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1)

4. 경고와 달램의 교차 구조

1) 경고와 위안(2)

그런데 제가 히브리서를 가르치다 보니 개역 성경 번역이 형편없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전에 빌립보서 강해를 할 때에도 그 아름다운 편지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오역된 곳이 많아 실망했는데 말입니다. 고린도전서의 경우도 어떤 곳은 비교적 잘 되었으나 어떤 곳은 형편없이 오역되었습니다. 한국의 근본주의적 교권주의자들이 마치 하나님이 옛날 개역성경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만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고집하고 새로운 성경 번역을 방해하는데, 여러분은 그러지 마시고 최근에 나온 좋은 번역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보면, 복음을 저버리고 배교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가볍게 경고합니다(2:1-4). 그러다 조금 더 강하게 경고하고(3:12), 조금 더 강하게(4:1), 좀 더 강하게(4:11-13), 그러다 아주 강하게(6:1-8)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10:1에 가면 그것보다 더 강하게 경고하게 됩니다. 이것이 ‘경고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가 “배교하고 신앙에서 뒤걸음질 치면 제2의 회개는 없고 죽는다”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한편으로 달래기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달램 시리즈’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우리가 핍박받고, 고민하고, 죄책감으로 감히 하나님께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지만, 이런 것을 다 알고 동정할 수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기도해 주시니 너희들 신앙이 위축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된다”는 달램의 말을 경고들 사이사이에 넣습니다. 2:17, 3:1, 4:14-16, 5:1-10, 6:9-20이 이 달램의 말씀들입니다. “너희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잘 시작했고, 잘 지키고 있고, 지금도 사랑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가”라고 독자들을 추켜세우며 위안을 주고, 확신을 주고, 달래고 있습니다.


그 다음 7:1-10:18은 히브리서의 본론인데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한번에 영원한 효과가 있는 속죄로 드렸으며, 지금 현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 노릇을 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속죄 제사뿐만 아니고 새 언약의 제사여서, “너희 죄를 내가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렘 31:34)는 약속이 담겨 있으므로, 너희가 신앙생활하다가 좀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발동시켜서 너희를 다시 회복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 하지 말고, 하늘의 완성된 구원(하늘 안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그의 모범을 따라 믿음의 순례의 길을 신실히 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의 구조와 메시지 전체를 알아야 그 맥락 속에서 6:1-8의 경고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알게 되는데, 히브리서 전체의 구조(경고와 달램이 계속되는 교차 구조)도 모른 채 단편적으로 하나만 떼어서 읽게 되면, “세례 후에 나도 좀 죄를 지었는데 두번째 회개가 없다고 하네”하면서 양심이 여린 사람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 전체를 잘 살피고, 전체 구조를 통해서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또 종말론적인 유보의 구조를 포함하여 복음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하는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역설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후의 심판날까지 믿음과 구원에 견고히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바울은 그 신념을 표현합니다(고전 1:7-10).


로마서 8:28-38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렇게 ‘성도의 견인론’(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종말의 구원의 완성때까지 지켜 주심)을 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확신을 주고자 할 때 바울은 보통 ‘예정론’(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믿음과 구원에로 미리 예정하심)을 펼칩니다. 영원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태초부터 우리를 믿음과 구원에로 예정하셨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또는 우리 인간들이 약간의 실수를 했다고 해서 우리를 포기하여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떨어지게 버려두지 않습니다. 전능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영원에서 영원까지 자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사로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 우리에게 두신 구원의 계획 또는 예정의 뜻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성도의 견인론’을 위해 펼치는 교리이고,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믿음의 안위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 사는 우리에게, 구원의 첫 열매을 받고 그 완성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아직도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받아 그 구원의 첫 열매를 누리고 그 구언의 전달자 노릇을 해야 하는 우리에게 우리의 구체적 삶에서 사탄의 뜻을 좇아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굴러 떨어질 수 있음을, 하나님 나라로부터 탈락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고,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신실히 지켜 주실 것임을 역설하여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두 가르침들을 논리적으로 대립시키고 어느 하나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엄연한 성경의 두 가르침들을 그들이 의도하는 바의 평면에서 통합하여 논리적 긴장 가운데 둘 다를 견지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입니다. 전자의 가르침이 의도하는 바는 구체적인 삶에서 사탄의 통치를 뿌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도, 즉 성환의 길을 신실히 가도록 촉구하는 것이고, 후자의 의도하는 바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 즉 신실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기에 안전하다는 것을 일깨워 우리에게 안도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르침들을 상호 논리적 긴장 속에 함께 견지함으로써, 지금 나의 실존에서,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식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는 한 우리는 후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안도하고 신앙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과 자세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안도해야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조마조마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자세를 갖지 않고, 맘몬 우상숭배에 빠져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고, 해치고자 한다든가 음행의 위험에 빠져들 때는 전자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경우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지 행위로 받느냐? 하나님께서 한 번 믿음에 이른 자들을 끝까지 지켜 주신다고 하지 않느냐?”등의 생각으로 자위하면서 실제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빠져 나와 사탄의 나라로 들어가면 제2의 회개는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펴 볼 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구원을 이미 다 따 놓은 당상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통치/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이 경고를 받고 신실한 제자도, 열매있는 성화의 길로 되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통치/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가끔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할까 조마조마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심을 믿으며,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성령이 자신과 함께 계셔서 자신을 일깨우고 힘주심의 증거로 보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안도하며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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