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2일 화요일

인물 성경 연구, 이렇게 시도하라

인물 성경 연구, 이렇게 시도하라
 
- 목회와 신학 20123월호
 

성경 인물 분석을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 중 특히 중요한 세 가지 사항을 다루고자 한다. 첫째 성경 내레이터의 등장인물 묘사방법’, 둘째 역할에 따른 등장인물의 구분’, 셋째 등장인물과 내레이터 사이의 관계가 등장인물 이해에 미치는 효과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주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참고문헌을 몇 개 소개하겠다.
 
 
등장인물 묘사방법
 
등장인물 묘사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직접적 묘사, 2. 간접적 묘사, 3. 종합적 묘사다.1 각각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직접적 묘사
 
직접적 묘사는 내레이터가 등장인물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규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내레이터는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언급한다(6:9). 또 욥에 대해서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언급한다(1:1).
 
직접적 묘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대부분의 경우 모호성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적 묘사의 이런 확실성은 독자로 하여금 그 묘사에 이어지는 본문들의 내용을 이 묘사에 비추어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노아의 의로움은 그가 전 피조계의 생명들을 다 멸절시킨 홍수에서 살아남은 근거가 된다. 욥의 완전한 의로움은 욥기 3장 이하에서 욥과 세 친구 사이에 길게 이어지는 모든 논쟁을 해석하는 토대가 된다. 욥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세 친구의 주장은 내레이터의 직접적 묘사 앞에서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2. 간접적 묘사
 
간접적 묘사는 내레이터가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직접 말해주지 않고, 대신 등장인물의 외모, 장신구나 옷 등의 차림새, 이름, 말투, 동작, 몸짓, 버릇, 그리고 그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에 대해 하는 말, 등장인물끼리의 비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사울의 큰 키와 준수함(삼상 9:2, 23)과 겸손함(삼상 9:21~22)은 그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만한 자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욥은 자녀들이 잔치를 치른 다음 날이면 항상 그들을 성결하게 하는 의식을 치르고, 그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다(1:5). 욥의 이런 행동은 그가 욥기 1:1에서 내레이터가 직접적으로 묘사한 바와 같은 사람임을 증명해준다.
 
간접적인 묘사의 장점은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촉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는 내레이터가 등장인물의 성품이나 신분 등과 관련해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은 부분들을 간접적 묘사들로부터 추론해낼 수밖에 없다. 독자는 부지런히 머리를 써야만 내레이터가 등장인물에 대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겨우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호성이 남는 경우들도 꽤 있다.
 
앞에서 살펴본 예 가운데 사울에 대한 간접적 묘사를 독자들은 보통 처음에는 그가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춘 사람임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러티브가 진행될수록 점점 독자들은 이런 해석이 옳았는지에 대한 회의를 품게 돼 있다. 특히 그가 보여준 겸손함(삼상 9:21~22)은 오히려 그의 우유부단함의 증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그의 이런 우유부단함은 그를 파멸로 몰아간다(삼상 15장 등). 또한 그의 큰 키 역시 그를 왕에 적합한 인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키가 그다지 컸을 것 같지 않은 다윗이 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왕이 된다(참고, 삼상 16:7).
 
따라서 독자들이 간접적 묘사를 대할 때 중요한 점은 최대한 조심해서 정보를 모아야 하고, 또 그 묘사를 통해 내레이터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분석 시 실수를 저지르기 쉬운 부분이므로 설교자들은 더욱 각별히 신중을 기해 분석해야 한다.
 
 
 
3. 종합적 묘사
 
종합적 묘사는 내레이터가 큰 규모의 본문에서 앞의 두 가지 방법을 종합해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첫째는 소위 내러티브 유비(narrative analogy)”란 방법이다. 사사기 19장은 레위 사람이 자기 첩과 관련해서 기브아에서 겪는 일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장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여호와의 천사들이 겪은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것을 통해 내레이터는 사사기 시대의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만큼이나 타락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성경의 내레이터들이 매우 즐겨 사용하는 두 번째 종합적 묘사방법은 소위 타입신(type scene)”이라는 것이다. 이 타입신은 플롯의 흐름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는 장면들을 종합해서 일컫는 용어다. 대표적인 예로 창세기 12, 20, 26장에 반복되는 거의 비슷한 형태의 거짓말 사건은2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오랜 경험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족장들의 악한 성품,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대조시키고 있다.
 
세 번째 종합적 묘사방법은 소위 더블 플롯이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함께 엮여 있는 두 개의 본문 사이의 관계를 통해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마가복음 5:21~43에는 죽을병을 앓고 있는 열두 살소녀인 야이로의 딸과 열두 해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서로 얽혀 있다. 소녀와 여인은 심각한 병‘12’라는 숫자를 통해 서로 상응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인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신분을 통해 볼 때 종교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고, 혈루병에 걸린 여인은 율법이 규정하는 부정한 병 때문에 종교로부터 소외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서로 상응과 대조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 앞에 나와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 더블 플롯 이야기의 핵심이다.
 
다른 예로 누가복음 1:5~3:38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여러 차례 교호적으로 엮여 있다. 한 번씩 이야기가 교차될 때마다 독자들은 기적적인 방식으로 잉태된 두 아이 중 누가 더 큰 자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선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각기 임신한 상태에서 상봉했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한 말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뻐해 자기 어머니의 뱃속에서 뛰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큰 자임을 암시해준다(1:41~45). 그리고 이 더블 플롯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례 요한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런 암시는 현실화된다. 이어서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장면과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세례 요한보다 큰 자이심을 확증해준다.
 
정리하자면, 독자들은 내레이터가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취합 정리하고 이 각각의 묘사방법의 특징과 기능을 잘 고려해 정보를 분석하면, 등장인물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확실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역할에 따른 등장인물의 구분
 
등장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기본적인 사항은 등장인물이 본문 내러티브 속에서 하는 역할을 파악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내러티브 속에서 맡는 역할은 대략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영웅(hero) 혹은 주인공(protagonist), 대립인물(antagonist), 대조인물(foil), 기능적 인물(functionary), 군중·합창단(chorus)·행인(walk-on).
 
역할에 따라 인물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당연히 주인공(protagonist)’이다. 주인공은 내러티브의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다. 따라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해당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일들 중 하나다.
 
주인공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본문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창세기 25~35장에서 주인공은 야곱이다. 내러티브는 거의 항상 야곱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28장에서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 내레이터의 눈은 야곱을 따라간다. 이에 따라 가나안에 있는 야곱의 가족들은 거의 완전히 독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하란에서 야곱이 만난 새로운 인물들이 독자의 시야를 채운다. 32장에서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하란의 인물들이 퇴장하고 가나안에서 야곱이 만나는 인물들이 무대의 중심을 채운다. 이처럼 내레이터가 그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존재가 거의 대부분 주인공이다.
 
대립인물(antagonist)’은 주인공과 가장 많이 부딪히며 갈등을 야기하는 인물이다. 사무엘상 18~31장에서 사울은 다윗의 대립인물의 역할을 한다. 열왕기상 17~22장에서 아합은 엘리야의 대립인물의 역할을 한다.
 
대조인물(foil)’은 대조를 통해 상대방의 어떤 성격을 더욱 부각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이 대조인물은 아마 설교와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일 것이다. 예를 들어 황금 송아지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출애굽기 32:21~24의 아론은 모세의 대조인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론은 모세로부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추궁을 당하자 22절에서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라는 말을 한다. 그의 이 말은 황금 송아지 사건 직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 때, 32:11에서 모세가 어찌하여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 두 구절 모두 원어상으로 볼 때 동일한 히브리어 문구(하라 아프, @a hrt)를 사용하고 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진정시키려 하고, 아론은 모세를 진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양자의 유사성은 여기까지다. 양 인물 사이의 대조점은 유사점보다 훨씬 더 크다. 첫째, 모세는 자신의 부재중에 황금 송아지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든 변호하려고 하는 반면에 아론은 자신이 깊숙이 참여한 황금 송아지의 죄를 공동으로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을 팔아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 한다. 이를 위해 아론은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라고 말한다(32:22). 그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백성의 근본적인 죄악성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론과 모세의 이런 대조는 모세가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2)라고 말함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죄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이자 위대한 중보자인 모세의 위대성은 아론이란 대조인물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대조인물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경우는 요나서 1장의 요나와 이방 선원들 사이에 나타난다.3 양 인물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경외하다혹은 두려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야레(ary)”라는 히브리어 단어다.
 
요나는 1:9에서 자신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라고 선언한다. 내레이터는 이방 선원들을 묘사할 때 두려워하다란 표현을 세 번 사용한다(1:5, 10, 16). 이방 선원들은 처음에는 막연히 두려워하여”(5), 풍랑의 원인을 알고 나서는 심히 두려워하여”(10), 마지막으로 요나의 운명과 연결해서 풍랑의 상태를 완전히 통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나서는 여호와를 심히 두려워하게 된다(16). 이 세 번의 두려워하다란 단어는 이방 선원들이 여호와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충실하게 반응하는 자들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냥 막연한 대상을 향해 두려워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여호와란 신을 향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낀다. 히브리어로 경외하다란 단어와 두려워하다란 단어가 동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필자는 최소한 이 세 번의 두려워하다란 언급 중 마지막 언급은 경외하다란 의미로 번역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레이터는 이방 선원들이 이 짧은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 하나님께 반응을 보이고 경외를 보이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그들이 여호와께 서원과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반면에 내레이터는 요나를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계속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묘사한다. 요나서 4:2의 요나의 말을 고려해 볼 때, 요나는 처음 하나님의 말씀(1:2)을 받았을 때부터 요나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방 선원들은 요나의 대조인물로 작용하며, 요나의 하나님 경외가 이율배반적임을 드러내는 도구 역할을 한다.
 
이런 예들을 통해서 충분히 느낄 수 있듯이 대조인물들 사이의 대조는 설교적으로 도움이 되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양 인물 사이의 대조점들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설교로서 충분할 뿐만 아니라, 따로 예화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대조인물들 사이의 대조 그 자체가 생생한 예화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기능적 인물(functionary)’은 내러티브가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종류의 등장인물이다.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갔다가 길을 헤맨다. 그때 어떤 사람”, 즉 기능적 인물이 그에게 형들의 행방을 가르쳐줌으로써 그는 형들을 찾게 된다(37:15~17).
 
기능적 인물은 좀 더 복잡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 출애굽기 24~40장에서 여호수아는 다양한 기능을 한다. 첫째, 출애굽기 32장에서 여호수아는 서스펜스 기법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황금 송아지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면서 온 이스라엘을 멸절시켜버리겠다고 했을 때, 모세는 중보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해낸다(32:7~14). 그러나 정작 그는 산 아래 내려와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돌판을 깨뜨리고, 황금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하고(32:19~20), 또 레위인들을 시켜 3,000명을 쳐서 죽이게 한다(32:25~29). 이런 중보자로서의 모세와 하나님의 대리 심판자로서의 모세 사이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 서스펜스 본문인 출애굽기 32:17~18에서 여호수아는 모세와 백성의 산 아래서의 만남을 최대한 늦춤으로써 독자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둘째, 여호수아는 성막과 시내산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성막은 뜰, 성소, 지성소의 삼중 구조로 돼 있는데, 시내산 역시 산 아래, 산 중턱, 산꼭대기의 삼중 구조로 돼 있다. 여호수아는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과 산꼭대기의 모세 사이의 공간인 산 중턱이란 공간에 위치함으로써 이 공간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이 역할을 통해 성막과 시내산 사이의 구조적 상응성을 돋보이게 한다.
 
셋째, 이런 기능적 인물로서의 여호수아의 역할은 오경부터 여호수아서에 이르는 긴 문맥을 고려할 때, 중요한 한 가지 기능을 더 한다. 여호수아는 자기 상전인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에 오를 때 그를 따라감(24:13)으로써 이스라엘이 광야 시대에 저지른 가장 추악한 죄악인 황금 송아지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흠결이 없는 차세대 지도자로 활동하는 토대가 된다.
 
군중’, ‘코러스(chorus)’, ‘행인(walk-on)’ 등도 때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코러스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원래 코러스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들에서 사용된 개념이다. 코러스는 극의 배경 설명을 해주고, 때에 따라 배우들의 대사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들이나 극의 흐름에 대한 해설 등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곤 했다.
 
성경에도 코러스의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룻기에서 코러스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룻기 1:19에서 코러스 역할을 하는 온 성읍이이가 나오미냐라는 말을 함으로써 나오미가 자신의 삶에 대한 탄식(1:20~21)을 토로하는 계기가 된다. 나오미는 전능자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괴롭혀서 자신의 인생이 괴로워졌다고 한탄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기쁨이란 뜻을 가진 나오미라고 하지 말고 쓰라림이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 하라고 말한다.
 
룻기의 끝에 가서 코러스 역할을 하는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룻을 창세기의 족장들의 아내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중요한 신학적 발언을 한다(4:11~12). 또 룻이 보아스의 아들을 출산했을 때 여인들은 그 아이를 룻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1장의 그녀의 불행이 극복됐음을 선언하는 역할을 한다. 여인들의 이 선언은 룻기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4:14~15). 또한 이 여인들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1장의 나오미의 이름과 관련된 탄식을 뒤집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점 역시 룻기의 신학과 관련해 중요하다(4:17). 다시 말해 룻기의 코러스는 룻기의 신학적 메시지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아가서의 예루살렘의 딸들역시 룻기의 코러스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내레이터와 등장인물의 관계
 
성경의 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은 내레이터와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다. 내레이터가 특정 등장인물에게 호의적인가, 아닌가를 파악하는 것은 내러티브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사항이다.
 
예를 들어 요나서의 내레이터가 요나에게 호의적인가, 적대적인가 하는 문제는 요나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 과연 그는 호의적일까, 적대적일까?
 
이에 대한 답은 둘 모두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표면적으로 요나서의 내레이터는 요나에게 적대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나서 1장에서 이방 선원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 신실하게 반응한다. 반면에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 아주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계속한다. 내레이터는 양자를 대비시킴으로써 요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요나서의 내레이터는 2장의 요나의 기도를 가지고도 요나를 비판한다. 요나는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권자이자 능력자이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그의 간절함은 오직 자신의 목숨에만 적용된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3~4장에서 보여주듯이 가혹하기만 하다. 내레이터는 또한 3~4장에서 요나를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특히 요나서 4:1은 그러한 반발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다. 개역개정판은 이 구절을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라고 과도한 의역을 하고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그것이 요나에게 아주 심히 악하였다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그것은 앞의 3:10에서 여호와께서 니느웨가 회개하고 악에서 돌아서자마자 그들을 용서하신 것을 지칭한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신 것을 요나는 무척이나 악하고 잘못된 일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 내레이터는 요나를 하나님의 계속되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자신의 고집을 접으려 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점은 그가 여러 번에 걸쳐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억지를 부리는 것을 통해 묘사된다(4:3, 8, 9).
 
이처럼 내레이터가 표면적으로는 요나에게 적대적이지만, 좀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요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내레이터의 호의는 요나서에서의 하나님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요나에 대한 교육이라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첫째, 이 점은 특히 예비하다”(마나, hnm; 1:17; 4:6, 7, 8)란 단어를 통해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보내어 요나를 삼키게 하신 것이나 박 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동원하신 것 등은 다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 목적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마치 멀티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교사처럼 요나의 교육에 이런 멀티미디어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신다.
 
둘째, 4장에서 요나가 자기를 죽여 달라고 과도하게 졸라댈 때,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대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는 말씀만을 하신다(4:4, 8).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절하게 하나님은 요나서 4:10~11에서 요나의 분노의 부당성을 지적해주신다. 요나가 스스로 수고해서 키우지 않은 하찮은 박 넝쿨에 큰 애정을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니느웨 성의 12만 명의 사람들과 수많은 가축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요나서 4:2에서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분이라는 점이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이런 인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니느웨 사람들이 아니라, 요나 자신이었다. 만약 하나님이 요나가 불만을 토로했던 바와 같이 인내심이 크신 분이 아니었다면 요나는 이미 1장에서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나에게 무한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시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태도는 당연히 내레이터의 태도와 연결돼 있다.
 
그러면 요나서의 내레이터가 이처럼 요나에게 적대적인 태도와 호의적인 태도를 겸비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요나서의 내레이터의 의도를 제대로 해석하는 데 있어 핵심이다.
 
그 핵심을 설명하도록 하자. 우선 내레이터는 요나서 본문 내내 요나를 적대적으로 다룸으로써 독자들이 요나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리고는 본문의 마지막을 4:10~11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맺음한다. 원래 이 질문의 답은 요나가 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내레이터는 요나가 대답을 해야 할 대목에서 본문을 끝내버림으로써 독자가 그 답을 대신하게 만든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독자는 요나가 해야 할 답을 채워 넣음으로써 그 자신이 요나가 된다. 그 결과 독자는 요나서 본문을 읽으면서 계속 부정적인 시각 속에서 봐왔던 요나가 사실은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정작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요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하나님과 내레이터가 요나에게 내내 숨은 호의를 보여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보여주신 인내와 은혜는 사실은 독자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독자는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 . 당신이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합당합니다라는 답을 하게 되고, 드디어 하나님의 폭넓은 사랑을 수용함으로써 요나서의 내레이터가 의도한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내레이터가 등장인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설교를 위해 본문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성경의 내러티브들의 설교 메시지는 바로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서 얻어질 수 있다. 내레이터의 등장인물 묘사방법, 등장인물의 역할에 따른 분류 및 기능, 그리고 내레이터의 등장인물에 대한 태도 등을 잘 파악할 때, 체계적인 성경 인물 설교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 필자 정보 - 박철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강사. 연세대학교(B.A.),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Th.M.), 영국 글로스터셔대학교(Ph.D.)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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