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9일 토요일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4)_김세윤교수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24)<1> 하나의 복음, 네 개의 복음서들

1. 하나의 복음의 네 가지 변주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며 그것을 ‘복음’이라 이름합니다(고전 15:3-5, 롬 1:3-4). 사복음서들은 모두 하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하나인데 복음서들은 왜 네 개일까요? 하나의 복음을 네가지로 변주했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의 복음을 네 가지 다양한 관점들로 새롭게 해석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치 음악에서 하나의 멜로디를 네 가지 음으로 변주해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하나의 복음을 네 가지 형태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변주가 왜 필요한가 하면, 복음서들의 저자들인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들의 삶의 정황들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삶의 정황에 따라 다른 필요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 명의 설교자들에게 로마서 12:1-2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를 하라고 하였을 때, 그들이 각각 자신의 청중의 삶의 정황의 필요들과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그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네 개의 서로 다른 설교들을 만들어 내는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마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독자들의 삶의 정황에 합당하게 선포합니다. 마태도, 누가도, 요한도 그렇게 해서, 하나의 복음을 네 개의 변주로 선포한 것입니다.

2. 삶의 정황에 적합한 양식의 복음 선포(1)
이를 좀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중요한 성경비판 방법론인 역사비평적 방법론들을 알고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료(또는 문서)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 문학 비평 등의 방법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중 양식 비평과 편집 비평의 통찰들을 조금 활용할 줄 알면 복음서들을 읽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얻습니다.
복음서들에 나오는 여러 비유들, 이적 설화들, 논쟁설화들 등은 각각 복음을 선포하는 한 편의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설교가 주어진 ‘삶의 정황’을 헤아리는 것이 긴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정황에 있는 어떤 독자들의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어진 복음 설교인가?”라는 관점에서 복음서들의 단락들을 보는 것입니다(한국의 보수 근본주의 목사들과 그들의 신학교들은 이런 비평 방법들을 쓰면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고 기독교 신앙이 손상된다고 극구 반대합니다. 물론 이 방법들을 부정적으로 쓰면 이들의 주장대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들을 긍정적으로 쓰면 성경을 바르고 깊이 이해할 수 있어 꼭 필요한 방법들입니다. 이런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 방법들을 통째로 거부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어서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처럼 성경을 자신들의 교리에 종속시키고 겨우 그 교리들을 뒷받침하는 ‘증거본문’의 원천 정도로나, 아니면 경건이나 도덕적 예화들의 원천 정도로 사용하고,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에 고착되어, 성경이 선포하는 진정한 복음을 터득하여 선포하지 못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하루 속히 신학적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우리가 성전세를 계속 내야 됩니까, 안 내도 됩니까?”라고 예수께 묻습니다. 예수께서 “자녀된 자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베드로 네가 낚시줄을 던져 물고기에게서 나오는 두 닢으로 한 닢은 너를 위해, 나머지 한 닢은 나를 위해 성전세를 내거라”하십니다(17:26-27).
이 이야기가 왜 마태복음에만 있을까요? 예수의 행적, 가르침, 말씀이 많으나 그 중에서 왜 어떤 이야기만 계속 구전되고 설교되고 가르쳐졌을까요? 각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의 독자들의 삶의 정황에 절실한 것들만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해결해  주는 것들만 구전되고 설교된 것입니다.
가령 앞의 이야기를 마가나 누가가 알고 있었는데 빼버리고 마태만 실었다면, 이는 마태가 당시 예수 믿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황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된 주후 70년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직 서 있고 매년 모든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론적인 속죄 제사를 드려서 자신들의 죄가 다 씻어졌다고 믿는 자들이니, 성전에서 짐승 제사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온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성전에서 계속 행해지는 짐승 제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유대인들도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성전세를 내서 성전 제사의 덕을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는 유대 공동체 속에서 교회와 회당이 갈라지기 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정황에 예수의 뜻을 선포한 설교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신학적으로, 원칙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 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에 힘입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학적인 원칙을 주장하면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유대 공동체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과의 평화를 위해서 성전세를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황에서 나타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유용합니다. 그래서 마태가 유대인들 속에 섞여 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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