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6)

6) 이혼의 문제(2)

바울은 “이혼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최대한 존중해서 심지어 혼합결혼에서도 이혼하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지옥이 되거나, 그 가정생활을 유지할 경우 한쪽이 위험하게 되거나 할 경우에는 “이혼을 하라”고 말합니다. 종말의 구원이 완성되기 전까지 우리의 비극은 선과 악 가운데 한 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두 악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보다 작은 악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서나 이혼은 상처를 주고 엄청난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서도 이혼은 악입니다. 그러기에 이혼은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같이 사는 것이 이혼보다 더 큰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보다 작은 악인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남편이 매일 술 마시고 와서 아내와 자식들을 때려 죽이게 생겼는데도 교회에 가서 상담을 하면 “이혼은 절대 안 된다. 참고 기도하면 언젠가는 회개하고 돌아온다. 그러니 끝까지 참아라”하고 충고합니다. 그 안에서 갈등하는 10대 자녀들이 집을 뛰쳐나가서 마약을 하고 깡패들과 어울립니다. 집에 가면 전쟁이고 지옥이니까 집을 나가서 이렇게 망가지는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누구도 참고 살았더니 돌아왔다더라. 참고 살아라”고 합니다. 그러다 실제로 아내가 맞아 죽고 자식들이 망가지는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런 경우에 “갈라져라, 이혼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근본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고 그 정신을 존중한 것입니다. 그 정신은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 문자를 율법으로 만들지 말고,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기치고, 탈세하고, 부동산 투기하고, 약한 자들을 억누르고, 환경 오염시켜 이웃을 병들게 하고, 불량 물품 생산하고 파는 등 온갖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하면서 돈 많이 벌려고 하는 행태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한국의 교회들이 오로지 이혼만은 절대해서는 안 되는 죄악으로 규정하며 이혼하여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나 가혹하게 정죄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한국 교회의 신학적 미숙과 신앙적 왜곡에 대해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습니다.


2. 문자가 아닌 정신의 강조(1)

바울의 예수 전승 사용의 또 하나의 예로, 복음 전파자들의 생계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을 자세히 보면 예수의 말씀이 놀라우리만치 많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그렇게 많이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세 번이나 직접 인용합니다. 고린도전서 9:14에 있는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고 명하셨다”는 말도 누가복음 10:7, 마태복음 10:10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인용은 고린도전서 9:1부터 바울이 반복하는 주장들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듣는 교회의 헌금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도들의 관행을 예로 듭니다. 5절에 “다른 사도들, 베드로, 야고보도 심지어 아내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교회의 지원으로 살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 바나바와 나만 그럴 권리가 없겠느냐?”고 합니다. 7절에서는 로마 병정들의 예를 듭니다. “자비량하고 병정 노릇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양치는 목동들도 양의 젖을 먹지 않는가? 모세 율법에도 심지어 타작마당의 소도 곡식 먹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유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성전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하고 계속해서 나열한 후에 9:14 클라이막스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백히 그렇게 명령까지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5절에 놀랍게도, “그러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무료로 복음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유주의자들은 기세등등하게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보통 예수의 말씀도 인용하지 않는데, 여기 어쩌다 한번 인용하고는 곧 그것을 무시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불트만 학파의 해석방식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함부로 경솔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 말씀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여 율법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예수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따르지 않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교보내면서 왜 “복음 선포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전대를 마련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경의 사회학적 접근 방법, 즉 당시 삶의 정황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해서, 그런 가르침이 어떤 전제하에서 주어졌고, 예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명령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조하는 부자들이 갈릴리와 유대지방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들을 우리가 일부 압니다. 베다니의 나사로,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누가복음 8:1-3에 나오는 예수의 후원자들 등. 이들은 부자들로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이동성이 없습니다. 당시 농노들도 주인에게 매여 있으므로 역시 이동성이 없습니다.

한편 예수와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은 주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목수들 같은 수공업자, 기술자들, 또는 어부들 같은 당시의 사회 중산층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기술자들은 어디를 가든 장도리나 그물 같은 연장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런 제자들을 복음 선포를 위해 어떤 동네로 보내면, 가령 베다니에 보내면 틀림없이 나사로와 자매들이 그 제자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대접할 것인데,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집에서 먹고 자며 그 고을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전대 준비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빨리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명령을 주신 원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 선포에 집중하라,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라’ 이것이 예수의 명령의 의도요 정신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