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어떤 별명을 붙여 욕했습니까? ‘탐식하는 자요, 술취하는 자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마 11:19, 눅 7:34). 그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 예수가 더러워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런 혁명적 가르침에 따라 바울이 자신의 과거 바리새적 신학 원칙을 과감히 버리고 180도 혁명을 일으켜서 이 새 원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원칙을 바로 혼합결혼에 적용한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혼합결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이방인과 악수해서도 안 되고, 같이 밥을 먹어도 안 되고, 이방인의 집에 가서도 안 됩니다. 자유주의적인 유대 랍비들이라도, 어쩔 수 없이 이방인과 교류하고 함께 식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음식과 와인을 가져가서 자기 것만 먹으라고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과감하게 이 원칙을 버립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입니까? 어디서 나오는 기독교적 세계관입니까?
요한일서 4:4의 언어로 말하면 “너희 안에 계신 이(성령, 곧 사탄을 이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가 이 세상의 영보다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이 불신자 파트너 속에서 역사하는 세상의 영보다 더 강하다.”는 자신감에서 온 것입니다. 부활의 자신감, 복음의 자신감에서 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서 게토(ghetto)속에서 움츠러들어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세상을 적극적으로 성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5) 가부장적 제사장 개념의 오류
이쯤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관찰하고 넘어갑시다. 여기서 바울이 “믿지 않는 아내만 믿는 남편에 의해 거룩해진다”고 했습니까? “남편만 아내에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전달하는 제사장 역할을 한다”고 합니까? “믿는 아내에 의해서 믿지 않는 남편도 거룩하게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믿는 아내도 믿지 않는 남편에게 러구성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 사이에 난 자녀도 거룩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적 가정사역한다는 분들이 “아버지가 가정의 제사장”이라고 강조하고 다니는데, 도대체 어디에 그런 말이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의 제사장직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제사장이 있다는 것입니까?
한국에서는 개신교의 목사들이 곧잘 자신들을 제사장이라 주장하며 권위주의적으로 목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옳지 않습니다. 예배를 문자적으로 제사(미사)로 보는 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이나 하는 주장이지요. 굳이 ‘제사장’이란 말을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자라는 문자적인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성의 전달자라는 전의어로 쓰기로 한다면,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쳤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모두에게 ‘제사장’노릇하는 것 아닙니까?(만인사제론) 여기 본문 7:14을 보세요. 남편/아버지만 아내와 자식에게 거룩성을 전달한다고 했습니까? 아내/어머니도 남편과 자식에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전달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내/어머니도 ‘제사장’인 셈이지요?
역대 기독교 역사에서 아내/어머니의 기도로 방탕한 남편과 자식이 회심하고 돌아온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까? 아내/어머니의 기도로 남편과 자식을 회심시켜 구원을 얻게 한 경우가 훨씬 많지요? 그런데 왜 아버지만 ‘제사장’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남녀평등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지, 어찌하여 여자만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슬람이나 유교의 추종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예수께서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한 것이 바로 여자들을 굴종시키는 당시의 남존여비 사상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유교의 질곡에서 이 백성을 해방시켰는데, 다시 교회가 앞장서서 가부장적 가정생활을 강조하고 여성의 굴종을 강요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편/아버지가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해괴한 교리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말입니다. 참 한심스런 상황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본문을 정확하고 깊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6) 이혼의 문제(1)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7:15에도 접속사 “그러나”가 빠졌습니다. 여기에 “그러나”라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파트너가 갈라지기를 주장하면 그때는 이혼하라. 이런 경우는 형제나 자매나 구속받을 것이 없다.” 그것의 신학적 근거가 15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 가운데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도록 부르신 것이지 종교가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서 불신자 배우자가 가정을 지옥으로 만드는 상황 가운데서도 계속 살라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을 주고는 바울은 “그러나 신자 아내나 남편이 그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으며 못 되게 구는 불신자 배우자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면 혹, 그를 회심시켜 구원을 얻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그런 경우도 이혼하지 말고 참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반론을 염두에 두고, 그 반론에 대한 반론을 15절 후반부의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로 하여금 화평을 누리라는 것인데 그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계속 살아서야 되겠느냐? 더구나 네가 참고 기도하며 사랑을 베풀면 네 배우자가 회개하고 믿는 자 되어 구원을 얻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여기 이 15절 후반부와 16절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주장하면 이혼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평 가운데로 부르셨다. 그러니 되도록 참고 가정의 화평을 회복하여 이혼을 하지 말라. 네가 끝까지 참고 기도하며 사랑을 베풀면 네 배우자가 회개하고 믿는 자 되어 구원을 얻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맥락에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은 7:10부터 이혼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가운데, 15-16절은 예외 상황을 맞아 그것과 반대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 전반부에서만 반대되는 가르침을 주고, 15절 하반부와 16절에서 다시 그것을 뒤집는다는 것은 어색한 일입니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15절 전반부에 그렇게 강조하여 반대 가르침을 주지 말고, 이렇게 말했어야 옳지 않겠습니가?: “그러나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강하게 주장하면 이혼해도 된다. 그러나 되도록 오래 참아 가정의 화목을 회복하여 우리를 화평 가운데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라.” 이런 이유로 저는 전자의 해석이 옳다고 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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