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2일 화요일

토라, 무궁무진한 해석의 보물 창고

토라, 무궁무진한 해석의 보물 창고
 
- 목회와 신학 20123월호


 
토라의 다양한 음성과 모습들
 
랍비들은 토라가 70개의 얼굴을 지녔다고 말하면서 토라의 다성적 속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토라의 각 본문에 담긴 잠재적 의미들이 다양한 단면에서 광채를 발하는 보석 같다고 본다. 전 세계 인구를 망라하는 그들의 방법이 세계 70개국과 인간의 70개 언어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토라를 가리켜 70개의 얼굴을 지녔다고 한 것은 모든 인간이 제각기 토라 본문에서 다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후기의 신비주의자들은 토라에 대하여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인구수와 비슷한 숫자 60만 가지의 모습을 가진 것으로 유사하게 말하기도 한다.
 
모든 시대의 각기 다른 독자들은 토라의 본문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독자는 각 성경 본문의 다양한 부분들에 주목하여 그것들을 다른 본문들과 병렬시킴으로써 무한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다. 이는 특히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가 유동적이고, 현재 시제가 과거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이야기를 전부 설명하는 데는 제한이 있으나 본문의 재창조인 해석은 무궁하다고 할 수 있다.
 
바벨론 탈무드의 단편 산헤드린 34a에서 발견되는 전통은 토라 본문의 무한한 음성들과 고유한 의미를 예증하는 데 자주 인용된다. 단편 산헤드린이 주로 법정 질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아가다 전통들은 그 속에 포함된다. 랍비 아바예는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62:11)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한 줄의 성경 구절이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랍비 이스마엘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 바위를 쳐서 (많은 조각들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3:29)라고 가르쳤다.
 
한 반위가 많은 조각들(니쪼쪼트, nitzotzot)로 쪼개지는 것 같이 성경 구절 하나도 수많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부스러뜨리는해석 과정은 각 성경 구절에서 다양한 의미를 창조해냄을 의미하며 해석은 본문 말씀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예레미야 본문의 은유들처럼 랍비들이 사용하는 상징 역시 아주 명쾌해 보인다. 바위는 본문을 나타내며 방망이(망치)는 본문의 해석 과정을 말한다. 방망이로 두드린 바위가 많은 조각을 내듯 본문도 수많은 해석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이 구절을 대부분 독자들이 이해한 보편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말씀을 좀 더 집중해보면 모호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방망이를 닮아 있다. 여기에서 방망이는 대부분이 생각하는 대로 해석 과정이 아니라 본문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곧 본문 자체를 상징하는 방망이의 시각적 이미지는 바벨론 탈무드 샤바트(Shabbat) 88a에서 발견되는 전통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여기에서는 랍비 이스마엘의 학교의 가르침이 또 다른 아모라였던 3세기 팔레스타인의 랍비 요하난에 의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랍비 요하난은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68:11)를 인용하며 이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공포된 각각의 말씀들이 70개의 언어로 나뉜다고 말했다. 또 랍비 이스마엘은 “() 바위를 쳐서 (많은 조각들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에서 한 방망이가 많은 파편들(니쪼쪼트, nitzotzot)로 쪼개지는 것 같이 거룩한 이로부터 나온 모든 말씀도 70개의 언어로 나뉜다고 가르쳤다.
 
이 두 구절들의 핵심은 반석을 칠 때 많은 불꽃을 튀기는 방망이다. 당시 불꽃을 튀기는 방망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평범한 이미지였다. 어떤 유명한 교사들은 대장장이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이어갔으며, 방망이를 휘둘러 반석이나 모루를 내리치는 대장장이들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방망이에서 튀는 수많은 불꽃들은 마치 파편 부스러기처럼 보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 속에 새겨져 있으며 토라는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를 산출한다. 그리고 70개의 언어로 상징화되는 각 독자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본문을 이해한다.
 
 
 
다바르 아헤르(Davar Aher): 양자택일의 의미들이 미드라쉬 해석의 핵심이다
 
토라 본문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듯이 랍비들도 같은 맥락에서 토라를 다룬다. 미드라쉬 랍비들의 미드라쉼(모음집)은 결코 조화될 수도, 조화되어서도 안 되는 성경 해석의 불협화음으로 묘사된다. 미드라쉬는 성경 본문 자체의 모호한 속성에서 연유한 성경 구절의 모순된 해석들을 의미하곤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불확실성은 랍비 해석자들로 하여금 무수한 해석을 낳게 했는데 거기에는 항상 또 다른 해석다바르 아헤르(davar aher, 문자적으로는 또 다른 말씀을 뜻한다)가 있으며 같은 개체가 그들 중 몇 가지의 해석을 제공하기도 한다. 가령 랍비 하마 b, 하니나는 창세기 29:2~3에 대해 6개 이상의 해석을 내놓았는데 어떤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전형적으로 미드라쉬는 이런 모순들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과 상반을 미드라쉬의 구조 안에 짜놓는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병렬과 배치는 랍비적 본문의 해석자들로 하여금 본문에 담긴 수많은 함축적 의미와 대화하게 한다. 마치 성경의 특정 본문을 두고 랍비적 해석자들끼리 토론하며 그들만의 본문 해석 방식을 후세대가 거듭 재창조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중세 초반까지만 해도 성경의 어떤 본문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종종 모순점이 발견된다 해도 모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가령 13세기 초반에 살았던 Sefer Ha Hokhmah(쎄이페르 하 호크마)의 저자인 랍비 엘르아자르 벤 유다 오브 윔즈는 73개에 달하는 미드라쉬 해석, 지혜에 이르는 문을 목록화하여 그것이 각각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동시에 동일한 구절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도 증명했다. 그는 본문에서 모순이 파생된다 할지라도 그것에 영향 받을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토라 본문에 함축된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해석될 만큼 풍부하기 때문이다.
 
 
 
파르데스(The Pardes): 해석의 4단계-
 
프샤트(Peshat), 레메즈(Remz), 드라쉬(Derash), 쏘드(Sod)
 
토라는 참으로 끝없는 지혜의 원천이다. 여기서의 목표는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분석 단계를 이해하고 숙지하는 것이다. 의미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는 단어와 구, 구절의 단순하고 평범한 의미인 p-sh-t를 어근으로 하는 프샤트(peshat) 단계다. 프샤트는 본문에 대한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단계에서 스스로 어떠한 해석을 내리지 않고 본문 말씀에만 집중하게 된다. 토라의 모든 말씀은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의 첫 단계부터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랍비들은 문맥에 따라 형성된, 어떤 특정 본문의 원래 의미인 프샤트(peshat)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하는데 이를 강조하면서 구절에는 프샤트가 빠질 수 없다는 유명한 격언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프샤트를 고려하지 않고 토라 본문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에 대한 경고다.
 
우리가 독자 입장에서 문자적 의미로만 고정하려고 하는 본문 중 하나가 아가서다. 아가서는 다섯 두루마리 중의 하나로, 유월절 공휴일에 읽혀지는 쉬르 하-쉬림(Shir ha-Shrim)의 매우 심오한 해석의 단계로 이동하기가 쉬워 이 사랑시의 단순한 아름다움과 강력한 비유적 표현을 간과하기가 쉽다. 그럼 2장 초반부에서 연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매혹적인 은유들을 통해 이 본문에 대한 프샤트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그러나 이 시대의 랍비들은 스스로 문자주의와 맞서 싸웠다. 그들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라고 하며, 정작 자신들이 프샤트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에 제한되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프샤트가 본문의 원래 의미보다는 2세기의 랍비 아키바나 오늘날의 학습자를 무론하고 독자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성경 본문의 해석을 지지하기 때문에 거부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암시또는 언급을 의미하는 레메즈(Remez)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라 본문의 표면적 의미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 의미에 함축적인 해석을 첨가한다. 레메즈를 지닌 토라의 말씀은 종종 은유화되어 다른 설교의 영역으로 환치된다. 알레고리(풍유)를 통해 본문의 말씀이 보존되는 동안 우리는 본문이 진실로 이야기하는 바를 배우게 된다. 이것이 헬라의 작가들이 알레고리를 히포노이아(목적은 숨겨진 의미) 또는 본문에 대한 심오한 이해로 언급하는 이유다. 랍비들은 문자적 의미와 심오한 의미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프샤트 또는 문자적 의미는 독자를 토라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은 단계의 이해로 안내한다.
 
기독교인들은 아가서 본문을 예수와 교회의 관계로 이해하는 데 반해 랍비들은 전체 두루마리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의 관계를 풍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레메즈에 대한 기성품적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쉬르 하-쉬림(Shir ha-Shirim)에 대한 랍비들의 풍유적 해석들은 미드라쉬 라바를 보완하는 또 다른 10개의 작품, 쉬르하-쉬림 라바(Shir ha-Shirim Rabbah)의 주요 부분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7세기경 팔레스타인에서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가서 구절들에 대한 다양한 연속적 논평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에 대한 다음 해석은 랍비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풍유적으로 다뤘는지 보여준다.
 
 
 
랍비 후나는 () 구절을 세속적 권력의 압제로 적용했다. 백합화와 같이, 북풍이 불어올 때 가시나무 가운데 있다면 남쪽으로 휘어지며 가시에게 찔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은 여전히 위를 향해 있다. 이스라엘도 그와 같다. 지나친 과세와 조공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에게 고정돼 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145:15)라고 기록된 것처럼.
 
 
 
3세기에 살았던 초대 아모라인 랍비 후나는 여기에서 가시나무를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했던 로마 권력과 동일시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겪었던 가혹한 고통과 생계 부담과도 동일시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백합은 바람에 쉽게 휘어지는 속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을 향하고 있다.
 
드라쉬(derash)는 모든 세대에게 의미를 가르친다. ‘드라쉬라는 용어는 성경에 대해 찾다또는 탐구하다, 성경 본문을 탐구하여 뜻을 분별함을 의미하는 어근 d-r-sh에 근거한다. 이 동사를 최초로 사용한 에스라 7:10을 보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결심하였었더라(리드로쉬 에트 토라트 아도나이, Lidrosh et Torat Adonai).
 
 
 
같은 어근을 가진 드라쉬, 미드라쉬 양식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랍비들의 문학을 창조하는 데 있어 최고의 양식인데, 그것은 본문에 집중하며, 구조적이고 주제적인 요소들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때때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핵심적인 주제 말씀에 근거한 다른 성경의 구절들을 병렬시킬 수도 있다.
 
드라쉬는 필수적으로 본문의 프샤트와는 다른 뜻인 읽어들임을 포함하고 있다. 드라쉬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2:2)에 관한 미드라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표면적 의미들을 바꾸기도 한다.
 
랍비 이삭은 이 구절을 리브가에게 적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25:20).
 
만일 이 구절이 그녀가 밧단 아람 태생이라는 것을 알려줄 의도였다면 왜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다고 또 진술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사기꾼이요 그녀의 오라비도 사기꾼이며 그녀의 집안 모든 족속이 사기꾼이었으나 그들 중에 유덕한 리브가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그녀가 무엇을 닮았는가?”에 대한 답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드라쉬는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 리브가에 적용해본다면 그녀가 악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미덕 있는 여인임을 칭송한다. 이는 주변 사람들의 악덕에 영향을 받아 반드시 악한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랍비들이 인용한 창세기 구절에서 불필요한 부분들을 알아챘기 때문에 그들은 이에 대해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 본문에 브두엘과 라반이 모두 아람 족속이었다고 나오는데 왜 그들이 밧단 아람 태생이었음을 첨가하여 군더더기를 삽입했을까?”
 
그들은 이 첨가된 문구가, 거꾸로 하면 사기꾼을 의미하는 람아이(ram' ai)로 읽을 수 있는 아라미(arami, 아람 족속)의 동음어이므로 리브가의 아버지와 오라비가 사기꾼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문을 이런 식으로 읽음으로써 랍비들은 다른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높이는 동시에 여자 족장 중 한 여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토라 연구의 네 번째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는 해석의 신비적 영역인 쏘드(Sod, 신비). 이는 하나님의 설교와 말씀에 대한 카발리스트(유대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적 관념을 가리킨다.
 
쏘드는 본문에 관한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차원의 해석을 상징하기도 한다. 토라 본문이 무한한 깊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독자가 하나님을 조우하도록 인도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아름다운 구절을 조하르(Zohar)의 프리즘을 통해 본다면 우리는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해석의 심오한 신비적 속성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작품인 조하르는 13세기에 살았던 카발리스트 랍비 모세 드 레온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랍비 아키바의 제자, 랍비 시몬 바 요하이의 가르침과 동일시된다.
 
랍비 히스기야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이.” 여기에서 백합화는 누구인가? 바로 이스라엘의 회중이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가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을 지닌 것 같이 이스라엘의 회중도 공의와 자비를 지니고 있다. 백합화가 13개의 잎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회중도 사방으로 에워싼 13개의 자비적 속성을 갖고 있다. 엘로힘이 언급된 그 순간부터 그는 13개의 말씀을 가져와 이스라엘 회중을 둘러싸고 보호했으며 그 다음 (엘로힘)의 이름이 다시 언급됐다.
 
 
 
표면적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다른 현현, 즉 쎄피로트(Sefirot)에 관한 전혀 다른 측면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10개의 쎄피로트는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속성과 전능하심 그리고 주요 말씀에 언급된 성경 인물들의 이름에서 딴 각기 폭넓은 은유와 관련해 있음을 알려준다. 문자적으로 왕의 직위를 뜻하는 쎄피로트 중 하나는 토라와 동일시되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회중과 동일시된다. 창세기 1:1의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Elohim, 하나님)의 이름은 또 다른 쎄피로트 중 하나인 비나(Binah, 지혜)와 동일시되며, 엘로힘이 처음 언급된 곳과 창세기 1:2의 두 번째 언급 사이에 끼어 있는 13개의 단어들은 말쿠트(Malkhut)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비나에서 나온 자비적인 속성 13가지를 나타낸다. 이러한 암시들은 무한한 신비적 해석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신비적 전통은 토라를 항아리(히브리어 kad) 안에 있는 물로 비유하여 결코 마르지 않는 우물로 묘사한다. 히브리어에서는 문자 하나하나에 가 쓰이는데 ‘1’에 해당하는 알레프(aleph)‘2’에 해당하는 베이트(bet) 등등 모든 문자는 숫자로도 쓰인다. 단어 ‘kad’에 대한 숫자 또는 게마트리아(gematria)24. 이것은 정경에 포함된 24권의 책들이 하나님의 가려진 현현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토라의 신비한 깊이를 결코 알아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일부 분파는 토라의 의미에 대한 무한한 이해의 가능성을 훨씬 더 확장한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엽에 살았던 하시딕의 실권자인 베르디체프의 레위는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51:4)를 미드라쉬적으로 해석하여 이는 새 토라가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것은 토라 두루마리의 흰 여백조차 문자, 즉 의미로 구성되어 있으나 우리가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하나님은 이 여백의 의미를 계시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의 의미다.
 
 
 
교차 본문: 다른 본문들을 함께 엮기
 
파르데스 프샤트(pardes-peshat), 레메즈(remez), 드라쉬(derash), 쏘드(sod)가 각기 다른 방법의 주석을 의미하거나 본문에 대한 다른 단계의 이해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연구된 토라의 가장 뛰어난 해석 방법은 드라쉬다. 미드라쉬야말로 토라를 학습하는 가장 특색 있는 방식이며 현대 유대인들까지도 본문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다.
 
미드라쉬적 해석은 개별적인 성경 구절에 집중한다. 그러나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미드라쉬 해석의 특징적인 방법은 교차 본문이다. 본문들은 서로 반향하고 상호작용하며 서로 적용한다. 랍비들은 성경의 한 구절을 다음 구절에 연결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먼 평행 구절끼리 연결지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토라의 모든 구절은 상호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고리는 벤 아자이가 구절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을 때 그 주위에서 춤을 추던 불에 관해 언급하는 쉬르하-쉬림 라바(Shir ha-Shirim Rabbah)의 한 구절에서 볼 수 있다. 벤 아자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구절들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계시에 대한 원래의 경험을 재창조한 것이었다. 교차 본문은 토라 본문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토라의 교사가 의미를 전달하고자 구절들을 서로 연결할 때 학습자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방한다.
 
토라를 미드라쉬적으로 해석할 때 교차 본문은 두 가지 단계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데 첫째, 성경은 다양한 구절들과 문구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교차 본문의 해석은 성경 자체에서 뚜렷하다.
 
또 토라의 어떤 구절들과 문구들은 다른 구절들에 의지해 확대되거나 해석된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 17:21~22의 안식일 준수에 관한 규례를 보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이 말씀은 신명기 5:12~14을 근거로 하여 해석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십계명의 어투에 명백히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구절들의 병렬에 기초한 본문 해석의 문화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것의 고유한 첫 산물이기도 하다.
 
랍비들은 성경 내부의 교차 본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성경 구절들을 좀 더 결합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언어학적이고 주제적인 관계들을 드러냄으로써 구절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입증된 해석적 관계를 나타내는 새로운 의미들을 창조한다. 어떤 문맥에서는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던 본문일지라도 독자가 본문들 간 상호작용의 관계를 올바로 찾아낼 때 그 본문의 의미는 명확해질 수 있다. 3세기의 유명한 팔레스타인 교사였던 랍비 요하난은 본문들 간의 연결을 통해 그 모호성이 해소되며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다고 이해한다. 그는 “(성경) 구절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것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른 구절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타나크의 또 다른 구절들이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병렬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는, 므힐타(Mekhilta) 1장에서 우리가 분석했던 씨프레이 드바림(Sifrei Devarim)과 같은 미드라쉬 문학이며 출애굽기 본문을 한 구절씩 진행하는 미드라쉬 주석과 같다. 이것은 각 구절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하며 씨프레이 드바림(Sifrei Devarim)처럼 팔레스타인에서 아모라임(3~5세기) 시대에 편집됐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12:6에 따르면 니산월 10일에 구매한 유월절 어린양을 14일까지 간직하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해 랍비 마티아 벤 헤레쉬는 표면적으로는 이 구절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에스겔서 16장 구절과 비교하는데, 그것의 첫 부분은 할례의식에 인용된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하고(6)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7~8).
 
 
 
왜 성경에서 잡기 전에 4일을 요하는 유월절 어린양의 구매를 필요로 했는가? 이에 대해 랍비 마티아 벤 헤레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이는 거룩하신 이, 복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녀들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리라고 선언하신 맹세를 이행할 때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더 나아가 이르기를 ‘()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와 같이 계명에 대하여 벌거벗음을 뜻하는 구원에 이르게 할 계명(미쯔보트 mitzvot)이 없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이, 복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 가지 계명을 주셨다. 이같이 기록되었으되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이러한 이유로 유월절 어린양을 구매하여 잡기 전에 4일이 요구되는데 이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상급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에스겔서의 이 구절과 유월절 어린양을 언급한 출애굽기 구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관련짓게 하는가? 2세기 중엽의 팔레스타인 교사였던, 랍비 마티아 벤 헤레쉬가 인용한 에스겔서 16장 구절은 그 문맥 자체에서 획득된 것이어서 선지자가 이집트 노예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어떻게 랍비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구절들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 교차 본문은 출애굽기 12:12(“내가 두루 다니며[버 아바르티, ve' avarti]”)과 에스겔 16:8인데, 두 구절에서 같은 동사 아바르(avar, 지나가다)’가 사용됐다. 문자적 반향은 여기에서의 연결을 도우며, 랍비들은 이집트의 구속과 약속의 땅을 향한 광야 여행이 뒤따르는 시기를 언급함으로써 사랑을 할 만한 때를 강조하는 데 이용한다. 랍비 문학에서 시내산으로의 광야 여행은 실제 결혼식으로 보이는 시내산에서의 계시를 지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구애 기간으로 묘사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포로의 전 기간을 통하여 성숙해졌으나 계명(미쯔보트 mitzvot)에 벌거벗은이 구절에 근거해볼 때 아직까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어떻게 그들이 그 명령들을 준수할 수 있었는가?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셨다. 하나는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확인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적 상징인 할례, 곧 충성과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창세기 17장에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할례 행위를 준수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 두 가지의 예비적인 시내산 계명을 지켰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지나치시며 에스겔서 16장에 따라 그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뒹구는 것을 보셨다.
 
또다시 B.C.E 586년 이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있었던 때를 언급하는 이 후기의 선지서 본문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그들이 할례 시 흘리는 피를 보며 너는 너의 피로써 살라를 두 번 이르셨다. 이 말의 반복은 두 가지 피의 의식을 언급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 할례 의식에서 모델이라 불리는 할례 집례자는 어린아이의 입에 포도주 몇 방울을 떨어뜨린 후 바로 이 말씀을 암송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하다. 특히 메시지는 이 구절(“상급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의 막바지 절정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은 계명의 준수와 특별히 할례와 같은 의식적인 명령에 대한 준행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증할 것이라는 메시지다. 또한 각 개인이 자발적인 의지로 피를 제공함으로써 그 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은 2세기의 로마의 지배 하에서의 삶을 가르치는 한 모범이 되기도 했다. 그들을 유대인답게 하는 특별히 주요 의식과 명령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초대 기독교회는 일보다 신앙을 강조하며, 랍비들은 계명 즉 규율과 할례 의식에 대한 최우선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기독교는 예수의 보혈의 구속적 은혜를 강조하나 랍비들은 그들의 미드라쉬적 방식으로, 각각의 이스라엘 남자들이 흘린 피의 능력을 강조한다.
 
 
 
세대 간의 대화
 
미드라쉬의 핵심은 과거와 성경 구절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대화다. 보다 넓은 의미로 토라는, 주어진 성경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 창조되었으나 해석자와 교사, 세대 간 대화를 통해서도 창조됐다. 토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의식 안에 있는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까지 계속되는 대화로, 변증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랍비들의 본문을 연구할 때는 편집자들이 어떠한 특정 순서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구성했는지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이는 특히 한눈에 근본적으로 다른 논평의 잡집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미드라쉼 주석의 경우에 그러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종종 다른 세대의 다른 교사들에 의한 시리즈 내에서의 논평들 간 관계가 우연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병렬함으로써 발생하는 명백한 긴장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통찰력과 의미를 제공해준다.
 
대조적으로 두 교사가 쟁론 형식의 유형으로 보이는 것을 인용했을 때 (어느 한 구절에 관한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랍비 A가 이것을 말하는 동안 랍비 B는 저것을 말함) 그들의 관점은 빈번하게 서로를 보완하거나 쟁점에 대한 매개 변수를 정의한다.
 
현대 독자로서 우리는 수세대에 걸쳐 발전해온 토라와의 계속적인 이 대화 속으로 침잠한다. 우리는 토라가 그것을 창조하는 역사적 다른 배경을 반영할 때 토라의 의미 속으로 침잠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유대인 고유의 정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 토라의 학습자들이 광의적으로 정의한 바와 같이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본문들에 대한 작가들의 의도를 이해하도록 요구되는데 이는 성경 그 자체가 되는 것이거나 고대 현자들의 작품이 되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 또는 수많은 미드라쉼, 탈무드 주석들, 법전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진 상황 안에서 읽히고 분석돼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은 항상 이 구절이 기록될 때 편집자나 후대 편집자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가 돼야 한다. 그러나 토라를 더 많이 연구하는 것이 현대 학습자들의 의무다. 일단 본문에 대한 단순한 전통적 의미인 프샤트를 이해하게 되면 현대 독자들은 개인에 대한 고유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유로워져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이 과정을 본문의 재() 상황화로 묘사한다. 우리는 주어진 본문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까지 해야 한다. 여기에서 관건은 우리 자신을 본문에 관한 오래된 대화의 일부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본문과 우리 개인의 삶이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
 
 
 
 
 
:: 필자 정보 - 변순복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구약학 교수, 탈무 에듀아카데미 토라연구소장. 서울기독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구약학, Th.D.), 미국 베서니신학대학(신학사), 미국랍비대학원(랍비 과정 수료), 서던캘리포니아신학대학교(구약학, Th.M., Ph.D.)에서 공부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