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1)<3> 마태복음
4) 제자도와 의(義) (2)
‘의’란 말을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 다음이 마태입니다. 바울과 마태는 복음을 전혀 다르게 선포하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들도 여럿 있습니다. ‘의’라는 개념도 그렇고, 하나님 아들의 기독론도 그렇습니다. 열방에 대한 선교적 보편주의가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8:16-20에서 열방에 대한 선교가 강조됩니다. 1-2장의 탄생기사에서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좇아 예수에게 예배하러 옴은 종말에 모든 열방이 시온에 순례와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리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시키며, 28:16-20의 선교 위임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사도들이 만방에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고 열방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구원을 얻게될 것을 표적하는 사건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열방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가 바울로 하여금 이방 선교를 하게 합니다. 이처럼, 놀랍게도 마태가 바울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란 말을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 다음이 마태입니다. 바울과 마태는 복음을 전혀 다르게 선포하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들도 여럿 있습니다. ‘의’라는 개념도 그렇고, 하나님 아들의 기독론도 그렇습니다. 열방에 대한 선교적 보편주의가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8:16-20에서 열방에 대한 선교가 강조됩니다. 1-2장의 탄생기사에서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좇아 예수에게 예배하러 옴은 종말에 모든 열방이 시온에 순례와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리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시키며, 28:16-20의 선교 위임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사도들이 만방에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고 열방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구원을 얻게될 것을 표적하는 사건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열방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가 바울로 하여금 이방 선교를 하게 합니다. 이처럼, 놀랍게도 마태가 바울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마태의 ‘의’에 대한 초점이 다릅니다. 바울은 이방에 대한 선교적 관점에서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는 데에 초점을 둡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설 때에,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할례를 받아 이스라엘이 되고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느냐, 아니면 이 과정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얻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느냐?”, 이것이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하면서 유대주의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요점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는 것,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느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태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 공동체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느냐가 초점이었습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는 것,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느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태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 공동체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느냐가 초점이었습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바울과도 일치합니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사람은 그 의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2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의인이 됐으니까 그 의에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들의 후반부는 대개 어떻게 ‘의에 서 있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게 됩니다.
예수는 시편 110:1의 예언대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대권을 대행하는 분, 곧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분입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구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도 항상 우리가 의의 관계에 서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님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멈추게 합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장은 사랑의 이중계명의 삶의 다양한 정황들에 대한 바울의 적용입니다.
예수는 시편 110:1의 예언대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대권을 대행하는 분, 곧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분입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구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도 항상 우리가 의의 관계에 서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님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멈추게 합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장은 사랑의 이중계명의 삶의 다양한 정황들에 대한 바울의 적용입니다.
마태도 같습니다. 주 예수와 순종의 관계에 서 있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2:35-40에서 모든 계명을 예수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5-7장을 자세히 보면 다름 아닌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강해입니다.
산상수훈의 중심인 주기도문(마 6:9-13)은 세 개의 “당신”청원들과 세 개의 “우리”청원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세 개의 “당신”청원들은 “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를 부연한 것들이며, 마지막 “우리”청원, “우리를 마귀의 통치 아래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는 이 “당신”청원과 수미쌍관을 이루어 매듭짓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중심인 주기도문(마 6:9-13)은 세 개의 “당신”청원들과 세 개의 “우리”청원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세 개의 “당신”청원들은 “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를 부연한 것들이며, 마지막 “우리”청원, “우리를 마귀의 통치 아래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는 이 “당신”청원과 수미쌍관을 이루어 매듭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가장 간략하게 간추리면 “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루를 위한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겠나이다)”의 세 청원들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빠”노릇해 주심(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심)에 덕입어 살고, 죄 용서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즉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그리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 이웃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고 사는 것을 염원하는 기도입니다.
6:19-34은 마태가 출애굽 당시의 만나, 즉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야기(출 16장)를 배경으로 삼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의 청원을 강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빠”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강해하는 것입니다.
6:19-34은 마태가 출애굽 당시의 만나, 즉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야기(출 16장)를 배경으로 삼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의 청원을 강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빠”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강해하는 것입니다.
강해의 핵심은 가장 위험한 우상숭배의 형식을 경고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함입니다: “누구도 두 주인들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6:24).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가 다가오는 하루의 양식을 위해서 비는 삶의 자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순종하는 자세여야 한다. 맘몬(재물)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겠다는 우상숭배의 정신으로 보물을 쌓아두려고 하면, 출애굽 시대의 옛 이스라엘이 매일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이 삼일치의 만나를 쌓아 놓았던 것이 썩어 버린 것처럼 된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도적이 들어서 다 없어진다.”
이런 식으로 6장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함은 맘몬 우상숭배를 피하고 우리에게 “아빠”노릇하시며 매일 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임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자는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용서받음의 열매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겠나이다”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6장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함은 맘몬 우상숭배를 피하고 우리에게 “아빠”노릇하시며 매일 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임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자는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용서받음의 열매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겠나이다”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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