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7일 수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_

1)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그 사람의 아들(3)


예수께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고,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의 대행자 노릇하는 분, 곧 하나님 나라의 부왕이기에, 이 땅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대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마 11:25-17; 눅 10:21-22).

어떻게 보여 주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죄인들에게 용서,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회복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등,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우리에게 대행하심으로, 다시 말해 “치유”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때 “치유”를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한 치유는 바로 ‘죄인들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치유’하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장애인을 고치고, 나병환자를 고친 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아주 피상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려면 그보다 좀 더 깊이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한 치유는 ‘죄인들을 하나님께 회복시키는 치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일 많이 행하신 ‘아주 예수적인 행위’는 바로 ‘죄인들과 먹고 마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고 서로를 회복시킴’, 이것이 예수께서 가장 많이 행하신 치유인데, 성경은 가끔 병자들을 고친 치유를 극적으로 클로즈업시켜서 예수의 치유활동을 시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예수가 한 치유는 그런 것밖에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들은 몇개의 특수한 경우이고, 사실은 예수께서 가장 많이 한 치유는 죄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회복시킨 것입니다. 누가는 삭개오의 치유/회복을 클로즈업시켜 이러한 예수께서 집중한 치유의 한 예를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부왕으로서, 성경 숙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를 선포하고 그 통치의 힘을 시위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더 깊이 새겨서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를 자제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통치로 얻는 구원의 열매인 “영생”을 강조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경 숙어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는 세상은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적으로는 영생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덕 입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그 삶은 ‘신적인 삶’입니다. 그것을 그림언어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지하심, 전능하심, 영원하심, 무소부재하심의 모든 자원들을 상속받는 자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삶이 성경 숙어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말은 지금 같은 삶을 시간적으로만 영원히 늘여 뺀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영생이란 언어로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를 대치합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탕자의 비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비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덕 입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이면 저면들을 여러가지 비유들로 선포하셨는데, 그중에서 제일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거기서 탕자가 누구입니까? 탕자는 아담입니다. 예수께서 듣는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아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덕 입어 하나님의 대행자로 이 땅에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 모든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하나님의 대리자’)으로 세워서 자신의 땅에 대한 통치를 대행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덕 입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대행하게 했는데,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뱀으로 형상화된 사탄이 아담에게 와서 “네가 하나님같이 되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것 없이 네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고 속임수를 썼지요.

그 이야기를 예수께서 어떻게 묘사하십니까? 아버지의 부요함을 누리면서 사는 아들이 자기 분깃을 요구하고 아버지를 등지고 멀리 떠납니다. 아담이 자기 내재의 자원, 자기 속의 조그마한 지혜와 능력, 이런 것으로 자기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 뜻을 관철하면서, 자기 주장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예수께서 이 탕자의 비유로 인간의 아담적 상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거부하고 자기의 내재의 자원으로 살려고 할 때 금방 자기 내재의 자원의 한계성을 느낍니다. 한계성은 결핍, 지혜의 부족, 능력의 부족, 사랑의 부족, 시간과 공간의 갇힘 등의 결핍성으로 나타납니다. 이 결핍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께서 탕자가 자기 분깃을 가지고 부요한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리 가서 궁핍에 빠지게 된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탕자가 이방인의 종이 됩니다. 이 말은 곧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방인이 그에게 돼지치는 일을 시킵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가장 불결한 짐승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노예로 가장 불결하고 더럽고 죄스러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이 탕자가 돼지 먹는 음식도 못 얻어먹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적 실존인 것입니다.

아담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모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청중에게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너희가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주장, 이웃에 대한 자기주장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창조주의 아버지 노릇 필요없다. 내 뜻대로 살겠다.” 그게 주된 내용이지요. 그러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같이 됩니까?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한계성에 빠지고 결핍성에 갇혀서 숱한 고난을 겪게 됩니다. 이 고난들이 바로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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