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0)

3.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2)


예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 아빠께 다가오는 하루 양식(‘일용할 양식’)을 비는 자세로 살라”(마 6:19-34). 그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 사랑은 자신의 투자와 노력에 대한 정당한 이익만 취하지 부당하게 과도한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고(즉 이웃의 것들을 빼앗아 자신을 더 살찌게 하려 하지 않고) 자연히 자신의 남은 것들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가 비교적 공정하게 재분배되겠지요. 골고루 잘 살게 되겠지요. 그러면 갈등이 줄어들고 화평이 증대되겠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정의와 평화의 확대로, 자유의 확대로, 인권의 증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는 원수까지도 네 이웃이라고 합니다. “누가 오른 빰을 치면 왼쪽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합니다(마 5:38-48).

너무도 오랫동안 성도들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죽어서 영혼이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조금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분들은 ‘예수의 재림 때에 완성되는 나라’라고만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했고, 그 선포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이 창조하고 모은 하나님의 백성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그들이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지금, 벌써,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나라에서 속량된 사람들, 곧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현재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깨우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힘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인된 우리가,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우리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힘입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으면 우리는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회에 정의와 평화와 자유, 즉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구제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첫 열매로서 이미 출범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우리가 여기서 벌써 누릴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 소금과 빛 노릇을 하는 것이며,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실현된 구원은 종말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구원의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 구원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

우리는 이런 구조 속에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이 유보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을 결정적으로 꺾고 우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벌써 그 구원을 얻고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승리가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가 완전히 제거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말론 구조 속에서 개인적인 삶으로 말하면, 즉 칭의론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했다, 또는 하나님 나라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올바른 관계에(하나님 나라 안에) 서 있음’입니다.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합니까? ‘예수의 재림 때까지’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어떻게 서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됐으니까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으로써’ 서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써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등 돌리는 탕자 노릇을 재현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서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것이 결국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4. 경고와 달램의 교차 구조

1) 경고와 위안(1)

서신들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아 그 관계 안에 서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고 여러 번 경고합니다. 대표적인 경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서신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받아 성령도 받고 성찬예식에 참여도 하고 있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경험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열광주의’에 빠져 우상숭배와 음행, 그리고 형제들과의 갈등 등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바울은 그들의 세례와 성령체험 그리고 성찬 참여와 모형론적으로 같은 체험을 하며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음행 등 죄악 때문에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다 죽었던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의 예’로 들면서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경고가 더 심각한 언어로 주어지는 곳이 히브리서 6:1입니다: “한번 예수 믿고, 세례받고, 구원의 첫 맛을 본 사람들이 신앙을 저버리면 두번째 회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그 본문을 읽고 힘들어합니다. 마침 이 본문이 어느 날의 QT 본문이었는데, 그 본문만 읽었을 경우 성도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히브리서 저자가 탁월한 설교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한 편의 설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첫 기쁨과 열정을 잃어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말리기 위해서 경고하면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신에는 그러한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는 말들이 반복됩니다. 제가 이것을 ‘경고 시리즈’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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