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9일 토요일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4)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4)<3> 마태복음 

6) 신학적 긴장

    (1) 특수주의와 보편주의(3)

마태복음이 보여 주는 예수의 사역이 이 설명과 일치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의 뜻을 좇아 유대인들만 섬겼는데, 이는 그렇게 하여 생성되는 하나님의 새 백성(새 이스라엘, 교회)을 통해서 모든 열방을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결국 예수의 “그러므로 너희들은 나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대위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결론하는 것입니다(28:16-20).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마태복음에 강하게 나타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이해하게 합니다. 예수 자신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하지 않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주된 적대자들로 나타나고 유대인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회당’, ‘너희들의 회는당’, ‘오늘날의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교회가 이미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의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수 유대 공동체와 분리하여 인식하고,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에 의해 표상된 랍비 유대교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의로운 ‘남은 자들’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가 그들에게서 이 ‘남은 자들’인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이전되어 후자들이 ‘참 이스라엘’을 이루게 되어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들의 진정한 상속자가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2) 율법과 은혜

마태복음의 또 다른 신학적 긴장은 율법과 은혜입니다. 마태는 율법 준수를 강조합니다. 예수는 율법의 완전한 해석가로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참 뜻에 대한 완전한 해석입니다(5:17-18).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합니다(5:20).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것을 요구합니다(7:21, 21:31). 사랑의 이중계명을 문자를 넘어서 그 정신에서부터, 진정한 동기에서부터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반대어법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핑계로 함부로 행동하는 카리스마틱 열광주의자들(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비유를 듭니다(7:15-35).
그러면서도 마태는 은혜를 강조합니다(9:12-13, 10:7-8, 11:28-30, 18:23-35). 팔복 선언에서부터 은혜에 대해 강조합니다(5:3-12). 하늘 나라의 은혜와 메시아가 새롭게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는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서의 삶이 상호 긴장 가운데 천명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에 대한 강조와 은혜에 대한 강조가  긴장을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상급의 문제(1)

마태복음에는 “상급”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은혜와 율법의 긴장의 한 단면입니다. “상급”이라는 말은 6:4, 6, 18, 10:41, 20:8 등에 나타나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는 표현은 6:20-21에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마태 다음으로 “상급”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쉽게 해석해 버립니다. 이런 요소들을 마태나 바울에게서 발견되는 유대교적 잔재라고 취급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마태나 바울도 끝까지 유대교에서 아주 중요시했던 공로에 대한 상급사상을 버리지 못하였고, 그것이 도덕적 권면을 위해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나 바울이 이런 언어를 쓸 때는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믿는 은혜에 의한 구원과의 연결을 생각해 보지 않고 과거 유대교의 잔재로서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상급” 사상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급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배격하는 가르침도 강조합니다. 20:1-16의 유명한 포도원 농부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가 그 예입니다. 포도원 농부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준다는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복음서들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3시에 일하러 온 농부나 6시에 온 농부나, 9시, 심지어 11시에 온 농부나(당시 12시간 동안 일한다면 11시에 온 농부는 마지막 1시간만 일하는 것이다) 품삯은 모두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온 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나의 주권적 결정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약속한 바를 준 것인데 무슨 불평이냐”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을 맺는 존재들이 아니므로 자신의 율법 지킴의 선행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 데나리온은 구원으로서 하나님께서 주권자적 은혜로 주시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어서 그에 더한 어떤 것을 바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가 유독 그의 복음서에 이 이야기를 포함한 까닭은 앞에 나오는 많은 “상급”의 언어들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가 유대교의 상급신앙에 정면으로 대항해서 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신적 생명, 영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적 무한에의 참여는 곧 온전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신적 무한에 참여함으로 온전해져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에 등급이 있어서 상등 구원이 있고 하등 구원이 있다면, 하등 구원에는 부족함과 결핍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하등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 하나님의 신성/충만에 참여함)인데 그 구원에 무슨 등급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구원’이라는 말과 ‘상등, 하등’이라는 말은 함께 쓸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은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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