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8)

2) 수미쌍관의 구조(2)


어떤 주제를 가르침에 있어, 어떤 말씀으로 열고(여기서는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닫는지의 고리를 만드는 것을 inclusio라고 합니다. 한자 표현으로는 수미쌍관이라고 합니다. 이는 ‘머리와 꼬리를 쌍으로 관련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형태가 많이 나옵니다. 가령 마가복음 1:1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의 클라이막스 15:39에 가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고 백부장이 모든 열방을 대표하여 “저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복음서를 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닫습니다.

이런 것이 전형적인 inclusio 입니다. 이런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은 조금만 눈여겨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말하는 것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역설, 이것이 마가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요체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에 당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으며 우상의 신전에서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길드(guild)에 속하면 그런 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드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됩니다. 고린도에서는 이스미안 게임(고린도 지역에서 벌어진 고대 그리스의 대 경기)이 2년에 한 번씩 열렸는데, 그런 잔치에 참여해야 네트워크도 되고 그러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곳에 참여해서 잔치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하는 문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또 고린도 시장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고기는 신에게 바쳐지는 절차를 통해서 도살됩니다. 그래서 푸줏간에 나와 있는 고기를 사면 십중팔구 우상에게 바쳐진 후 도살된 고기입니다. 한국말로 말하면 “그 고기에 귀신 붙은 것이 아닌가? 부정탄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바울은 이중 계명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사랑의 이중계명이라는 원칙을 정하고 뒤에 다시 한 번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약합니다. 그래서 inclusio를 보면 바울이 이 심각한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결국 예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 통치의 구체적 요구인 사랑의 이중계명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8장에서부터 10장까지 그 문제를 다루고 10장 끝부분에서 바울이 앞에 다룬 것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합니다.


그 요약을 보면 네 가지 명령들이 나오는데, 첫째, “우상숭배를 피하라”입니다(10:14). 이때의 우상숭배를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가 이루어지는 신전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좁게 정의합니다. “그것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25절부터 33절까지를 보십시오. “시장에서 파는 것은 자유롭게 사서 먹으라. 네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푸줏간 주인에게 이 고기가 신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도살됐는지 묻지 말고 사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것의 신학적 근거가 26절입니다.

거기도 “왜냐하면”이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라.” 이것은 시편 24:1을 인용한 것으로서, 창세기 1장에도 하나님의 지으신 것은 다 좋은 것, 깨끗한 것이라고 말씀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레위기의 음식 가르는 정결의 법들을 한꺼번에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셋째, 불신자 중에 누가 너희를 식사에 초대하거든 상에 무슨 음식이 제공되든 네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주인에게 이 고기가 신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도살됐는지 묻지 말고 먹으라.” 그리고 넷째, “다만 누가 너희에게 이것은 제물이라고 알려 주거든 그렇게 말한 자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

바울은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이러면 혹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믿음이 ‘약한 자’라고 합니다. 혹 그런 사람이 식탁에 동석하여 이것은 ‘제물’이니 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네가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연약한 자의 양심에 손상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먹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포기함, 이것이 아웃 사랑이지요.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스도인의 자유

“우상숭배 자체는 피하라.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이웃의 초대를 받았을 때 이교도가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라. 그러나 먹는 행위가 연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을 때는 먹지 말라.” 이 네 가지 명령들이 8장부터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의 요약인데 이것들을 자세히 보세요. 거기에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우상 숭배 피하라), 둘째 이웃사랑(약한 형제의 양심을 손상치 말라), 셋째 그리스도인의 자유(시장이나 이교도 친구의 집에서 제공되는 고기 먹는 것은 위 두 계명에 저촉되지 않으니 자유롭게 하라).

여기서 바울은 우상숭배를 굉장히 좁게 정의합니다. “우상에게 제사가 이루어지는 신전의 잔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강한 자들이 여기서 잘못 나갑니다. 강한 자들은 “우리의 지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뿐이다. 그렇다면 우상은 실체가 없는 나뭇조각, 돌덩어리에 볼과하다. 그러므로 저 이교도들이 살아있는 신이라고 제물을 바치지만 우리는 그냥 참여해서 같이 즐기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지식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상숭배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고, 그 우상을 도리어 귀신들이 이용하여 우상숭배의 분위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악영향을 끼치므로 신전의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의 먹는 자유가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손상할 때에는 이웃 사랑의 원칙에 따라 먹지 말라. 그렇지 않는 한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원칙에 저촉되지 않으면 나머지에 대해서는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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