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9)

4) 정결법의 새로운 정의와 적용


이 세 가지 원칙은 우리가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정결법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가령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서기관들이 예수와 제자들이 정결법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 때, 예수께서 정결법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정의를 합니다. “밖에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다”(막 7:15). 아주 예수다운 새로운 정의입니다.

돼지고기 한 점 먹고 술 한 잔 마시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고 이웃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음식이 우리 뱃속에 들어가서 뒤로 나오면 그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증오심, 탐심, 음란, 불신앙, 복수심,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탐심이 우리로 하여금 맘몬 우상을 숭배하게 하여 하나님 사랑을 못하게 합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증오심과 복수심이 우리로 하여금 이웃 사랑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지, 밖에서 우리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따위가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정결법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막 7:19). 음식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의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을 ‘adiaphora’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차이가 없음’이라는 말입니다. 음식을 가려 먹는 문제 같은 것들은 지키나 마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레위기의 정결 체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엊그제까지 유대 바리새 신학자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읽었을 때, “이 사람의 가르침이 유대 신학과 어떻게 반대되는가? 어떻게 이렇게 놀랍고도 새로운 혁명의, 자유의, 해방의 복음을 선포했나?”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이때 비로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해방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결법을 깡그리 무시한 예수께서 그 대신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막 12:28-34). “음식을 가리고 절기를 지키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판정하는 것입니다. “우상에 바쳐진 고기라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사서 먹으라. 그러나 신전에서 우상숭배의 상황에 참여는 하지 말라(하나님 사랑), 또한 네가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는데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안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을 존중해서 먹지 말라(이웃 사랑)”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제물을 먹느냐의 문제를 다루는 중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9:19-22에서 자신의 사도적 자세를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그걸 22절에 부연합니다. “내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유대인같이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 반면에 (모세의) 율법없는 자들에게는, 즉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는, 나 스스로 율법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곧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이중계명의 법) 아래 있지만 이들과 함께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마신다. ‘약한 자들’(율법주의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내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음식이나 정결의 문제들 같은 adiaphora에 관해서는 그의 선교적 자세를 이렇게 청중에 따라 조정합니다. 유대인과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음식법 결례를 준수합니다(이웃 사랑). 이방인과 강한 자들 가운데서는 음식법 결례를 무시합니다(이것도 이웃 사랑). 그러고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천명합니다. 여기 전체를 천명한 말이 1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것은 원래 헬라어 원문에 보면 마가복음 10:45에 나오는 예수의 유명한 말씀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많은 사람’이란 말은 히브리적 숙어로 모든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선교의 자세를 사랑의 이중계명의 원칙에 따라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삶의 정황 속에서 예수 정신의 적용

바울이 고린도전서 10:31-33에서, 8-10장에서 준 가르침의 전체를 다시 요약합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것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사랑의 관점(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인가?)에서, 둘째 이웃 사랑의 관점(이것이 이웃에게 거침돌이 되는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원칙을 33절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8장-10장에서 바울은 새로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에 누구의 가르침을 적용한 것입니까?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원칙으로 보고, 그 원칙의 정신을 삶의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율법주의적, 문자주의적 경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박탈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일수록 더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가르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이중계명! 그 외에는 자유입니다. 성경에 쓰인 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해 우리의 신학적 선입견이 고쳐져야지, 우리의 신학적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내 신학적 선입견에 맞추도록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을 그대로 따라서 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요약과 요구가 11:1에 있습니다. 여기 장, 절을 잘못 갈라서 마치 11장을 여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10장 말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시오.”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에 당면해서 결국 누구를 본받아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예수님의 음식에 대한 가르침,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본받고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요구를 본받아서 가르쳤고, 또한 자기의 사도적 사역의 자세를 예수님의 섬기는 자세에 맞춰서 하니까, 이것이 최종적인 진술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같이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시오.” 그러니까 율법주의나 문자주의가 아니고 율법의 정신, 그 영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jgw1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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