸업생으로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창국 목사는 군산 영명학교와 금산심광학교에서 근무하였으며(임영신의 선생), 1917년 제주도 선교사로 6년간 근무하며 제주도의 독립운동가인 조봉호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독립모금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2년에는 광주 남문밖교회(광주제일교회)에서, 1924년에는 광주 양림교회를 개척하여 25년간 봉직하였습니다. 그는 슬하에 4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김현정은 목사이며, 둘째 아들 김현승은 유명한 시인(대표작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 등 다수)이고 셋째 아들 김현택은 전북대 교수(미국 거주)가 됐고, 넷째 아들 김현구는 전남여고 교장을 역임한 광주중앙교회 원로장로입니다. 은송리의 한 떠꺼머리 소년이 예수를 믿음으로 한국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로 서고, 후손들 또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급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전주 서문밖교회의 최초의 세례교인인 유성안의 부인 김성희는 집안은 부유했지만 두 딸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집안에 머리 둘 곳 없이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메티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은 김성희는 남편에게는 서양사람 집에 신기한 물건을 보러 간다고 말하고 교회에 나가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김성희에게 모진 구타를 하면서 만일 다시 교회를 나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성희는 계속 교회를 나갔고 그때마다 남편의 학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 처음 그녀가 한 일은 어린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여자들에게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개 엄마혹은 신체의 특징을 따서 이 부러진 여자’ ‘코에 사마귀 있는 여자등으로 불렸습니다. 김성희도 본래 이름이 없었지만 세례를 받을 때에 선교사가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두 딸의 이름을 짓게 된 김성희는 예수님 보시기에 귀한 보배 같은 딸이라고 하여 큰 딸에게는 큰 보배’, 작은 딸에게는 작은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어느 날 김성희는 잉골드(Ingold, Mattie B 1867-1962. 1895년 내한 1897년 전주의료선교 시작 1905년 테이트 선교사와 결혼)선교사를 급히 불렀습니다. 잉골드가 가서 보니 뒤뜰에는 커다란 돼지가 죽어 있고, 그 배 위에는 아픈 어린 아이가 올려져있었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그렇게 해서 고쳐질 것이라는 전례미신 때문이었습니다. 잉골드 선교사는 그 아이를 급히 데려다가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어도 남편 유성안은 자신의 아들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김성희는 엄청난 결단을 하였습니다. 제사 음식 장만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남편은 부엌칼로 김성희를 위협하면서 제사음식을 장만하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때 김성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원한다면 나를 죽이시오. 당신은 나의 몸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의 영혼은 죽이지 못할 것이요. 나는 결코 제사를 준비하지 않겠소.” 이러한 대답을 들은 유성안은 칼을 높이 든 채 얼마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아내의 모습에서 그 어떤 두려움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얼굴은 오히려 굳은 의지로 환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유성안은 칼을 집어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 후 유성안은 본인은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부인의 교회생활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두 딸도 기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큰딸은 기독교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는 그의 책에서 이 동양여자는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라는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지음 한인수 옮김 호남선교 초기역사도서출판 경건 1998. 28-33)


전주시 완산동에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이 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부의 서쪽 용머리 고개 동쪽에 군자정을 만들었는데 이곳을 기령당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경로당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령당 안에는 이상만, 이건호, 송성용 등이 30여개의 풍광을 적은 현판들이 있었습니다. 기령당 뒤쪽에 있는 송림 사이에는 송석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송석정은 완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전주천 맑은 물이 흐르고, 좌우에는 다가산과 곤지산이 감싸고 있습니다
송석정 바로 밑은 서천교를 넘어 정읍으로 가는 행인들이 지나가는 중요 도로였습니다. 그 주변으로는 기와집으로 된 청학루와 백학루가 있었는데, 이곳은 소나무가 많다 하여 은송리라고 불렀으니, 과히 옛 풍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송석정에 걸린 편액은 효산 이광열이 쓴 여러 작품 중에서 필획과 포치가 뛰어난 작품에 속합니다. 비록 편액 주변이 장식이 없고 단청이 되지는 않았지만 글씨만큼은 어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이 송석정은 멋진 정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도심 속에서 속세를 떠난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정자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먼 곳까지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은송리는 북두칠성의 모양을 닮은 완산칠봉에 의해 조성된 명당 가운데서도 핵심을 이루는 곳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은송리야말로 전주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이곳은 조선 왕조의 시조인 신라 사공(新羅 司空) ()의 발상지요 중시조 목조 안사(穆祖 安社)의 본향으로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은송리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최씨, 이씨, 유씨의 시조들이 일찍이 개창의 터전으로 삼아 오늘날 한국의 명문 성씨를 일구어낸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합니다. 워낙 텃세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섣불리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은송리와 남부시장은 서로 마주보는 형세라서 남북을 연결하는 전주천의 다리들을 중심으로 각종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때문에 일찌감치 주민들의 생활전선이 형성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은송리는 동학혁명 당시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전주에 입성한 농민군과 성을 탈환하려는 관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와 같이 유서 깊고 풍광도 좋으며 장터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은송리에 레이놀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의 첫 선교를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외지인에게도 텃세를 부릴 정도인데, 외국인이 은송리에 터를 잡고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그 지역 양반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양반들은 항의를 했고, 이러한 항의가 계속되자, 1900년 전주 감영까지 나서게 되었습니다
전주 감영에서는 선교사들에게 은송리 그 지대는 태조의 조부가 태어난 성역이기 때문에 거주를 허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공론이 벌여졌고, 결국 타협 끝에 그에 상당한 땅을 다른 곳에 주고 건축 비용을 일체 변상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완산동 은송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화산(현 중화산동)으로 자리를 옮겨 그 일대가 선교사 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서문밖교회(西門外敎會) 시대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기전학교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은송리 전주교회는 설립 초기에 테이트 선교사와 해리슨 선교사가 교회를 이끌면서 양적으로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1900년 가을에는 113명이나 되었고 한번은 54명의 세례지원자를 교육시킨 후 문답고시에 6명만이 합격하여 세례를 준 일도 있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전주 장날에는 장터선교에 열을 올렸고 평일에는 전주성 밖으로 나가 인근 동리에도 전도를 하였습니다. 특히 전주 성내에 사는 양반들 선교에 열의를 보였습니다. 나라의 형편이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모습에 슬퍼하고 있던 전주의 양반들은 점점 선교사들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한문으로 된 성경을 구입하여 읽으며 새로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서문밖교회에는 양반과 상민들이 함께 어울려 예배를 드리니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04년 전주에 와서 활동한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1873-1918. 한국명 보위렴. 쿠바에서 활동하다 1904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주, 목포, 광주에서 활동. 사람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림. 1912년 몸이 쇠약해져 귀국)의료 선교사가 19053월 전주의 어느 양반의 병을 치료하던 중에 이곳을 찾아온 의병들이 그를 일본 경찰이라고 여겨 칼로 여러 군데를 찔러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집의 안주인이 죽어가는 그 앞에 막아서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그들이 물러난 뒤 그는 급히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그의 귀와 머리에 난 상처는 더 이상 낫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이 일이 전주의 양반들에게 소문이 났고, 결국 이 일은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당시 선교부에 올라온 보고입니다.
 그해의 도시 선교는 앞선 해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052월까지 교회에 모인 남자들은 완전히 중상층 상인이거나 농부가 아니면 하층 짐꾼들이었다.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무관심했다. 포사이드박사가 상처를 입은 한 달 뒤 상당수의 고위층과 부유층의 이씨 문중사람들과 집안의 가장들이 큰 길에서 가마를 내려 예배드리는 외국사람 집에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그 도시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이 사건이 본이 되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체면이 깎이는 일이 아니었다.”(애너벨 M. 니스벳 호남선교 초기 역사69)
포사이드 선교사는 치료 후 다시 전주로 돌아왔으나 곧 목포로 가서 병원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온갖 어려움 중에도 환자들을 돌보아 사람들로부터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1911년 자신의 고향인 루이빌로 귀국하여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1918년 결국 그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슬픈 소식은 해리슨 선교사와 함께 전도활동을 하던 부인 데이비스 선교사가 장티푸스에 걸려 치료를 받다가 1903620일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19029월 레이놀즈 선교사가 서울 구리개(아현)교회(서울 중앙교회)로 옮겨감으로 1904년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서 전주 서문밖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군산 선교에 너무 지쳐 있던 전킨 선교사가 휴식을 취하는 목적으로 서문밖교회로 온 것이지만 전킨이 어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선교사입니까? 오히려 그는 일을 더 만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20리 밖으로 순회전도를 하지 말라는 선교회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주를 중심으로 장터선교, 노방전도, 축호전도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교인 수는 날로 늘어갔습니다. 19059월 서문밖교회는 완산에서 화산으로 이제 전주의 4대문 중의 하나인 서문과 아주 가까우며 전주천을 건너 전주 부중으로 들어가는 문턱인 서문밖 현 위치로 옮기게 됐습니다. 거기에 780평의 땅을 구입하고 건평 50평의, 벽돌과 기와지붕을 인 한양절충식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이곳이 바로 서문밖교회입니다
전킨 선교사의 진두지휘로 새로 지은 예배당 안에는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좌석을 구분하고 가운데에 휘장을 전후로 길게 쳐서 남녀반이 서로 마주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이는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낡은 유교의 관습이라 하여 젊은이들 중심으로 철거를 주장하여 1921612일 교인전체의 의견을 물어 휘장을 철거하게 된다.) 총 공사비는 3,500냥이 들었는데 2,300냥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고 완산의 선교사 사택 한 채를 헐어 자재를 보충하여 소요경비를 충당하였습니다. 은송리에 있을 때는 은송리 예배당으로 부르다가, 1905년 전주부내로 교회를 지어 옮기니 전주교회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통칭 전주 서문밖교회로 불렀는데, 그러다 이곳은 19551214일 마침내 전주서문교회로 개칭됩니다.

19077월 일본은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맺어 행정권을 빼앗고 조선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시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백성들은 나라의 성쇠존망(盛衰存亡)의 혼탁지세(渾濁之世)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존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백성들의 죗값이니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나라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예레미야의 통곡의 마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회개와 부흥의 불길은 전국교회로 번져 나갔습니다
전주 서문밖교회에서는 500명이 자진해서 나와 전도대원이 되었고 5,000권이 넘는 단편복음서를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교인들이 날연보를 바치기로 서약한 날이 총 3,349일이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부흥 전도운동에 전킨 선교사는 앞장을 서서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그러한 만큼 그의 육신은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8115<예수교신보> 교회 통신란에는 다음과 같은 소식이 실렸습니다.
 
전라도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남

본월 2일에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 목사를 아시는 형제자매는 육신의 섭섭한 정회를 금하기 어렵도다. 이 목사는 교중 사무 보는 중 제일이더니 불행히 세상을 떠났으니 장차 그 자리에 대신 사무 보실 이가 그와 같이 잘 보리라고 하기가 어렵겠도다. 이 목사가 우리나라에 오신지 16년에 전라도에서만 교중사무를 주관하셨으나 사경할 때에는 항상 다른 곳으로 다니며 많이 인도하셨고 어디가든지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으며 그 집안 식구는 부인과 아들 3형제와 딸 하나이더라. 슬프다. 이 목사가 육신의 고락을 다 버리고 세상을 떠나서 낙원으로 간 것을 생각하면 가쁘다고도 할 수 있지마는 그 외로운 부인과 어린 자매들의 정경을 생각하면 눈이 어둡고 기운이 막혀서 기도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돌아보사 잘 보호하실 줄로 믿삽나이다.(전주서문교회 100년사177)
 
전킨 선교사는 190812일 급성 장티푸스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알고 있는 선교사들과 서문밖교회 교인들 그리고 군산, 익산, 김제 등 그를 통해 전도 받고 믿음을 시작한 교회 교인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성경말씀처럼 이김의 시킨바였습니다. 에너벨 니스벳은 그의 회고록에서 전킨 선교사의 장례식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전킨 선교사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전킨의 얼굴을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에 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위렴 목사는 살아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에너벨은 슬픔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 전킨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의 뜻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전킨은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이라고 하는 데에 격렬하게 반대를 하면서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호남선교 초기역사58-59)
 
전킨 선교사가 전라도 땅에 뿌린 복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씨앗들은 크게 자라나 120년이 지난 오늘, 이 지역은 전국적으로 가장 복음화율(30%이상)이 높은 곳이 되었습니다.

7인의 선발대로 전킨과 함께 한국에 온 매리 레이번 전킨(Mary Leyburn, Junckin) 부인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교우들에게 전킨 선교사가 생전에 서문밖교회를 새로 건축하였지만 종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고 말하니, 서로 연보들을 하여 직경 90cm나 되는 큰 종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해외선교신문의 편집장 윌리엄(H F William)목사는 직접 이 종을 큰 기선에 실어 한국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제물포에 도착한 이 종은 다시 범선 편으로 만경강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전주에서 40리 거리인 김제의 회포면 쌍강포에 내렸습니다. 다시 인근에 난산교회와 쇠평리교회 신자들이 이 종을 쇠달구지에 실어 서문밖교회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종각을 세우기 위해 교인들이 헌금을 하고 인근 교회들도 협력하였는데 김제 번드리 교회에서는 5원을 보내 왔습니다
종각 건축위원으로 김필수 장로, 전영칠 집사 그리고 목수 김학수에게 맡겨 종각을 세우니 마침내 19081210일 오후 4시 헌종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 후에 윌리엄 레이놀즈, 니스벳 선교사와 전영칠 집사 그리고 앞으로 종을 관리하며 타종 책임을 맡은 안경오가 차례로 타종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감격을 김필수 장로가 1230일자 <예수교 신보>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전주서문교회100년사179)
 
한 번씩 종을 쳐 보는데 뗑 뗑 뗑 사랑하는 전 목사의 기념종소리로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오르신 후 보혜사를 우리를 외로운 자식같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심 같이 전 목사는 종을 보내게 하여 이곳 교우와 다른 친구들을 경성하게 하셨도다.
비록 전킨 선교사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셨지만 그 후 그 종소리가 울릴 때 마다 그의 신앙과 선교정신도 함께 서문밖교회와 호남 모든 교회들에게 울려 퍼졌습니다.
 

남 장로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성경 교육에 필요한 책을 직접 쓰거나 번역 출판하여 사람들에게 읽게 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 부인인 잉골드 선교사는 어린이 성경교육을 위해 예수교 초학 문답을 저술하였고, 메티 선교사는 인모귀도(Leading the mother in the right way)라는 책을 썼는데 여자 매서인 과부 이씨가 예수를 믿게 된 일과 믿은 후 친정어머니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는 내용입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마훗(Mahooe)이 쓴 Art of Soul Winning이란 책을 번역하여 개인전도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출판한지 1년도 되지 않아 2,000부가 다 팔려 매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의료선교사 윌슨(Wilson Patterson)은 의학에 관한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우리말 성경은 로스선교사에 의해 만주에서 발간된 예수셩교젼서인데, 이는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것으로 주로 의주사람들에 의해 번역이 되어 평안도 방언이 많이 섞여 있던 터라 남쪽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글 번역 성경이 필요해졌습니다. 번역위원을 선정하였는데, 북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 게일 목사 그리고 남장로교회의 레이놀즈 목사가 성경번역 일을 맡았습니다

19026월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까지 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해를 지나갈 무렵 다른 배와 충돌하여 좌초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살아난 미국 광산업자인 보올비( J.F.Bowby)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아펜젤러 목사는 충분히 살아나올 수 있었지만 배 아래층 3층 칸에 있던 조수인 조한규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다가 본인은 살아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고로 한국인 14, 일본인 4, 선원 4명 그리고 아펜젤러 목사 이렇게 23명이 실종 사망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선교사인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군산 내초도감리교회에 순교관을 건립하여 그의 아름다운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끝에 1904년 번역을 끝낸 신약성경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구약전서의 번역에도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언더우드 목사는 병환으로 그리고 게일 목사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킨 선교사 별세 후 전주 서문밖교회를 맡게 돤 레이놀즈 목사가 주도적으로 노력해야 했고, 그 결과 191042일 구약전서의 번역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글 성경은 레이놀즈 선교사의 노고의 결과요 또한 서문밖교회 교인들이 그를 도와 번역 사업에 동참하였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특히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서문밖교회의 이승두이고 또 한사람은 서울에서부터 번역 사업에 종사한 김정삼입니다. 이들은 우리말로 교정하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그 중 이승두는 191111일 장로가 되었습니다. 본래 이승두는 1909711일 피택되었으나 성경번역일로 늦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12년 서문밖교회는 레이놀즈 목사가 사임하고 최초로 한국인 목사를 청빙하게 되었습니다. 청빙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지방에서 목회하고 있던 김병룡 목사였습니다. 김병룡 목사는 1897년부터 평북 의주군 읍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평북선천읍교회 남자 중학교(신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0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 최대진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됩니다. 김 목사는 의주군 남재 낙원 농상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19129월 전주 서문밖교회 목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주 소음리 정거장에 도착하던 날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인들이 나와 열렬하게 그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1913415일자 <예수교회보>(15)에 김병룡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때는 밤이라 수 십리나 행하여는 사랑하시는 각 학교 선생 여러분이 자행거로 수십여리를 나와 인사하는 중 어린학도들이 기쁜 소리로 부르고 오리 상거에는 여중학교 선생 누님들이 수다한 학생들 인도하고 여러 직분과 여러 사랑하는 형제는 반가히 부르는 말씀과 사랑에 손으로 붙잡고 영접함을 다 말할 수 없사와 주은을 감사할 뿐이옵고 집에 들어와 보온즉 수백여환 가격으로 수리해 거처에 편케하며 가용물품은 서양 부인들과 여러분들이 부족한 것 없이 다 마련하여 준고로 풍족한 은혜를 받은 중.
 
지금까지 선교사들이 이끌어 온 서문밖교회는 오랫동안 한국인 목사가 교인들을 인도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왔는데 비로소 한국인 목사가 오니 얼마나 큰 기쁨인지 김병룡 목사가 오는 날 60리 밖까지 교인들이 나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전주서문교회 100년사216-217)
 

전주 서문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꼭 기억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익산 목천포 당뫼에 이경호(李敬鎬)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규풍의 둘째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지내었고 800석지기 농사를 지으며 윤택한 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환이 위독하자 세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병구완을 함으로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이경호는 후처로부터 아들을 낳아 이름을 보한(普漢 다른 기록에는 성한(聖漢) 1872. 1. 23.-1931. 8. 16. 출생년월일을 가족들은 1973. 5. 16.이라고도 한다)이라 하였습니다. 이보한은 어린 시절 열병을 앓아 왼쪽 눈을 실명하여 늘 검정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촉망받는 아이였으나 당시 반상의 신분 제도가 엄정하였던 때라 서자의 신분으로 눈총을 받으며 외롭게 자랐습니다.

어느 날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에서 선교 준비를 하다가, 주변사람들로부터 전주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인 이경호를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이경호를 찾아가 다짜고짜 한국식으로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면서, “아부지,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경호는 저 서양 오랑캐가 자기를 아부지라고 하면 자기도 오랑캐가 되니까 기분이 나빠 씩씩거리고 있는데, 테이트 선교사는 아부지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좋아 그런 줄 알고, 한술 더 떠서, 가까이 가서 귀를 어루만지면서, “아부지, 귀 참 잘 생겼습니다.”하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이경호는 어랍쇼! 이 오랑캐가 이제는 내 몸에 손을 대? 감히 양반의 몸을 서양 것이 만져? 오랑캐의 아부지라는 말에 분통이 터지려는 판에, 저것이 한술 더 떠서 귀를 만지면서 또 아부지라고 해? 머슴아! 이놈을 묶어놓고 매로 매우 쳐라!”하면서 머슴들에게 지시했고, 테이트 선교사는 꼼짝없이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치외법권(治外法權)에 속한 외국인을 구타한 죄를 지은 이경호는 즉시 전주 감영에 갇혔습니다. 가족이 백방으로 알아보니 목사는 원수까지 사랑한다고 들어 사정을 하니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여서 이경호는 예수를 믿겠다고 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풀려나온 후에도 교회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19053, 이보한의 집에 강도가 들어 부친인 이경호가 강도떼의 습격을 받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실은 강도가 아니라 의병들이라고 한다.) 이보한은 급히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왕진을 부탁했습니다. 당시 포사이드 선교사는 19049월 전주 서원고개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의료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포사이드의 치료를 받고 살아난 이경호는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전에 감영에서 풀려올 때 한 약속도 있고 또 보답하는 뜻에서 교회를 나가기는 해야겠는데 양반 체면에 직접 교회로 나갈 수는 없어 집안사람들을 불러 모아 지원자를 찾았습니다. “누가 나 대신 교회에 나가겠는가?” 모두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보한이 제가 나가겠습니다.”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강도들 앞에서 보여준 포사이드의 의연한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은 터였습니다. 특히 강도들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피하거나 반격하기보다는 가해자를 미소로 대하고, 도망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포사이드로부터 충격과 도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서양인의 종교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대신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총명한 이보한은 교회에 나가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성경뿐아니라 영어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 후 전주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능숙하게 하자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지 못하였고 일본인들도 그 앞에서는 잘난 체하지 못했습니다. 이보한은 예수 믿은 지 1년 만에 전주교회의 대표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보한이 신앙을 갖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있습니다, 그는 서자로서 외롭고 쓸쓸하던 때면 전주 북문 안에 있는 큰 아버지 이건호 진사 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 집의 작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가 놀러 오면 늘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기독교인으로 보한에게 교회이야기를 해주고 기도도 해주곤 했는데, 이보한은 그 부인에게서 마치 어머니와 같은 느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부인이 잘 부르는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 봅시다. 열매 차차 익어 곡식 거둘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작은 숙모로부터 이 찬송을 배운 이보한은 어디서나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는 날마다 남문 밖 장터로 나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이보한의 소리는 실로 명창 수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보한이 항상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찬송을 부르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거두리’ ‘거두리 참봉’(참봉으로 불린 것은 그가 영능과 경기참봉을 지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이라 불렀습니다
한자로는 巨杜裡라고 썼는데 자는 배나 위장을 뜻하는 말로 큰 뱃심을 부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전주 뿐 아니라 전주 주변까지 이 거두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부터 이보한을 이거두리로 부르겠습니다. 이미 지난번에 화산교회를 소개할 때 이거두리가 화산의 진사양반을 구원시킨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진사양반은 1918년 서문밖교회의 네 번째 장로가 된 이돈수 장로입니다.
이거두리의 파격적인전도행각은 유명한데, 그는 판소리가 일품이라 노래를 불러주고 그 삯을 받으면 거지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자연히 그의 주변에는 거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거지들을 끌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 어려움이 있을 때 거지들과 함께 종종 봉사대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이거두리는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의지할 만한 큰 힘이 되어 주었고, 그들의 울분을 시원스럽게 대신 풀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상관에는 나무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날의 나무를 다 못 팔고 많은 양이 남게 되면 나무꾼들은 으레 거두리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거두리는 나무꾼들을 집합시켜 마치 군대처럼 행진을 시킵니다. 구령소리에 발을 맞추어 지게꾼들을 이열 종대로 줄을 세워 전주 부중을 한 바퀴 돌면서 일종의 시위를 합니다. 그리고 나무 장사들을 삼삼오오 데리고는 당대의 부잣집들로 가서 마당에 판을 벌이고 앉아 강매를 시작합니다. 그는 때로 소금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아 거기에서 남은 수익금으로 가난한 이들의 구호금으로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제하에서 지주 계급의 이름난 부자들은 각종 사업에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두리는 그들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식량, 의복, 구호 금품을 받는 대로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과 걸인들에게 나눠 주는 일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3·1 운동 때는 거지들을 끌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거두리는 태극기 운반책을 맡아 전라도 전역에 태극기를 운송했습니다. 당시 전주 거지 대장을 앞세우고 전라도 지방 곳곳의 장날에 맞춰 거지들이 골목마다 태극기를 몰래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거지들이 앞장서서 하니 촌민들도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시간에 맞춰 이거두리가 장터 한복판에 나타나 만세를 외치자 옆에 섰던 거지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또한 이거두리는 부자들에게 돈을 거두고 기생들에게 금붙이 등을 거두어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상해 임시 정부에 몰래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지방의 명창 기생들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당대의 국창이라고 불린 이화중선은 이거두리에게 틈틈이 창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비녀, 반지를 빼어 이 일을 도왔습니다
그는 숨은 애국지사들과 천한 기생들까지 몰래 거두어 준 금, , 보화들을 책보에 싸서 어린 손자 이중환(당시 8)의 손목을 잡고 지경역(지금의 대야역)으로 자주 나갔습니다. 기차가 들어오면 화장실을 대여섯 번 들락거리며 독립자금을 전달했습니다. 대략 2만 원 정도의 거금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말이 70-80전이었고 장정 하루 품값이 1원이었습니다.

전주 서문교회에 김인전 목사(1876-1923)가 있었을 때입니다. 한학자 출신인 김 목사는 민족 운동가로서 전주권에서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는 상대의 종교가 무엇이든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언제나 찾아가 함께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김 목사는 향교를 찾아가 원로 한학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김 목사가 향교를 향해 길을 나설 때면 이거두리는 으레 앞장을 서서 교통정리를 하였습니다. 이거두리는 김 목사보다 4살이나 위였지만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였습니다. “쉬 비켜서라. 김 목사님 나가신다.”하며 앞장을 섰습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김 목사가 걸어갈 길을 비로 쓸면서 모시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이거두리가 만세 시위를 하다가 감옥에 간 적이 있는데 아무데나 대변을 봐서 벽에 바르고 얼굴에 칠갑을 하자 미친 사람이라 여겨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풀려난 그는 여전히 옷고름도 매지 않고 모자는 구멍을 뚫어 거꾸로 쓰고 다니며 미치광이 노릇을 했고 일본 헌병대 앞에서 세상이 뒤바뀌었다!”하면서 거두리로다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행진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같이 행진하곤 하였습니다.
한평생 돈을 모을 줄 몰랐고 있으면 있는 대로 몽땅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 것이 없으면 친구에게 빌려서라도 도와주어야 하는 그의 성품 때문에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늙으니 몸은 쇠약해졌고 결국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던 그는 회갑을 앞둔 1931년 음력 8168월 한가위 날에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이거두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주 부중에 퍼지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주의 거지들과 상관 골짜기 나무꾼들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당시 전주 부중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상업은행 창시자 박영철(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군기병소좌로 예편하여 1917년 익사군수 1927년 함북지사를 지낸 후 동양척식회사 감사 삼남은행장을 지냈다. 1933년부터 38년 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의 부친 박기순(朴基順, 1857년 음력 55-1935년 양력 9301908년 전북농공은행장을 역임하고 한일병탄 후 일제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24년 조선총독부중추원 참의를 지내었고, 전주 인근 986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옹보다 훨씬 성대하였다고 합니다

거리의 지게꾼들은 생업을 전폐하였고 걸인들은 상여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전주의 신작로는 조문객들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만장 행렬은 무려 10리를 뻗쳤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걸인들이 다투어 상여를 매었고 수백 장의 만사 깃대는 좁은 목에서 상관색 장리까지 장장 1Km나 뻗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걸인들은 장지에서도 삽 쓰기를 거절하고 손으로 흙을 파서 봉분을 만들고 자갈 하나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온 정성을 다해 안장하였습니다.(배윤숙이 정리한 것을 인용)
나무꾼들과 걸인들은 1전씩 모아 120cm 높이의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비명은 <李公거두리 愛人碑>라 하였고 그 비문은 平生性質 溫厚且慈 見人飢寒 解衣給食”(한평생 온후하고 자비로운 성품,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먹여주었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생전에 전주 이씨 집안에서 추방당한 처지라 유해는 색장리에 있던 종중 묘지에 들어갈 수 없어 죽림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다 1982년에야 문중 교인들의 주선으로 비로소 완산구 색장동 전주 시내를 벗어나 동남쪽으로 임실로 넘어가는 고개 길 오른쪽 옥녀봉 산자락에 위치한 종중 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이거두리의 전도자로서의 기행은 너무나 많아 짧은 시간에 다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이거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던 한국교회사의 위대한 사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기독교사상에서 그동안 연재했던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을 지면 관계상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군산에서부터 시작된 연재는 전주에서 끝을 내게 됐지만, 저는 앞으로도 서천, 부여, 강경, 금산까지 남장로교 지역을 다 둘러 볼 예정입니다. 그 내용은 다른 지면을 통해 만날 수 있겠지요. 그동안 관심 갖고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는 명제는 한국기독교에도 유효합니다. 저의 이 글이 모쪼록 오늘날 한국교회의 참다운 갱신과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밑거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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